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운·한치례가 궁각·복식·기용 등의 일을 아뢰고, 윤자운이 사직을 청하다
윤자운(尹子雲)·한치례(韓致禮)를 명하여 불러서 인견(引見)하였는데, 윤자운이 아뢰기를,
"궁각(弓角)을 주청(奏請)하는 일은 정동(鄭同)이 말하였으니, 정동이 반드시 황제의 뜻을 헤아려 알고 말한 것입니다. 신의 뜻에는, 만일 주청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세로 보면, 주청하면 반드시 준가(准可)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윤자운이 말하기를,
"궁각을 금한 뒤로부터 우리 나라 사신이 관(關)을 나갈 때에 총병관(摠兵官)이 샅샅이 뒤지는데, 야인(野人) 달자(達子)와 다름이 없었으니, 참으로 수치스럽고 욕되었습니다. 신이 가니, 총병관이 신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나라에서는 무엇 때문에 주청하지 않습니까?’ 하였고, 또 정동이 황제의 뜻을 전하기를, ‘그대 나라가 선덕(宣德)578) 연간에는 따로 토산물을 바쳤었는데, 지금은 왜 없느냐?’ 하므로, 신 등이 대답하기를, ‘선덕 연간에 토산물을 바친 것은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바친 것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정동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아뢰기를, 「매[鷹]를 바치는 것을 정지한 뒤로 물선도 바치지 않습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정동이 또 황제의 뜻을 전하기를, ‘해내(海內)의 여러 나라에서 주청하는 것을 짐이 혹 준가하지 않았지만, 그대 나라에서 주청하는 것은 일일이 들어주었다. 궁각은 무엇 때문에 그대 나라에서만 쓰지 않고 해서(海西) 달자(達子)에게 전매(轉賣)하느냐?’ 하므로, 신 등이 대답하기를, ‘궁각은 오직 중국[上國]을 의뢰하여 나라에서 쓰기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더욱이 해서 달자는 땅이 모련위(毛憐衛)·건주위(建州衛)를 격하여 있는데, 어찌 적의 지경을 넘어서 전매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이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정동이 말하기를, ‘재상은 말하지 마오. 내가 자세히 아뢸 것이오. 지금 금법을 베푼 것은 오로지 시랑(侍郞) 마문승(馬文勝)의 아뢴 것으로 인함인데, 황제께서 어떻게 본국이 해서 달자와 멀리 격한 것을 알겠습니까? 만일 본국에서 이 뜻과, 홍무(洪武)579) 연간에 화포(火砲)를 준 것과, 정해년580) 에 징병(徵兵)한 일을 가지고 주청하면 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튿날 〈정동이〉 통사 장자효(張自孝)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재상이 대답한 것으로 자세히 아뢰고, 인하여 내 뜻으로 홍무 연간에 화포를 준 것과, 정해년의 건주위의 승첩을 아뢰었는데, 황제께서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말하기를, 「지금 까닭 없이 예전 법을 변경하여 사사롭게 은혜를 보일 수는 없다.」 하였으니, 그대의 재상이 이것을 갖추어 아뢰어 진계하면 재가할 것이다.’ 하였으나, 신 등이 감히 임의로 주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뜻에는 궁각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긴요한 것이니 이때에 미쳐서 주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윤자운이 또 아뢰기를,
"정동이 말하기를, ‘한 재상(韓宰相)581) 은 황친(皇親)이니, 마땅히 토산을 바쳐야 한다.’ 하였는데, 신 등이 대답하기를, ‘외국의 배신(陪臣)으로 어찌 감히 진헌(進獻)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가지고 온 것이 아주 적습니다.’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관대하니, 다소에 구애하지 말고 바치는 것이 좋다.’ 하며 두세 번 강요하므로, 부득이하여 한치례(韓致禮)가 사사로이 가지고 간 한씨(韓氏)에게 드릴 정표할 물건을 덜어내어 진헌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서에 말한 복식(服食)·기용(器用)이라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윤자운이 말하기를,
"칙서에는 복식·기용이라고 하였지마는, 정동의 말한 것으로 보면, 그 뜻이 오로지 음식물(飮食物)에 있는 듯합니다. 정동이 말하기를, ‘이것이 예를 이루는 일은 아니다. 진헌은 많을수록 좋다.’ 하였습니다. 본국의 승정원과 의정부에서 일을 의논할 때에 매양 예가 되는 것으로 두려워 하는데, 만일 대감(大監)에게 위임하여 보낸다면 본국에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나 마땅히 계속할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또 예부(禮部)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동화문(東華門)에 진헌하는 것이 사체에 어떠할까?"
