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부원군 김수온이 사직의 전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이 전(箋)을 올려 걸해(乞骸)872) 하기를,
"신이 지난 2월 초2일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사면하기를 청하였는데, 본직을 면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곧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으로 고치시었으니, 전도(顚倒)하고 감열(感咽)하는 것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신이 70세가 되려면 다섯 달이 부족한데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우니, 쇠하고 늙은 것을 짐작하여 보면, 새벽이나 저녁에 길이 성대(聖代)를 하직할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자(上慈)는 사직을 허락하소서. 엎드려 생각건대, 마땅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래 숭추(崇樞)를 더럽힐까 두렵고, 명령이 하늘에서 내리니 훈부(勳府)에 총탁(寵擢)하는 것을 놀래었습니다. 은혜가 소망 밖에 나왔으니, 감격이 부끄러움과 아우릅니다. 폐간(肺肝)을 피력하고자 하여 공경히 문자(文字)에 의지합니다. 생각건대, 신은 단약 평범하고 냉한(冷寒)하며 매우 외롭고 방종하여, 지혜는 몸을 윤택하게 할 수 없으며 재주는 세상에 적합한 것이 없습니다. 생계를 꾀함에 의식(衣食)이 궁하여 항상 고달프게 아침에는 나물, 저녁에는 소금을 먹었으며, 학술은 황(黃)·노(老)873) 가 섞이었으니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지고 묵적(墨翟)874) 의 행실을 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유유(悠悠)한 포위(布韋)의 항오요 우우(踽踽)한 광간(狂簡)875) 의 무리였습니다. 스스로 용렬한 무리에 치수하니 누가 호걸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인의(仁義)요, 업으로 하는 것은 시서(詩書)였습니다. 해가 다 가도록 장구(章句)만을 연찬(硏鑽)하니 반딧불 창에 눈 탑이요,876) 항상 성현의 교훈에 눈을 두니 형(衡)에 의지하고 옛것을 참고하였습니다. 부끄럽게도 도(道)를 꾀하고 가난한 것은 꾀하지 않으니, 끝내는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종(世宗)이 건어(乾御)하신 때를 당하여 신유년877) 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였습니다. 어찌 초모(草茅)의 이름이 갑자기 면류(冕旒)의 들으심에 통달한 것을 기약하였겠습니까? 홀연히 황문(黃門)878) 에서 좌액(佐掖)에 내린 전지를 받으니 백유(白儒)로서 사서(史書)를 집현전(集賢殿)에서 추역(抽繹)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4년을 지나서 드디어 7품에 승진하였습니다. 병인년879) 여름에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상사를 당하였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대군(大君)으로서 빈전(殯殿)을 모시었습니다. 위로는 부왕(父王)의 슬픔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모후(母后)의 명복을 비셨습니다. 불법(佛法)의 번선(飜宣)에 의하여 여러 인연의 특수한 것을 삼았습니다. 석씨(釋氏)의 보(譜)를 간정(刊定)하였고 금륜왕(金輪王)880) 의 계(係)를 추원(追源)하였습니다. 겁초(劫初)에서 시작하여 대승(大乘)의 전한 것을 고루 상고하였고, 한대(韓代)에 서역에서 온 패엽(貝葉)881) 의 경문을 처음 번역하였습니다. 편마(編摩)한 것은 겨우 20권을 만들었는데 탐토(探討)한 것은 거의 천함(千函)을 두루하였습니다. 비록 신의 천박(淺薄)한 자질로도 그 일의 시종을 맡았습니다. 그때에 세종(世宗)께서 미령하시어 밖에 나와 계시었습니다. 