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의 역을 더는 방법, 하삼도의 축성, 경상도의 군수 확보 등을 의논하다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낸 이와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 및 일찍이 경상도 감사(監司)와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이와,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 1품에게 명하여 궐정(闕庭)에 모여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의논할 일은,
"1. 선군(船軍)의 호수(戶首)만이 홀로 원패(圓牌)277) 를 받고 입번(立番)하여 한 달[一朔]마다 서로 체대(遞代)하는데, 왕복(往復)하는 사이에 집에 있으며 휴식(休息)하는 것이 겨우 20여 일이므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유산(流散)하는 자가 있으니, 그 보인(保人)278) 도 아울러 원패를 주어서 서로 입번하여 노일(勞逸)279) 을 고르게 하고, 또 동거(同居)하는 자제(子弟)에게 다른 역(役)을 정하지 말자는 것.
1.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는 진실로 마땅히 빨리 쌓아야 하고, 내지(內地)의 성보 또한 불가불 쌓아야 하며, 또 그중에서 왜인(倭人)이 경유하는 낙동강(洛東江) 변의 읍성(邑城)은 더욱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할 것.
1. 경상도의 군수(軍需)가 넉넉하지 못하므로, 그 상납(上納)하는 전세(田稅)를 주창(州倉)에 납입하고, 납입된 수를 계산하여 전라도(全羅道)·충청도(忠淸道) 양도의 군수로 충납(充納)할 것."
이었다.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와 좌의정 심회(沈澮)·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조석문(曺錫文)은 의논하기를,
"1. 수군(水軍)은 보인(保人)을 준 것이 3명인데, 동거(同居)하는 2정(丁)외에는 이를 빼앗아서 다른 역(役)에 충당하니, 호수(戶首)가 입번하는 기간이 매우 잦아서 날이 갈수록 조잔(凋殘)하여 유망(流亡)하는 것이 잇달읍니다. 청컨대 옛법에 의거하여 수군은 〈다른 역에〉 옮겨 바꾸지 말고, 여정(餘丁)이 비록 많더라도 다른 역에 충당하지 말며, 절호(絶戶)된 전지(田地)를 계호(繼戶)한 사람에게 주어서, 공부(貢賦)를 제외한 모든 요역(徭役)은 거듭 〈법을〉 밝혀서 면제[蠲免]하시고, 호수(戶首)와 보인(保人)은 모두 패(牌)를 주어서 윤차(輪次)로 입번하게 하되, 만약에 재능이 있는 자일 것 같으면 해령(海領)280) 의 직임을 주어서 장권(奬勸)281) 하소서.
1. 양산(梁山)·밀양(密陽)·진주(晉州)·함안(咸安)·칠원(漆原)·영산(靈山)·의령(宜寧)·언양(彦陽)·단성(丹城)·영천(永川)·대구(大丘)·청도(淸道)·경산(慶山) 등의 고을은 비록 내지(內地)라 하더라도 혹은 변방(邊方)에 가깝고, 혹은 왜객(倭客)이 경유하는 길이므로, 성보(城堡)가 없는 것은 불가하니,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할 것입니다. 낙동강 양변의 초계(草溪)·창녕(昌寧)·현풍(玄風)·성주(星州)·선산(善山)·인동(仁同)·군위(軍威) 등의 고을 또한 마땅히 급히 쌓아야 되나, 급작스럽게 판비(辦備)할 수 없으니, 마땅히 농한기[農隙]에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쌓게 하되, 그 쌓은 수를 매 세초(歲抄)마다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그러나 법이 헛되이 행하여져서는 아니되며, 성곽(城郭)을 쌓고 수군(水軍)을 채우는 것은 모두 감사(監司)의 임무이니,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그 책임을 맡기어 〈임기(任期)의 〉 개월(箇月)에 구애하지 말고 성취(成就)가 있기를 기(期)하면, 두 가지 일을 대략 구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경상도 여러 고을의 회계(會計)한 곡식이 미두(未豆)·잡곡(雜穀) 아울러서 1백 65만 6천 8백여 석(碩)인데, 또 연전(年前)에 우도(右道)의 군수(軍需)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해마다 전세(田稅) 5천 1백여 석을 〈서울로〉 상납하는 것을 면제하여 주창(州倉)을 보충하게 하였으므로, 수년(數年) 후면 보충된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파천 부원군(坡川府院君) 윤사흔(尹士昕)과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좌찬성(左贊成) 윤필상(尹弼商)·이조 판서(吏曹判書) 홍응(洪應)·우찬성(右贊成) 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1. 무릇 수군(水軍)의 호수(戶首)는 으레 사어(射御)282) 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이고, 차정(差定)한 보인(保人)은 부득이하여 간혹 잔열(殘劣)한 자로써 충급(充給)한 것인데, 그 호수가 입번(立番)하기를 꺼려하여 보인을 대신 보내어 방어(防禦)가 소우(疏虞)한 데 이르게 하므로, 호수에게 원패를 주는 법[戶首圓牌之法]을 세운 것입니다. 지금 만약 보인에게도 아울러 원패를 주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아질 것이니, 마땅히 《대전(大典)》에 의하여 예전대로 하고, 그 동거(同居)하는 자제(子弟)가 비록 보인의 수[保數]를 넘더라도, 그 2인은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않는 것이 또한 《대전》에 기재되어 있으니, 마땅히 예전대로 하되, 다만 요역(徭役)을 면제 하는 법만 거듭 밝히실 뿐입니다.
1. 여러 고을의 성보(城堡)는 진실로 마땅히 수축(修築)해야 하는데, 연변(沿邊)을 가장 시급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을 쌓는 대사(大事)는 멀리서 미루어 헤아려 의논을 정할 수 없으니, 아직은 하삼도(下三道)의 관찰사와 절도사로 하여금 연변 근처의 성보가 없는 여러 고을에 성을 쌓을 만한 곳을 함께 살펴서 마련(磨鍊)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농한기에 점차 수축하게 하고, 매 연말[歲季]마다 그해에 쌓은 척수(尺數)를 아뢰게 하소서. 또 왜인(倭人)이 경과하는 곳은 비단 낙동강 뿐만이 아니라, 또한 육로(陸路)도 있으니, 낙동강 변의 제읍은 먼저 성을 쌓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연변의 여러 고을에 쌓고, 다음에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에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1. 호조(戶曹)에서 일찍이 경상도의 군수(軍需)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전세(田稅)를 상납하는 것을 면제하고 주창(州倉)에 납입하게 하였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좌참찬(左參贊) 임원준(任元濬)과 양천군(陽川君) 허종(許琮)·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는 의논하기를,
"1. 선군에 있어서 강(强)한 자를 택하여 호수(戶首)를 삼고, 약(弱)한 자는 보(保)를 삼아서, 호수에게 원패(圓牌)를 주는 것은, 서로 번갈아 바꾸지 못하게 하여 배[船]를 다루는 데 익숙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지금 만약 보인(保人)에게도 아울러 순환(循環)하면서 입번(立番)하게 하면, 그 호수의 강한 자가 직접 가서 방수(防戍)하기를 꺼려해서, 영문(營門)에 있는 자는 모두 약한 보인일 것입니다. 만약에 완급(緩急)함이 있으면 이들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니, 예전대로 두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다만 선군의 역(役)이 가장 고통스러워서, 사람들이 모두 피하기를 꾀하기 때문에, 선군의 호(戶) 비록 3정(丁)이 넘더라도 다른 역을 정하지 않는 것은 세종조 때의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2정(丁) 외에는 모두 뽑아서 〈다른〉 역을 차정(差定)하면, 사람들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세종조 때의 법에 의하소서.
