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계 부정 심원이 유자의 의관 문제·축수재의 혁파 등에 관해 상서하다
주계 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듣건대, 하늘이 높고 땅이 낮으므로 예제(禮制)가 이루어졌고, 유(類)끼리 모이고 무리대로 나누므로 예제가 시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절문(節文)1087) 은 비록 사물(事物)에 산재(散在)하지만 그 운용(運用)은 실제로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인생(人生)은 만물(萬物)의 으뜸이 되고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하여 그 회통(會通)하는 것을 관찰해서 그 전례(典禮)를 행(行)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이것을 몸받아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제정해서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어른과 어린이,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 행(行)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유별(有別)이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 자기를 닦고 상대를 이루어지게 하며 집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어찌 예(禮)를 쓰지 아니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중니(仲尼)1088) 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으니, 대저 예(禮)가 이미 망(亡)한다면 나라가 어찌 홀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禮)의 근본[本]에는 부정(不正)이 있지 아니하나 그 쓰임[用]에는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기 때문에, 관례(冠禮)의 근본은 성인(成人)의 도리(道理)를 이루도록 하는 데 있으나 그 말류(末流)에는 어린 아이들이 관을 쓰게 되며, 혼례(婚禮)의 근본은 생민(生民)1089) 의 근원을 중하게 여기는 데 있으나 그 말류(末流)에는 부귀(富貴)를 흠모하게 되며, 제례(祭禮)의 근본은 생양(生養)1090) 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데 있으나 그 말류(末流)에는 참란(僭亂)하거나 귀신에게 아첨하게 되는 등 처신(處身)하거나 물건을 접(接)하거나 상장(喪葬)이나 군례(軍禮)·빈례(賓禮)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禮)의 허물이겠습니까? 예를 행하는 자의 허물인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도학(道學)에 정신을 기울이시고 태고(太古)의 사실(史實)에 마음을 두시어 몸소 적전(籍田)1091) 을 갈아서 제례(祭禮)를 준비하시고, 친히 석전제(釋奠祭)1092) 를 행하시어 사례(射禮)1093) 를 강(講)하시니, 선진(先進)을 따르시고 말류(末流)의 폐단을 만회(挽回)하시려는 소이(所以)를 대개 알 만합니다.
아아! 전하께서는 날로 진전(進前)하는 지혜로서 작게 이룬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시는데, 좌우(左右)에 있는 신하들은 비록 10년의 세월이 변하더라도 오히려 그 사람 그대로이기 때문에 선(善)을 좋아하시는 편은 전하이신데, 이를 가로막는 편은 좌우의 신하들이니, 그 이른바, ‘내가 날로 나아가거든 너는 달로 나아가라[我日斯邁 而月斯征]1094) ’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신의 한심(寒心)하게 여겨 차마 가만히 있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만약에 혹시 한갓 옛것에만 얽매일 줄 알고 현시의 변화(變化)에 통(通)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교주 고슬(謬柱鼓瑟)로서 족히 치도(治道)를 논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동방(東方)의 백성들은 중국[諸夏]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법을 금일에 회복할 수 없다고 하여 목전(目前)에 편(便)한 데로 나가고 높고 원대(遠大)한 데에 힘쓰지 아니한다면 이것은 곧 고식적(姑息的)인 계책이지, 어찌 족히 당대 시대의 폐단을 구(救)하는 영구하고 안정된 계책이 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그 뜻을 세우기를 높게 하시고 그 말미암는 바를 삼가시면 이제(二帝)1095) 의 덕(德)을 반드시 따를 수가 있고, 삼왕(三王)1096) 의 법(法)을 반드시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니, 근래의 규범에 구애받으시지 마시고, 작은 잡기(雜技)를 좋아하시지 마소서. 의(義)를 들으시거든 어렵고 큰 일이라고 하시지 마시며, 선(善)을 보시거든 마치 강물이 넘쳐 흐르듯이 좇으시고, 어진이를 구(求)하시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 오로지 능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고, 아랫사람을 접견(接見)하시고 조회(朝會)를 보시는 데 오로지 부지런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며, 연한(燕閒)에서도 보존(保存)하시고 위의(威儀)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하시며, 여러 사람의 입에 따라 의혹(疑惑)을 옮기지 마시고 그 결단(決斷)을 밝게 하시며, 천(賤)한 관원(官員)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그 삼가고 어렵게 여기소서. 상(賞)줄 만한 선(善)이라도 오히려 그 혹시 참람(僭濫)함이 있을까 살피시고, 벌(罰)줄 만한 악(惡)이라도 오히려 그 혹시 남형(濫刑)함이 있을까 살피시며, 하찮은 말이라 하여 소홀하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살피기를 좋아하시고 조그마한 허물은 해로울 게 없다고 하지 마시고 반드시 용서하지 마소서. 나라를 일으키고 나라를 잃는 이치가 방책(方策)1097) 에 실려 있으니, 아름다운 모책(謀策)에 대해서 신이 어찌 다시 군말을 하겠습니까만, 오직 4가지 일만을 조목별로 열거(列擧)하며 다음과 같이 바칩니다.
신(臣)이 《주역(周易)》1098) 을 살펴 보건대, 이르기를, ‘여자는 안에서 자리를 바로잡고, 남자는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는데,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바로잡는 것은 천지(天地)의 큰 뜻이다.’고 하였고, 《예기(禮記)》1099) 에 이르기를, ‘남자가 낮에 안에서 거(居)하면 병을 묻는 것이 가(可)하며, 밤에 밖에서 거(居)하면 조상(弔喪)을 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밤에 밖에서 묵지 아니하고 낮에 안에서 거(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정이(程頤)가 이르기를, ‘인주(人主)가 하루 중에 현사(賢士)·대부(大夫)를 접견(接見)하는 때가 많고 환시(宦寺)·궁녀(宮女)를 가까이 하는 때가 적으면, 자연히 기질(氣質)이 변화(變化)하여 덕(德)스러운 기국(器局)을 성취(成就)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선왕(先王)들은 매일 새벽녘에 조당(朝堂)에 앉아서 정사를 듣다가 물러나서 소침(小寢)으로 가서 일에 종사하고 일찍이 궁중(宮中)에 깊숙이 거(居)하지 아니하였으니,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고서 일에 전념(專念)하려는 까닭이었습니다. 대저 자리가 바로 잡히면 뜻이 정(定)해지고, 뜻이 정해지면 마음이 조용해지고, 마음이 조용해지면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궁리(窮理)하고, 여기에서 본성(本性)을 기르면 장차 어디로 가든지 통(通)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며, 여기에서 정사를 생각하고 여기에서 사람을 접(接)하면 장차 어디에 거처(居處)하든지 마땅하지 않을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곡(邪曲)된 것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없고 속이는 것이 저절로 생기는 일이 없어져 군신(君臣)의 도(道)가 서로 믿음성이 있고 위 아래의 정(情)이 숨기는 바가 없으면, 사곡(邪曲)이 충성(忠誠)으로 변해질 수 있고, 계옥(啓沃)이 나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총명(聰明)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열려지고, 도덕(道德)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성(盛)해지는 등 심지어 인정(人情)의 물태(物態)와 농사[稼穡]의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두루 알지 못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삼대(三代)1100) 의 제왕(帝王)들이 자품(資稟)이 고명(高明)해지고 성(聖)스럽고 공경하는 덕(德)이 날로 높아져서 천고(千古)에 초월(超越)하여 아무도 이에 따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후세의 인주(人主)들은 그렇지 못하여 궁중(宮中)에 깊이 거(居)하니, 항상 더불어 거처(居處)하는 자가 환관(宦官)·궁첩(宮妾)의 무리가 아닌 바가 없으며, 항상 보고 듣는 것이 실없는 농담이나 저속하고 야비한 일이 아닌 바가 없었습니다. 