하니, 윤자운이 대답하기를,
"선덕 연간에 성지(聖旨)로 구한 것을 역시 동화문(東華門)에 바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서는 어느 곳에서 나왔는가?"
하니, 윤자운이 말하기를,
"동화문에서 나와 신 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보면 반드시 한림원(翰林院)에서 지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다시 정승과 음식물을 의논하라."
하였다. 윤자운이 말하기를,
"한씨(韓氏)가 여러 번 말을 전하기를, ‘왜 회합(回蛤)·반합(斑蛤)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하였고, 또 성지(聖旨)를 전하기를, ‘왜 한씨의 요구에 부응(副應)하지 않았느냐?’ 하였고, 말하는 자가 또 이르기를, ‘한씨가 태후(太后)와 함께 있다.’ 하였으니, 생각건대, 황제께 진언하기가 쉬울 듯합니다. 정동이 은밀히 말하기를, ‘이번에 바친 대구어(大口魚)를 황제가 좋아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윤자운이 인하여 한씨의 편지로 올리었다. 한치례(韓致禮)가 아뢰기를,
"한씨가 신에게 이르기를, ‘본국에서 차는 노리개로 반합(斑蛤)·장아(獐牙)·호아(虎牙) 같은 것은 귀천 없이 다 차는데, 너는 왜 너의 가인(家人)이 차는 것을 거두어 내게 주지 않았느냐? 반드시 한비(韓妃)582) 께 고하여 많이 갖추어 오라. 안되거든 너는 마땅히 내가 준 저사(紵絲)로 사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자운이 말하기를,
"정동이 그의 형이 삽대(鈒帶)583) 를 띠었는지의 여부(與否)를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지금은 미처 삽대를 띠지 못하였지만, 마땅히 자급(資級)에 따라 올라갈 것입니다.’ 하니, 정동이 말하기를, ‘다른 대감의 족속으로 삽대를 띤 자들이 모두 자급에 따른 것인가? 내가 스스로 자랑할 것은 아니지마는, 심 재상(沈宰相)584) 이 왔을 때에 내 주선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동의 형이 누구인가?"
하니, 우승지(右承旨) 임사홍(任士洪)이 말하기를,
"정거(鄭擧)인데, 지금 가선 대부(嘉善大夫)입니다."
하였다. 윤자운이 어전에서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늙고 병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겸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해면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의약(醫藥)은 마땅히 내가 내려 주겠다."