1. 왜인이 경유하는 길이 무릇 3도(道)에서 낙동강뿐만이 아닌데, 3도의 여러 읍성을 어찌 일일이 쌓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연해(沿海) 군현(郡縣)의 성보(城堡)만 긴급하고 늦은 것을 헤아려서 점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옛사람이 일을 생각함이 주밀(周密)하여, 비록 내지(內地)라 하더라도 모두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다만 세월이 오래 되고 수축(修築)하지 아니하여 많이 퇴락(頹落)한 데가 있으니, 또한 감사와 절도사로 하여금 순심(巡審)하게 하고, 그 본 고을의 사람들로 하여금 풍년을 기다려 농한기를 타서 완전히 수축하게 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함이 어떻겠습니까?
1. 호조(戶曹)에서 이미 〈군수(軍需)의〉 소용(所用)을 계산하여 미리 비축하기 때문에 아주 궁핍(窮乏)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근년에 왜인의 내왕이 〈전보다〉 배나 많고, 구(求)하는 바가 끝이 없으니, 〈연례(年例)로 주는〉 세사(勢賜)는 지금 고치기가 어려우나, 별례(別例)로 주는 것은 힘써 재감(裁減)283) 에 좇으시어 후일의 폐단을 막으심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과 한성군(韓城君) 이훈(李塤)·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철성군(鐵城君) 박거겸(朴居謙)·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윤흠(尹欽)·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소(李承召)·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예(李芮)·형조 판서(刑曹判書) 윤계겸(尹繼謙)은 의논하기를,
"1. 《대전(大典)》안에, ‘제도(諸道)의 수군(水軍)은 4만 8천 8백 명으로 정액(定額)을 삼고, 항상 원패(圓牌)를 찬다.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는 순행(巡行)하여 재주를 시험[試才]하고, 근무 일수가 3백 60일이 차야 가계(加階)284) 하되, 매년 한 도목(都目)을 쓰고, 종4품에서 거관(去官)하며, 〈거관할 자가〉 그대로 재임[仍仕]하는 자는 근무 일수가 4백 50일이 차야 가계하되, 정3품에 이르러서 그친다.’고 하였으니, 그 대우함이 중(重)하고, ‘1보(保)와 1정(丁)을 지급하고, 동거하는 족친(族親)이 비록 보수(保數)를 넘는다 하더라도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아니하며, 호내(戶內)의 잡역(雜役)은 아울러 모두 견면(蠲免)한다.’고 하였으니, 그 구휼(救恤)함이 지극합니다. 지금 만약 보인(保人)으로 하여금 윤차(輪次)로 입번(立番)하게 하면 정군(正軍)과 다름이 없어서 불가불 보인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고, 관직을 제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전》의 법을 일체(一切) 고친 뒤에야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은 망령되이 생각건대, 지금 곧 군적(軍籍)을 고쳐서 다시 강장(强壯)한 자를 택하여 정군(正軍)에 충당하고, 잡역을 면제하는 법을 거듭 밝히며, 입번하는 때를 당하여 정군이 혹 유고(有故)하면 소재지의 수령(守令)이 그 보인에게 증명서를 주어서 대신 보내되, 그 용모(容貌)와 나이[年歲]를 아울러 기록하게 하면, 호수(戶首)는 홀로 고통을 받는 데 이르지 않고, 또 대립(代立)하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1. 제도(諸道)의 여러 고을에 모두 성을 쌓게 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 때에 이미 강구(講究)한 계책인데, 다만 일이 많고 혹은 흉년으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 일이 없고, 제도(諸道)가 풍년이니, 먼저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를쌓고, 점차 내지(內地)에 이르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1. 경상도는 현재의 군수(軍需)가 1백만여 석을 넘고, 또 매년의 조세(租稅)를 그 반이나 주창(州倉)에 머물러 두게 하였으니, 군수가 넉넉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주창에 모두 납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모자라는 데에 이르면, 호조(戶曹)에서 또한 임시(臨時)로 구처(區處)할 것이니, 예전대로 두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파(李坡)와 호조 참판(戶曹參判) 이서장(李恕長)은 의논하기를,
"1. 선군(船軍) 1인에게 보(保) 1정(丁)을 지급하고, 다만 호주(戶主)에게만 원패(圓牌)를 주어서 오랫동안 입번(立番)하게 하는 것은, 배를 다루는 데 익숙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길[道途]을 왕복하는 사이에 노일(勞逸)이 고르지 못하고, 또 완급(緩急)함이 있으면, 보(保)가 된 자가 어찌 홀로 집에 있으면서 수전(水戰)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정군(正軍)이 유고(有故)하게 되면 마땅히 보인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니, 어찌 〈수전을〉 익히지 않고서 갑자기 익숙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보인에게도〉 아울러 원패를 주고 그 체제(體制)를 같게 하면 명분(名分)이 서로 뒤섞이게되니, 마땅히 그 제도를 달리하여 정(正)은 ‘정(正)’이라 칭하고, 보(保)는 ‘보(保)’라고 칭하여, 정 하나와 보 둘이 차례로 입번하게 하면 거의 노일(勞逸)이 알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동거하는 자제 2인에게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않게 하는 것은 이미 《대전》에 기재되어 있으며, 지금 만약 보인을 아울러 입번하게 해도 또한 보조(補助)가 없어서는 아니되니, 동거하는 1인만 아울러 〈보인〉으로 지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국초(國初)에는 선군(船軍)이 한번 차정(差定)된 뒤에는 부자(父子)가 서로 〈그 역을〉 전하여 세업(世業)을 삼았으나, 지금은 그 역(役)에 시달려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면하기를 꾀하고, 국가에서 또한 금방(禁防)함이 없기 때문에 자주 역을 바꾸어서 전업(專業)할 수 없으니, 국초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한 번 차정한 뒤에는 자손도 아울러 타역을 정하지 말고, 호역(戶役)을 후하게 면제하여 주고, 해령(海領)의 직(職) 또한 넉넉히 승서(陞敍)해야 합니다.
