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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69권, 성종 7년 7월 26일 정묘 5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대마도 선위사 김자정이 5월 초2일부터 7월 초5일까지의 견문 내용을 치계하다

대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 김자정(金自貞)이 보고 들은 사건을 치계(馳啓)한 것은 이러하였다.

"5월 초2일 평명(平明)604) 에 신이 왜 중추(倭中樞) 평무속(平茂續)·첨지(僉知) 피고여문(皮古汝文)·호군(護軍) 원무기(源茂崎)·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지세포(知世浦)를 출발하여 유시(酉時)605) 에 대마도의 서쪽에 있는 사수나포(沙愁那浦)에 도착하였는데, 거주하는 왜인이 배를 타고 나와서 영접하였습니다. 포(浦)의 인가는 서너 집 남짓한데, 모두 초가집이고 담장은 없었습니다.

초3일 좌수나 대관(佐須那代官) 종 석견수 국길(宗石見守國吉)·사직(司直) 피고파지(皮古破知)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고 또 각각 환도(環刀) 1병(柄)을 선물로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종 월중수 성홍(宗越中守盛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문안(問安)하였으며, 쌍고군수(雙古郡守) 종국차(宗國次)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고 또 환도를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초4일 배로 출발하여 야음비도포(也音非道浦)에 도착하였는데, 사수나포(沙愁那浦)에서 여기까지는 20리였습니다.

초5일 종성준(宗盛俊)하정(下程)606) 을 보내 주었습니다.

초6일 배로 출발하여 완우라포(完于羅浦)에 도착하였는데, 야음비도포에서 여기까지는 7리였습니다. 인가는 10호(戶) 남짓하였으며, 산업(産業)은 소조(蕭條)607) 하고 돌이 많은 밭이 있었는데, 단지 삼[麻]과 보리[麥]를 심긴 하였으나 그것 역시 풍성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초7일 배로 출발하였는데, 왜선(倭船) 4척이 와서 영접하고 좌우에서 끌어서 도이사지(都伊沙只)를 지나 이신도마리포(尼神都麻里浦)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의 인가는 50여 호(戶)였으며, 바로 원무기(源茂崎)가 기거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무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습니다. 도이사지는 양쪽 골짜기가 아주 좁고 뱃길이 서로 꼬여서 물의 흐름이 격렬하게 움직이므로 가장 험준한 곳이었으며, 완우라포에서 여기까지 30리였습니다.

초8일 조국차(助國次)가 신에게 말하기를,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말하기를, 「도주(島主)의 딸이 방금 창진(瘡疹)을 앓고 있으므로 형세가 대국의 명을 영접하기 어려우니 며칠간 지체하도록 요청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명을 받들고 이곳으로 오다가 불행하게도 풍랑을 만나 벌써 6일이나 경과하였으니 더 체류할 수 없다.’ 하였더니, 조국차가 말하기를, ‘만약 이 말을 위반하면 도주가 장차 나를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임금의 일은 기한이 있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없다.’ 하였더니, 조국차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바라건대 하루 동안만 머물러 주소서. 내가 마땅히 부관인(副官人) 피고여문(皮古汝文)을 보내어 도주에게 보고하겠습니다.’ 하므로, 신이 부득이하여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늙고 젊은 부녀(婦女)들이 무늬 옷에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낯은 가리고서 조그마한 배를 타고 잇달아 이르러 두루 보고 나서 말하기를, ‘대국의 풍악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하므로, 악공(樂工)에게 풍악을 울리도록 하였더니, 오래도록 탄복하면서 구경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초10일 배로 출발하였는데, 피고여문이 도주가 있는 곳에서 돌아와 15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접하게 하였으며, 도주가 종 상야수(宗上野守)를 보내어 반접(伴接)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대관 종정수종성준(宗盛俊)·종직가(宗職家)가 각각 배를 보내어 와서 수미요시포(愁未要時浦)에서 영접하였습니다. 그 포구(浦口)는 막히고 좁아서 너비가 겨우 30여 척(尺)이며, 수심(水深)은 얕고 섬이 많았는데, 왜선(倭船)이 끌고 호위해 가서 훈라포(訓羅浦)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인가는 1백여 호였으며, 해안(海岸)을 따라서 기거하였는데, 농경(農耕)을 일삼지 않고 흥판(興販)608) 을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이신도마리포(尼神都麻里浦)에서 여기까지는 90리였습니다. 대관 종정수·종성홍(宗盛弘)·종직가·종중무소보 직속(宗中務少輔職續)이 하정(下程)을 보내 주었습니다.

11일 조전언팔(早田彦八)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귀국의 은혜를 받아 왔기에 귀국의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틀림없이 우리집으로 맞아와서 받들어 접대하였었는데, 지금도 역시 조찬(朝餐)을 베풀고자 하니 잠깐 폐려(弊廬)609) 로 왕림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하므로 신이 갔었는데, 술은 두어 순배 하고서 그쳤고, 또 밥상을 차려 왔는데 숟갈은 없고 나무로 된 젓가락만 있었으며, 그것은 한번 쓰고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의 풍속은 모두 이런 류(類)였습니다.