그 환시(宦寺) 가운데 이(利)를 탐하여 일을 주선하고 황제의 명(命)을 받들고 뜻을 잘 맞추는 자가 있으면, 명(命)을 전(傳)하는 데 어긋나거나 잘못됨이 없고 사령(使令)하는 데 뜻을 잘 맞추며, 감언(甘言)이나 저속한 말로 배알(拜謁)하므로 침윤 부수(浸潤膚受)1101) 의 참소(譖訴)가 기회를 틈타서 슬그머니 마음을 찌르는 것이 마치 아무런 마음이 없는 데에서 나오는 것 같으나, 그러나 인주(人主)는 훈훈(醺醺)한 마음이나 탕일(蕩佚)한 뜻으로서 스스로 그 술책(術策) 중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조회(朝會)를 보는 데에 이르러서도 여러 신하들이 헛되이 배알(拜謁)하고 물러나며, 비록 경연(經筵)의 신하들도 또한 엄연(儼然)히 줄지어 모시고서 글 몇 줄을 읽고 두루 말하고서는 물러나며, 혹은 진언(進言)하는 자가 있어서 또한 정색(正色)을 하여 상주(上奏)하고 끝마친 다음에 물러나지만, 군신(君臣)의 정의(情意)는 멀어져 서로 접(接)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데도 훈도(薰陶)·보양(保養)의 공(功)을 책임지운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외정(外庭)의 잘잘못과 민간(民間)의 이익과 병폐를 듣고서 알 수가 없으므로, 사(邪)와 정(正)이 뒤섞여 나오고 선(善)과 악(惡)이 뒤바뀌어지기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화(禍)와 불측(不測)의 환란(患亂)이 이미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금(古今)의 공통된 환(患)입니다. 신(臣)은 전하께서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의 여가에 항상 연거(燕居)하시는 곳이 정전(正殿)에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만약 없으시다면 곧 소침(小寢)을 선정전(宣政殿) 뒷쪽의 대내(大內) 밖에다 짓도록 명령하시되, 2실(室)을 연달아 지어서 1실(室)은 따뜻하게 만들고 1실은 서늘하게 만들어서 겨울철과 여름철을 편하게 지내소서. 그리고 고금(古今)의 마음에 새기고 경계할 만한 글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을 골라서 써서 좌우(左右)에 걸어 놓고 병풍(屛風)을 설치하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의 서적(書籍)도 또한 좌우에 배치하여 쌓아 두고, 매양 정사를 듣는 여가에 항상 이곳에 연처(燕處)하시되,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꽂꽂이 앉아서 혹은 때때로 글을 익히고, 혹은 정사를 생각하기도 하시며, 왕왕 경연관(經筵官)과 여러 신하들 가운데 가히 사우(師友)가 될 만한 자 한두 사람을 인견(引見)하여 온화한 얼굴로서 예(禮)로 우대하고 조용히 편안하게 이야기하시며, 그 왕명(王命)을 받아 사조(辭朝)하고 가는 자나 외방(外方)에서 내조(來朝)하는 자가 있거든 관품(官品)이 높고 낮은 것을 논하지 말고 모두 접견(接見)을 하시며, 심지어 정사에 이르러서도 대소(大小)에 관계 없이 모두 승지(承旨)로 하여금 친히 아뢰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는데도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거나 일이 넓혀지지 못하거나 총명(聰明)이 상달(上達)되지 못하거나 충성스러움과 간사함이 변별(辨別)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臣)은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臣)이 《서경(書經)》1102) 을 살펴보건대, ‘하늘이 밝은 도(道)가 있어 그 유(類)가 분명하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선(善)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온갖 복(福)을 내리시고 선하지 않는 일을 하는 자에게는 온갖 재앙(災殃)을 내리신다.’고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화(禍)와 복은 모두 그 스스로 자취(自取)하는 것이지, 선한 일을 하지도 아니하고서 귀신에게 아첨하고 기도(祈禱)하여서 복을 얻은 자는 있지 아니하였으며, 악한 일을 하지도 아니하고 정도(正道)만을 지키고 기도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화를 얻은 자도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군왕(君王)의 탄생(誕生)은 실로 천명(天命)을 받음인데, 신(神)과 인간의 주인(主人)이 되어서 진실로 능히 기욕(嗜欲)을 절제(節制)하고 기거(起居)를 알맞게 하여 덕(德)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억조(億兆) 창생들을 편안하게 구제한다면, 재해(災害)를 제거(除去)하는 데 어찌 기양(祈禳)하기를 수고롭게 해야겠으며, 수복(壽福)의 오는 것이 어찌 기도(祈禱)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고 하였고, 소공(召公)이 말하기를, ‘왕(王)이 덕(德)을 쓰니, 하늘에 명(命)이 영원하기를 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으며 속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에 반대가 된다면, 하늘에 죄를 지어서 사람들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怒)하는데, 비록 날마다 천금(千金)을 허비하여 나쁜 귀신이나 사람을 공향(供享)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다만 화(禍)를 부르게 할 뿐이니, 끝내 무슨 유익(有益)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일찍이 축수재(祝壽齋)를 파(罷)하도록 명하시면서 말씀하기를,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운수(運數)가 있는데 어찌 기도(祈禱)를 쓰겠는가?’고 하시고, 또 기도의 축문(祝文)을 읽어보시고 좌우(左右)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과궁(寡躬)을 위하여 복(福)을 빌지 말라.’고 하시고, 또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는 모두 인군(人君)이 부덕(否德)하여 불러 들인 것인데, 지금 중들이나 무당들을 모아서 비를 비는 것이 부끄럽지 아니한가? 나는 기도하는 일을 파(罷)하고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 가(可)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조금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을 읽어서 중이나 무당들의 허탄(虛誕)하고 요망(妖妄)함을 알고 있는데, 지금 도리어 좌도(左道)1103) 에 의지하여서 하늘의 은택(恩澤)을 바라는 것이 가(可)하겠는가?’고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인군(人君)이 이미 능히 몸을 기울여 덕(德)을 닦지 못하여 천재(天災)와 지괴(地怪)가 이르렀는데, 곧 신(神)에게 기양(祈讓)을 베푸는 것은 잘못이다.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바로잡히면 천기(天氣)가 위에서 순응(順應)할 것이나, 인사가 순조롭지 못하면서 천기의 순응(順應)을 구(求)하고자 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고 하시었습니다.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나의 생일(生日)을 당하여 종척(宗戚)과 훈구 대신(勳舊大臣)들이 재(齋)를 설치하고 오래 살도록 기도하는데, 예(禮)에 있어서 옳지 않으니, 그것을 없애도록 하라.’고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불씨(佛氏)의 도(道)는 화복(禍福)에 무익(無益)하다. 내가 숭앙하고 믿었다면 모후(母后)의 빈천(貧天)하시던 날을 당하여 슬퍼하고 그리워할 때 어찌 불사(佛事)를 크게 설치하여 명복(冥福)을 빌지 아니하였겠는가?’고 하시며 세밑[年終]의 환원(還願)1104) 을 파(罷)하시고 변계량(卞季良)에게 이르기를, ‘세밑에 환원하고 복(福)을 구하는 일은 불씨(佛氏)를 믿는 단서(端緖)가 되니, 무릇 불사(佛事)에 관계되는 것은 이를 파(罷)하여 거의 없애도록 하라. 비록 복(福)을 얻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비루(鄙陋)한 일인데, 하물며 결단코 이러한 이치가 없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적(史籍)에 실려 있어서 역력(歷歷)히 상고할 수 있으니, 신(臣)이 감히 속이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 후사(後嗣)에 교훈(敎訓)을 남기신 것이 어찌 양양(洋洋)하게 밝게 나타나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하물며 수명이란 것은 태어날 초기에 정(定)해진 것이요, 또 석가(釋迦)가 능히 줄이거나 늘일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佛者)는 본래 서역(西域)의 궤탄(詭誕)한 요술(妖術)로서 진실로 조정(朝廷)에서 마땅히 숭배(崇拜)하고 받들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은 함께 방책(方策)이 있으니, 진실로 전하께서도 일찍이 통람(洞覽)하신 바인데, 신이 감히 속이겠습니까? 