1. 국가가 승평(昇平)한 지 오래 되어, 남방의 방어(防禦)가 가장 소우(疏虞)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해(滄海)가 둘러 있으니, 봉역(封域)의 어느 곳인들 적로(賊路)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事勢)가 일일이 방수(防戍)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요해처(要害處)를 택해서 방수합니다. 수진(水鎭)은 그렇다고 하겠지만 육지의 주군(州郡)과 같은 데는 요해처를 택하지 않고, 거의 모두 연해(沿海)에 고을을 설치하고도 성(城)이 없어서, 창원(昌原)과 울산(蔚山)·양산(梁山)과 같은 곳은 만약에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게 되면 도망하여 사방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만약에 의지할 만한 성이 있으면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천천히 계책을 세워도 족히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연해의 성은 진실로 마땅히 먼저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변이 아니더라도 그 다음의 요해지와 왜인이 왕래하는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도 또한 성을 쌓지 않을 수 없으나, 사세가 갑자기 쌓기가 어려우니, 각각 본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올해에 한 면(面)을 쌓고, 다음해에 한 면을 쌓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소요(騷擾)하지 말게 하되, 본도(本道)는 근래에 연사(年事)가 자못 풍년이 들었으니, 올 가을부터 시축(始築)하게 함이 편하겠습니다.
1. 지금 경상도(慶尙道)의 회계(會計)를 살펴보니, 현재의 수가 무려 1백만여 석(碩)이 되고, 둔전(屯田)의 소출과 감사(監司) 및 수령(守令)이 별도로 저축한 수가 또한 수천여 석에 내려가지 않는데, 매년 전세(田稅)의 반을 주창(州倉)에 또한 납입하니, 본도(本道)의 저축이 이미 족합니다. 그런데 또 적(賊)에게 가까우면서 성(城)도 없는 곳에 미곡(米穀)을 많이 저축하여 융심(戎心)을 여는 것은 또한 불가하니, 예전대로 상납하게 함이 편합니다. 그리고 전라도·충청도 양도의 미멸(米𥸴)을 〈본도의 군수로〉 충납(充納)하자는 의논은 심히 불가합니다. 조전(漕轉)하는 선박이 상공(常貢)에도 오히려 부족하고, 더구나 양도는 국가의 부고(府庫)의 지역으로, 많이 저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겠습니까?
1. 신 등이 지금 남방(南方)의 일을 물으심에 미쳐 감히 평일(平日)에 마음속에 품은 바를 다시 진달합니다. 국가에서 부산포(釜山浦)는 왜선(倭船)이 처음 닿는 곳이므로, 대장(大將)이 거처하는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여 마침내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의 영(營)을 개운포(開雲浦)로 옮긴 것은, 당시의 관찰사(觀察使)가 아뢴 바에 인함인데, 그 뜻이 병법(兵法)에서 ‘구천(九天)의 위와 구지(九地)의 밑285) 에 감추어야 한다.’고 하여, 대장(大將)이 〈적이〉 처음 쳐들어오는 곳에 바싹 닿아 있어 단약(單弱)함을 먼저 보이는 것이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포에 늘 기거(起居)하는 왜인이 수사(水使)가 관할하는 군인의 강약(强弱)과 다소(多少), 성명(姓名)에 이르기까지 익히 알고 있으니, 본도(本道)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것을 혐의하여 요해(要害)의 땅을 버리고, 〈군대를〉 인솔하여 다른 곳에 우접(寓接)한 것인데 염포(鹽浦)와 가까우니, 이것은 이쪽을 숨기고 저쪽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남방(南方)에서 가장 요해처(要害處)가 셋이 있으니, 제포(薺浦)와 부산포·염포입니다. 그러나 제포는 앞에 수사진(水使鎭)과 거제(巨濟)가 있고, 뒤에는 병사진(兵使鎭)과 창원(昌原)이 있으므로, 중간에 위치하여 수미(首尾)에서 구원할 수 있으며, 염포도 또한 병사(兵使)의 영(營)에서 가까운데, 오직 부산포만을 비장(裨將)으로 수어(戍禦)하게 하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개운포(開雲浦)도 또한 울산(蔚山)에 있어, 수영(水營)과 병영(兵營)이 함께 같은 군(郡)에 있어서 지척(咫尺) 사이에 양 대장(大將)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요해(要害)의 부산(釜山)과 같은 곳에 비장(裨將)만 홀로 머물러 두니,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만일에 부산이 먼저 적의 침입을 받게 된다면, 양 대장이 능히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예전대로 다시 부산포로 옮기는 것이 매우 편하겠습니다."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극돈(李克墩)은 의논하기를,
"1. 선군의 보인에게 모두 원패를 주어서 순환(循環)하여 입번하게 하면 편안함을 고르게 할 듯하나, 그 보인은 거의 모두가 단약(單弱)하여, 만약 모두 입번하여 방수(防戍)하게 하면, 방어(防禦)가 허소(虛疎)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보인의 강장(强壯)한 자 1인을 택하여 패(牌)를 주어서 정군(正軍)과 더불어 서로 교대해 입번하게 하면, 노일(勞逸)도 마땅함을 얻고, 방어도 허소한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대전(大典)》에 ‘수군은 1보(保) 1정(丁)을 지급하고, 동거하는 아들[子]·사위[壻]·아우[弟]가 비록 보인의 수 2인을 넘더라도 〈그들에게〉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관리(官吏)가 보인을 지급할 때 간혹 동거하는 자로써 이를 지급합니다. 그러면 한 집안에서 한 달 동안 입방(立防)286) 하는 것을 오로지 지탱하게 되어, 1년에 여섯 번씩이나 왕복하게 되니, 심히 가긍(可矜)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선군의 보인은 모두 호를 달리하는 자로써 지급하되, 그 동거하는 자제(子弟)는 《대전》에 의하여 2인에 한해서는 다른 역을 정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국가가 승평(昇平)한 지 거의 1백 년이 되었으니, 이제 바로 불우(不虞)를 경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는 진실로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하고, 내지(內地)의 성보도 또한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성을 쌓는 것을 다만 그 고을의 군정(軍丁)만 사용하기 때문에 1년에 쌓는 것이 50여 척(尺)에 불과하니, 이것으로 계산하면 거의 50년에 이른 뒤에야 쌓기를 마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양산성(梁山城) 같으면 경주(慶州) 영내(領內)의 여러 고을에서 쌓고, 창원성(昌原城)은 진주(晉州) 영내의 여러 고을에서 쌓으면, 공역(功役)이 쉽게 이루어져서 일이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만약에 ‘백성을 번거롭게 함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면, 큰 공역(功役)을 이르는 것에 어찌 작은 해(害)를 따지겠습니까?