12일 도주가 하가 이세수(河可伊勢守)를 보내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게 하고 이어서 신을 호위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피고여문(皮古汝文)이 신에게 말하기를, ‘섬이 모두 돌산이라서 경작할 만한 조그마한 전지도 없습니다. 만약 조선의 한 고을만한 전지만 있다면 어찌 빈궁함을 걱정하겠습니까? 도주는 비주(肥州)·축주(筑州)의 두 고을에 모두 전토(田土)가 있으므로 그곳으로 옮겨서 살려고 생각하나, 다만 조선 전하의 은덕이 너무나 융성하여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번리(藩籬)가 되려고 감히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곳 섬 사람들이 몰래 중국에 가서 도적질하여 스스로 생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못 많습니다. 중국에 가서 만일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면 가끔 조선의 국경을 침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주가 엄격하게 금제(禁制)를 가하여 도둑질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일본국(日本國)에서는 요즈음 전쟁으로 인하여 도주를 불러 부난(赴難)610) 하게 하였으나, 도주가 사고를 칭탁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명령을 위반하고 가지 않으면 후환(後患)은 없겠는가?’ 하니, 피고여문이 말하기를, ‘국왕이 비록 노여워하겠지만 끝내 병력으로 정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 무엇이 방해가 되겠습니까? 만약 조선에다 죄를 짓게 되면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매우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 섬에 산성(山城)이 있는데, 서로 전하여 오기를, 「조선 사람이 쌓았다.」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해적들을 위협하여 쫓아버리려고 이 섬에 와서 기거하였다는 사실이 문적(文籍)에 적혀 있으니, 그것이 실로 헛된 말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13일 배로 출발하였는데, 종 상야수(宗上野守)·하 이세수(河伊勢守)·특송(特送) 조국차(助國次)가 각각 배를 타고 좌우에서 호위하면서 갔습니다.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가 호위선 수십 척을 보내어 나와서 영접하여 주었으며, 신을 인도하여 도주가(島主家)로부터 5리쯤 떨어진 구전포(久田浦)에 이르렀는데, 훈라포(訓羅浦)에서 이곳까지는 30리였습니다. 여기의 인가는 60여 호이며 조선(造船)과 자염(煮鹽)611) 으로 생업을 삼습니다. 도주가 중원 삼하수(中原三河守)를 보내어 문안하게 하고 신을 인도하여 관사로 가게 하였는데, 종 중무소보 직속(宗中務少輔職續) 및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가 사람을 시켜 하정(下程)을 보내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공경히 뵙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으나, 도주가 회합하지 않았으므로 형세가 사사로이 뵙기 어렵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4일 도주가 사람을 시켜서 말하기를, ‘좋은 날을 가려서 하사한 것을 받는 것이 타당하겠으니, 조금 더 체류하면서 기다리십시오.’ 하였으며, 국분사 주지(國分寺住持) 숭목(崇睦)이 그의 제자 숭감(崇堪)을 시켜서, 호초(胡椒) 2근(斤), 다엽(茶葉) 3근(斤)을 보냈는데, 숭목은 바로 도주의 동모제(同母弟)였습니다. 구난도로(仇難都老)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희 형(兄) 입석 우경량 국장(立石右京亮國長)이 알현(謁見)하려 하였으나 직임(職任)이 있으므로 정말 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내어 문안하게 한 것입니다. 형이 정해년612) 부터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을 통솔하고 감찰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도주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명령하여 삼포에 가서 추쇄(推刷)하게 한 것입니다. 방금 듣건대 「귀국에서 저에게도 물품을 하사하였다.」고 하니, 그 기쁨 한량없습니다.’하였습니다. 두주가 평무속(平茂續)피고여문(皮古汝文)이 신과 평소에 아는 사이라 하여 그들에게 명령하여 좌우에서 떠나지 말고 관사에서 접대하는 제반 일들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평무속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주가 명령하기를, 「내가 서장(書狀)을 받지 않았으니 비록 조선의 직첩을 받은 사람이라도 사사로이 서로 왕래하면서 말을 누설하지 말라. 다만 사람을 시켜서 문안하게 하는 것은 가하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5일 신이 평무속을 시켜서 도주에게 고(告)하기를, ‘국명을 받들고 와서 머물면서 지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에 하사한 물품을 수령하렵니까?’ 하니, 도주가 사람을 보내 와서 말하기를, ‘교제(交際)하는 예절도 중대한 일인데, 더구나 경사스럽게 하사하시는 것을 수령하는데, 어떻게 좋은 날짜를 가려서 접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점법(占法)으로 추산(推算)하여 보건대 근간에는 좋은 날짜가 없어 곧 받들어 수령하지 못하였으니, 나를 태만(怠慢)하다고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며, 조정의 명령을 공경하고 신중하게 다루려고 하기 때문이니 의아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18일에는 수령하도록 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고하가차(古河家次)가 하정(下程)을 보내 주었습니다.

18일 도주가 하야 이세수(河野伊勢守)를 시켜서 술과 안주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비가 오고, 또 아들 정수(貞秀)가 어젯밤부터 인후(咽喉)를 앓기 시작했으므로 하사한 물품을 수령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날이 개이고 병이 나으면 부자(父子)가 마땅히 함께 하사한 물품을 수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9일 도주가 피고여문(皮古汝文)을 시켜서 와서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이미 많으므로 아들 정수가 앞으로 나의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오래도록 번리(藩籬)의 신하가 되려고 합니다. 지금 대국(大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선위(宣慰)하도록 하시니 경사스러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므로, 은혜에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부자(父子)가 함께 수령하려는 마음은 간절하나 불행히도 정수가 인후의 병이 재발하여 의원(醫員)을 시켜 침질과 뜸질을 하느라고 밤이 다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다시 평유(平愈)613) 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하사한 물품을 수령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완만(緩慢)하다고 여기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21일 피고여문을 시켜서 정수의 병을 위문하게 하고, 따라서 하사품의 수령 일자를 물었더니, 도주가 국장(國長)을 시켜서 와서 말하기를, ‘정수의 병이 낫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아비와 자식이 함께 살면서 다른 날짜에 하사품을 수령한다는 것은 불편(不便)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니 1, 2일 더 기다렸다가 병증세를 보아 가면서 수령하려 합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와서 위로하게 하시니 천위(天威)614) 가 너무나 가까운데 감히 다른 마음을 두겠습니까?’ 하며서 언사가 애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장이 신에게 말하기를, ‘저는 본래 삼포(三浦)에서 거주하는 왜인들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책임자입니다. 예의로서는 당연히 뵙고 문후를 드려야 되겠지만 도주가 회합을 아니하였기 때문에 감히 사사로이 뵙지 못합니다. 지금은 도주의 명령이 있는 까닭으로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24일 도주가 사람을 시켜서 문안하기를, ‘장마는 그치지 않고 여관은 낮고 좁은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아울러 일어납니다. 정수의 병은 회복을 기약할 수 없으니, 만약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면 내가 마땅히 서계(書契)와 하사한 물품을 수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27일 신이 압물(押物)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예물을 가져가서 먼저 도주가(島主家)의 청사(廳事)에다 두게 하고, 신이 서계(書契)를 받들고 가니, 도주가 뜰에서 내려와 국궁(鞠躬)하면서 공경히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중문(中門)을 경유하여 청사에 올라 동쪽 가까이서 서쪽을 향하여 서고, 도주는 처마 아래에서 네 번 절하고 청사로 나아와서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았습니다. 신이 서계를 도주에게 주니 도주가 받아서 집사인(執事人)에게 넘겨주고서 부복하고 일어나 도로 배위(拜位)에 나아가 네 번 절하였습니다. 절을 마치고 도주가 청사에 들어와 서쪽 가까이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하였습니다. 도주의 아들 정수는 병(病)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서계와 예물은 도주와 함께 수령하였습니다. 도주가 신을 인도하여 청사 서편방(西偏房)에 들어가 객(客)은 동쪽에 주인은 서쪽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대관 종정수도 역시 남쪽 가까이서 동쪽을 향해 앉아서 다례(茶禮)를 행하였습니다. 도주가 전하의 안부를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안녕하십니다.’ 하니, 도주가 또 말하기를, ‘선위사(宣慰使)께서 명을 받들고 오셨는데, 마침 정수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즉시 봉접(奉接)615) 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하므로, 신이 통사(通事) 서유산(徐有山)을 시켜서 도주에게 말하기를, ‘귀도(貴島)에는 선대(先代)부터 내려오면서 우리 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성의를 표함이 매우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족하(足下)께서도 역시 선대의 뜻을 이어 우리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요즈음에는 삼포(三浦)에 사는 왜인(倭人)들을 쇄환(刷還)하였으며, 적왜(賊倭)인 삼보라(三甫羅) 등을 죽였으니, 족하의 충성이 더욱 현저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께서도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고 나를 보내어 위로하여 정성에 보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니, 도주가 대답하기를, ‘금번의 큰 은혜는 실로 바라던 밖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몇 해 전에 구난도로(仇難都老)를 파견하여 삼포에 살고 있는 왜인들을 추쇄하게 하였더니, 나의 뜻을 체득(體得)하여 마음을 다하여 수색(搜索)하였으므로 나도 역시 매우 기뻤습니다.’ 하므로, 신이 또 그에게 말하기를, ‘족하가 면주(綿紬)와 면포(綿布)를 요청하는 말이 간곡하였었는데, 마침 중국의 사신이 도착하였기에 본국의 비용이 적지 않아 도주의 청원을 들어주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족하가 지성으로 순종하므로 특별히 몇 필(匹)을 하사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중국 사신이 마침 왔는데도 요청한 것을 그대로 들어주셔서 특별히 화포(貨布)를 내려 주시니 더욱 더 감사합니다.’ 하므로, 신(臣)이 또 말하기를, ‘당초에 변장(邊將)616) 이 적왜(賊倭) 삼보라(三甫羅) 등을 사로잡아서 법으로 처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오히려 양민(良民)들이 괘오(詿誤)617) 하여 여기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염려하여, 서울로 나치(拿致)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다시 국문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승복하므로 실정을 알아냈습니다. 그래도 법으로 처치하지 않고 왔던 사신편에 딸려 보내셨는데 족하가 바로 국경에서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비록 전하께서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구휼하게 한 뜻에는 어그러지나, 족하가 폐단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아서 우리 나라의 울타리가 된 정성을 전하께서는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도둑질한 정상이 명백한데도 만약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후일에 잘못을 본받을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즉시 죽이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특별히 위로하고 권장하시니 참으로 매우 감사합니다.’ 하고 술을 올리면서, 신에게 환도(環刀)와 남단자(藍段子)를 선물로 주려고 하므로, 신이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도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도(島)의 옛 풍속이며, 보잘것없는 물품이므로 사양할 것이 못됩니다. 이러신다면 우리들을 비이(鄙夷)618) 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신이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도주가 요청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선온(宣醞)을 내려 주셨으니 풍악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하므로 공인(工人)들을 시켜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습니다. 도주가 말하기를, ‘대국의 관악(管樂)과 현악(弦樂)은 청초하고 아담하다고 전해 들은 것이 오래였습니다. 오늘에서야 들어 보니 실로 즐겁습니다.’ 하면서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술 일곱 순배를 돌린 다음에 파(罷)하였는데, 도주가 신을 벗은 채 뜰 아래까지 내려와서 전송하여 주었습니다. 도주의 집에는 앞뒤로 청사(廳事)가 있으며 또 마구(馬廐)와 주사(廚舍)619) 도 있었는데, 띠[茅]로 덮었으며, 담으로 둘렀고, 담 밖에는 호참(壕塹)으로 삥 둘러 바닷물을 끌어 대었는데, 깊이와 너비는 각각 한 길[丈] 남짓하였습니다. 당(堂)에는 계단이 없이 월대(月臺)에 오르며, 사방의 벽을 판자(板子)로 만들었는데, 단확(丹雘)620) 은 칠하지 않았습니다. 동쪽·서쪽·북쪽의 벽에는 산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도주 자신은 후청사(後廳事)에 기거하였으며, 전청사에서는 빈객(賓客)을 응대(應對)하여 사무를 수답(酬答)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피갑(皮甲)621) 50벌, 두무(兜鍪)622) 50개, 목궁(木弓) 70개, 장검(長劍) 20자루, 장전(長箭) 40부(部)를 진열하여 비치해 두고서 스스로 방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섬안은 모두 8군(郡)인데, 거기에 예속된 사람을 통솔하여 5번(番)으로 분담시키고 번마다 80, 90명이 식량을 준비하여 5일씩 서로 교대로 입직(入直)하면서 사령(使令)에 대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주가 기거하는 곳에는 인가가 2백 50여 호 가량 되어 보였습니다.