진양군(晉陽君) 저사(邸舍)의 막(幕)을 택한 것은 반드시 위장(圍仗)에 가까운 집이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금을 상확(商確)하는 것은 신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시고 경적(經籍)을 토론하는 것도 반드시 신이라야 얘기하였습니다. 낮은 창문에 띠를 이은 집 두어 칸에 아침 저녁 연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거적자리에서 종(奴)과 주인[郞]이 함께 거처하였으니, 존비와 예절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탑(榻)을 가로 놓고 함께 의논하고, 밤에는 재(齋)에 거처하여 홀로 잤습니다. 기울어진 베개에 꿈을 파하지 않아서 뒹굴뒹굴 잠꼬대를 하며 깨지 않았는데, 문을 밀치고 곧 들어와서 옷을 흔들면 급히 놀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침처(寢處)하는 것은 안팎에 숨김이 없으니, 정의가 얕고 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책은 비록 하료(下僚)로 칭하지마는, 의(義)는 실로 집우(執友)와 같았습니다. 즉위(卽位)하심에 미쳐서도 오히려 내 스승이라고 말씀하시고, 중시(重試)의 과장(科場)을 열게 되어서는 부장원(副壯元)으로 뽑으셨습니다. 양부(兩府)의 숭질(崇秩)에 승진함에 미쳐서 또 삼자(三字)의 청함(淸銜)을 띠었습니다. 곧 금중(禁中)에 사진(仕進)을 명하시고 청사를 어측(御側)에 가깝게 열었습니다. 치란(治亂)·득실(得失)의 자취에 청문(淸問)을 내리시고 공자(孔子)·석가(釋迦)의 같고 다른 근원에 주자(疇咨)를 넓히시었습니다. 혹은 경서를 잡고 강론하여 저녁에 이르고 혹은 앞자리에서 홀로 대하여 밤중에 이르렀습니다. 논사(論思)하고 헌납(獻納)하는 것은 비록 법종(法從)882) ·문학(文學)의 반(班)은 아니나, 권주(眷注)하고, 인연(仁憐)하시는 것은 실로 종친(宗親)·훈구(勳舊)의 열(列)을 넘었습니다. 후한 은혜가 깊고 넓었으니 천주(天廚)의 어선(御膳)의 팔진미(八珍味)요, 발을 붙인 것이 맑고 높았으니 금마(金馬)883) ·옥당(玉堂) 두 곳이었습니다. 헌(軒)에 임하여 책문(策問)을 발하고 선비를 시험하여 재주를 뽑음에 이르러서는 진신(縉紳)이 붓을 물고 장상(將相)이 재주를 겨루니, 대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미 뽑은 것을 또 뽑고자 하는 것입니다. 송나라가 성하던 때에 있어서는 오육(吳育)·소자첨(蘇子瞻)을 득인(得人)하였다 하였는데, 전조(前朝)에 전하는 것은 겨우 조간(趙簡)·조광한(曹光漢)의 고사(故事)가 있었습니다. 정히 백년에 거행하지 못한 드문 법인데 만인이 얻고자 하는 아름다운 이름이었습니다. 신이 어찌하여 한가지 기예가 능한 것으로 문득 양방(兩榜)의 첫째를 차지하였습니까? 천안(天顔)에 기쁜 빛을 보이시고 절대(絶代)의 기재(奇才)라고 말씀하시고, 홍려(鴻臚)가 이름을 부르니 외과(巍科)의 갑제(甲第)임을 공손하게 들었습니다. 늙은이·어린이는 도로에 모여서 보고 친한 벗들은 문려(門閭)에 와서 치하하였습니다. 어찌 대단치 않은 몸이 전에 없던 은총을 입을 것을 기약하였겠습니까? 갑자기 높은 자급(資級)에 승진하여 허리에 문서(文犀)의 빛을 띠며 비반(匪頒)884) 을 겸하고 문에는 구마(廐馬)의 좋은 것이 날뛰었습니다. 신의 집이 가난하여 삼관(三館)885) 에 하례할 수 없다 하여 잔치에 드는 물건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명하셨습니다. 반배(盤排)는 사옹(司饔)과 예빈(禮賓)에서 준비하고, 술은 내섬(內贍)과 사온(司醞)으로 채웠습니다. 의정(議政) 네댓 사람은 엄명을 받아서 자리를 주장하고, 부원군(府院君) 두세 사람은 선온(宣醞)을 가져와 좌중에 권하였습니다. 또 명하여 자리에 나아가서 서대(犀帶)·금낭(錦囊)·기라 의복(綺羅衣服)·화(靴)·모(帽)의 종류 40여 건과 안구마(鞍具馬) 1필과 쌀 10석을 주시었으니, 국가에서 과거를 베푼 이래로 선비가 과거에 오른 영광과 상사(賞賜)가 많은 것이 신보다 더 한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신에게 대대로 없던 명예가 있어서, 사람이 능히 얻기 어려운 이름을 얻었겠습니까? 