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의 대우, 하삼도의 축성, 경상도의 군량 비축, 중국 물건의 무역 금지 등을 의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미치자, 대사간(大司諫) 이약동(李約東)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도 처치사(慶尙道處置使)가 되었었는데, 군사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자는 선군(船軍)입니다. 선군은 매양 한 달[一朔]마다 서로 교체(交遞)하므로, 한달 사이에서 왕복(往復)하는 것을 체하고 그 나머지 한가한 날이 8.9일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수령(守令)이 또 뒤쫓아서 이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가난한 자는 유망(流亡)하고 부자는 피하기를 꾀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선군들이 그 역(役)에 오래 종사하여 배[船]를 다루는 데 익숙한 자가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는 선군의 전지(田地)는 사람들이 매매(買賣)할 수 없고, 수령이 부호(扶護)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었는데, 지금은 이런 영(令)이 없기 때문에, 〈선군들이〉 유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한 사람을 정하고 내일 한 사람을 정하니, 사람들이 그 역에 오랫동안 종사하는 자가 없으며, 또 수호(首戶)한 사람이 독자(獨自)로 입번(立番)하여 그 업(業)을 오로지하게 하나, 그 사람이 죽으면 뒤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동거(同居)하는 자식(子息)과 고공(雇工)은 다른 역을 정하지 말고, 다시 서로 체대(遞代)하여 입역(立役)하게 하면, 수호(首戶)는 어깨를 펴고 쉴 수 있고, 물에 익숙한 자도 또한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어떠한가?"
하니, 조석문(曺錫文)은 아뢰기를,
"이약동의 말이 옳습니다. 국가에서 선군(船軍)을 두고 대우하기를 심히 우대(優待)하여, 옛날에는 선군으로 벼슬이 가선(嘉善)에 이른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신고(身苦)가 전에 비하여 배(倍)나 되는데도 애호(愛護)하지 않으니, 어느 누가 소속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저들은 모두 물의 성질[水性]을 익히지 아니하여, 평시(平時)를 당해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면 신기(神氣)가 황홀(怳惚)하여 동서(東西)를 판별하지 못하니, 어찌 배를 다루어서 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수령(守令)이 선군을 구휼(救恤)하지 않는 자는 파출(罷黜)하는 법이 이미 세워졌으나, 만호(萬戶)는 변방에 기거(寄居)하고, 오직 수령에게만 의지하니, 누가 능히 거핵(擧劾)273) 하겠습니까? 단지 이것만이 아닙니다. 전선(戰船)이 여러 가지 기구가 매우 많은데, 선군이 단약(單弱)해서 전혀 갖추지를 못했으니, 갑자기 〈적변의〉 경계(警戒)가 있으면 어떻게 이를 쓰겠습니까?
또 우리 나라의 방어는 남방(南方)보다 중함이 없는데, 남방의 읍성(邑城)이 견고하지 못하고, 우리 나라가 승평(昇平)한 지 1백 년이 되니, 만약에 불우(不虞)의 변(變)이 있게 되면 이를 방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연해(沿海)의 군(郡)에는 모두 성(城)이 있지만, 내지(內地)에는 성이 없어서, 왜적(倭賊)이 만약 성이 없는 길을 경유하여 틈을 타서 내군(內郡)으로 들어오게 되면, 화(禍)의 발생이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하삼도(下三道)의 주군(州郡)에 모두 성을 쌓아야만 마땅합니다. 지난 갑술년274) 에 경상도 백성의 와언(訛言)에 ‘왜변(倭變)이 있을 것이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으니, 그 당시에 만약 성이 있었다면, 모두 성중(城中)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아뢰기를,
"신이 세조조(世祖朝) 때에 나주성(羅州城)을 쌓도록 청하였는데, 이연손(李延孫)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폐단을 진달(陳達)하여 이를 정지 하였다가, 신이 다시 청론(請論)한 연후에 쌓았습니다. 무릇 성을 쌓는 것이 방어(防禦)의 대계(大計)인데,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된 자가 일시의 폐단만 따지고 먼 장래에 대한 생각[遠慮]을 돌보지 아니하여, 문득 그 불가(不可)함을 말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그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그 고을[邑]의 대소(大小)에 알맞게 각자 수축(修築)하게 하면, 거의 가(可)할 것입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왜적(倭賊)이 깊숙이 들어와 겁탈을 하며 곧바로 한강(漢江)까지 이르고, 혹은 갑자기 개성(開城)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곽(城郭)이 없었던 소치입니다. 만약에 전라도가 적로(賊路)의 요해(要害)인데도 왜적의 방비가 좀 늦추어졌다고 한다면, 경상도는 왜로(倭路)의 요충(要衝)에 해당하고, 삼포(三浦)의 왜(倭) 또한 국가에서 염려해야 할 바입니다. 만약에 적왜(賊倭)가 변경을 범하면, 이 무리들이 향도(鄕導)가 되어서 중심부[腹中]로 끌어들일지 알 수 없으며, 우리 나라에 만약 변(變)이 있으면, 이 무리들이 틈을 타서 난(亂)을 일으킬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성은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영유(金永濡)는 아뢰기를,
"경상도는 왜노(倭奴)가 왕래하는 땅이 되는데, 양곡(糧穀)의 저축이 많지 않으므로, 만약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같은 것이 있게 되면, 한 현(縣)에서 사졸(士卒)이 하룻동안 먹을 것도 판비(辦備)할 수 없으니, 다른 도(道)의 주창(州倉)의 세(稅)를 서울로 운송하고, 경상도의 세(稅)는 전부 주창으로 들여서, 〈군량의〉 저축을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대창(大倉)의 곡식을 백만억(百萬億)에 이르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곧 대창을 증수(增修)하겠는데, 이 일을 마땅히 여러 정승(政丞)에게 의논하겠다."