28일 도주가 국장(國長)을 시켜서 문안하게 하였습니다. 쌍고군수(雙古郡守) 종국차(宗國次)와 사직(司直) 피고파지(皮古破知)가 각각 환도(環刀) 1병(柄)을, 종 석견수 국고(宗石見守國古)는 장검(長劍) 1병(柄)을 가지고 함께 와서 신에게 억지로 증정하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의 아우 종무승(宗茂勝)이 주효(酒肴)를 가지고 와서 공궤하였으며, 또 신에게 다엽(茶葉) 1봉(封), 호초(胡椒) 1근(斤), 선자(扇子) 1병(柄)을 증정하였으며, 통사(通事)·군관(軍官)·반당(伴倘)에게는 치자(梔子) 각 1봉, 선자 각 1병을 증정하면서 말하기를, ‘지난 갑오년623) 에 특송(特送)으로 대국(大國)에 친조(親朝)하여 특별히 전하의 은덕을 받아 지금까지 감격하고 있으니 언제인들 그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방금 전하께서 안녕하시다는 말씀을 들으니 너무나 기쁜 마음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보잘것없는 물품을 가지고 와서 구구(區區)한 정성을 표합니다.’고 하였습니다.

28일 통사(通事) 허득강(許得江)은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의 집에, 이영손(李永孫)종성준(宗盛俊)의 집에 보내어 서계(書契)와 예물을 지급하게 하였더니, 종정수종성준이 도주가 서계를 받은 의식(儀式)에 의하여 받으면서 말하기를, ‘분수에 넘친 은혜를 입게 되니 감격스럽고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엇갈립니다.’ 하면서 통사에게 주찬(酒饌)을 공궤하고 또 인정(人情)624) 을 주었습니다. 또 서유산(徐有山)구난도로(仇難都老)의 집에 보내어 서계와 물품을 지급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전년에 삼포(三浦)에 와서 꼭 서울에 올라와 조회하려 했다가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갔다 하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것이다.’고 하니, 구난도로의 형 국장(國長)이 절하고 받으면서 사례하기를, ‘삼포(三浦)의 일은 제가 모두 감독하는데, 제 동생이 대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려 주신 물품을 받게 되었으니, 전하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주찬(酒饌)을 공궤하고 인정(人情)도 주었다고 합니다.

