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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70권, 성종 7년 8월 16일 병술 3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성균관 유생들이 민발에게 준 성균관 노비의 환속을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민미(閔敉) 등이 상소하기를,

"본관(本館)의 노비(奴婢)는 다른 공천(公賤)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고려[前朝]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위로는 선성(先聖)을 위하고 아래로는 유학(儒學)을 위하여, 자기의 비용을 써가면서 〈노비까지〉 성균관에 바쳐 영구히 국학(國學)의 노비[臧獲]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조종(祖宗)에서는 80여 년 사이에 아홉 번이나 선지(宣旨)를 반포하여 〈노비의〉 다른 역사(役事)를 감하여 면제해주고, 심지어는 궐내(闕內)의 역사까지도 모두 면제하도록 하였으니, 조종에서 국학을 숭상하고 중시하여 양현(養賢)만 오로지 담당하게 한 것은, 지극하고 극진한 것입니다. 그런데 민발(閔發)은 이러한 뜻을 무시하고 다만 자기의 욕심을 따라, 스스로 종[奴] 장생(長生)과 계집종[婢] 도치(都致)를 공신(功臣)의 노비로 삼아 두 번이나 성청(聖聽)을 번독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발이 비단 우리 선성(先聖)의 만세(萬世)의 공(功)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종에서 아홉 번이나 반포했던 선지(宣旨)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비록 무지(無知)하고 망령스러운 일개 무인(武人)이라고는 하나, 어찌 마음씨가 이렇게 탐욕스럽고 미련합니까? 그리고 장례원(掌隷院)에서는 아뢰기를, ‘안유(安裕)의 증서[券契]가 명확하지 않으니,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간사(奸詐)함이 심합니다. 고려 말엽부터 성조(盛朝)에 이르는 몇백여 년에 대소 인민(大小人民)이 모두 안유가 바쳤다 하여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니, 문적(文籍)은 비록 해가 오래 되어서 전하지 않지만 의심이 없음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김극유(金克忸)는 홀로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신 등은 이빨을 갈고 침뱉으며 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도 김극유의 간사함을 징계하지 않고, 민발의 탐욕스럽고 미편함을 물리치지 않고서 그대로 그에게 주었으니, 신 등은 성상(聖上)께서 국학을 일으키고 문학을 숭상하시는 교화(敎化)에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가령 민발이 나라에 공(功)이 있어서 상(賞)주지 않을 수 없다면, 중외(中外)의 공천(公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 성균관(成均館)의 노비라야만 그 욕심을 채우겠습니까? 더구나 조종 이래로 훈신(勳臣)·석보(碩輔)734) 가 많으므로, 그 공로에 보답하여 상을 줌에 있어서 지극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국학(國學)의 노비를 점유(占有)하고자 바랐던 자는, 민발 이외에는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전 판결사(判決事) 손순효(孫舜孝)가 사유를 상세하게 밝혀 아뢰어서 이미 유윤(兪允)을 받았는데, 〈전하께서는〉 또 김극유의 사사로운 청(請)을 따랐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주(人主)의 한 마디 말은 여러 사람이 따르게 되어서 법(法)이 되는 것인데, 어찌 전후(前後)의 성지(聖旨)가 이와 같이 한결같지 않습니까? 신 등은 한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어서(御書)로 그 끝에 이르기를,

"전일(前日)의 질문(質問)에 있어서, 너희들은 유학(儒學)의 중함으로써 대답하지 않고 노비의 강장(强壯)함으로서 말하였으니, 이는 유학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익(利益)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어서, 진실로 유학자(儒學者)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문식(文飾)을 많이 하여 사실을 꾸며가며 번독하게 말하는가?"

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민발(閔發)은 무인(武人)이라서 들먹여 말할 것도 못된다. 처음에 우찬성(右贊成) 서거정(徐居正)이 성균관 지사(成均館知事)로서 유생(儒生)들을 제지(制止)하기를, ‘두 명의 노비를 가지고 상소하는 것은 대의(大義)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으나, 유생들은 듣지 않고서 마침내 상소하였다. 서거정은 노(怒)하여 수창(首倡)한 자를 쫓아내고자 하였으니, 당시의 여론이 이러한 일들을 그릇되게 여겼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70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7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신분-천인(賤人)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註 734]
    석보(碩輔) : 보좌하는 현량(賢良)한 신하.

○成均館生員閔敉等上疏曰:

本館奴婢, 非他公賤之比。 前朝文成公 安裕, 上爲先聖, 下爲斯文, 費出己有, 私納成均, 永爲國學之臧獲。 祖宗八十餘年之間, 九頒宣旨, 蠲免他役, 以至闕內之役, 悉令除下, 祖宗所以崇重國學專委養賢者, 至矣盡矣。 而閔發不顧是意, 徒徇己欲, 自占奴長生都致, 以爲功臣奴婢, 再瀆聖聽。 是則閔發非徒負我先聖萬世之功, 抑亦輕棄祖宗九頒之旨。 雖曰無知妄作一武人也, 何用心若是貪頑也? 掌隷院啓以爲, ‘安裕券契不明, 與之可也’, 其爲奸詐甚矣。 自前朝之季至于盛朝, 幾百餘年, 而大小人民, 皆以爲安裕所納, 傳誦一國, 則文籍雖年久不傳, 其無疑惑, 章章明甚。 而金克忸獨曰: "不知", 臣等莫不切齒唾(篤)〔罵〕 。 朝廷不懲克忸之詐, 不斥閔發之貪, 仍而與之, 臣等恐有累聖上興學右文之化矣。 就令有功於國, 不可不賞, 則中外公賤非不多也, 何必成均之奴, 然後充其欲哉? 而況祖宗以來, 勳臣碩輔, 不爲不衆, 酬勞賞功, 亦不爲不至矣, 望占國學奴婢者, 閔發之外, 未之聞也。 前判決事孫舜孝具由覈啓, 已蒙允兪, 而又從克忸徇私之請。 竊謂人主一言衆從而法焉, 是何前後聖旨如此其不一也? 臣等不無憾焉。

(奴)御書其尾曰: "前日之問也, 汝等不以斯文之重爲對, 乃以其〔奴〕 之壯言之, 是不以斯文爲重而以利爲重, 固非儒者之心, 故不聽耳。 爾等何爲多文飾情, 瀆言之歟?" 不聽。

【史臣曰: "閔發則武人, 不足數也。 初右贊成徐居正, 以成均館知事止儒生曰: ‘以二口奴上疏, 不合大義’, 儒生等不聽, 竟上疏。 居正怒, 欲黜首倡者, 物論非之。"】


  • 【태백산사고본】 11책 70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7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신분-천인(賤人)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