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이승소·성담년·한명회 등과 시장 짓는 것에 대해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정언(正言)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무릇 시장(詩章)을 짓는 것이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짓자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나,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덕행(德行)은 근본이고 문예는 끝이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지어 월산 대군(月山大君)에게 주시고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지어 한명회(韓明澮)에게 주시었는데, 모두 판자(板子)에 새기어 달았습니다. 풍월정은 사람이 보기 어려운 곳이므로 오히려 괜찮겠으나, 압구정은 한강(漢江) 곁에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만일 중국 사신이 와서 한강에 놀다가 우연히 이 정자에 올라 어제시(御製詩)를 본다면 반드시 전하께서 뭇 신하와 함께 창화(唱和)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또 풍속이 숭상하는 것은 임금으로 말미암으므로, 여러 아랫사람들이 만일 주상께서 사장(詞章)을 좋아하시는 것을 알면 성현의 글은 강하지 않고 장차 오로지 시장을 일삼을 것이니,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용이하게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문종(文宗)께서 글씨를 잘 쓰셨으나 필적이 민간에 있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글자만 보면 남금(南金)921) 같이 보화로 여깁니다. 전하께서 지난번에 등왕각서(滕王閣序)922) 를 써서 한명회(韓明澮)에게 주시었는데, 한명회가 곧 판자에 새겼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찍어 내어 병풍을 만들었으니,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군(大君)과 정승(政丞)이 나에게 시를 짓기를 청하기에 나도 또한 뜻을 말하였을 뿐이고, 고려(高麗) 현종(顯宗)이 문사(文詞) 짓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뭇 신하와 함께 창화(唱和)하는 유는 아니다. 정승(政丞)이 또 한 병풍으로 내 글씨를 청하였는데, 판자에 새긴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아름다운 것을 자랑하고자 하여 한 것이랴?"
하매, 동지사(同知事) 이승소(李承召)가 말하기를,
"이 말을 신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창화하는 것이 원래 부덕(不德)한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한결같이 엄하기만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왕이 연향(燕享)의 예(禮)를 제정하여 위아래의 정을 통하였으니, 녹명(鹿鳴)923) 등의 시(詩)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당(唐) 우(虞) 때에도 갱재(賡載)924) 의 노래가 있어, 도유 우불(都兪吁咈)925) 의 풍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대국을 섬기는 나라이니, 문장(文章)이 아니면 그 정을 통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생원(生員)만을 설치하였더니 모두가 썩은 선비였기 때문에, 또한 진사(進士)를 설치하였는데, 사장(詞章)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비백서(飛白書)926) 를 썼는데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취하였으니,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것이 또한 성덕(聖德)에 누(累)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검토관(檢討官) 성담년(成聃年)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아랫사람이 숭상하는 것은 반드시 인주에서 근본한다는 것을 말하여 풍운 월로(風雲月露)927) 의 습관이 생길까 염려하는 것은 옳으나, 임금이 사장(詞章)을 짓기를 좋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고, 시강관(侍講官) 최숙정(崔淑精)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우리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신이 올 때에 시부(詩賦)로 서로 창화하여 그 정을 통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장(詩章)이 아니면 비록 예의가 있더라도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문사(文詞)는 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당(唐) 우(虞) 때에도 갱재(賡載)의 노래가 있었으니, 지금 주상께서 시를 지어 뭇 신하와 창화하는 것이 무엇이 의리에 해롭겠습니까?"
하고, 권경우(權景祐)는 말하기를,
"갱재의 노래는 모두 자연스럽게 발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 말이 옳다. 한갓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고, 한명회에게 현판(懸板)을 철거하고 또 등왕각서를 도로 들이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8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11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註 921]남금(南金) : 중국의 남부 형주(荊州)·양주(楊州) 등지에서 산출되는 황금(黃金).
- [註 922]
등왕각서(滕王閣序) :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남창부(南昌府) 신건현(新建縣)에 있는 누각(樓閣).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아들 등왕(滕王) 원영(元嬰)이 세웠는데, 당대(唐代)의 문장가 왕발(王勃)이 서문을 지었음.- [註 923]
녹명(鹿鳴) : 《시경(詩經)》 소아(小雅) 가운데의 일편(一篇).- [註 924]
갱재(賡載)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시를 지음.- [註 925]
도유 우불(都兪吁咈) : 도유(都兪)는 찬성, 우불(吁咈)은 반대의 뜻. 요(堯)임금이 군신(群臣)과 정사를 의논할 때에 쓰인 말, 즉 군신간의 토론·심의의 뜻임.- [註 926]
비백서(飛白書) : 팔서체(八書體)의 하나.- [註 927]
풍운 월로(風雲月露) : 세도 인심(世道人心)에 조금도 유익하지 않은 화조 월석(花朝月夕)만을 읊은, 부화(浮華)한 시문(詩文).○壬辰/御經筵。 講訖, 正言權景祐啓曰: "上聖學高明, 凡爲詩章, 皆出於天性, 非所作爲。 然先儒曰: ‘德行本也, 文藝末也。’ 向者上製《風月亭詩》, 以賜月山大君, 製《狎鷗亭詩》, 以賜韓明澮, 皆刻板懸之。 風月亭, 人難得見, 猶之可也, 至於押鷗亭, 在漢江頭, 臣意以謂若詔使來遊漢江, 偶登斯亭見御製詩, 則必謂殿下與群臣唱和矣。 且俗尙由於人主, 群下若知上好詞章, 則不講聖賢之書, 將專事詩章矣, 人主所好, 不可容易示人也。 我文宗善書, 然筆迹罕在民間, 故人見其一字如寶南金。 殿下曩者御書《滕王閣序》賜明澮, 明澮卽爲刊板, 人爭印出, 以爲屛風, 臣以爲不可。" 上曰: "大君、政丞請予製詩, 予亦言志耳, 非若(高襄)〔高麗〕 顯宗好爲文詞, 日與群臣唱和之類也。 政丞又以一屛風請予書, 其刊板非予所知也。 予豈欲誇美而爲之乎?" 同知事李承召曰: "此言臣以爲過矣。 唱和固非不德。 人君不可一於嚴, 故先王制爲燕享之禮, 以通上下之情, 如《鹿鳴》等詩是也。 唐、虞之時亦有《賡載》之歌, 而有都兪吁咈之風。 我國事大之國, 非文章無以達其情。 昔者只設生員, 類皆腐儒, 故亦設進士, 以詞章之不可廢也。 唐 太宗書飛白, 群臣爭取之, 好書亦無累於聖德矣。" 檢(封)〔討〕 官成聃年啓曰: "臺諫言: ‘下之所尙, 必本於人主, 而恐有風雲月露之習’ 可也; 言: ‘人主不可好爲詞章’ 則非也。" 侍講官崔淑精曰: "中國以我爲禮義之邦者, 無他使臣之來, 以詩賦相唱和以通其情故也。 若非詩章, 雖有禮義, 將何以哉? 由是言之, 文詞不可廢也。" 領事韓明澮曰: "唐、虞之時, 亦有《賡載》之歌, 今上製詩以與群臣唱和, 亦何害於義哉?" 景祐曰: "《賡載》之歌, 皆自然而發, 豈如此乎?" 上曰: "爾言是也。 徒爲取笑而已, 予甚愧之。" 命韓明澮撤去懸板, 又還入《滕王閣序》。
- 【태백산사고본】 13책 8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11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註 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