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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82권, 성종 8년 7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1477년 명 성화(成化) 13년

보명의 죄·손순효 등의 죄·녹과의 개정·공채의 징수 등에 대해 논하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보명(寶明)초복(初覆)729) 에 성상께서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이 앞서 형조(刑曹)에서 상복(詳覆)730) 하여 죽이지 말고자 하였으니,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지사(知事) 홍응(洪應) 등은 대답하기를, ‘죽일 만합니다.’ 하고, 현석규는 살릴 만한 도(道)를 조목으로 들어서 말하니, 집의(執義) 이경동(李瓊仝)은 말하기를, ‘보명(寶明)은 비록 박인창(朴仁昌)이 꾀어 부추겨서 무고(誣告)한 말이라 하더라도 이씨(李氏)도 또한 보명의 주인이니, 죽여서 징계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니, 만약 보명박인창의 비(婢)라고 하여서 죽이지 않는다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옥사는 의심할만 하니, 마땅히 다시 의논하겠다."

하였다. 이경동이 말하기를,

"손순효(孫舜孝)·홍귀달(洪貴達)은 같은 죄인데, 벌(罰)은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더러 물으니,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두 사람의 공사(供辭)731) 를 보건대, 손순효홍귀달(洪貴達)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이경동은 말하기를,

"청촉(請囑)이 없다 하여, 한한(韓僴)은 석방하고, 홍귀달은 죄주면, 그윽이 외인(外人)이 그 나라 일을 상소한 자를 죄주었다고 생각할까 두렵습니다. 옛적에 광무(光武)임연(任延)에게 이르기를, ‘장관(長官)을 잘 섬기면 명예(名譽)를 잃음이 없다.’고 하니, 임연이 대답하기를, ‘상하(上下)가 뇌동(雷同)함은 폐하(陛下)의 복(福)이 아닙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이 말하기를,

"현석규(玄碩圭)의 소위(所爲)가 불가하다면, 어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政院)이 이 앞서는 일찍이 이와 같지 않았다고 들었거늘, 저번에는 박시형(朴始亨)의 일이 있었고, 이제 또 이 일이 있다. 홍귀달(洪貴達)은 당초에 같이 의논하지 아니하고 홀로 아뢰었고, 그 공함(公緘)에 답(答)한 것도 스스로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노기(怒氣)가 오히려 문자(文字) 사이에 있었으며, 손순효(孫舜孝)의 언사(言辭) 또한 지리(支離)하다. 그러나 홍귀달과는 간격이 있다."

하였다. 이경동이 말하기를,

"행직 당상(行職堂上)이 너무 많음으로 녹과(祿科)를 더 설치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에 있어서는 5품으로부터 4품에 오르고, 4품으로부터 3품에 오르는 것은 모두 제한(制限)이 있는데, 이제는 동반(東班)의 조사(朝士)는 반드시 수령(守令)을 경력한 뒤에야 4품을 제수하되, 기타의 잡직(雜職)이나 의사(醫士) 등과 같은 무리는 이 규정(規定)에 구애됨이 없이 그대로 자궁(資窮)에 이르고, 사공(事功)이 조금만 있으면 당상(堂上)을 문득 제수하여 외람(猥濫)됨이 자못 심하니, 이를 한정하지 아니하고 한갓 녹과(祿科)만 더함은 미편(未便)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갑자기 개정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이경동이 말하기를,

"전지하기를, ‘재가(再嫁)한 자의 자손을 사판(仕版)에 함께 하지 말라.’ 하셨으니, 방애(防礙)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굶주려 죽는 일은 적은 것이고, 실절(失節)하는 일은 큰 것이다. 국가가 법을 세운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만 한다."