29일 국장·구난도로가 주효(酒肴)와 인정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주면서 하사품을 받게 되어 감격스럽고 기쁜 의사를 극력 진술하였습니다. 그래서 통사 서유산을 시켜서 말하기를, ‘삼포에 사는 왜인은 예전의 약속과 같지 않으니, 당연히 점차로 쇄환(刷還)하여 흔단(釁端)이 생기지 않게 하여 오랫동안 잘 사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국장이 말하기를, ‘도주께서 뒷날 만약 저를 보내 준다면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쇄환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6월 초1일 대관(代官) 종정수가 주효(酒肴)를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으며, 수행한 병사 1백여 명이 모두 활과 칼을 패용하고 있었는데, 신에게 환도(環刀) 1병(柄)을 선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전하의 은덕은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면서 인하여 늦어진 까닭을 서술(敍述)하므로, 신이 그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가 도주의 좌우에서 우리 나라의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셔서 아울러 예물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본도(本島)가 귀국(貴國)과 우호를 맺은 지 벌써 오래 되었으며, 전하의 은수(恩數)가 예전보다 더 융숭하므로 온 섬의 사람들이 감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지금 또 특별히 장려와 권면을 더하시니 더욱 감격스럽고 두렵습니다.’ 하므로, 신이 ‘삼포에 사는 왜인(倭人)이 점점 무성하게 퍼지니 의당 약속대로 쇄환하도록 명령하여 오래도록 교호하고자 합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사인(使人)의 배가 삼포에 도착하면 늘 살고 있는 왜인의 큰 배를 빌어 점검에 대신하여 숫자를 늘이는 간교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이와 같이 간교하고 참람한 일은 나와 도주는 지금까지 몰랐으니, 당연히 도주에게 보고하여 규찰하고 징치(懲治)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6월 초2일 대관 종정수피고여문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배를 점검하는 데 간교를 부리는 행위는 내가 도주에게 보고하려다가 다시 생각하여 보니, 도주가 만약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왕래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처벌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선위사(宣慰使)께서 오래 머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주의 아들 정수(貞秀)가 새로이 총명(寵命)625) 을 받아 즐거워하고 경사스럽게 여기는 이 무렵에 처벌을 받는 자가 많으면 참으로 상서롭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섬안의 모든 사무는 도주께서 나에게 참여하여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는데, 선위사께서 돌아간 뒤에 내가 마땅히 도주에게 천천히 보고하여 엄격히 금지하도록 하겠으니, 도주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초4일 도주가 사람을 시켜서 신을 초청하므로 그의 집에 갔더니, 도주가 아들 정수와 같이 뜰에서 내려와 영접하면서 청사(廳事)의 서편방(西偏房)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객(客)은 동쪽에, 주인은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읍(揖)하였으며, 정수가 앞으로 나아와서 읍을 하므로 신도 읍으로 답례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각각 자리에 앉아 다례(茶禮)를 행하였습니다. 정수가 전일에 몸소 서계(書契)를 수령하지 못한 사유를 진술하고, 인해서 환도(環刀) 1병(柄), 아청 단자(鴉靑段子) 1필(匹)을 신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도주가 말하기를, ‘정수가 예로는 당연히 절을 하여야 하는데, 병이 다 낫지 않아 굽혔다 폈다 할 수가 없어서 읍례(揖禮)만 하였으니 의아하게 여기지 마소서. 병을 참고 나왔으므로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워 지금 도로 들여보내려 하니 무례함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턱 아래를 싸맸으며, 침질과 뜸질한 곳이 있었고, 신색(神色)이 편치 않게 보이므로 즉시 도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찬(酒饌)을 베풀어 대접을 하고 아래로 하인에게까지 선물을 차등 있게 주었습니다. 신이 도주에게 말하기를, ‘당초 귀도(貴島)의 사람들이 장사를 이유로 삼포에 붙어 살았는데, 우리 선왕(先王)께서 선도주(先島主)와 60호(戶)는 머물러 살도록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들이 날로 번성하는데다 몰래 의탁하여 머무른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지금 제포(薺浦)에는 3백 8호(戶), 부산포(釜山浦)에는 67호, 염포(鹽浦)에는 36호입니다. 지역은 좁은데다 사람은 많으니 생계가 매우 곤란할 뿐만 아니라, 혹시 한번이라도 실화(失火)하게 되면 잇달아 모두 타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온 간사하고 못된 무리들이 간혹 와서 살면서 때때로 사기를 행하므로, 후일에 틀림없이 변경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킬 것이니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족하(足下)가 전담하여 쇄환(刷還)하려고 하니 참으로 기꺼이 포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체류하고 있는 숫자가 처음 약속을 너무나 초과하였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차마 일시에 갑자기 쇄환하지 못할 것이니, 족하는 마땅히 피차간의 이해를 생각하여 점차로 쇄환하여 약속대로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신이 또 말하기를, ‘갑오년626) 겨울에 귀도의 배 15척이 경상도(慶尙道)의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며, 서쪽으로 전라 제도(全羅諸道)를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을미년627) 봄에는 우리 나라의 함안진(咸安鎭)의 백성 윤자평(尹自平)이 8인을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고기를 잡다가 밤에 섬의 왜인을 만나 5인은 죽고, 도망하여 살아온 자는 3인이었는데, 배안의 의복과 식량과 기구는 약탈당하고 남은 것이 없었으며, 또 섬의 배 8척이 같은 해 4월에 경상도 남해현(南海縣)·금산(錦山) 등지에 도착하여 도서(島嶼) 사이에 출몰(出沒)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족하의 문인(文引)628) 을 받았다면, 지세포(知世浦)에서 조회(照會)를 거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몰래 국경 지대에 가서 슬그머니 이익을 엿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반드시 흔단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난날 예조(禮曹)에서 이서(移書)하여 족하에게 유시(諭示)하여 금지하게 하였으니, 족하는 마땅히 옛 약속을 지키고 도인(島人)을 금지하여 옛 정의를 오래 유지하도록 하시오.’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금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바닷길이 멀고 막혀서 듣고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모두 우리 섬의 사람들이 한 짓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경도(京都)의 병란으로 흩어져 해적(海賊)이 되었는데, 풍문으로 들으니 그 무리들이 몰래 대국을 침범한다고 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해서 사로잡아 엄격히 다스리겠습니다.’ 하므로, 신이 또 말하기를, ‘제추(諸酋)의 사선(使船)은 각각 정한 약속이 있는데 약속을 위반하고 더 보내는 자가 있으며, 귀도(貴島)에서 연례로 보내는 사선도 역시 혹 정한 숫자 외에 오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족하의 문인(文引)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인접(引接)하였었는데, 만약 늘 이와 같이 한다면 혹 속임과 거짓이 있고 신의로써 서로 허여한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간사한 사람들이 모람되게 서계를 받고 족하도 미처 규찰하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갑오년629) 종무승이 돌아갈 적에 예조에서 전지를 받들어 이서(移書)하여 통렬하게 금지를 가하도록 하였지만, 그 뒤에도 역시 종정수의 사송(使送)인 다난쇄모(多難灑毛)·종마다이난(宗馬多而難)·사두여문(沙豆汝文)과, 종성준 사송인 도소지(都小只)와, 진성행(秦盛幸)의 사송인 시난쇄모(時難灑毛)와, 교지(敎之)의 사송인 난연도로(難延都老)와, 원실차(源實次)의 사송인 도여문(都汝文)과, 등희구(藤熙久)의 사송인 노구쇄모(老仇灑毛)와, 가차(家次)의 사송인 신여문(信汝文)과, 원길(源吉)의 사송인 피고여문(皮古汝文)과, 위행(爲幸)의 사송인 진등지(陳等只)충길(忠吉)의 사송인 신여문(信汝文)이 갑오년에 겹쳐 왔으며, 원실차(源實次)의 사송인 다라사이문(多羅沙而文)지평(持平)의 사송인 삼보라여모(三甫羅汝毛)와, 등희구(藤熙久)의 사송인 가문로수계(可文老愁戒)와, 충길의 사송인 사문로수계(舍文老愁戒)와, 종성준의 사송인 죽본변사야문(竹本邊沙也文)과, 종무세(宗茂世)의 사송인 사동고라(沙同古羅)가 을미년에 겹쳐 와서 폐단이 다시금 무궁(無窮)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부득이하여 거절하고 접대하지 않는다면 온 자들도 실망을 할 것이며, 성상(聖上)께서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시는 뜻에도 어그러지니, 족하는 엄격히 이를 규명하여 다스려서 간사하고 거짓됨을 막도록 하시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항상 검찰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이토록 잘못되었습니다. 마땅히 다시 글로 유시하신 것을 상고하겠습니다.’ 하므로, 신이 또 말하기를, ‘일본 국왕이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통신(通信)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려고 하는데, 방금 족하가 병란(兵亂) 때문에 통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일러 주니, 그렇다면 병란은 언제 끝날 것입니까?’ 하고, 또 병란의 승패(勝敗)의 상황을 문의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병란이 언제 평정될지는 모르며, 처음 불화의 씨를 만든 이유와 지금 서로 전쟁하는 형세는 글로 제시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도주가 신에게 말하기를, ‘먼 변방의 궁벽(窮僻)한 곳이라서 오락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활 쏘는 것을 구경하소서.’ 하고, 즉시 뜰에다 조그마한 과녁을 설비하고 부하들에게 쏘게 하였는데, 쌍고군수(雙古郡守) 종국차(宗國次)가 잘 맞히었습니다. 도주가 군관(軍官)에게 쏘아 보도록 요청하였는데, 내금위(內禁衛) 김사지(金四知)가 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쏘는 법은 월등하게 뛰어났으니 후일에 틀림없이 대임(大任)을 맡게 될 것입니다.’ 하면서 친히 술잔을 잡아 그를 공궤하고, 환도(環刀)·선자(扇子)·전촉[箭鏃]을 선물하였습니다.