지금 훈구(勳舊)와 종척(宗戚)의 대신(大臣)들이 서로 이끌어 공축(供祝)하여 성상의 장수(長壽)를 비는 것이 으레 보통의 일로 되었으나, 신은 그윽이 불가(不可)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부처[佛]의 힘에 힘입어서 성상의 수명을 1일(日) 1각(刻)이라도 연장(延長)할 수 있다면 신자(臣子)의 마음에서 비록 사람마다 그 몸을 백 조각으로 내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보아도 고금(古今)에 한번도 징험(徵驗)할 만한 일이 없었으니, 어찌 그 이치가 있겠습니까? 조금 지식이 있는 자는 반드시 부끄러워하고 분원(憤冤)하며 불씨(佛氏)가 어찌 족히 수복(壽福)을 가져 올 수 있겠는가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이 세상을 사는 데는 여러 사람을 따르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이것은 마음으로 그 요망(妖妄)하고 허탄(虛誕)한 것을 알고서 고식적(姑息的)으로 하는 짓이니, 이것이 아첨하는 것인데 어찌 임금을 정성의 도리로써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어리석고 미욱한 세민(細民)이 반드시 생각하기를, ‘종친(宗親)·재추(宰樞)는 국법(國法)을 준수(遵守)하면서도 오히려 무릎을 끓고 부처를 섬기며, 군왕(君王)은 국법의 종주(宗主)로서 오히려 부처에 의지하여 나이를 연장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게 있겠는가?’고 하고 그 우러러보고 혹신(惑信)하는 것이 반드시 더욱더 심하게 될 것이니, 농사나 장사를 하는 자들은 그 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부처에게 부자가 되도록 기도할 것이요,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도둑질하는 자는 그 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부처에게 죄를 면(免)하도록 빌 것이요, 선(善)한 자는 이륜(彝倫)을 닦지 아니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닦을 것이요, 악(惡)한 자는 나라의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부처의 계율(戒律)을 무서워할 것이요, 귀(貴)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그 귀하게 되도록 빌 것이요, 오래 살고자 하는 자는 그 오래 살도록 빌 것입니다. 책임을 전가(轉嫁)하고 서로 본받는다면 혹시 후세(後世)에서는 나라와 임금의 위복(威福)의 권한이 모조리 흙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佛像)에게 옮겨질까 오히려 두려운데, 그 서로 오랑캐로 되지 아니한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근원은 실로 축수재(祝壽齋)로 말미암아 열려지는 것이니, 이것이 신으로서 차마 가만히 입다물고 있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주역(周易)》1105) 에 이르기를, ‘이행(履行)하는 것을 보아서 길상(吉祥)을 고찰한다.’고 하였고, 《시경(詩經)》1106) 에 이르기를, ‘복(福)을 구(求)하기를 간사한 방법으로 아니한다.’고 하였고, 《서경(書經)》1107) 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의 이루어 놓은 법을 본받아 길이 허물이 없게 한다.’고 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멀리는 앞시대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우리 조종(祖宗)의 미루어 놓은 법을 몸받아서 아첨하는 말을 기뻐하지 마시고, 요망한 이야기에 현혹(眩惑)되지 마시고, 무릇 기도(祈禱)에 관계되는 일은 일체 금단(禁斷)하여서 올바른 전례(典禮)를 보이소서. 신이 전에 조회(朝會)에서 아뢸 때에 대략 이러한 뜻을 가지고 천총(天聰)을 우러러 번독(煩瀆)하였는데, 그때 자리에 있던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자(臣子)가 임금을 위하는 일이므로 그 정(情)이 절박(切迫)하다면 누가 감히 의논하겠는가?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만수무강(萬壽無彊)」이라고 한 것은 모두 임금을 위하는 일인데, 비록 지나친 행동이라 하더라도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고 하였으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이것은 대인(大人)·군자(君子)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는 자의 말이 아닙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자가 있는데, 임금을 섬기게 되면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여 아첨하는 자이다.’고 한 것은 이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만수무강」이라고 일컬어 말하는 것은 곧 연향(燕享)에서 임금에게 축수(祝壽)하는 말이니, 신자(臣子)가 되어서 군부(君父)에게 수복(壽福)을 평안히 누리도록 바라는 것은 곧 사람마다 느끼는 상정(常情)일 것인데, 천하(天下)에 어찌 이와 같지 아니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情)의 나타나는 것을 능히 스스로 자제(自制)하지 못하는 자는 오히려 또 일컬음에 절도(節度)가 있고 송축(頌祝)함도 예(禮)가 있어 감히 망동(妄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어찌 예의(禮義)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미연(靡然)히 불상(佛像)에 아첨하여 기도(祈禱)할 수 있겠습니까? 그 서로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인데도 곧 이를 빙자(憑藉)하여 증거로 삼으니, 이는 바로 지초(芝草)와 송엽(松葉)을 먹으며 도인(導引)1108) 을 하던 유법(遺法)입니다. 만약 임금의 질병(疾病)으로 기도(祈禱)를 행하는 것은 곧 신자(臣子)의 딱하고 절박(切迫)한 즈음이지만 오히려 감히 예(禮)를 범(犯)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5사(祀)에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상하 신기(上下神祈)에 기도하는 고래(古來)의 예문(禮文)이 방책(方策)에 실려 있음이 이와 같은데, 그 부처에 불공드리고 축수(祝壽)하는 법은 어떠한 전고(典故)에서 나온 것인지 신은 진실로 우매(愚昧)하며 그 근거(根據)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천지(天地)의 본성(本性)에 밝은 자는 괴이(怪異)한 신(神)에게 현혹(眩惑)되지 아니하고 만물(萬物)의 본정(本情)에 밝은 자는 옳지 못한 유(類)에 속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그 속는다는 것도 대개 또한 살피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 유의(留意)하신다면 국가가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선왕(先王)께서 예(禮)를 정하시니, 천자(天子)에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근본(根本)에 보답하고 추원(追遠)1109) 하는 데 모두 일정한 법전(法典)이 있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와 시일(時日)도 모두 일정한 법도(法度)가 있습니다. 유명(幽明)은 한 가지 이치로서 서로 통(通)하고 간격(間隔)이 없는데, 진실로 예(禮)에 실려 있지 아니하는 것은 곧 신(神)도 흠향(歆享)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예(禮)로써 제사지내야 한다.’고 하였고, 곡례(曲禮)1110) 에 이르기를, ‘그 바른 귀신이 아닌데도 이에 제사지내는 것을 「음사(淫祀)」라고 부르는데, 음사는 복(福)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이치이며 바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혹시 정신이 황홀(怳惚)한 사이에 영향(影響)이 있었다면 곧 이러한 마음은 주된 바가 없어서 망령되게 근심하고 의심하다가, 드디어 무축(巫祝)이나 요사(妖邪)스런 사람들이 때를 틈타고 틈을 잡아서 그 간사(奸邪)함을 마음대로 행하게 되는 것인데, 속이고 유혹하는 술책이 이미 행해지면 그 화(禍)가 되는 것은 또 장차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어지럽혀져 망(亡)한 데 이른 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 그 가장 심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옛날 삼묘(三苗)씨가 덕(德)을 어지럽혀 백성들과 신(神)들이 잡되게 섞이고 집집마다 무사(巫史)가 되어 그 올바른 귀신이 아닌 것에 더불어 제사지내니, 천지(天地)·산천(山川)이 실로 나쁜 신(神)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우순(虞舜)1111) 께서 곧 중려(重黎)에게 명하여 사전(祀典)을 수찬하여 밝혀서 높고 낮은 상하(上下)가 각각 분수와 한계가 있도록 하고, 천지(天地)의 통(通)하는 것을 끊으시고 유명(幽明)의 구분을 엄하게 하신 다음에야, 이상한 향불을 피우거나 요사스럽고 허탄(虛誕)한 말이 대개 모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고려(高麗) 말엽에 귀신에게 현혹되어 어지러운 것이 또한 삼묘(三苗)의 시대와 같았습니다. 