최을두가 관원 설치에 대해 상소하다
전자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최을두(崔乙斗) 등이 상소하기를,
"관(官)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서 각기 그 임무를 담당하게 한 것은 합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 양관(兩館)을 설치하여 사한(史翰)을 맡게 하고, 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강론(講論)을 맡게 하여, 관직(官職)이 서로 혼동(混同)되지 않았는데, 세조조(世祖朝)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집현전을 혁파(革罷)하고 다만 예문관·춘추관만 두었으며, 우리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집현전의 구제(舊制)를 회복하려고 하셨으나, 집현전을 혁파한 것이 이미 오래 되어서 갑자기 회복하지 못하시고, 특별히 예문관에 수찬(修撰) 이상의 15원(員)을 설치하여 고문(顧問)에 대비(對備)하시고, 또 봉교(奉敎) 이하로 하여금 또한 경연관(經筵官)을 겸대(兼帶)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찬 이상은 비록 직책이 춘추관을 띠었다고는 하지만, 예전대로 시강(侍講) 논사(論事)에 치중(置重)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비록 직책이 경연관을 띠었다고는 하나, 예전대로 기언(記言) 서사(書事)에 치중하니, 이름은 같은 관직이라고 해도 직사(職事)는 다릅니다. 지금 또 참외관(參外官)인 박사(博士)·저작(著作)·정자(正字) 4원(員)을 설치하고, 연소(年少)한 무리로 하여금 일찍부터 교양(敎養)을 쌓게 하여 집현전의 제도를 죄다 복구하였으니, 그 취지(趣旨)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다만 모두 경장(更張)하지 못하여 한(恨)스러운 것은, 사관(史官) 8원을 오히려 뒤섞여 있게 하여서, 마침내 한 관사(官司)에 각양(各樣)의 남행(南行)175) 이 있게 하였으니, 그 품질(品秩)은 모두 예문 참외관(藝文參外官)이나, 그 임무(任務)는 매우 달라서, 혼처(混處)할 수 없는 것인데, 무리하게 혼처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 등은 벼슬의 품질(品秩)은 비록 낮으나, 위로는 전하(殿下)의 언동(言動)을, 아래로는 군신(群臣)의 득실(得失)을 빠짐없이 모두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니, 그 임무는 진실로 가볍지 않습니다. 이러한데도 다른 관사(官司)에 군살이나 혹이 달려 있는 것처럼 붙어 있으니, 국가에서 관(官)을 설치하여 직무를 분담(分擔)시킨 본의에 어떠하며, 전하께서 사관(史官)을 대우하시는 뜻에 어떻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옛법을 참작하시어 신 등 8원으로써 별도로 한 국(局)을 설치하여 그 임무에 전념(專念)하게 하도록 조종(祖宗)의 제도를 복구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정승에게 보이라고 명하였었다. 정인지(鄭麟趾)가 의논하기를,
"각기 따로 관(館)을 설치한다면 인재(人才)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없습니다."