모두 말하기를 조우(遭遇)가 비상(非常)하여 그러므로 장탁(奬擢)의 과망(過望)을 가져왔다 합니다. 살과 뼈가 액(液)에 젖었으니 예택(睿澤)이 온 몸에 젖었고, 간책(簡策)에 자세히 썼으니 아름다운 칭찬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크게 밝으심이 두루 비치고, 지극한 어짐이 사(私)가 없으십니다. 겸용(兼容)의 도량이 넓으시니 천지가 부도(覆燾)하는 것 같고, 화육(化育)의 덕이 두터우시니 우로(雨露)가 생성(生成)하는 것 같습니다. 즉위하시던 처음에 첫머리로 당저(當宁)의 권총(眷寵)을 입었습니다. 좌리(佐理)의 공훈을 논하면, 세종(世宗)께서 복어(服御)하신 지 오래서부터 그 공을 책정하고, 대성(臺省)에 죄를 청하면 우리 세조(世祖)의 후대(厚待)가 융성함을 생각하여 그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영중추(領中樞)는 서반(西班)의 극품이요 부원군(府院君)은 늙은이를 우대하는 높은 봉작(封爵)입니다. 어찌 신의 몸이 감히 처할 것이겠습니까? 모두 성상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뜻하고 배부른 한 가족이 넉넉하게 해를 마칩니다. 비록 미분(糜粉)이 되더라도 상답(上答)할 길이 없으니, 눈물만 흘리어 한갓 하정(下情)을 감격시킬 뿐입니다. 신이 조종 이래 입은 덕택의 깊은 것을 두루 말하는 것은, 감히 전하께서 다시 특수하게 대우하는 것을 다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작은 그릇은 차기가 쉽고, 작은 분수는 넘치기가 쉽습니다. 마땅한 재주가 아니면서 신하가 은총을 입는 것은 천도(天道)는 겸손한 것을 좋아하니 어찌 복이 생기겠습니까? 나이 이미 칠순에 미쳤는데 나라에 일호의 도움이 없습니다. 어려서 배운 것은 문장(文章)인데 어찌 능히 말[馬]에 기대어 곧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본래 이치(吏治)에 익숙하지 못하니 또한 송사 듣는 것이 남과 같지 못합니다. 비유하건대, 여러 기러기가 모인다고 하여 강호(江湖)가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요, 쌍 오리가 난다고 하여 주저(洲渚)가 더 작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의 진퇴는 나라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의 자취는 비록 잠거(簪裾)886) 에 체류하여 있으나, 뜻은 실로 임학(林壑)에 얽혀 있습니다. 두어 간 집과 두어 줄기 대나무로 소쇄(蕭灑)하게 산수 가운데서 그윽한 집을 짓고, 한 바퀴의 달과 한떼의 바람으로 기쁘게 천지 사이에 벗을 삼으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상유(桑楡)887) 의 볕이 이미 늦어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천석(泉石)888) 의 맹세가 오래 식어진 것을 민망히 여기시어,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사직을 허락하여 주시면, 신이 감히 산의 높은 것 같고 바다의 깊은 것 같이 항상 성수(聖壽)의 만세를 빌어 길이 늙지 않는 봄을 기약하지 않겠으며,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어서 강구(康衢)에 격양(擊壤)하는 것을 본받아서 길이 무위(無爲)의 교화(敎化)를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신하가 사환(仕宦)하다가 노성(老成)하면 물러가 쉬며 바람을 읊고 달을 읊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경은 지금 물러가 쉴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8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9책 502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註 872]걸해(乞骸) : 늙은 재상이 벼슬을 내놓고 그만두기를 임금에게 청원함. 걸신(乞身)·걸해골(乞骸骨).