원단(圓壇)에서 하늘[天]에 제사를 지내거나 여러 명산(名山)에서 은혜(恩惠)를 내리도록 비는 것과 같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할 만한 것들이 있었으나,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정사(政事)를 맡으시던 처음 시기에 이르러, 맨먼저 원단(圓壇)을 혁파(革罷)하고 은혜를 비는 것을 혁파하고 음사(淫祀)를 금지시킨 다음에야, 선왕(先王)의 예(禮)가 세상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금상(今上) 전하께서도 또한 이러한 폐단을 아시고, 이미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격(巫覡)을 모조리 추쇄(推刷)하여 성(城) 밖으로 쫓아내어 동활인원(東活人院)·서활인원(西活人院)에 나누어 소속시키시고, 사족(士族)과 서인(庶人)들의 집으로 하여금 음사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法)의 행해지지 아니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를 범(犯)하기 때문인데, 성수청(星宿廳)1112) 을 짓는 것은 아마도 전일의 명령을 내리신 바에는 위배될까 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신에게 하교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신은 전하의 뜻이 아닌 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러나 한 나라의 주인(主人)이 되어서 항상 한 나라의 책임을 지시고 계신데, 명령이 궁중의 내전(內殿)에서 나갔는데도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신은 천 년 뒤에 반드시 이를 의논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주역(周易)》 고괘(蠱卦)의 구이조(九二條)에, ‘어머니의 잘못을 맡아서 바로잡는다.[幹母之蠱]’라는 내용을 몸받아서 오로지 지성(至誠)으로써 감동시키면, 거의 불교(佛敎)에 속아서 은혜(恩惠)를 상(傷)하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고, 궁내의 다스림이 저절로 엄(嚴)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것뿐 아니라, 송악(松岳)에서 은혜를 내려달라고 비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국무당(國巫堂)이라고 부르는 자가 내녀(內女)와 내환(內宦)과 공인(工人) 4, 5인과 노래 부르는 자 5, 6인을 거느리고 각각 우역(郵驛)의 말을 타고 거리를 떠들면서 지나서 개성 공관(開城公館)에 들어가 머무르는데, 노래하고 춤추고 연락(宴樂)하면서 수십일을 머무르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유수(留守)는 2품(品)의 재상(宰相)인데도 국무녀(國巫女)가 반드시 더불어 대무(對舞)1113) 하는 것을 으레 보통 일로 여기면서 말하기를, ‘임금을 위하는 일이니 그리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습속(習俗)의 폐단이 바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寒心)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경외의 인민과 같은 경우에는 목멱산(木覓山)·송악산(松嶽山)·감악산(紺岳山)·금성산(錦城山) 등지에서 혹은 은혜를 빈다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원장(願狀)이라고 일컫기도 하면서 봄 가을철에 성대히 공향(供享)하고 여악(女樂)을 베풀어 갈고(羯鼓)1114) 치는 소리가 길에 서로 잇닿는데, 심지어 사족(士族)의 부녀자(婦女子)들도 몸소 스스로 여기에 가는 자도 있습니다. 그 춤을 추고 놀아나는 것이 심히 완구(宛丘)1115) 의 습속(習俗)이 있으니, 비단 풍속(風俗)에 누(累)가 될 뿐만 아니라, 이것은 크게 예(禮)에 참람(僭濫)하다는 것입니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귀신(鬼神)에게 공급(供給)하는 데 예(禮)가 아니면 공경하게 할 수 없고, 정속(正俗)을 교훈(敎訓)하는 데 예(禮)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였고, 《맹자(孟子)》1116) 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의 법(法)을 준수(遵守)하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자는 아직 있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멀리는 옛날 제도를 상고하시고 가까이는 이루어진 국법(國法)을 따라서, 모든 음사(淫祀)에 관계되는 일을 일체 금단(禁斷)시킨다면, 유명(幽明)이 엄(嚴)해지고 상하(上下)의 예(禮)가 바로잡혀질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 성인(聖人)께서 관복(冠服)을 제정할 때 각각 알맞게 하여 관작(官爵)이 있는 자에게는 명복과 헌면(軒冕)1117) 을 착용하게 하고, 상(喪)을 당한 자에게는 제참(齊斬)과 최질(衰絰)을 착용하게 하고, 유자(儒者)에게는 치관(緇冠)과 심의(深衣)를 착용하게 하였으니, 모두 안팎을 가지런히 하여 위의(威儀)를 밝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금수(禽獸)와 다르다는 것을 알도록 하려는 까닭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동국(東國)에서는 고려(高麗) 이전부터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관복(冠服)이 모두 법(法)이 없어서 혹은 참람(僭濫)하기도 하고 혹은 요망(妖妄)스럽기도 하는 등 정해진 바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우왕(禑王) 13년에 이르러, 유신(儒臣) 정몽주(鄭夢周)의 무리들이 처음으로 건의(建議)하여 호복(胡服)1118) 을 혁파(革罷)하고 관직이 있는 자는 모두 사모(紗帽)를 착용하게 하고,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과 경외(京外)의 학생(學生)들은 모두 평정 두건(平頂頭巾)을 착용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이르게 되자, 유생(儒生)의 관복(冠服)은 중국 조정(朝廷)의 국자감생(國子監生)의 예(例)에 의거하여 한 다음에야 비로소 천고(千古)의 폐속(弊俗)이 한번 크게 변(變)하게 된 것입니다. 대저 유생(儒生)은 예(禮)가 나오는 바인데, 유생이면서도 예를 지키지 않는다면 예가 어떻게 행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첨시(瞻視)를 신중히 하고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비(是非)를 논하는 등 항상 스스로 격앙(激昻)하여서 그 뜻을 받들게 하는데, 만약 임금이나 스승이 된 자는 이런 때에 대도(大道)로써 격려하고 법복(法服)으로써 속박하여 우뚝하고 강인(强忍)하고 초탈(超脫)하는 자질(資質)을 성취(成就)시키지 않고서, 벼슬[筮任]에 나아가 사사로운 생각이 안에서 생기고 속(俗)된 관습이 밖에 붙어서 도도(滔滔)하게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하게 된 다음에는 비록 성인(聖人)과 더불어 거(居)하더라도 능히 감화(感化)되어 학문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만약 광탄(狂誕)하고 조잡(粗雜) 난폭한 무리들로서 유명(儒名)을 띠고 도척(盜蹠)의 짓을 하는 자들이 매양 시가(市街)를 나가 다닐 때 항상 이러한 법복(法服)을 입는다면 비록 그 광탄하고 난폭함을 부리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고서 안으로는 부끄러워하고 밖으로 겁을 내서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이니, 그 이익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전하께 이 문제를 아뢰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청컨대, 유자(儒者)로 하여금 길거리에서는 두건(頭巾)을 착용하고 청금(靑衿)을 더 입고서 다니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전하께서 처음에는 이미 이를 허락하시었다가, 한참 만에 다시 명령하시기를, ‘청금(靑衿)만 더 입도록 하라.’고 하시고 두건(頭巾)은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는데, 그 청금(靑衿)만을 취(取)하시고 두건(頭巾)을 취하시지 아니하신 까닭은 오로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몸은 유자(儒者)가 되어도 좋으나 머리는 유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반드시 전하의 본의(本意)가 아니고 좌우(左右)에 있는 신하 가운데 전하를 오도(誤導)하는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으니, 이를 중지하소서.’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의 유생(儒生)들이 다만 학당(學堂)과 관(館) 중에서는 항상 두건(頭巾)을 착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시(監試)에 입격(入格)하는 자나 방방(放榜)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착용하고서 유가(遊街)1119) 하므로, 여염(閭閻)의 서민(庶民)들이 익히 본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궁촌(窮村)의 어리석은 부녀자들도 또한 모두 그것이 유관(儒冠)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들이 놀란다는 것이 어찌 오로지 저쪽편에만 있고 이쪽에는 있지 아니하겠으며,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저지하는 것도 어찌 오로지 저쪽편에만 있고 오히려 이쪽편에는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풀 수 없는 이유의 첫 번째입니다.