하고, 정창손(鄭昌孫)은 아뢰기를,
"예문관(藝文館)에 한림(翰林) 이상이 20여 원 있으니,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4원을 가설하였으니, 그 수(數)가 번다(煩多)하고 한 관사 안에 남행(南行)의 직명(職名)이 뒤섞이게 됩니다. 전조(前朝) 때에 춘추 공봉(春秋供奉) 10원과 예문 공봉(藝文供奉) 10원을 나누어서 사(司)를 달리하였으니, 이제 그 예(例)에 따라 따로 한 사(司)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부득이(不得已)하다면 전부터 있는 23원도 또한 이미 족하니 예전대로 그냥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한명회(韓明澮)·윤사흔(尹士昕)은 의논하기를,
"맡은 임무가 각기 다른데 한 관사에 같이 있는 것은 불편하니, 따로 한 국(局)을 만들어서 그 임무에 전심(專心)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김국광(金國光)은 의논하기를,
"맡은 임무가 각기 다르면서 한 국(局)에 같이 있는 것은 난처하며, 각기 따로 국을 설치하려면 관제(官制)를 크게 고쳐야 하니 불편합니다. 한림(翰林) 8원이 모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 있는데, 지금 겸직(兼職)을 해제(解除)하고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의 직호(職號)로써 춘추관에 옮겨 춘추관의 실관(實官)으로 삼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승정원(承政院)에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경동(李瓊仝)이 의논하기를,
"지금의 예문관(藝文館)은 곧 옛날의 집현전입니다. 세조조(世祖朝) 때에 경연(經筵)을 정지하고 집현전을 파한 뒤에 서책(書冊)을 예문관에 두게 하였는데,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고문(顧問)하시는 곳에 사람이 없을 수 없으므로, 경연관(經筵官)을 예문관(藝文館)에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직사(職事)가 섞여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가설(加設)한 4원도 또한 갑자기 정지할 수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경연관(經筵官)은 모두 홍문관(弘文館)의 실함(實銜)을 띠게 하여 출사(出仕)하게 하고, 지금의 예문관은 고문(顧問)에 대비(對備)하게 하여, 봉교(奉敎) 이하 8원은 전대로 예문관의 실함(實銜)을 띠고 직사(職事)에 전력하게 해서, 모두 옛 제도와 같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심회와 이경동 두 사람의 의논 중에서 어느 의논에 따라야 하겠는가?"
하였다. 정인지·정창손·심회가 의논하기를,
"중국의 한림원(翰林院)은 잡예(雜藝)가 모두 한데 모여 있습니다. 지금 경연관과 한림이 같은 관사(官司)에 있는 것은 진실로 무방(無妨)하니, 예전대로 경연(經筵)을 겸대(兼帶)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신은 생각건대, 전의 헌의(獻議)에 의거하여 한림(翰林) 8원을 춘추관에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사흔(尹士昕)은 의논하기를,
"이경동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만약 부득이하다면 예전대로 그냥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김국광은 의논하기를,
"《대전(大典)》의 반강(頒降)이 10년을 지나지 않았는데, 경이(輕易)하게 고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또 한림(翰林) 8원이 춘추관의 직을 겸대(兼帶)하게 하는 것도 이미 《대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이 전일에 한림을 춘추관에 이속(移屬)시킬 일을 의논해 아뢰었는데, 만약 《대전》을 어지럽게 고치는 것이 어려우면 새로 4원을 설치하지 말고, 한림 8원은 나이 젊고 장래가 있는 자를 선택하여 임명하여서, 사관(四館)의 거관(去官)하는 격례(格例)에 구애하지 말고, 모름지기 부수찬(副修撰)의 결원(缺員)을 기다려서 차례차례 천전(遷轉)시키게 하고, 만약 부득이하다면 이경동(李瓊仝)의 헌의(獻議)에 따라, 한림 8원의 예문관(藝文館) 경연관(經筵官)을 홍문관(弘文館)에 이속(移屬)시키는 것도 통(通)하게 하소서."
하고, 강희맹(姜希孟)·신정(申瀞)·임사홍(任士洪)은 의논하기를,
"이경동(李瓊仝)의 논의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다만 예문관에는 봉교(奉敎) 이하 8원만 있고 장관(長官)이 없어서 불편하니,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과 응교(應敎) 2원으로 겸임(兼任)시켜서 통솔(統率)하게 하고, 응교는 집현전(集賢殿)의 예를 따라 당하관(堂下官)으로 장래에 문형(文衡)을 주장(主掌)할 자를 선택하여서 겸정(兼定)하면, 거의 크게 경장(更張)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강희맹 등의 의논의 편부를 물으니,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응교(應敎) 중 1원과 도승지(都承旨)를 예문관(藝文館)에 겸대(兼帶)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좋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90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6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편사(編史)
- [註 175]남행(南行) : 음직(蔭職).