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되, 그 완급(緩急)을 헤아리고 그 노일(勞逸)을 고르게 하여 점차 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근년에 경내(京內)와 외방(外方)의 저축(儲蓄)이 고르지 아니하여, 열에 아홉은 경내에 있고, 열에 하나는 외방에 있어서, 이로 인해 여러 고을에 저축한 것이 넉넉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경상도의 용도(用度)가 너무 많아서 〈전세(田稅)의〉 상납(上納)하는 수를 양감(量減)하여 주창(州倉)에 이납(移納)하게 해서, 지금 이미 대략 1백 6만여 석이지만, 여유가 있기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의논하는 자의 말이, ‘주창(州倉)을 양감하는 것이 가할 듯하다.’고 하나, 다만 전라도·충청도 양도의 전세를 그 숫자만큼 대신 상납(上納)케 하는 일은, 경중(京中)에 저축한 것이 적지 아니하고, 양도의 조운(漕運) 또한 쉽지 않으니, 거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 홍도상(洪道常)·전 절도사(節度使) 김순신(金舜臣)·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윤호(尹壕)·형조 참판(刑曹參判) 윤효손(尹孝孫)은 의논하기를,
"1. 선군의 호수에게 원패를 주어서 한 달마다 서로 교체하여 입번하게 하면, 휴식하는 날이 적어서, 그 고통을 혼자 받으며, 보인은 전혀 입번하지 아니하여 배를 다루는데 익숙하지 못하므로, 완급(緩急)할 때에 쓸모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보인 3정(丁)에게 모두 원패를 주어 순환(循環)해서 입번하게 하라.’고 하나, 이것은 한갓 소요(騷擾)할 뿐만 아니라, 강장(强壯)하고 약(弱)한 것이 같지 아니하여 방수(防戍)가 혹 허소(虛疎)할 것이니,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수에게만 원패를 지급하고, 보인 중에 강장한 자 1인을 택하여 ‘아무 보인’ 이라 칭하여, 형모(刑貌)와 나이를 아울러 기록하고, 잠시 원패를 주어서 윤차(輪次)로 입번하게 하여 노일(勞逸)을 고르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1. 성을 쌓는 것은 늦출 수 없으나, 민력(民力)을 신중히 사용해야 합니다. 연변(沿邊)과 내지(內地)에 성보(城堡)가 없는 여러 고을이 많으니, 만약에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살아갈 방도[生道]로써 백성을 사역시켜 비록 노고함이 있더라도 원망함이 없게 하여, 연사의 풍흉(豐凶)을 보아서 매양 농한기를 당하여 각각 근처에 사는 백성들로 쌓게 하되, 연변부터 시작하여 올해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아 점차로 쌓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1. 경창(京倉)의 군수(軍需)가 넉넉하지 못함이 아니고, 충청도·전라도의 조운(漕運)이 또한 쉽지 않으니, 경상도의 군수가 풍족할 때까지 한하여 상도(上道)의 전세(田稅)는 상납하고, 하도(下道)는 주창(州倉)에 납입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호조 참의 정은(鄭垠)·형조 참의 한언(韓堰)·이조 참의 최한정(崔漢禎)·예조 참의 김자정(金自貞)은 의논하기를,
"1. 선군의 호수는 한 달마다 서로 교체하여 휴식하는 날이 적으니, 진실로 가긍(可矜)합니다. 호수를 택하여 〈보인을〉 통솔하게 하고, 보인도 또한 원패를 주어서 윤차(輪次)로 입번하게 하며, 나머지 세 집[家]에서 힘을 합하여 돕게 하면 보인도 모두 선상(船上)에 익숙하게 되어 완급(緩急)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제(子弟)는, 호를 달리한 자 외에는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않는 것이 또한 편하겠습니다.
1. 연변의 성보는 진실로 마땅히 급히 쌓아야 하고, 내지(內地)의 성보도 또한 늦출 수 없습니다. 양산(梁山)과 동래(東萊) 같은 데에 성보가 없는 것은 더욱 불가하니, 양산 이상에서부터 낙동강변의 각 고을의 성보를 완급(緩急)을 헤아려서 점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1. 경상도의 군수(軍需)가 비록 ‘넉넉하지 않다.’고 하지만, 병신년287) 동등(冬等)의 회계(會計)한 수가 1백 65만 6천 8백 30여 석이고, 같은 해[同年]에 〈전세(田稅)의〉 반이 주창(州倉)에 가납(加納)된 것이 7천 2백 70여 석이며, 삼포(三浦)의 왜료(倭料)가 2만 2천 3백 90여 석이며, 국둔전(國屯田)288) 의 소출과 감사(監司) 및 각 고을에서 보첨(補添)한 것이 또한 많으니, 해마다 이와 같이 저비(儲備)하면 비록 크게 넉넉하지는 못하더라도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본도(本道)의 전세(田稅)를 주창(州倉)에 납입하게 하고, 충청도·전라도의 전세를 〈경창(京倉)에〉 충납(充納)하게 하면, 반드시 그 도(道)의 주창에 납입할 것으로 충당하게 되어 양도의 주창에 납입되는 것이 또한 매우 넉넉지 못할 것이니, 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조선(漕船)은 상공(常貢)을 운반하는데도 항상 부족됨이 염려되고, 〈충청도·전라도가〉 비록 연분(年分)289) 이 높아서 혹 충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조운(漕運)하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만약에 본도의 창고에 유치(留置)된 수가 넉넉하지 않다고 하여 부득이 이를 더한다면, 본도에서 1년에 군자(軍資)로 상납하는 수가 6천 석에 내려가지 않고, 경창(京倉)에 저축된 것 또한 부족하지 않으니, 햇수를 한(限)하여 주창에 납입하게 하고, 다른 도(道)로 하여금 충납하지 말게 함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대사헌(大司憲) 김영유(金永濡)는 의논하기를,
"1. 선군(船軍)은 정병(正兵)에 비하여 아주 고통이 심합니다. 여러 진(鎭)의 정병은 4번(番)으로 나누어서 한 달씩 부방(赴防)하는데, 선군은 다만 2번으로 나누어서 한 달마다 서로 교체하니, 비록 한 달이라고 하지만, 하령(下領)290) 하여 있는 곳이 본포(本浦)와의 거리가 누일정(累日程)291) 이 되니, 왕래(往來)하는 일수(日數)를 제하면 집에 있는 것이 겨우 20여 일인데, 하물며 그 선상(船上)의 육물(陸物)을 하령 군인(下領軍人)으로 하여금 취판(取辦)하게 하므로, 그 집에 있는 날은 더욱 적습니다. 또 정군(正軍)인 자는 원패(圓牌)에 얼굴 생김새[形貌]와 나이[年歲]를 세겨서 소지[佩持]하여, 비록 농사철[農月]을 당하여도 한결같이 대신(代身)하지 못하므로, 매양 번을 당할[當領] 때마다 양물(糧物)의 값이라 칭하고 면포(綿布) 수필(數匹)을 으레 보인(保人)에게서 거두니, 1년의 여섯 달 동안에 당령 면포(當領綿布)가 거의 10여 필에 이릅니다. 이로 인하여 정군과 보인이 함께 곤(困)하고, 능히 역(役)을 감당할 수 없어서 거의 모두 도산(逃散)하니,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선군이 비록 정병과 같이 4번으로 나누어서 교대로 쉬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보인의〉 3정(丁)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하니, 마땅히 장실한 자[實丁]를 택하여 〈법에 정한 바〉 수에 의해 정급(定給)하고, 만약에 동거(同居)하는 보(保)292) 외에 여정(餘丁)이 있으면, 다른 역(役)을 정하지 말아서 그 삶을 후하게 하고, 또 진무(鎭撫)·영선(領船)293) 이 부득이하여 임사(任使)294) 하는 것 외에는 장실(壯實)한 보인도 또한 대립(代立)하도록 허락함이 어떻겠습니까?