- [註 873]
황(黃)·노(老) :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道).- [註 874]
묵적(墨翟)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노(魯)나라 철학자. 겸애(兼愛)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제학파(諸學派)의 하나인 묵가(墨家)의 시조임.- [註 875]
광간(狂簡) : 뜻하는 바는 크나 행함이 없이 소홀하고 거칠음.- [註 876]
반딧불 창에 눈 탑이요, : 형창 설탑(螢窓雪榻)을 말하는데, 진(晉)나라 차윤(車胤)은 반딧불에 글을 읽고 손강(孫康)은 눈 빛에 글을 읽었다는 고사(故事)임. 즉 어렵게 면학하였다는 것임.- [註 877]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878]
황문(黃門) : 대궐문.- [註 879]
병인년 : 1446 세종 28년.- [註 880]
금륜왕(金輪王) :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왕(轉輪王)의 하나. 수미산(須彌山)의 사주(四州)를 통치한다는 제왕(帝王).- [註 881]
패엽(貝葉) : 인도의 다라수(多羅樹)의 잎. 그 위에 불경(佛經)을 베꼈으므로, 전(轉)하여 불가(佛家)의 경문(經文)을 말함.- [註 882]
법종(法從) : 임금을 호종함.- [註 883]
금마(金馬) : 한림원의 이칭.- [註 884]
비반(匪頒) : 군신에게 나누어줌.- [註 885]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의 세 기관을 말함. 문필(文筆)과 교육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음.- [註 886]
臣於去二月初二日請辭領中樞府事, 許免本職, 卽改永山府院君, 不勝顚倒感咽之至。 但今臣於七十未滿五朔, 而耳聾眼暗, 迹其衰邁, 曉夕長辭聖代, 伏望上慈賜骸骨。 伏以處非其地, 懼久玷於崇樞, 命降自天, 驚寵擢於勳府。 恩出望外, 感與愧幷。 欲歷肺肝, 祗憑文字。 竊念臣單平冷係, 奇苦孤縱, 智不足以潤身, 才無有於適世。 謀生則窘於衣食, 常苦朝韲夕鹽, 學術則雜於黃老, 未免儒名墨行。 悠悠布韋之伍, 踽踽(枉)〔狂〕 簡之徒。 自齒庸流, 誰云豪傑? 然欲行者仁義, 而所業者詩書。 窮年章句之是鑽, 螢爲窓而雪爲榻, 常目聖賢之垂敎, 倚於衡而參於前。 愧謀道而不謀貧, 終爲人而非爲己。 當世宗之乾御, 獲辛酉之丙科。 豈期草茅之名, 遽徹冕旒之聽? 忽受黃門傳旨於左掖, 俾以白儒抽史於集賢。 凡閱四年, 遂陞七品。 歲在丙寅之夏, 時遭昭憲之喪。 維世祖之潛龍, 以大君而侍殯。 上慰父王之慼, 下薦母后之靈。 憑佛法之飜宣, 爲衆緣之殊勝。 刊定釋氏之譜, 追源金輪之係。 肇起劫初, 歷考大乘之傳, 創譯韓代西來貝葉之文。 編摩僅就於廾卷, 探討殆遍於千函。 雖以臣之淺膚, 任其事之始終。 時世宗未寧, 出御于外。 