전조(前朝)1120) 이전의 수천 수백년 동안 오래 된 습속(習俗)이 우리 왕조(王朝)에 이르러 일거에 갑작스레 변(變)하여 중국 제도[華制]를 따르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고 있습니다. 무릇 예악(禮樂)·문물(文物)·여복(輿服)1121) 의 제도로서 성하게 빛나고 볼 만한 것은 무엇인들 조종(祖宗)께서 강력히 결단(決斷)하신 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약 말하기를, ‘정치를 하는 데는 그 일의 옳고 그름과 사악(邪惡)하고 정당한 것과 가볍고 무거운 것과 손해되고 이익되는 것을 따지지 아니하고 모두 옛것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고, 변혁(變革)시키는 것은 불가(不可)하다.’고 한다면, 그 선왕(先王)께서 행하신 이러한 조처는 모두 세상을 놀라게 하고 풍속을 놀라게 하므로, 본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선왕(先王)께서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혁명(革命)한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민정(民情)이 인정되지 아니하였으니, 동이(東夷)의 습속(習俗)을 갑자기 바꾸어서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을 것이요, 성자 신손(聖子神孫)께서도 또한 모두 말씀하시기를, ‘조종(祖宗)의 대성(大聖)께서도 급하게 풍속을 바꾸지 아니하셨는데, 우리는 조종(祖宗)보다 현명(賢明)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할 수가 있겠는가?’고 할 것이요, 후세(後世)에서 지금 세상을 이을 이들도 또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을 것이요, 천지(天地)가 끝나는 종말(終末)의 세상에 이르도록 이와 같을 것이니, 끝내 어찌 능히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은 모두 마땅히 관모(冠帽)가 떨어져 머리를 풀어 헤치고 두루 호복(胡服) 차림을 한 다음이라야만 전조(前朝)의 옛 습속(習俗)에 알맞고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을 것입니까? 신이 풀 수 없는 이유의 두 번째입니다.
옛부터 인주(人主) 가운데 의리(義理)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스스로 어지러이 고치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망(亡)한 지경에 이르른 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인신(人臣)들은 그러한 때를 당한다면 감히 지적하여, ‘망령되게 스스로 어지러이 고칩니다.’고 말하지 못하고, 반드시 칭탁(稱託)하기를, ‘선왕(先王)의 법(法)을 바꿀 수는 없으며, 정치를 하는 요체(要諦)로서는 풍속을 놀라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성명(聖明)한 군주(君主)로서 소신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소신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옛것과 지금의 것이나, 낡은 것과 새것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그 의리(義理)의 형편에 따라 예제(禮制)를 덜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며 시대와 알맞게 맞추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중니(仲尼)의 이른바, ‘군자(君子)는 천하(天下)에 처하면서 어느 한 가지를 고집하지도 아니하고 어느 한 가지를 불가(不可)하다고도 아니하고 의리에 따른다.’고 한 것이요, 《주역(周易)》의 서문(序文)에서 이른바, ‘때에 따라서 변역(變易)하되 도(道)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신은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전하를 어떠한 군주(君主)라고 생각하여서 감히 이러한 말을 해서 이를 가로막았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전하를 불세출(不世出)의 군주(君主)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요(堯)임금·순(舜)임금·3왕(三王)의 도(道)를 말씀드려 동방(東方)의 만세까지 끝 없는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도, 이에 말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신이 풀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만약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말한 바와 같다면 임금과 신하가 위 아래에서 보시는 일부(一部)의 《경국대전(經國大典)》도 오히려 이미 많은 것인데, 어찌 두루 읽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하여서 사물(事物)의 이치를 궁구(窮究)하겠습니까? 부서 기회(簿書期會)1122) 의 소임(所任)은 두서너 명의 서리(胥吏)이면 족히 이를 감당할 수 있을 터인데, 또 어찌하여 널리 준재(俊才)를 구(求)하여 써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이루게 합니까? 신이 풀 수 없는 이유의 네 번째입니다.
지금 신은 고의로 정직(正直)함을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정치를 하는 방도는 문교(文敎)보다 큰 것이 없으며, 남을 가르치는 방도는 예의(禮儀)보다 큰 것이 없는데, 의관(衣冠)이 바르지 못하면서도 능히 마음을 바로 가지는 자는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듯 나라의 대체(大體)를 위하는 데에 불가(不可)한 점이 있으므로, 감히 가슴에 품은 생각을 두루 펴고 기휘(忌諱)할 바를 피(避)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서경(書經)》1123) 에 이르기를, ‘임금은 교묘한 말로써 나라의 옛 정치를 어지럽히지 아니하고, 신하는 총애(寵愛)와 이익으로써 이루어 놓은 공(功)에 거(居)하지 아니하면, 나라는 길이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살펴 주소서.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의 친척(親戚)은 살피는 것을 돕는다.’고 하였으니, 신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종친(宗親)의 말류(末流)로서 낳아서 길러 주신 은혜를 외람되게 입었으므로, 비록 그 구구(區區)한 충성을 나타내고자 하더라도 어찌 능히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존경하는 견마지성(犬馬之誠)에서 나오므로 매양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너무 간절하여 헤아릴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이 조롱하여 비웃고 모욕하여 헐뜯어 신을 미쳤다고 하고 참람(僭濫)하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성(異姓)의 친척(親戚)은 임금에게 세 번 간(諫)하여도 임금의 마음에 합(合)하지 아니하면 진실로 마땅히 신을 신고서 가버릴 것이지만, 신 같은 경우에는 의리상 슬픔과 기쁨을 임금과 같이 해야 하므로 진실로 가 버릴 이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진언(進言)한 것이 비록 4, 5 차례에 이르렀으나 아직 한번도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래도 아직 그만두지 못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광망(狂妄)하고 참람(僭濫)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신의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곽(郭)나라로 가서 부로(父老)에게 묻기를, 「곽(郭)나라가 무슨 까닭으로 망했는가?」고 하니, 말하기를, 「그 선(善)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惡)한 이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고 하자, 환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곧 어진 임금인데 어찌하여 망(亡)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고 하니, 부로(父老)가 말하기를, 「선(善)한 이를 착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쓰지 못하였고, 악(惡)한 이를 미워하면서도 능히 없애지 못한 것이 나라를 망친 까닭입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후세(後世)의 논자(論者)가 말하기를, ‘혹시 알지도 못하는 자에겐 오히려 기대해 보는 수도 있으나, 대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군자(君子)는 세상을 피하여 은거(隱居)하고, 소인(小人)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고 하였고, 복괘(復卦)1124) 의 초구조(初九條)에 이르기를, ‘멀지 않아서 되돌아 오므로,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크게 길(吉)하리라.’고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 유의(留意)하신다면 국가가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글이 들어가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상소(上疏) 중에서 따로 1전(殿)을 지어서 사대부(士大夫)를 맞이하도록 하자는 말이 있는데, 내가 하루에 세 차례씩이나 경연(經筵)을 열고 밤에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사대부(士大夫)를 접견(接見)하는데, 어찌 반드시 별전(別殿)을 다시 짓겠는가? 또 축수재(祝壽齋)와 성신청(星辰廳)은 조종(祖宗)께서 행하신 지 이미 오래 되는데, 갑자기 혁파(革罷)할 수가 없다. 비록 이러한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옛 전장(典章)을 한 것이 많은데, 심원(深源)이 이름을 날리고자 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심히 그르게 여기는데, 경(卿)들의 뜻에는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신준(申浚)·박숙진(朴叔蓁)·손비장(孫比長)이 대답하기를,
"전일의 조계(朝啓)에서 심원(深源)이 이 일을 아뢰었는데, 그 말이 비록 적절하게 쓰여지지는 못하였으나, 감히 말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진실로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그 말의 옳고 그른 것이라면 오로지 성상께서 취(取)하시거나 버릴 일입니다."
하였다. 손비장이 또 말하기를,
"대저 사(邪)와 정(正)은 양립(兩立)하지 못합니다. 이단(異端)1125) 의 나쁜 점을 신이 대간(大諫)이 되었을 때에도 또한 일찍이 이를 논하였습니다. 심원(深源)의 이러한 말은 불가(不可)한 점이 없습니다."