초7일 신이 식량이 떨어져 면포(綿布)를 가지고 장사하는 배에서 쌀과 교환하려고 하였더니, 도주가 그러한 사정을 듣고 국장(國長)을 시켜서 쌀 60석(碩)을 보내왔습니다. 신이 서유산(徐有山)을 시켜서 쌀값으로 면포 60필을 도주의 집으로 보냈더니, 도주가 말하기를, ‘양국이 교호(交好)하면서 지금 사신이 욕되게 왕림하여 있는데, 내가 비록 아침저녁으로 받들지는 못하지만 감히 면포를 팔아서 쓰도록 하겠습니까? 이것은 앞으로 우리 섬의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시려는 것입니다. 대국의 은혜는 구산(丘山)같이 무겁습니다. 본도(本島)가 비록 가난하다고 하지만 지금 보잘것없는 쌀을 보내고서 어떻게 감히 값을 받겠습니까?’ 하면서 노여워하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고 거절하기를 매우 굳게 하므로 부득이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초10일 일기주(一岐州)에 사는 호군(護軍) 삼보랑대랑(三甫郞大郞)이 주효(酒肴)를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신이 일본국의 병란이 어떠하냐고 문의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양국이 해자를 깊이 파고 성채를 세워서 지금까지 서로 버티어 승부(勝負)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우리 나라의 사선이 국왕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남로(南路)의 군사는 질서가 없고 산만적이어서 기강(紀綱)이 없으니 해적(海賊)들에게 약탈당할 것입니다. 만약 일기주(一岐州)에서 북해(北海)를 경유하여 간다면 바람이 순편하면 8일 만에 약협주(若狹州)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며, 약협주에서 육로(陸路)로 3식(息)630) 을 가면 이마두참(伊麻豆站)에 이르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수로(水路)를 경유하여 3식을 가면 사가모도참(沙可毛道站)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육로로 1식을 가면 국왕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박다(博多)·일기(一岐)의 장사꾼들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하여 왕래합니다. 대국(大國)에서 만약 통신사를 파견한다면 내가 마땅히 길을 인도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종직가(宗職家)가 군사 1백여 명을 인솔하여 주찬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고 선물을 주었는데, 종직가는 바로 도주의 아들 정수의 아내의 오라비입니다.