其擇晉邸之幕, 必近圍仗之家。 商確古今, 非臣則不可, 討論經籍, 必臣而後談。 矮窓芧屋之數間, 朝夕烟煤之滿面。 斷席奴郞之同處, 尊卑禮節之無心。 晝則橫榻而共論, 夜則齋居而獨宿。 欹枕未破於幽夢, 轉轉寱語而未醒, 排戶直入而憾衣, 急急驚呼以起。 寢處無諱於內外, 情可知其淺深。 職雖稱於下僚, 義實均於執友。 作其卽位, 猶曰我師, 曁重試之開圍, 擢壯元而爲副。 迨陞兩府之崇秩, 且帶三字之淸銜。 卽命仕於禁中, 開廳近於御側。 降淸問於治亂得失之跡, 廣疇咨於孔釋同異之源。 或執經覬論而日晡, 或前席獨對於夜半。 論思也, 獻納也, 雖非法從文學之班, 眷注也, 仁憐也, 實越宗親勳舊之列。 湛恩汪濊, 天廚御膳之八珍, 接武淸高, 金馬玉堂之兩地。 至若臨軒而發策, 試士而搜才, 搢紳含毫, 將相戰藝, 蓋欲得於未得, 抑亦掄於已掄。 在宋之盛, 則以吳育、蘇子瞻爲得人, 前朝所傳, 僅有趙簡、曺光漢之故事。 正百年未擧之曠典, 而萬人欲得之美名。 臣何一技之能, 輒居兩榜之首? 天顔有喜, 乃曰 ‘絶代之奇才’, 鴻臚唱名, 聳聽巍科之甲第。 老幼聚觀於道路, 親朋來賀於門閭。 豈期不貲之軀, 獲被無前之寵? 驟陞峻級, 腰帶文犀之光, 兼以匪頒, 門騰廐馬之駿。 謂臣家貧無以賀於三館, 入宴物件, 乃分命於各司。 盤排備於司饔與禮賓, 酒味崇於(內瞻)〔內贍〕 及司醞。 議政四五承嚴命而押筵, 府院兩三齎宣醞以侑坐。 又命就賜犀帶ㆍ錦囊ㆍ羅綺衣服ㆍ靴ㆍ帽之類凡四十餘件、鞍具馬一匹、米十碩, 自國家設科以來, 儒士登第之榮與夫賞賜便蕃之重, 未有過於臣者。 豈臣有不世之譽, 得人所難能之名? 皆言遭遇之非常, 故致奬擢之過望。 肌骨瀜液, 淪睿澤於渾身, 簡策詳書, 流美讀於後世。 恭惟我主上殿下大明旁燭, 至仁無私。 度廓兼容, 如天地之覆熹, 德敦化育, 若雨露之生成。 逮夫踐祚之初, 首蒙當宁之眷。 論勛於佐理, 則以自世宗服御之久, 而策其功, 請罪於臺省, 則體我世祖厚待之隆而赦其咎。 領中樞西班之極品, 府院君優老之崇封。 顧豈臣身之敢處? 皆由上聖之特恩。 溫飽一家, 優游卒歲。 雖糜粉而無由上答, 垂涕泗而徒激下情。 臣歷敍謬蒙祖宗以來德澤之深者, 非敢更邀殿下之復殊遇也。 蓋小器則易以就盈, 微分則易爲溢。 人臣荷寵, 苟非其才, 天道喜謙, 豈能生福? 行年已及於七秩, 在邦無補於一毫。 幼學者乃文章, 而何能立就於倚馬, 素不閑於吏治, 而亦未聽訟之猶人。 比之乘雁集, 則江湖不爲之多, 雙鳧飛, 而洲渚不爲之小。 繄臣進退, 非國有無。 且臣迹雖滯於簪裾, 情實纓於林壑。 數間屋數竿竹, 結蕭灑山水中之幽居, 一輪月一陳風, 作欣然天地間之故友。 伏望憐臣桑楡之景已晩, 悶臣泉石之盟久寒, 特降兪音, 許賜骸骨, 臣敢不如山之崇如海之深, 恒祝壽於萬歲, 長期不老之春, 日出而作, 日入而息, 効擊壤於康衢, 永贊無爲之化!
傳曰: "人臣仕宦, 老成退休吟風詠月, 固美事, 然卿則今不可退休。"
- 【태백산사고본】 13책 8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9책 502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註 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