1. 경상도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은 〈땅이〉 비록 작고 좁더라도 모두 성보(城堡)가 있는데, 연해에서 1,2일 노정(路程)인 내지의 여러 고을은 염려가 없다고 하여 일찍이 성을 쌓지 않았으니, 이미 실책(失策)입니다. 또 김해(金海)의 황산강(黃山江) 위에서부터 상주(尙州)의 낙동강에 이르기까지는 왜인(倭人)이 이 수로(水路)를 따라 왕복하는데, 만약 〈이들이〉 난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비록 1,2일 노정이라 하더라도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 진실로 어렵지 않습니다. 연강(沿江)의 여러 고을에 성보가 없는 것도 또한 미편하니, 비록 한 달[期月] 만에 다 쌓지는 못하더라도 영산(靈山) 이하 여러 고을에 먼저 쌓고, 그 나머지 여러 고을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연한(年限)을 작정(酌定)하여 큰 고을은 그 고을로 하여금 스스로 쌓게 하고, 작은 고을은 이웃 고을과 같이 힘을 합하여 쌓게 함이 실로 편리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또 산성(山城)도 또한 수축(修築)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간혹 한 성(城) 내에 여러 고을의 곡식이 있으면, 〈수축할 곳을〉 자로 재어 나누어 주어서 힘을 합하여 수축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1. 경상도의 저축[蓄積]은 왜료(倭料)의 비용으로 인하여 전라도에 비하여 그 수효가 배(倍)나 감(減)해질 뿐만 아니라, 좌·우도(左右道)가 일면(一面)이 바닷가이고, 왜(倭)와의 거리가 가까와서 방어(防禦)가 가장 긴급하니, 군수(軍需)를 예비(豫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주(晉州)·고성(固城) 등 여러 고을은 전세(田稅)를 납입하는 가흥창(可興倉)과의 거리가 가장 멀어 그 정도(程途)가 혹 10여 일이 되고, 문경(聞慶)·풍기(豊基) 등 여러 고을이 가장 가까운데, 또한 2,3일에 내려 가지 아니하니, 해마다 큰 재[大嶺]를 넘어서 멀리 다른 도(道)로 수송하는데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상사(常事)이기 때문입니다. 전라도는 나주(羅州)의 영산창(榮山倉)과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 함열(咸悅)의 덕성창(德城倉)에 각각 가까운 데로 수송해 납입하니, 먼 곳이 불과 4,5일정에 지나지 않으므로, 경상도의 거민(居民)에 비하여 멀리 수송하는 폐단과 노일(勞逸)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다만 전라도의 전세는 모두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간혹 표몰(漂沒)할 염려가 있으니, 신은 생각건대, 경상도의 1년에 상경(上京)하는 전세를 반(半)을 감(減)하여 그 도(道)의 주창(州倉)에 납입하고, 그 감한 수를 전라도 안에 이정(移定)하여 도(道)를 나누어서, 상도(上道)의 여러 고을은 충청도의 범근내창(犯近乃倉)에, 하도(下道)의 여러 고을은 각각 부근의 영산창과 덕성창에 예전대로 수납(輸納)하게 하면, 충청도의 내포(內浦)의 선운(船運)이 표몰(漂沒)될 염려가 없고, 전라도의 해운(海運) 또한 감생(減省)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이약동(李約東)과 집의(執義) 김승경(金升卿)·사간(司諫) 윤민(尹慜)·장령(掌令) 김극검(金克儉)·지평(持平) 윤기반(尹起磻)·헌납(獻納) 강거효(姜居孝)·정언(正言) 박처륜(朴處綸)은 의논하기를,
"선군(船軍)의 정(正)·보(保)에게 아울러 원패(圓牌)를 주어서 순환(循環) 입번(立番)하게 하고, 동거하는 자제(子弟)에게 다른 역(役)을 정하지 않는 일과, 연변의 성보(城堡)와 낙동강변의 읍성(邑城)을 급히 쌓는 일은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경상도의 전세(田稅)를 모두 주창(州倉)에 납입하고, 그 납입되는 수를 계산하여 전라도·충청도 양도의 군수(軍需)로 충납(充納)하는 것은, 조운(漕運)할 때에 표몰(漂沒)될 염려가 있고, 조졸(漕卒)도 또한 그 해(害)를 받으니, 매년 전세(田稅)를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서 전수(全數)를 노정(路程)의 원근(遠近)을 헤아려 상도(上道)는 가흥창(可興倉)에 납입하고, 하도(下道)는 주창에 납입하여 그 군수(軍需)가 풍족[周足]하기를 기다려 예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의논이 들어가니, 전교하기를,
"선군의 보인 가운데 장실(壯實)한 자를 택하여 아울러 원패를 주고, 패의 모양은 정군(正軍)이 차는 것과 같게 하되, 조금 작게 하여 정군이 유고(有故)하면 대신 입번[代立]하게 하고, 또 동거(同居)하는 여정(餘丁)은 다른 역(役)을 정하지 말며, 하삼도(下三道)의 연변(沿邊)과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은 성을 쌓을 만한 곳을 감사(監司)로 하여금 심정(審定)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올 가을부터 쌓기 시작하고, 경상도의 군수(軍需)가 풍족할 때까지 한하여, 상도(上道)의 전세(田稅)는 경창(京倉)에 납입하고, 중도(中道) 이하는 각각 주창(州倉)에 납입하는 것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7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2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군사-부방(赴防)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농업-전제(田制) / 농업-농작(農作) / 외교-왜(倭)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77]원패(圓牌) : 선군(船軍)의 신분 증명서. 한 면에는 부모의 성명, 본인의 이름·나이·생김새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거주지와 소속 포(浦)·영(領)을 새기고, 전자로 선군이란 낙인을 찍었음.