○先是, 藝文館奉敎崔乙斗等上疏曰:
設官分職, 各當其任, 不可混也。 惟我國家設藝文、春秋兩館, 以掌史翰, 又設集賢殿, 以任講論, 官職不相混矣, 至世祖朝始革集賢殿, 只置藝文ㆍ春秋館, 我殿下卽位之初, 欲復集賢舊制, 而集賢之革已久, 不可遽復, 特於藝文館設修撰以上十五員, 以備顧問, 又令奉敎以下, 亦兼經筵。 然修撰以上雖曰職帶春秋, 而依舊以侍講論事爲重, 奉敎以下雖曰職帶經筵, 而依舊以記言書事爲重, 名曰同官, 而職事則異。 今者又設參外官博士、著作、正字四員, 使年少輩早有所儲養, 而悉復集賢舊制, 其意甚美。 第恨未盡更張, 史官八員猶使混處, 遂令一司有各樣南行, 其秩則俱爲藝文參外官, 而其任則懸殊, 其不可混處而冒居也較然矣。 臣等職秩雖卑, 然上焉殿下之言動, 下焉群臣之得失, 無不悉書以垂萬世, 則其任固非輕矣。 如是而寄寓於他司, 若附贅懸疣焉, 於國家設官分職之意何? 於殿下待史官之意何? 伏望殿下參酌古典, 令臣等八員別作一局, 以專其任, 以復祖宗之制, 不勝幸甚。
命示政丞。 鄭麟趾議: "各別設館, 則人才爲難, 不必更改。" 鄭昌孫議: "藝文館翰林以上二十餘員, 不爲少矣。 又加設四員, 其數煩多, 一司之內南行職名混淆。 前朝之時, 春秋供奉十員, 藝文供奉十員, 岐而異之, 今依此例, 別作一司何如? 如不得已, 則在前二十三員亦已足矣, 仍舊何如?" 韓明澮、尹士昕議: "所任各異, 而同處一司不便, 別作一局, 以專其任何如?" 沈澮、金國光議: "所任各異, 則同處一局爲難, 各別設局, 則大更官制未便。 翰林八員皆兼春秋館記事官, 今除兼職, 以奉敎、待敎、檢閱職號, 移爲春秋實官爲便。" 上又命政院議。 同副承旨李瓊仝議: "今之藝文館卽古之集賢殿也。 在世祖朝停經筵罷集賢殿, 以書冊付藝文館, 殿下日御經筵顧問之地, 不可無人, 故設經筵官於藝文館, 此職事之相混處也。 今旣加設四員, 亦不可遽停, 臣意以謂經筵官皆帶弘文館實銜而仕, 今之藝文館以備顧問, 奉敎以下八員, 仍帶藝文館實銜以專職事, 悉如古制何如?" 傳曰: "沈澮、李瓊仝兩議, 當從何議?" 鄭麟趾、鄭昌孫、沈澮議: "中國翰林院, 雜藝皆聚。 今經筵官及翰林同司固無妨, 仍舊兼帶經筵何如?" 沈澮議: "臣以謂依前議, 翰林八員置於春秋館何如?" 尹士昕議: "依李瓊仝議施行。 如不得已, 仍舊何如?" 金國光議: "《大典》頒降未過十年, 輕易紛更未便, 且翰林八員兼帶春秋館, 已載《大典》。 故臣於前日, 翰林移屬春秋館事議啓, 若以紛更《大典》爲難, 則勿新設四員, 翰林八員擇年少有將來者充差, 不拘四館去官格例, 須待副修撰之闕, 次次遷轉, 如不得已, 則依李瓊仝議, 翰林八員藝文館經筵官, 移屬弘文館亦通。" 姜希孟、申瀞、任士洪議: "依李瓊仝議施行爲便。 但藝文館只有奉敎以下八員, 而無長官未便, 以弘文館直提學、應敎二員兼差統率, 應敎依集賢殿時, 擇堂下官將來主文者兼定, 則庶無大爲更張之弊。" 上問希孟等議便否, 政院啓曰: "應敎中一員及都承旨兼帶藝文館何如?" 傳曰: "可。"
- 【태백산사고본】 14책 90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6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