하였다. 윤자운이 또 아뢰기를,
"홍칭(洪偁)이 오랫동안 사복 첨정(司僕僉正)으로 있었으므로, 마정(馬政)을 잘아는데, 지금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제수하였으니, 청컨대 보내지 말고 그대로 사복 첨정으로 두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홍칭이 아니더라도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8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58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교통-마정(馬政)
- [註 578]선덕(宣德) :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579]
홍무(洪武) :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연호.- [註 580]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註 581]
한 재상(韓宰相) : 한확(韓確).- [註 582]
○命召尹子雲、韓致禮引見, 子雲啓曰: "弓角奏請事, 鄭同言之, 同必揣知帝意而言也。 臣意以爲若奏請, 則可得也。" 上曰: "以事勢觀之, 奏請則必蒙準矣。" 子雲曰: "自弓角設禁後, 我國使臣出關時, 摠兵官搜橐無遺, 與野人、達子無異, 良可羞辱。 臣行, 摠兵官謂臣曰: ‘汝國何不奏請?’ 且鄭同傳聖旨云: ‘汝國在宣德年間別進土産, 今何無也?’ 臣等對曰: ‘宣德年間進土産, 承朝廷之命耳。’ 同曰: ‘我亦奏云: 「自停進鷹後, 物膳亦不進。」’ 同又傳聖旨云: ‘海內諸國所奏, 朕或不準, 汝國所奏, 一從之。 弓角何不止用於汝國, 而轉賣於海西達子?’ 臣等對曰: ‘弓角惟上國是資, 國用尙且不敷。 況海西達子, 地隔毛憐、建州衛, 豈有越敵境而轉賣乎? 萬萬無是理。’ 同曰: ‘宰相勿言。 我當詳奏。 今設禁, 專因侍郞馬文勝所奏耳, 帝安知本國與海西達子遼隔乎? 若本國將此意及洪武年間賜火砲、丁亥年徵兵之事奏請, 則可得蒙準矣。’ 翼日召謂通使張自孝曰: ‘我以宰相所對詳奏, 因以己意奏洪武火砲之賜、丁亥建州之捷, 帝默然良久曰: 「今不可無因而變舊法示私恩也。」 汝宰相具此奏陳, 則可矣。’ 然臣等不敢擅奏。 臣意弓角我國所須甚緊, 當及此時奏請可矣。" 上曰: "然。" 子雲又啓曰: "鄭同言: ‘韓宰相, 皇親, 宜進土産。’ 臣等答曰: ‘外國陪臣, 安敢進獻? 且所齎缺少。’ 同曰: ‘朝廷寬大, 勿拘多少, 進之可也。’ 再三强之, 故不得已量出韓致禮私齎去韓氏處人情, 進獻。" 上曰: "勑書所云服食器用, 何物也?" 子雲曰: "勑書雖云服食器用, 以鄭同所言觀之, 其意專在於食物也。 同言: ‘此非成例事也。 進獻多之爲貴。’ 本國承政院、議政府議事, 每以成例爲懼, 若委遣太監, 則本國無如之何矣。’" 上曰: "雖然, 當爲可繼之道也。 且不由禮部, 直進於東華門, 於事體何如?" 子雲對曰: "宣德年間聖旨所求, 亦進於東華門。" 上曰: "勑書出於何處?" 子雲曰: "自東華門出付臣等。 然觀其文, 必翰林院所撰也。" 上謂承旨曰: "更與政丞議食物。" 子雲曰: "韓氏屢傳言: ‘何不送回蛤、斑蛤?’ 且傳聖旨云: ‘何不副韓氏所求乎?’ 言者又曰: ‘韓氏與太后同處’, 意其易得進言於帝矣。 鄭同密言: ‘今進大口魚, 帝好之。’" 子雲仍以韓氏書契進焉。 韓致禮啓曰: "韓氏謂臣曰: ‘本國佩玩如斑蛤、獐牙、虎牙, 無貴賤皆佩, 汝何不收汝家人所佩以饋我乎? 須告韓妃, 多般備來。 否則汝宜以吾所與紵絲貿來。’" 子雲曰: "鄭同問其兄鈒帶與否, 臣答曰: ‘今雖不及帶行, 當循資而至矣。’ 同曰: ‘他太監族屬鈒帶者, 亦皆循資乎? 我不宜自伐, 沈宰相之來, 非我周旋, 則必至今不還矣。’" 上曰: "同兄誰?" 右承旨任士洪曰: "鄭擧, 今爲嘉善矣。" 尹子雲旣出, 啓曰: "臣老病, 請解右議政兼禮曹判書。" 傳曰: "勿辭。 醫藥予當賜之。" 子雲又啓曰: "洪偁以久爲司僕僉正, 諳練馬政, 今除長興府使, 請勿遣仍職。" 傳曰: "雖非洪偁, 豈無他人?"
- 【태백산사고본】 12책 8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58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교통-마정(馬政)
- [註 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