- [註 278]
보인(保人) : 정병(正兵)을 돕게 하기 위하여 둔 군보(軍保). 원래는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에 정병의 농사일과 뒷바라지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나, 뒤에 군대의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역(役)을 면제하여 주고, 그 댓가로 삼베나 무명 따위를 받아들였음. 보(保).- [註 279]
노일(勞逸) : 수고로움과 편안함.- [註 280]
해령(海領)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선군에게 주던 무관직의 벼슬인데, 40개월에 1개급씩 승진시켜 종2품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이르면 그치게 하였음.- [註 281]
장권(奬勸) : 장려하여 권함.- [註 282]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 [註 283]
재감(裁減) : 헤아려서 덜어버림.- [註 284]
가계(加階) : 품계를 올리는 일.- [註 285]
구천(九天)의 위와 구지(九地)의 밑 : 하늘의 가장 높은 곳과 땅의 가장 낮은 곳. 즉 적이 발견하기 어렵고 예측하기 어려운 곳을 말함.- [註 286]
입방(立防) : 입번하여 방수함.- [註 287]
병신년 : 1476 성종 7년.- [註 288]
국둔전(國屯田) : 수자리 사는 군사가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군자(軍資)에 충당하던 토지를 말함.- [註 289]
연분(年分) : 그 해의 농사의 풍흉에 따라서 토지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던 제도.- [註 290]
하령(下領) : 수군(水軍)에서는 하번(下番)을 하령(下領), 당번(當番)을 당령(當領)이라 함.- [註 291]
누일정(累日程) : 여러 날이 걸리는 노정(路程).- [註 292]
보(保) : 보인.- [註 293]
영선(領船) : 조운선(漕運船) 1척 안의 조졸(漕卒)을 거느리는 우두머리. 10척에 통령(統領) 1인, 30척에 천호(千戶) 1인을 두었음.- [註 294]
임사(任使) : 책임을 지워서 부림.○命曾經政丞、議政府、六曹, 曾經慶尙道監司ㆍ節度使、忠勳府堂上一品, 會闕庭議事: 一。 船軍戶首, 獨受圓牌立番, 一朔相遞, 往返之間, 家居休息, 僅二十餘日, 不堪其苦, 流散者有之。 其保人竝給圓牌, 互相立番, 以均勞逸, 且同居子弟, 勿定他役事。 一。 沿邊城堡, 固宜急築, 內地城堡, 亦不可不築。 且其中倭人所經洛東江邊邑城, 尤宜急築事。 一。 慶尙道軍需不裕, 其上納田稅, 納於州倉, 計所入之數, 以全羅、忠淸兩道軍需充納事。
上黨府院君 韓明澮左議政沈澮、昌寧府院君 曺錫文議: "一。 水軍給保三名, 而同居二丁外, 奪充他役, 戶首立番之期甚數, 日就凋殘, 流亡相繼。 乞依古典, 水軍勿移易, 餘丁雖多, 勿充他役, 絶戶田地, 移給繼戶之人, 貢賦外一應徭役, 申明蠲免, 戶首保人皆給牌, 輪次入番, 如有才能者, 授海領職奬勸。 一。 梁山、密陽、晋州、咸安、漆原、靈山、宜寧、彦陽、丹城、永川、大丘、淸道、慶山等邑, 雖曰內地, 或近邊, 或倭客經由之路, 無城堡不可, 所宜急築。 且洛東江兩邊草溪、昌寧、玄風、星州、善山、仁同、軍威等邑, 亦當急築, 然不可驟辦, 當於農隙, 各令其官築之, 所築之數, 每歲抄啓聞。 然法不可徒行, 築城郭、實水軍, 皆監司之任, 得人而任其責, 勿拘箇月, 期於有成, 則二事可能粗備。 一。 慶尙道諸邑會計米豆雜穀幷一百六十五萬六千八百餘碩, 且年前以右道軍需不足, 每歲以田稅五千一百餘碩, 除上納補州倉, 數年之後, 則所補必多, 不必更議。" 坡川府院君 尹士昕、光山府院君 金國光、左贊成尹弼商、吏曹判書洪應、右贊成徐居正議: "一。 凡水軍戶首, 則例以射御可當者差之; 保人不得已或以殘劣者充給, 其戶首憚於立番, 以保人代送, 以致防禦疎虞, 故立戶首圓牌之法。 今若幷保人給牌, 則弊復如前, 當依《大典》仍舊, 其同居子弟, 雖過保數二人, 毋定他役, 亦載《大典》, 宜仍舊。 但徭役蠲免之法, 申明而已。 一。 諸邑城堡, 固當修築, 沿邊爲最急。 然築城大事, 不可遙度而定議也, 姑令下三道觀察使、節度使, 沿邊近處無城堡諸邑, 同審可築處, 磨鍊以啓後更議, 令所在官, 農隙漸次修築, 每歲季其年所築尺數啓聞。 且倭人所經非徒洛東江, 亦有陸路, 洛東江邊諸邑, 不必爲先築城也。 先築沿海諸邑, 次築內城諸邑便。 一。 戶曹曾以慶尙道軍需不足, 除上納田稅, 納州倉, 不必更議。" 左參贊任元濬、陽川君 許琮、武靈君 柳子光、文川君 柳洙議: "一。 船軍擇其强者爲戶首, 弱者爲保, 而戶首給圓牌者, 使不得代替, 欲慣於操船也。 今若竝令保人循環立番, 則其戶首之强者, 憚於往戍, 而在營門者, 皆弱保矣。 