11일 박다에 사는 중 소유(少由)가 장사 때문에 이웃 객사에 와서 우거(寓居)하면서 통사(通事) 서유산(徐有山)을 보고 말하기를, ‘풍전주(豐前州)에는 8군이 있는데, 소이전(少二殿)과 대내전(大內殿)이 반씩 나누어 각각 4군씩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이전이 영토를 잃어버린 뒤부터는 대내전이 아울러 차지하였는데, 지금 소이전이 옛날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여 종직성(宗職盛)종국구(宗國久) 등을 시켜서 군사 4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풍전주에 도착하여 고성(古城)에 들어가 근거지를 삼고 있으며, 대내전의 대관(代官) 수연도로(愁延都老)가 그 사실을 듣고 역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서로 마주보면서 진(陣)을 치고 있으며, 또 새로운 성(城)을 쌓아서 버티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 교전(交戰)하여 대내전의 군사는 죽은 자가 60인이고, 소이전의 군사는 죽은 자가 6인이며 승부는 결정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서로 맞서 있는데, 끝내는 반드시 크게 접전(接戰)하여 자웅(雌雄)을 겨룬 다음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하고, 평무속(平茂續)도 역시 가만히 말하기를, ‘소이전이 도주에게 글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하였으므로 지금 군사를 파견하여 전쟁을 도우려 합니다. 다만 본도의 장사(壯士)들이 많이 소이전을 따라서 박다(博多)에 가서 사는데다 지금 또 군사를 징발하여 보낸다면 본도가 텅빌 것이므로 그 사실을 비밀히 하여 다른 나라에서 알지 못하게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15일 도주가 그의 형 종성준(宗盛俊)과 대관 종정수와 함께 활과 칼을 가진 군사 4백여 명을 거느리고 찾아왔기에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면서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21일 도주가 사람을 시켜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도주가 우리 나라에서 내려 준 삿갓을 쓰고, 아울러 우리 나라의 활과 화살을 휴대하였으며,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따르는 1백여 명이 모두 창과 칼을 소지하였습니다. 앞서가면서 길을 인도하는 것을 따라 사냥[打圍]할 곳에 도착하니, 군사 4백여 명이 산에서 몰이를 하여 내려왔으나 끝내 한 마리의 짐승도 없었습니다. 도주가 대관 종정수를 시켜 와서 말하기를, ‘더위를 무릅쓰고 수고하셨는데,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술을 한잔 올리려 하였으나, 곁들일 안주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23일 도주가 국장을 보내어 2통의 서록(書錄)을 주었는데, 그 하나에 이르기를, ‘일본국(日本國) 응인(應仁)정해년631) 정월에 전산 우위문독 의취(畠山右衛門督義就)미장수(尾張守) 정장(政張)이 자기네끼리 서로 다투어 하루 동안에 전사(戰死)한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낙하(洛下)632) 는 인심이 흉흉하여 편안하게 살 곳이 없었습니다. 이해 5월에 세천 우경대부 승원(細川右京大夫勝元)산명 좌위문독 입도교풍(山名左衛門督入道敎豐)이 뜻밖에 군대를 일으켜 서로 싸움을 하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때문에 일본국에서 대명(大名)이라고 일컫는 자들이 어떤 이는 이쪽 편을, 어떤 이는 저쪽 편을 들었으니, 부자(父子)와 형제가 구름과 비처럼 번복(翻覆)을 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관대히 용서하는 뜻에서 화친할 것을 명령하면, 세천(細川)은 번번이 공명(公命)에 순응하였으나, 산명은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하께서 오히려 그의 어리석음을 민망하게 여기어 급격하게 군대로써 공격하지 않고 점차로 그들을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문명(文明)계사년633) 3월에 산명입도(山名入道)가 병으로 죽고, 같은 해 5월에 세천 우경대부(細川右京大夫)도 역시 병으로 죽었습니다. 갑오년634) 8월에 산명입도의 적손(嫡孫) 탄정소필 연(彈正少弼延)·일색 우경대부(一色右京大夫)가 육단(肉袒)635) 하고서 항복하기를 애걸하므로 전하께서 민망하게 여겨 허락하였는데, 대내 신개 정홍(大內新介政弘)·전산 우위문독 의취(畠山右衛門督義就)금출천전(今出川殿)을 흉도(凶徒)의 우두머리의 여얼(餘孽)이라고 위협하고 서로 모여서 난리를 만들어 파리떼나 개처럼 몰려갔다가 다시 오곤 하였지만, 전하께서는 오히려 차별 없이 사랑하고 똑같이 보아 차마 쳐서 죽여 그들의 나라와 군읍(郡邑)을 약탈하도록 꾀하지 못하고, 저들로 하여금 힘이 쇠모(衰耗)하여 자연히 복종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순(因循)하여 온 것입니다. 대저 관동(關東)오륙(奧陸)·진경(津輕)·합포(合浦)·외빈(外濱)의 제공(諸公)들은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습니다. 귀국(貴國)에서도 듣고서 알겠지만 시종(始終) 충성스런 마음이 변하지 않는 자는 세천(細川)의 두 당(黨)과 적송(赤松)의 한 당(黨)과 좌무위 의민(佐武衛義敏)·전산 미장수(畠山尾張守)·전산의승(畠山義勝)·좌좌목 대선대부(佐佐木大膳大夫)·내도돈 교지(內道頓敎之)입니다. 그리고 구주(九州)의 모든 호족(豪族)들이 차례로 군대를 경도(京都)에 파견하고 스스로 그들의 봉강(封疆)을 지키니, 외국(外國)의 방어에 전력하는 자입니다. 전에 전산(畠山)·대내(大內)가 귀국에 사선(使船)을 보내었으니, 비록 글에 거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내가 해마다 경도에 공선(貢船)을 보내는데, 순풍(順風)을 만나면 여기서 출발하여 곧바로 약협주(若狹州)에 도착하게 되나 만약 뜻하지 않게 역풍(逆風)을 만나면 적국(敵國)을 피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귀국에 통신(通信)을 요청하는데, 사사로운 원수 때문에 공의(公義)를 폐기(廢棄)할 수는 없으며, 귀국에 대하여 비록 이 다음에라도 묵묵히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서.’ 하였으며, 그 두 번째 글에 이르기를, ‘오도(五島)·일기(一岐)·송포(松浦)의 제자(諸子)가 매년 보내는 사선(使船)의 인원수를 성화(成化) 6년636) 9월 28일에 내려 주신 글에 특별히 정한 숫자가 있었으므로 근래에는 그대로 지켜서 위반함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예선(例船)637) 으로 보낸 것을 헤아려 보건대 혹 바람과 파도에 막혀서 섣달 또는 이듬해 1, 2월에 귀국에 도착하게 되고, 금년에 또 금년의 예선을 보내게 되는데, 귀국에서는 지난해의 예선이 불행하게도 금년에 도착한 것을 금년의 예선으로 적용하여 많이 삭감당하게 되니, 금년의 예선이 이때문에 차오가 생깁니다. 그러니 연월(年月)로 고찰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또 오도 우구수(五島宇久守)가 예전에는 매년 3척의 배를 보냈는데, 성화 6년에 1척을 삭감하여 2척으로 정액을 삼았습니다. 전해에 표류(漂流)한 승려(僧侶)를 되돌려 보냈더니, 그들이 돌아오는 편에 보낸 글에다 또 하사(下賜)하는 한 통의 글을 첨가하였는데, 동명 도주(同鳴島主)도 역시 매년 보내도록 허락한 것이 한 척이라고 하였으니, 무엇이 의심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또 삼포(三浦)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유고(諭告)하셨는데, 대저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지만 그 지역의 경계가 있으니 포악함이 현저(顯著)한 자에 이르러서는 어찌 엄벌하여 기세를 꺾지 않겠습니까? 삼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또 고기잡이 배가 귀국에 갈 때는 각각 문인(文引)을 출급하여 긴밀히 하도록 전에 이미 경계하였으나, 지금 또 족하(足下)가 여러 번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니 거듭 집사자(執事者)에게 명령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부터 뒤로는 국지(菊池)가 매년 배 2척을 보내려는 것은 조공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집사의 명령을 준수하겠지만, 그래도 오히려 위반하는 것이 있을까 두려웠는데, 이제 교유(敎誘)하여 주신 것은 다행입니다.’ 하고, 또 국장(國長)이 도주의 말로 신에게 말하기를, ‘박다(博多)에 사는 종금(宗金)의 손자 삼미삼보라(三未三甫羅)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자입니다. 지난 갑오년638) 에 전산전(畠山殿)의 압물(押物)로 대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배가 파손되어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본도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뒷날 세견선 50척 내에서 내어 보내고자 하니, 전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그리고 호제(護濟) 종정수(宗貞秀)의 사선(使船)을 매년 약속대로 내어 보냈는데, 지금 갑오년에 3척의 배를 더 보냈다고 말하기에 자세히 상고하여 보니, 다만 무자년639) 김호인(金好仁)이 돌아갈 적에 한 척의 배가 약정(約定)한 숫자 외에 호송(護送)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반드시 중간에 간사한 자가 저지른 것일 것입니다. 또 을미년640) 에 보낸 3척의 배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해사(該司)로 하여금 갑오년·을미년에 보낸 명단을 상세하게 상고하여 보여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나의 형 종성준(宗盛俊)이 대국의 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선이 3척에 불과하므로, 지금 다시 배의 숫자를 첨가하여 주도록 요청하려고 하니, 잘 아뢰어 주십시오. 그리고 종성가(宗盛家)의 사선은 본래 7척이었는데, 지금 그의 아들 종직가(宗職家)가 기업을 계승하였음에도 3척을 삭감하였으니, 전하께 아뢰어 예전의 정액(定額)대로 허락하여 주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종성가(宗盛家)는 본래 4척이었는데, 한때의 조그마한 공로 때문에 임시로 3척을 더해 준 것입니다. 이제 종성가가 죽었기 때문에 도로 예전의 약정대로 한 것뿐입니다.’ 하였습니다.