하였다. 한성부 윤(漢城府尹) 어세공(魚世恭)이 아뢰기를,

"공채(公債)732) 를 징수하고 갚는 것은 비록 노비(奴婢)가 있더라도 제사(諸司)에서 본부(本府)에 이를 위임하여, 부(府)에서 감당하기가 어려우니, 금후로는 노비(奴婢)가 있는 제사(諸司)의 물(物)은 스스로 징수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또 싸우고 욕하는 것은 모두 형률(刑律)에 나오는데, 이제 형조(刑曹)에서 수교(受敎)하여 본부(本府)733) 에 보내니, 싸우고 욕한 죄는 태형(笞刑)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앞서는 모두 한성부(漢城府)에 속(屬)하였던 까닭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장례원(掌隷院)에서 청송(聽訟)하되, 약간(若干)의 부자(父子)를 분간(分揀)하는 것은 헌부(憲府)에 보내고, 이제 한성부에서도 또한 청리(聽理)하되, 약간의 장(杖) 이상의 죄(罪)는 형조(刑曹)에 이송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8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9책 479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의식(儀式) / 신분-천인(賤人)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역사-고사(故事)

  • [註 729]
    초복(初覆) : 살인 사건에 대한 초검(初檢)과 복검(覆檢)의 함칭.
  • [註 730]
    상복(詳覆) : 상세히 복심(覆審)함.
  • [註 731]
    공사(供辭) :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
  • [註 732]
    공채(公債) : 공금(公金)을 소비하여 진 빚.
  • [註 733]
    본부(本府) : 한성부.

○乙酉/受常參, 視事。 都承旨玄碩圭啓: "寶明初覆, 上謂左右曰: ‘前此刑曹詳覆欲勿殺, 卿等意何如?’ 知事洪應等對曰: ‘可殺也。’ 碩圭條陳可生之道, 執義李瓊仝曰: ‘寶明朴仁昌指嗾爲誣飾之言, 李氏寶明之主也, 殺此以懲何如?’ 若以寶明仁昌之婢而不殺, 則恐有末流之弊。" 上曰: "此獄可疑, 當更議之。" 瓊仝曰: "孫舜孝洪貴達, 罪同而罰異。" 上問諸左右, (曰)洪應對曰: "觀二人供辭, 舜孝貴達有間。" 瓊仝曰: "以無請囑釋韓僩而罪貴達, 竊恐外人以爲罪其言事者。 昔光武任延曰: ‘善事長官, 無失名譽。’ 對曰: ‘上下雷同, 非陛下之福也。’" 領事金國光曰: "玄碩圭所爲不可, 則安可使之泯默? 但此事則是。" 上曰: "聞政院前此未嘗如此, 曩有朴始亨之事, 今又有此事。 洪貴達初不同議而獨啓, 及其答公(諴)〔緘〕 也, 不自以爲非, 怒氣猶在於文字間。 舜孝言辭亦支離, 然與貴達有間。" 瓊仝曰: "以行職堂上太多, 加設祿科, 在祖宗朝, 自五品陞四品, 自四品陞三品, 俱有限制, 今則東班朝士, 必經守令然後授四品, 其他雜職如醫士等流不在此限, 馴致資窮而少有事功, 使授堂上, 猥濫頗甚, 不此之限而徒加祿科未便。" 上曰: "法難遽更。" 瓊仝曰: "傳旨: ‘再嫁者子孫, 勿齒仕版。’ 恐有防礙。" 上曰: "餓死事小, 失節事大。 國家立法, 但當如是。" 漢城府判尹魚世恭啓曰: "公債徵償, 雖有奴婢, 諸司委之於本府, 府不能堪, 今後有奴婢諸司之物, 令自徵何如? 且鬪敺詈罵, 皆出刑律, 而今刑曹受敎送本府, 鬪敺詈罵之罪, 非止於笞。" 上曰: "前此皆屬漢城府, 故送還耳。 掌隷院聽訟, 而若干父子分揀, 則送憲府。 今漢城府亦聽理, 而若干杖以上罪, 則移刑曹何妨?"


  • 【태백산사고본】 12책 8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9책 479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의식(儀式) / 신분-천인(賤人)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