儻有緩急, 不可爲也, 仍舊爲便。 但船軍役最苦, 人皆規避, 故船軍戶雖過三丁, 毋定他役, 世宗朝法也。 今於二丁外, 竝抽差役, 人將不堪當, 依世宗朝之法。 一。 倭人所經之路, 凡三道非但洛東江, 則三道諸邑城, 豈可一一築之? 但沿海郡縣城堡, 量緊慢漸次築之爲便。 古人慮事周密, 雖內地皆築山城, 但歲久不修, 多有頹落, 亦令監司、節度使巡審, 令其本邑之人, 待年豐農隙完築, 以備不虞何如? 一。 戶曹已計所用預備之, 不至苦乏, 不須更議。 但近年倭人來往倍多, 而所求無窮, 歲賜則今難改也, 別例之賜, 務從裁減, 以杜後日之弊爲便。" 花川君 權瑊、韓城君 李塤、光城君 金謙光、鐵城君 朴居謙、漢城府判尹尹欽、禮曹判書李承召、工曹判書李芮、刑曹判書尹繼謙議: "一。 《大典》內, ‘諸道水軍以四萬八千八百爲定額, 而常佩圓牌。 水軍節度使巡行試才, 仕滿三百六十加階, 每年用一都目, 從四品去官, 仍仕者, 仕滿四百五十而加階, 至正三品而止’, 其待之重矣。 ‘給一保一丁, 而同居族親雖過保數, 毋定他役, 戶內雜役竝皆蠲免’, 則其恤之至矣。 今若令保人輪次立番, 則與正軍無異, 不可不給保, 不可不授職, 《大典》之法, 一切改之而後可行也。 臣等妄謂今方改軍籍, 更擇强壯者充正軍, 申明蠲役之法, 當立番時, 正軍或有故, 所在守令, 以其保給狀代送, 竝錄其容貌年歲, 則戶首不至獨受其苦, 亦無代立之弊。 一。 諸道諸邑竝令築城, 祖宗朝已講之策也, 第因多事或年歉, 未得擧行。 今國家無事, 諸道年豐, 先築沿邊城堡, 漸及內地爲便。 一。 慶尙道見在軍需, 過百萬餘碩, 且每年租稅, 留其半於州倉, 則軍需不爲不裕, 不必盡納州倉也。 若至乏少, 則戶曹亦自臨時區處, 仍舊爲便。" 吏曹參判李坡、戶曹參判李恕長議: "一。 船軍一人給一保一丁, 而只給戶主圓牌, 使之長立番者, 欲其慣於操舟也。 然道途往返之間, 勞逸不均, 且有緩急, 則爲保者, 豈獨在家不預水戰乎? 儻正軍有故, 當使保代之, 安可不習而遽能慣熟乎? 若竝給圓牌而同其體制, 則名分混淆, 宜異其制, 正稱正, 保稱保, 正一保二輪次立番, 則庶勞逸得中矣。 若同居子弟二人毋定他役, 則已載《大典》。 今若竝令保人立番, 亦不可無助, 幷給同居一人爲便。 國初船軍一差之後, 父子相傳以爲世業, 今苦於其役, 百計規免, 而國家亦無禁防, 故數遞其役, 不能專業, 依國初故事, 一差之後, 竝子孫勿定他役, 厚復其戶, 海領之職, 亦宜優陞。 一。 國家昇平日久, 南方防禦, 最爲疎虞。 滄溟限帶封域, 何處非賊路乎? 然勢不可一一防戍, 必擇要害戍之。 水鎭則然矣, 若陸地州郡, 則不擇要害, 率皆沿海置邑而無城, 若昌原、蔚山、梁山之類, 萬有不虞, 奔逬四散。 若有城可依, 閉門固守, 徐爲之計, 足以禦敵, 沿海之城, 固當先築矣。 雖非海邊, 其次要害之地及倭人來往沿路諸邑, 亦不可不築。 然勢難猝築, 各令本邑之民, 今年築一面, 明年築一面, 毋令擾民, 本道邇來年頗豐登, 來秋始築爲便。 一。 今考慶尙道會計, 見在之數, 無慮百萬餘碩, 而屯田所出、監司、守令別儲之數, 亦不下數千餘碩。 每年田稅一半, 又入州倉, 本道所畜, 亦已足矣。 且於近賊無城之地, 多儲米穀, 以啓戎心, 亦爲不可, 依舊上納爲便。 若全羅、忠淸兩道米𥸴充納之議, 甚不可。 漕轉之船, 於常貢猶且不足, 況兩道國家府庫之地, 不可不多畜也。 一。 臣等今因問及南方之事, 敢以平日所懷更陳之。 國家以釜山浦 倭船初泊之處, 不宜大將所居, 乃移水軍節度使營於開雲浦, 因其時觀察使所啓也。 其意以爲兵法藏於 ‘九天之上, 九地之下’, 大將不可壓居初面, 先示單弱也, 故發此議也。 然釜山浦恒居倭人, 慣知水使所管軍人强弱多小以及姓名, 本道亦豈不知乎? 以此爲嫌, 棄要害之地, 引而避寓於他處, 而又近於鹽浦, 則是諱此而揚彼也。 且南方最害處有三, 曰薺浦, 曰釜山浦, 曰鹽浦。 然薺浦則前有水使鎭及巨濟, 後有兵使鎭及昌原, 而居其中, 首尾可救, 鹽浦亦近兵使之營, 而獨釜山浦則只以裨將戍之, 無乃不可乎? 開雲浦亦在蔚山, 水營ㆍ兵營同在一郡, 咫尺之間, 兩大將相對, 而要害如釜山, 則獨留裨將, 此臣等之未解也。 萬一釜山先受敵, 則兩大將其能及援乎? 乞仍舊還移釜山浦, 甚便。" 禮曹參判李克墩議, "一。 船軍保人皆給圓牌, 循環立番, 似爲均逸; 其保人率皆單弱, 若皆令立防, 則防禦不無虛疎。 臣意謂擇保人强壯者一人給牌, 與正軍相遞立番, 則勞逸得宜, 而防禦不至虛疎。 但《大典》, ‘水軍給一保一丁, 同居子壻弟, 雖過保數二人, 毋定他役。’ 以此官吏給保時, 或以同居者給之。 然則一家專支一朔立防, 一年六度往返, 甚可矜也。 臣意船軍保人, 皆以戶別者給之, 其同居子弟, 依《大典》, 限二人毋定他役何如? 一。 國家昇平幾百年, 正當戒不虞之時。 沿邊城堡, 固宜急築, 內地城堡, 亦不可緩。 然近來築城, 只用其邑軍丁, 故一年所築, 不過五十餘尺, 以此計之, 則幾至五十年而後畢築。 臣意以謂如梁山城, 則以慶州領內諸邑築之, 昌原城則以晋州領內諸邑築之, 則役易就而事易成矣。 若言煩民太多, 則成大功者, 豈計小害? 今年築一城, 明年築一城, 度其緩急, 均其勞逸, 漸築何如? 一。 近年京外儲蓄不均, 什九在內, 什一在外, 以此諸邑所儲不裕。 往者以慶尙道用度太多, 量減上納之數, 移納州倉, 今已大槪一百六萬餘碩, 然不至有餘。 