하였다. 김영유(金永濡)가 아뢰기를,
"지금 호부(豪富)275) 의 집에서 청화기(靑畫器)를 다투어 쓰는데, 중국의 물건[唐物]은 저절로 올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수송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 폐단이 작지 않으니, 청컨대 엄히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물건을 무역하지 못하도록 일찍이 이미 법을 세웠으니, 그것을 거듭 밝히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7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2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토지매매(土地賣買)
- [註 273]
○戊申/御經筵。 講訖, 大司諫李約東啓曰: "臣嘗爲慶尙道處置使, 軍士中最苦者船軍也。 船軍每一朔相遞, 而於一朔之間, 除往返其餘閑日, 不過八九日, 守令又從而役之, 人不堪苦, 貧者流亡, 富者謀避, 由是船軍無有久其役而慣於操船者。 古之時, 船軍之田, 人不得買賣, 守令不扶護者罪之, 今則無此令, 故因以流亡。 今日定一人, 明日定一人, 人無久於其役者, 又首戶一人, 獨自立番, 使專其業, 然其人死, 則後無人能繼其事者。 臣謂同居子息雇工, 毋定他役, 更相遞立, 則首戶可以息肩, 慣水者亦多矣。" 上謂左右曰: "何如?" 曺錫文曰: "約東之言然矣。 國家置船軍, 待之甚優, 古之時船軍有職至嘉善者, 今則身苦倍前, 而不以愛護, 人誰願屬? 彼皆不習水性, 當平時乘舟入海, 神氣怳惚, 莫辨東西, 安可操舟以禦敵乎? 守令不恤船軍者罷黜之法已立, 然萬戶寄居邊方, 唯守令是依, 誰能擧劾乎? 不特此也。 戰舸諸緣甚多, 而船軍單弱, 專不備具, 卒然有警, 何以用之? 且我國防禦, 莫重於南方, 而南方邑城不固, 我國昇平百年, 脫有不虞, 無以禦之。 雖沿海之郡皆有城, 而內地無城, 倭若由無城之路, 乘隙而入于內郡, 則禍生不測, 臣謂下三道州郡, 皆可築城矣。 去甲戌年, 慶尙道民訛言有倭變, 人皆奔竄, 當其時若有城, 則皆入于城中矣。" 韓明澮曰: "臣於世祖朝請築羅州城, 而李延孫爲全羅道觀察使, 陳弊而停之, 臣更請論然後築之。 夫築城防禦之大計, 而爲監司、守令者, 計一時之弊, 不顧遠慮, 輒言其不可。 臣以爲使其州郡, 稱其邑之大小, 各自修築, 則庶乎其可矣。 麗季倭深入爲寇, 直至漢江, 或猝入開城。 此無他, 無城郭所致也。 若全羅道, 雖曰賊路要害, 而防倭差緩, 慶尙道當倭路之衝, 而三浦之倭, 亦爲國家之所慮也, 如賊倭犯邊, 則此輩爲鄕導, 引入腹中, 未可知也。 我國若有變, 則此輩乘釁爲亂, 亦未可知也。 由是言之, 城不可不築也。" 大司憲金永濡啓曰: "慶尙道當倭奴往來之地, 而積蓄不廣, 脫有如(李)李施愛之亂, 則無一縣能辦士卒一日之餉者。 以他道州倉之稅輸于京, 而慶尙之稅全入州倉, 以備蓄積何如?" 上曰: "世祖嘗欲大倉之粟至于百萬億。 故今乃增修大倉, 此事須議諸政丞。" 永濡曰: "今豪富之家, 兢用靑畫器, 唐物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 其弊不貲, 請痛禁。" 上曰: "勿貿唐物, 曾已立法。 其申明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7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42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재정-전세(田稅) / 재정-창고(倉庫) /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농업-토지매매(土地賣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