하니, 한참 있다가 임금이 명하여 심원(深源)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경(卿)이 일찍이 조계(朝啓)에서도 이를 말하였는데, 지금 또 이를 말하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선정전(宣政殿) 뒤에는 이미 전(殿)을 지을 장소도 없으며, 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아랫사람의 정(情)이 또한 상달(上達)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축수재(祝壽齋)는 아랫사람들이 임금을 지목(指目)하여 하는 일이요, 내가 명(命)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조종(祖宗) 이래로 이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일은 뒤에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임금이 표피(豹皮) 1장(張)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8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30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구휼(救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의생활-관복(官服) / 의생활-상복(常服) / 풍속-예속(禮俗) / 풍속-풍속(風俗) / 농업-권농(勸農)
- [註 1087]절문(節文) : 예절의 규정.
- [註 1088]
중니(仲尼) : 공자(孔子).- [註 1089]
생민(生民) : 사람이 자손을 낳는 것.- [註 1090]
생양(生養) : 부모가 낳아서 길러주는 것.- [註 1091]
적전(籍田) : 권농(勸農)의 뜻으로, 임금이 친히 경작(耕作)하는 토지.- [註 1092]
석전제(釋奠祭) :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에게 지내는 나라의 제사. 매년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함.- [註 1093]
사례(射禮) : 궁술(弓術)의 예식. 즉 활을 쏠 적에 행하는 의식.- [註 1094]
‘내가 날로 나아가거든 너는 달로 나아가라[我日斯邁 而月斯征] : 《시경(詩經)》 소아(小雅)편 소완(小宛)장.- [註 1095]
이제(二帝) : 요(堯) 순(舜)임금.- [註 1096]
삼왕(三王) : 하(夏)의 우왕(禹王), 은(殷)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이르는 말. 문왕과 무왕은 부자(父子)이므로 하나로 침.- [註 1097]
방책(方策) : 서책(書冊). 방(方)은 목판(木版)이고, 책(策)은 간책(簡策)인데, 옛날에 종이가 없을 때에 목판이나 간책에 모든 것을 기록하였으므로 서책의 대명사로 쓰임.- [註 1098]
《주역(周易)》 : 가인괘(家人卦).- [註 1099]
《예기(禮記)》 : 단궁(檀弓) 상편.- [註 1100]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1101]
침윤 부수(浸潤膚受) : 《논어(論語)》의 안연(顔淵)편에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己矣"에서 나온 말로서, 물이 스며들 듯이 보이지 않게 남을 은근히 비방하는 참소(讃訴)를 말함.- [註 1102]
《서경(書經)》 : 주서(周書)편 태서(泰誓) 하장.- [註 1103]
좌도(左道) : 옳지 못한 도.- [註 1104]
환원(還願) : 신(神)에게 기원하는 것.- [註 1105]
《주역(周易)》 : 천택리(天澤履).- [註 1106]
《시경(詩經)》 : 대아(大雅)편 한록(旱鹿)장.- [註 1107]
《서경(書經)》 : 상서(商書) 열명(說命)하.- [註 1108]
도인(導引) : 대기(大氣)를 마셔서 체내(體內)로 끌어 들이는 양생법(養生法).- [註 1109]
추원(追遠) : 죽은 먼 조상을 추모 숭배하는 것.- [註 1110]
곡례(曲禮) : 《예기(禮記)》의 편명.- [註 1111]
우순(虞舜) : 순(舜)임금.- [註 1112]
성수청(星宿廳) : 궁중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도교(道敎)에서 나온 것임. 성신청(星辰廳).- [註 1113]
대무(對舞) : 서로 마주보고 춤추는 것.- [註 1114]
갈고(羯鼓) : 북의 일종.- [註 1115]
완구(宛丘) : 《시경(詩經)》의 진풍(陳風)의 편명. 유공(幽公)의 황음(荒淫)하고 방탕한 것을 풍자한 것.- [註 1116]
《맹자(孟子)》 : 이루장(離婁章).- [註 1117]
헌면(軒冕) : 관직이 있는 사람이 타는 수레와 쓰는 관(冠).- [註 1118]
호복(胡服) : 몽고인의 옷을 말함.- [註 1119]
유가(遊街) :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풍악을 잡히고 거리를 돌면서 좌주(座主)·선진자(先進者)·친척들을 찾아보던 일. 대개 방방(放榜) 뒤 사흘에 걸쳐 행하였음.- [註 1120]
전조(前朝) : 고려 왕조.- [註 1121]
여복(輿服) : 수레와 복식.- [註 1122]
부서 기회(簿書期會) : 일년의 회계를 장부에 기록하여 기일 안에 조정에 보고하는 일.- [註 1123]