議者之言, 量減州倉似可, 但全羅、忠淸兩道田稅代數上納之事, 則京中所儲不爲不少, 兩道漕運亦不易, 勿擧行何如?" 工曹參判洪道常、前節度使金舜臣、行僉知中樞府事尹壕、刑曹參判尹孝孫議: "一。 船軍戶首給圓牌, 一朔相遞立番, 休息日少, 獨受其苦。 保人則全不立番, 不得慣於操舟, 緩急無用。 議者曰: ‘保人三丁皆給圓牌, 循環立番。’ 非徒騷擾, 壯弱不同, 防戍或疎, 有乖大體。 戶首只給圓牌, 擇保人强壯者一人, 稱某保人, 竝錄形貌年歲, 假授圓牌, 輪次立番, 以均勞逸何如? 一。 築城不可緩也, 而重用民力。 沿邊及內地, 無城堡諸邑多, 脫有不虞, 將何以禦之? 以生道使民, 雖勞不怨, 視歲豐歉, 每當農隙, 各以近處居民築之, 始自沿邊, 今年築一城, 明年築一城, 漸以築之何如? 一。 京倉軍需, 不爲不裕, 忠淸、全羅道漕運亦不易, 限慶尙道軍需周足, 上道田稅則上納, 下道則納州倉, 何如?" 戶曹參議鄭垠、刑曹參議韓堰、吏曹參議崔漢禎、禮曹參議金自貞議: "一。 船軍戶首, 一朔相遞, 休息日少, 誠爲可矜。 擇戶首令統率, 而保人亦給圓牌, 輪次立番, 而餘三家共力助之, 則保人皆得慣於船上, 緩急可用矣。 其子弟戶別者外, 毋定他役亦便。 一。 沿邊城堡, 固宜急築, 而內地城堡, 亦不可緩。 如梁山與東萊無城堡, 尤不可, 自梁山以上洛東江邊各邑城堡, 量其緩急, 漸以築之爲便。 一。 慶尙道軍需, 雖曰不裕, 丙申年冬等會計之數一百六十五萬六千八百三十餘碩, 同年一半州倉加納七千二百七十餘碩, 三浦倭料二萬二千三百九十餘碩; 國屯田所出、監司及各官補添亦多, 年年如此儲備, 雖不大裕, 亦非不足。 若以本道田稅納于州倉, 使忠淸、全羅道田稅充納, 則必以其道州倉所入充之, 兩道州倉所入, 亦甚不敷, 充納爲難。 且漕船恒貢之運常患不足, 雖年分高而或事可充納, 漕運亦難。 若以本道留庫之數爲不裕, 而不得已加之, 則其道一年軍資上納之數, 不下六千碩, 京倉所儲, 亦非不足, 限年納其州倉, 勿令他道充納爲便。" 大司憲金永濡議: "一。 船軍視正兵最苦。 諸鎭正兵, 分四番一朔赴防, 船軍則只分二番, 一朔相遞, 雖曰一朔, 下領所居, 距本浦累日程, 則除往來日程, 在家纔二十餘日, 況其船上陸物, 使其下領軍人取辦, 其在家之日尤少。 且正軍者, 圓牌刻形貎年歲佩持, 雖當農月, 一不代身, 每於當領, 稱糧物之價, 綿布數匹例取保人, 一年六朔當領綿布, 幾至十餘匹。 因此正軍、保人俱困, 不能當役, 率皆逃散, 此非細故也。 臣意謂船軍雖不得如正兵分四番更休, 其三丁有名無實, 宜擇實丁, 準數定給, 如有同居保外餘丁, 毋定他役, 以厚其生, 且鎭撫領船, 不得已任使外, 壯實保人, 亦許代立何如? 一。 慶尙道沿海諸邑, 則雖卑隘皆有城堡, 自沿海一二日程內地諸邑, 則以爲無虞, 不曾築城, 已爲失計。 又自金海 黃山江上至尙州 洛東江, 倭人由此水路往還, 如欲作耗, 雖一二日程, 乘船沿泝, 誠不難矣。 沿江諸邑無城堡, 亦爲未便, 縱不得期月盡築, 靈山以下諸邑先築, 其餘諸邑, 自外而內, 酌定年限, 大邑則使其官自築之, 小邑則同傍邑幷力築之, 實爲便益。 且山城亦不可不修築, 或一城之內, 數邑之穀在焉, 尺量分授, 同力修築何如? 一。 慶尙道蓄積, 以倭料之費, 視全羅道其數不啻倍減, 左右道一面濱海, 距倭密邇, 防禦最緊, 其軍需不可不預備。 晋州、固城等諸邑, 距田稅所納可興倉最遠, 其程途或十餘日, 聞慶、豊基等諸邑最近, 而亦不下二三日, 年年踰大嶺, 遠輸他道, 而民不怨者, 以其常事也。 全羅道則羅州 榮山倉、靈光 法聖倉、咸悅 德城倉, 各以附近輸納, 遠者不過四五日程, 其視慶尙居民遠輸之弊, 勞逸懸絶。 但全羅田稅, 皆由海路, 間有漂沒之患。 臣謂慶尙道一年上京田稅減一半, 納其道州倉所減之數, 移定於全羅道; 中分其道, 上道諸邑於忠淸道 犯近乃倉, 下道諸邑各以附近榮山倉、德城倉, 依舊輸納, 則忠淸道內浦船運, 無漂沒之患, 全羅海運亦可省矣。" 大司諫李約東、執義金升卿、司諫尹慜、掌令金克儉、持平尹起磻、獻納姜居孝、正言朴處綸議: "船軍正、保竝給圓牌, 循環立番, 同居子弟, 毋定他役事, 及沿邊城堡與洛東江邊邑城急築事, 依所啓施行何如? 慶尙道田稅皆納州倉, 計其所入之數, 以全羅、忠淸兩道軍需充納, 則漕運之際, 慮有漂沒之患, 漕卒亦受其害, 每年中分田稅全數, 計程遠近, 上道則納于可興倉, 下道則納于州倉, 待其軍需周足, 依舊何如?" 議入, 傳曰: "擇船軍保人中壯實者, 竝給圓牌, 牌形, 與正軍所佩差小, 正軍有故, 使之代立, 且同居餘丁, 勿定他役, 下三道沿邊及內地諸邑可築城處, 令監司審定啓聞後, 來秋始築, 慶尙道軍需限周足, 上道田稅納京倉, 中道以下各納州倉等事, 令該曹議啓。"
- 【태백산사고본】 12책 7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2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군사-부방(赴防)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농업-전제(田制) / 농업-농작(農作) / 외교-왜(倭)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