25일 도주가 신을 초청하므로 그의 집에 갔더니, 청사(廳事) 서편방(西偏房)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도주가 말하기를, ‘국분사(國分寺)가 전하의 도움을 힘입어 도서(圖書)를 받았으며, 세견선의 건조를 지금 시작하였습니다. 전하께 아뢰어 다시금 배의 숫자를 더해 주어 완공할 수 있도록 하여 모든 중들의 기축(祈祝)하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대관(代官) 종정수(宗貞秀)는 세견선이 1척이었는데 갑오년에 4척을 더하여 주셨으니, 전하의 은혜가 지극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신임하는 자이니, 전하에게 아뢰어 다시 불쌍하게 여겨 구휼을 더하게 하소서.’ 하므로, 신이 그에게 말하기를, ‘사선(使船)이 삼포에 와서 유체(留滯)하는 기한은 모두 정약(定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왜(主人倭)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기 때문에 머무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만약 엄격히 금지하지 않는다면 사모(詐謀)641) 를 자행함이 많아서 이 때문에 흔단(釁端)을 구성할까 두렵습니다. 지금부터 만일 아무런 까닭 없이 머무는 자가 있으면 주인왜와 아울러 과죄(科罪)하여 간악한 계교를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내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삼포에 있는 왜인의 두목에게 물어서 추핵(推覈)하여 엄격히 다스리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도주가 환도(環刀)를 선물로 주었는데, 신이 사양하다가 할 수 없어서 받았습니다. 도주의 아들 정수(貞秀)가 병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선물[人情]을 주면서 사례하였습니다. 도주가 작별(作別)에 임(臨)하여 거듭 전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주는 석야장견(蓆野將堅)을 보내고 아들 정수는 팔랑좌위문(八郞佐衛門)을 보내어 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으며, 신과 함께 떠나게 하였습니다.

26일 도주가 종대선(宗大膳)을 시켜서 수답 서계(修答書契) 2통과 진상(進上)할 초록 단자(草綠段子) 1필, 아청 단자(鴉靑段子) 1필, 환도(環刀) 2병(柄), 전촉[箭鏃] 1백 근(根), 그리고 아들 정수는 수답 서계 1통과 진상할 아청 단자 1필, 환도 2병, 전촉 1백 근(根)을 보냈습니다. 이날에 신이 배로 출발하였는데, 대관 종정수·국장·종직속(宗職續)·종무승(宗茂勝)·이세수(伊勢守)가 배를 타고 좌우에서 호위하면서 훈라포(訓羅浦)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종정수가 주악(酒樂)을 베풀어 은근(慇懃)한 뜻을 극진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통사(通事)·군관(軍官)에게까지 모두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우리 도주를 위로하시고 미천(微賤)한 데까지 미치셨으니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멀리 여기까지 와서 전송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래 세견선(歲遣船)이 1척이었는데, 지난 갑오년642) 에 또 4척을 더하여 주시니, 전하의 은혜가 지중합니다. 저의 조부(祖父)가 대관이 되었을 적에는 해마다 미두(米豆)와 의복을 하사하여 주셨으므로, 제가 몇 해 전에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전달(轉達)하였으나, 허가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저의 박복(薄福)한 탓입니다. 어떻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 본국에서는 도주가 대국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다는 것을 듣고 한없이 감탄하여 부러워합니다. 본도(本島)의 집사자(執事者)는 오직 저 한 사람뿐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에게 아뢰어 세견선을 더 배정하여 주신다면 더욱 충성을 다하되 시종(始終)의 변함이 없겠습니다.’ 하고, 또 도주의 말로서 신에게 이르기를, ‘국장(國長)이 삼포에서 규찰(糾察)하여 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만, 귀국에서 모르실 뿐입니다. 삼포에 사는 왜인들이 사모(詐謀)와 모람된 것을 자행하는 것을 서로 은폐(隱蔽)하여 주기 때문에 알 길이 없으니, 반드시 국장으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추핵(推覈)하게 한 뒤에야 엄격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틀림없이 보조함이 없지 않은데 어찌 더욱 후하게 대하여 주지 않고 시급하지 않은 사람으로 처우하겠습니까? 빌건대 이러한 뜻을 전하에게 아뢰어 도서(圖書)를 발급하고 세견선을 배정하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초5일 진시(辰時)643) 에 신이 도주가 특송(特送)한 석야장견(蓆野將堅) 등과 사연나포(沙然那浦)를 출발하여 신시(申時)644)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6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62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604]
    평명(平明) : 동이 틀 때.
  • [註 605]
    유시(酉時) : 5∼7시.
  • [註 606]
    하정(下程) : 외국 사신이 머무는 곳에 정해진 공급 외에 별도로 음식물을 보내 주는 것을 말함. 별하정(別下程).
  • [註 607]
    소조(蕭條) : 호젓하고 쓸쓸함.
  • [註 608]
    흥판(興販) : 물건을 흥정하여 판매함.
  • [註 609]
    폐려(弊廬) : 자기집의 겸사.
  • [註 610]
    부난(赴難) : 달려가서 국가의 환란을 구원함.
  • [註 611]
    자염(煮鹽) : 소금을 굽는 것.
  • [註 612]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613]
    평유(平愈) : 병이 나아 회복함.
  • [註 614]
    천위(天威) : 임금의 위엄.
  • [註 615]
    봉접(奉接) : 받들어 영접함.
  • [註 616]
    변장(邊將) : 변경을 지키는 장수.
  • [註 617]
    괘오(詿誤) : 남을 속여 그릇되게 인도함.
  • [註 618]
    비이(鄙夷) : 야비한 오랑캐.
  • [註 619]
    주사(廚舍) : 음식을 장만하는 곳.
  • [註 620]
    단확(丹雘) : 단사(丹砂).
  • [註 621]
    피갑(皮甲) : 가죽으로 된 갑옷.
  • [註 622]
    두무(兜鍪) : 투구.
  • [註 623]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24]
    인정(人情) : 선물.
  • [註 625]
    총명(寵命) : 총애하여 내리는 칙명.
  • [註 626]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27]
    을미년 : 1475 성종 6년.
  • [註 628]
    문인(文引) : 증명서.
  • [註 629]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30]
    3식(息) : 90리.
  • [註 631]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632]
    낙하(洛下) : 일본 경도를 지칭.
  • [註 633]
    계사년 : 1473 성종 4년.
  • [註 634]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35]
    육단(肉袒) : 사죄하는 표시로 웃옷을 벗고 드러냄.
  • [註 636]
    성화(成化) 6년 : 1470 성종 원년.
  • [註 637]
    예선(例船) : 규정대로 보내던 배.
  • [註 638]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39]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640]
    을미년 : 1475 성종 6년.
  • [註 641]
    사모(詐謀) : 남을 기만하는 꾀.
  • [註 642]
    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643]
    진시(辰時) : 7∼9시.
  • [註 644]
    신시(申時) : 15∼17시.