臣聞天尊地卑, 禮制立矣, 類聚群分, 禮制行矣。 故其節文雖散在事物, 而其運用則實管於人, 人生爲萬物之秀, 位乎天地之間, 觀會通以行其典禮者也。 聖人體此, 制爲冠婚喪祭, 以行乎君臣父子長幼夫婦之際, 使人知有以自別也。 其修己成物齊家治國, 何莫非禮之用也? 仲尼曰: "爲國以禮。" 夫禮旣亡, 則國安得獨存哉? 然禮之本無有不正, 而其用則有邪有正, 故冠之本在於責成人之道, 而其末流則孩提(突)〔冠〕 弁, 昏之本在於重生民之源, 而其末流則富貴是慕, 祭之本在於報生養之恩, 而其(本)〔末〕 流則僭亂謟瀆, 以至乎處身接物喪葬軍賓, 莫不皆然, 此豈禮之過也? 爲禮者之過也。 恭惟我殿下留神道學, 游心太古, 躬耕籍田, 以備祭禮, 親行釋奠, 以講射禮, 其所以欲從先進, 挽回末流, 蓋可知矣。 嗚呼! 在殿下有日躋之聖而不安於小成, 在左右, 雖十年之變, 猶夫其人也, 故好善者殿下, 而沮之者左右也, 其所謂 ‘我日斯邁, 而月斯征’ 果安在哉? 此臣之所以寒心而不忍恝然者。 苟或徒知泥古而不通時變, 則固膠柱皷瑟, 未足以論治道。 若以東方之民爲有異於諸夏, 先王之法不可復於今日, 趣便目前, 不務高遠, 則是乃姑息之計, 何足以救當時之弊, 爲久安之策? 伏願殿下尙其立志, 愼其所道, 以二帝之德爲可必及, 以三王之法爲可必行, 不拘滯於近規, 不好尙於小技。 聞義則勿曰艱大, 見善則若決江河, 求賢納諫惟恐其不能, 接下視朝惟恐其不勤, 存存乎燕閒, 穆穆乎威儀, 勿遷惑於衆口, 其明其斷, 勿輕忽於賤官, 其難其愼。 善可賞矣, 而猶審其或僭, 惡可罰矣, 而猶審其或濫。 罔以邇言爲易, 必好察焉, 罔以小過爲無傷, 必不貸焉。 興邦喪邦布在方策, 嘉謀嘉猷臣何更贅? 惟條列四事, 以獻如左。 臣按《易》曰: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男女, 正天地之大義也。 《禮》曰: "晝居於內, 問其疾可也; 夜居於外, 弔之可也。’ 故君子不夜宿於外, 不晝居於內。 程頤曰: "人主一日之中, 接賢士大夫之時多, 親寺人宮女之時少, 則自然氣質變化, 德器成就。" 昔者, 先王每日昧爽坐朝聽政, 退適小寢從事焉, 未嘗深居宮中, 所以正位乎外以專業也。 夫位正則志定, 志定則心靜, 心靜則業專。 故窮理於斯, 養性於斯, 將無往而不通, 思政於斯, 接人於斯, 將無處而不當。 非辟無自入焉, 欺罔無自生焉, 君臣之道交孚, 上下之情不蔽, 忠邪可變, 啓沃可進。 故人主之聰明由是而日開, 道德由是而日盛, 至於人情物態稼穡艱難, 無不周知。 此三代帝王所以資稟明高, 聖敬日躋, 超越千古, 不可幾及者也。 後世人主則不然, 深居宮中, 所常與處者, 無非宦官宮妾之徒, 所常見聞者, 無非謔浪鄙卑之事。 其有宦寺之儇利辨給善承迎旨意者, 傳命則無違誤, 使令則有稱愜, 甘言卑辭之謁, 浸潤膚受之愬, 乘便陰中若出無心, 而人主醺心蕩意, 不自知其陷於術中也。 至於視朝, 則群臣虛拜而退, 雖經幄之臣, 亦儼然列侍, 及讀遍數行則退, 或有進言者, 亦正色奏訖而退, 君臣情意邈不相接。 如此而責薰陶保養之功, 不亦難哉? 故外庭得失民間利病, 無得而聞知, 以致邪正雜進, 臧否顚倒, 無形之禍, 不測之亂, 已萌於肘腋矣, 此乃古今之通患也。 臣未知殿下於常參經筵之餘, 所常燕居, 有正殿乎? 若無則便令構小寢於宣政殿後大內之外, 連營二室, 一則爲溫, 一則爲涼, 以便冬夏。 而選寫古今銘戒疏章可爲矜式者, 揭諸左右, 設之屛幛, 經史書籍亦排積左右, 每聽政之暇, 常燕處於此, 必斂襟危坐, 或時習或思政, 往往引見經筵官及群臣之可爲師友者一二, 溫顔優禮, 從容宴語, 其有受命辭行者, 自外來朝者, 無論官品高下, 皆賜接見, 至於事無大小, 皆令承旨親啓。 如此而身不誠、業不廣、聰明不達、忠邪不辨者, 未之有也, 臣不勝至願。 臣按《書》曰: "天有顯道, 厥類惟彰。" 又曰: "作善者, 降之百祥, 作不善, 降之百殃" 凡人之禍福, 皆其自取, 未有不爲善而以謟禱得福者未有, 不爲惡而以守正得禍者。 而況君王之生, 實受天命, 爲神人之主, 苟能節嗜欲, 適起居, 修德行政, 康濟兆民, 則災害之去, 何勞於禳, 壽福之來, 何待於禱? 仲尼曰: "大德必得其壽。" 召公曰: "王其德之, 用祈天永命。" 此必然之理, 不可誣也。 如其反是, 則獲罪於天, 人怨神怒, 雖日費千金, 供享神姦, 適足以速禍, 竟何益之有哉? 故我太宗恭定大王嘗命罷祝壽齋曰: "脩短有數, 何用祈禱?" 又覽祈禱祝文, 謂左右曰: "自今毋爲寡躬祈福。" 又謂承政院曰: "自古水旱之災, 皆人君否德所召, 今聚僧巫禱雨, 無乃有愧乎? 予以謂罷禱事, 修人事可也。 予粗讀聖經, 知僧巫誕妄, 今反憑左道以希天澤可乎?" 又曰: "人君旣不能側身修德, 以致天災地怪, 便設神禳非也。 人事正於下, 則天氣順於上, 人事不順, 而欲求天氣之順, 安有是理?’, 世宗莊憲大王嘗曰: "當予生日, 宗戚勳舊, 設齋祈算, 於禮未可, 其除之。" 又曰: "佛氏之道, 無益於禍福。
予若崇信, 當母后賓天之日哀慕之時, 豈不大設佛事以修冥福乎?" 又罷年終還願, 謂卞季良曰: "年終還願, 邀福之事, 崇佛之端, 凡干佛事, 罷之幾盡。 雖有獲福之理, 猶爲鄙陋, 況斷無是理乎?" 此皆載在史籍, 歷歷可考, 臣敢誣哉? 以是觀之, 太宗、世宗所以貽訓後嗣者, 豈不洋洋明著乎? 又況壽者定於有生之初, 又非釋迦所能損延。 佛者本西域詭誕之術, 固非朝廷所當崇奉者也。 其是非得失, 俱在方策, 固殿下所嘗洞覽者也, 臣敢誣哉? 今也勳戚之臣相率而供祝, 以祈聖壽, 例以爲常, 臣竊以爲不可。 若資佛之力, 得延聖壽一日一刻, 則於臣子之情, 雖人百其身可也。 屈指古今, 無一可驗, 豈理也哉? 稍有識者, 必愧赧憤冤, 以爲佛何足爲壽福哉? 顧生斯世, 不可不從衆耳。 此心知其妄誕, 而姑爲是阿媚, 豈事君以誠之道哉? 若愚迷細民, 則必以爲: "宗宰(記)〔紀〕 法之守, 猶屈膝事佛, 君王紀法之宗, 猶賴佛延年, 而況於我哉?" 其觀瞻信惑, 必爲滋甚。 爲農商者, 惰其所業而祈富於佛, 爲寇盜者, 任其所恣而祈免於佛, 爲善者, 不修彝倫而修佛敎, 爲惡者, 不畏國刑而畏佛戒, 欲貴者, 祈其貴, 欲壽者, 祈其壽, 轉相倣效, 猶恐或後, 則國君威福之權, 悉移於土木之塑矣, 幾何其不胥爲夷也? 其源實由祝壽齋啓之也。 此臣之所以不忍默默者。 《易》曰: "視履考祥。" 《詩》曰: "求福不回。" 《書》曰: "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 伏願殿下遠稽先聖賢之格言, 近體我祖宗之成憲, 毋悅於阿辭, 毋惑於侫說, 凡干禳禱, 一切禁斷, 以示正典。 臣前於朝啓, 略將此意上瀆天聰, 時有在座者曰: "此臣子爲上之事, 其情切迫, 孰敢爲議?" 且《詩》曰: "萬壽無疆", 凡爲上之事, 雖過擧何妨? 臣愚以爲此非大人君子以道事君者之言也。 孟子曰: "有事君人者, 事是君則爲容悅" 者, 謂此也。 謂稱 ‘萬壽無疆’ 者, 乃於燕享祝君之詞, 爲臣子者, 於君父欲其安享壽福, 乃人人之常情也, 天下安有不如是者? 然以情之所發不能自已者, 尙且稱之有節, 頌之有禮, 不敢妄動也。 又安可不顧禮義, 靡然謟禱於佛像哉? 其不相爲倫也萬萬矣, 而乃藉之以爲證, 此政任芝、藥松引經之遺法也。 若疾病行禱, 乃臣子憫切之際, 猶不敢犯禮。 一則曰五祀, 一則上下神祗, 古來禮文載在方策者如此, 其供佛祝壽, 出何典故, 臣誠愚昧, 未知所據。 然傳曰: "明於天地之性者, 不可惑以神怪, 明於萬物之情者, 不可罔以非類", 則其爲罔, 蓋亦不難察。 惟聖明之留意焉, 則國家幸甚。 臣聞先王之制禮也, 自天子以至於庶人, 報本追遠, 皆有常典, 牲器時日, 皆有常度。 幽明一理, 通徹無間, 苟禮之所不載, 卽神之所不享。 仲尼曰: "祭之以禮。" 《曲禮》曰: "非其鬼而祭之, 名曰淫祀, 淫祀無福", 此乃必然之理, 不可得而易也。 其或怳惚之間如有影響, 乃是心無所主, 妄有憂疑, 遂爲巫祝妖人乘間投隙, 以逞其奸欺誑惑之術旣行, 則其爲禍, 又將無所不至矣。 古今以此坐致亂亡者, 何可勝數? 姑以其太甚者言之, 昔三苗氏亂德, 民神雜揉, 家爲巫史, 相與祭非其鬼, 天地山川實爲神姦。 於是虞舜乃命重黎修明祀典, 使尊卑上下各有分限, 絶天地之通, 嚴幽明之分, 然後焄蒿妖誕之說擧皆屛息。 吾東方在高麗之季, 其瀆亂鬼神亦如三苗之世。 有若圓壇之祀天諸山之祈恩, 尤其可傷者。 及我太宗大王卽政之初, 首革圓壇, 罷祈恩, 禁淫祀, 然後先王之禮復明於世。 今我殿下亦知是弊, 已令法司悉刷巫覡, 驅諸城外, 分屬東西活〔人〕 院, 使士庶之家毋得行淫祀, 違者科罪。 然法之不行, 自上犯之, 星宿廳之作, 恐反於前日之所令。 曩者殿下下敎臣曰: "此非予所爲", 臣非不知非殿下之意, 然爲一國之主, 常任一國之責, 孰謂令出宮闈而非殿下所爲乎? 臣恐千載之下, 必有議之者。 願殿下體《蠱》之九二, 惟以至誠感之, 庶不至乎矯佛傷恩而內治自嚴矣。 非徒此也, 至於松岳山祈恩, 則號國巫者, 率內女、內宦、工人四五、歌者五六, 各騎郵馬, 喧鬧道路, 入據開城公館, 歌舞宴樂, 留連數旬, 弊不勝言。 留守二品宰相也, 而國巫女必與對舞, 例爲常事曰: "爲上之事, 不得不爾。" 嗚呼! 習俗之弊, 乃至於此, 可謂寒心。 且如京外人民於木覔、松岳、紺岳、錦城山之屬, 或稱祈恩或稱願狀, 春秋則盛供享, 張女樂羯鼓之聲相屬於路, 至有士族婦女親自行之。 其婆娑遊戲, 有甚《宛丘》之俗, 非徒有累於風, 他大是僭禮。 仲尼曰: "上有好者, 下必有甚焉", 此之謂也。 《禮》曰: "供給鬼神, 非禮不莊, 敎訓正俗, 非禮不成。" 孟子曰: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伏願殿下遠稽古制, 近遵成憲, 凡干淫祀, 一切禁斷, 則幽明嚴而上下之禮正矣。
臣聞古者聖人制爲冠服各有所稱, 使爵者爲命服軒冕, 喪者爲齊斬衰絰, 儒者爲緇冠深衣, 皆所以齊內外而明威儀, 使人知有以自別於禽獸也。 我東國自高麗以上, 上自公卿下至儒生, 冠服皆不典, 或僭或妖, 莫之有定。 及辛禑十三年, 儒臣鄭夢周之輩始建議革胡服, 有官職者皆着紗帽, 成均生員及京外學生, 皆着平頂頭巾。 及至我太宗朝, 儒生冠服, 依朝廷國子監生例, 然後千古弊俗一大變也。 夫儒生, 禮所生也, 儒而無禮, 禮何得行? 故正衣冠尊瞻視學古文論是非, 常自激昻, 以尙其志。 若爲君師者, 不於此時扣之以大道, 羈之以法服, 以成就其崛强超脫之資, 及至筮仕, 私意生於內, 俗慣鑠於外, 滔滔與世浮沈, 然後雖聖人與居, 不能化而入也。 且如狂誕粗暴之徒儒名蹠行者, 每出行街市常服此法服, 則雖欲肆其狂暴, 必返觀而內愧外怯, 不敢果也, 其所益豈淺淺哉? 今聞有復於殿下者曰: "請令儒者於街路着頭巾加靑衿以行", 殿下初旣許之, 俄而更令曰: "加靑衿而已", 不許頭巾, 其所以取於靑衿而不取於頭巾者, 獨何歟? 然則身可爲儒, 而頭不爲儒歟? 此必非殿下之本意也, 而在左右誤殿下者, 必曰: "不可駭衆 而止之" 也。 今之儒生只於學堂館中常着頭巾者何歟? 及監試入格者放榜時亦皆着之以遊街, 閭閻庶民習見已久矣。 雖窮村愚婦, 亦皆知其爲儒冠也。 然則衆人所駭, 何獨不在於彼而在於此也? 左右所沮, 何獨不在於彼而猶在於此也? 此臣所未解者一也。 前朝以上千百年久習, 及至我朝一擧頓變, 以從華制, 迄于今賴之。 凡禮樂文物輿服之制郁郁可觀者, 何莫非祖宗强斷之力也? 若曰: "爲政不問其事之是非邪正輕重損益, 皆當沿舊, 不可有變", 則其先王此擧, 果皆驚世駭俗而不可法歟? 若然則先王必曰: "革命未久, 民情未定, 東夷習俗不可卒變 以駭衆也。" 聖子神孫亦皆曰: "祖宗大聖未遑易俗, 我不賢於祖宗, 而敢爲之哉?" 後來繼今者又所云若是, 以至窮天地之終, 又所云若是, 則竟何能有變哉? 然則在朝臣僚皆當毁帽被髮遍爲胡服, 然後有合於前朝之舊俗而不駭衆歟? 臣所未解者二也。 自古人主不知義理, 妄自紛更, 以致亂亡者多矣。 故人臣當其時, 不敢斥曰: "妄自紛更", 必托曰: "先王之法不可有變, 而爲政之要不可駭俗。" 若聖明之主居得致之位, 操可致之勢, 固當不拘古與今舊與新, 惟視其義之所在, 損之益之, 與時宜之。 此仲尼所謂 ‘君子之於天下, 無適也無莫也, 義之與比。’ 《易》序所謂 ‘隨時變易, 以從道也。’ 臣未知左右以殿下爲何如主, 而敢出此言以沮之也若以殿下爲不世出之主, 則當道之以堯、舜三王之道, 爲東方萬世無疆之休可也, 而乃所云猶若, 玆臣未解三也。 若如左右所云, 則君臣上下所監一部《經國大典》, 猶已多矣, 何用博觀經史, 以窮事物之理乎? 簿書期會所任, 數三胥吏足以當之, 又安用旁求俊彦, 以致經濟之才乎? 臣所未解者四也。 今臣非姑爲沽直也。 大抵爲治之道, 莫大於文敎, 敎人之方, 莫大於禮儀, 未有衣冠不正, 而能正心者也。 是於爲國大體, 有所不可, 敢歷敷所蘊, 不避所諱。 《書》曰: "君罔以辯言亂舊政, 臣罔寵利居成功, 邦其永孚于休。" 伏願殿下察之。 傳曰: "親戚補察", 〔以〕 臣不侫以宗屬之末, 叨蒙生成之恩, 雖欲效其區區, 豈能有補於萬一? 然愛國尊主, 出於犬馬之誠, 每有可言, 懇懇乎不知所裁。 此在朝臣僚所譏笑侮毁, 以臣爲狂爲僭者。 然異姓之親, 三諫而不合, 則固當納履而去矣, 若臣則義同休戚, 固無可去之理。 以是所進者雖至四至五, 未一蒙允, 而尙未止, 伏望殿下恕臣狂僭, 憐臣悃愊, 幸垂察焉。 傳曰: "齊 桓公之郭問父老曰: ‘郭何故亡?’ 曰: ‘以其善善而惡惡。’ 公曰: ‘若子之言, 乃賢君也, 何至於亡?’ 父老曰: ‘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所以亡也。’" 後之論者曰: "未之或知者, 猶有所覬也, 夫旣知之矣, 不能行其所知, 君子所以高擧遠引, 小人所以肆行而無忌憚也。" 復之初九曰: "不遠復, 無祗悔, 元吉。" 惟聖明之留意焉, 則國家幸甚。
書入, 傳于承政院曰: "疏中有別構一殿, 以迎士大夫之語。 予日三經筵, 夜御便殿以接士大夫, 何必更作別殿? 且祝壽齋ㆍ星辰廳, 祖宗行之已久, 不可卒革。 雖非此事, 予之改舊章多矣, 深源無乃欲釣名而有是言乎? 予甚非之, 於卿等意以爲何如?" 申浚、朴叔蓁、孫比長對曰: "前日朝啓, 深源啓此事, 其言雖非適用, 敢言不已, 誠爲美矣。 若其言之是非, 惟上取舍。" 比長又曰: "大抵邪正不兩。 異端之非, 臣爲大〔司〕 諫時亦嘗論之。 深源此言, 無所不可。" 俄而命召深源, 傳曰: "卿曾於朝啓陳之, 今又言之, 予甚嘉之。 然宣政殿後旣無構殿之所, 且日御經筵, 下之情亦不可謂不達。 祝壽齋, 下自爲上也, 非予命之, 況祖宗以來行之已久乎? 如此事, 後勿復言。" 仍賜豹皮一張。
- 【태백산사고본】 13책 8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30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구휼(救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의생활-관복(官服) / 의생활-상복(常服) / 풍속-예속(禮俗) / 풍속-풍속(風俗) / 농업-권농(勸農)
- [註 1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