對馬島宣慰使金自貞馳啓聞見事件:

五月初二日平明, 臣與中樞平茂續、僉知皮古汝文、護軍源茂崎、特送助國次知世浦, 酉時到對馬州西沙愁那浦, 居乘船出迎。 浦有人居三四餘戶, 皆茅屋無墻壁。 初三日, 佐須那代官 石見守 國吉、司直皮古破知, 持酒來慰, 又各贈環刀一柄, 辭不受。 越中守 盛弘遣人來問安, 雙古郡守宗國次持酒來慰, 又贈環刀, 不受。 初四日, 發船到也音非道浦, 自沙愁那浦至此二十里。 初五日, 宗盛俊送下程。 初六日, 發船到完于羅浦, 自也音非道浦至此七里。 人居十餘戶, 産業蕭條, 有石田只種麻麥, 亦不豐茂。 初七日發船, 有船四艘來迎, 左右牽引, 過都伊沙只尼神都麻里浦。 人居五十餘戶, 乃源茂崎之居里也。 茂崎齎酒肴來慰之。 都伊沙只, 兩峽隘狹, 船路回互, 波流激盪, 最險絶處也, 自完于羅浦至此三十里。 初八日, 助國次謂臣曰: "代官宗貞秀遣人語予曰: ‘島主女方患瘡疹, 勢難迎命, 請緩數日’。" 臣答曰: "奉命來此, 不幸阻風, 已經六日, 不可稽留", 助國次曰: "若違此言, 島主將置我於死矣。" 臣答曰: "王事有期, 不可淹留", 助國次曰: "若然則乞姑留一日。 我當先遣副官人皮古汝文報告島主矣", 臣不得已從之, 有婦女老少, 以斑衣蒙頭掩面, 乘小艇相繼而至, 周覽旣畢, 曰: "願聞大國樂聲’, 令工人作樂, 嘆賞良久乃散。 初十日發船。 皮古汝文還自島主處, 率軍十五人來迎, 島主遣宗上野守伴接而來。 代官宗貞秀宗盛俊宗職家各遣船, 來迎于愁未要時浦。 其浦阻狹, 廣僅三十餘尺, 水淺多嶼, 船牽引衛護, 而行至訓羅浦。 人居百餘戶, 沿岸而居, 不事耕農, 專以興販爲生。 自尼神都麻里浦至此九十里。 代官宗貞秀宗盛弘宗職家中務少輔職續送下程。 十一日, 早田彦八來言: "吾世受貴國之恩, 凡遇貴國使臣, 必邀至吾家奉待, 今亦欲設朝餐, 願暫臨弊廬", 臣往見之, 酒數行而罷, 又設飯無匙只有木筯, 一用卽棄。 俗皆類此。 十二日: "島主遣河可伊勢守持酒來慰, 仍令護衛而來。 皮古汝文謂臣曰, ‘島皆石山, 無寸田發耕。 若有朝鮮一邑之田, 何患貧窮? 島主於二州, 皆有田土, 思欲移居, 第以朝鮮殿下恩德至隆, 無以報効, 只欲永作藩籬, 未敢遠去耳。 昔者此島人潛往中國作賊以自給, 今不爾, 故貧者頗多。 至中國如不得利, 則往往犯朝鮮之境, 故島主嚴加禁制, 使不得竊發也。 日本國頃因兵戰, 徵島主使赴難, 島主托故不往矣。" 臣答曰: "違命不往, 其無後患乎?" 皮古汝文曰: "國王雖怒, 終不得加兵, 違命何妨? 若得罪朝鮮, 則無所歸處, 甚可畏也。 島有山城, 相傳朝鮮人所築, 未知信否。" 臣答曰: "我國人恐逐海寇, 來居此島事, 在文籍, 實非虛語也。" 十三日, 發船, 宗上野守河伊勢守、特送助國次, 各乘船左右翼衛而行。 代官宗貞秀送衛護船數十隻出迎, 引至島主家前五里許久田浦, 自訓羅浦至此三十里。 人居六十餘戶, 以造船煮鹽爲生業。 島主遣中原三河守問安, 引至所館, 中務少輔職續及代官宗貞秀遣人送下程, 謂臣曰: "非不欲奉謁, 島主未會, 勢難私見耳。" 十四日, 島主使人言曰: "當擇吉受賜, 姑留待之。" 國分寺住持崇睦使弟子崇堪送胡椒二斤、茶葉三斤, 崇睦卽島主同母弟也。 仇難都老來見曰: "我兄立石右京亮國長欲謁見, 然有職任, 不果來, 遣我問安。 兄自丁亥年, 統察三浦人。 然常侍島主不離側, 故令我往三浦推刷耳。 今聞貴國賜物於我, 喜歡罔極。" 島主以平茂續皮古汝文與臣有素, 令不離左右, 省視館待諸事。 茂續等謂臣言: "島主出令曰: ‘我未受書, 雖朝鮮受職人, 毋得私相往來, 漏洩言語。 但使人問安可也’。" 十五日, 臣使平茂續告島主曰: "奉命而來, 不宜留滯。 何日受賜物乎?" 島主遣人來言曰: "交際禮重, 況受慶賜, 安可不擇吉接待乎? 以我占法(椎)〔推〕 算, 近無吉日, 未卽奉受, 恐以我爲怠慢。 然非有他意, 所以敬重朝命也, 勿以爲訝。 十八日當受之。" 古河家次送下程。 十八日, 島主使河野伊勢守來遺酒肴曰, "今日雨, 且子貞秀昨夜始患咽喉, 未受賜物。 若雨晴疾愈, 父子當同受賜物。" 十九日, 島主使皮古汝文來言曰: "我年已老, 子貞秀將繼我業, 永作籬臣。 今大國委遣使宣慰, 慶莫大焉, 不勝感恩之至。 切欲同受, 不幸貞秀咽喉之疾復痛, 使醫鍼灸, 終夜不寐。 更待平愈, 同受賜物。 乞勿以爲緩。" 二十一日, 使皮古汝文貞秀病, 仍問受賜日期, 島主使國長來言曰: "貞秀疾未愈, 乃何? 父子同居, 異日受賜, 竊意不便。

欲更待一兩日, 見病證受之。 殿下特遣官來慰, 天威甚邇, 敢有他心?" 辭甚切至。 國長謂臣曰: "我本總治三浦居, 禮當候謁, 以島主未會, 不敢私見。 今則島主有命故來耳。" 二十四日, 島主使人問安曰: "陰霖不止, 旅館湫隘, 何以經過? 慙懼交至。 貞秀疾平復無期, 若明日雨晴, 則我當竝受書契賜物。" 二十七日, 臣令押物齎領禮物, 先置於島主家廳事, 臣奉書契而往, 島主下庭, 鞫躬祗迎。 臣由中門陞廳事, 近東西向立, 島主陞簷下, 行四拜, 就廳事, 北向跪。 臣就書契授島主, 島主受之, 授執事人, 俛伏興, 還就拜位, 行四拜。 訖, 島主入廳事, 近西東向立, 相對再拜。 島主子貞秀, 病不出, 其書契禮物, 島主幷受之。 島主引臣入廳事西偏房, 客東主西, 相對而坐。 代官宗貞秀亦近南東向坐, 行茶禮。 島主問殿下安否, 答曰: "康寧。" 島主又言: "宣慰使奉命而至, 適因貞秀患病, 未卽奉接, 良用愧恨。 乞寬恕。" 臣令通事徐有山語島主曰: ‘貴島自先世以來, 籬衛我國, 効誠甚至。 今足下亦繼先志, 凡我國事, 盡心爲之, 今者刷還三浦居, 誅斬賊 三甫羅等, 足下忠款益著。 我殿下深用嘉賞, 遣我勞慰, 以答誠款。" 島主答曰: "今次鴻恩, 實出望外, 感激無已。 年前遣仇難都老推刷三浦居, 能體我意, 盡心搜索, 吾亦喜甚。" 臣又語之曰: "足下請綿紬、綿布, 辭語懇至, 適朝廷使臣到本國, 費用不貲, 似不得從請。 然足下至誠効順, 故特賜若干匹。" 答曰: "中國使臣適來, 俯從所請, 特賜貨布, 尤增感荷。" 臣又語之曰: "當初邊將擒賊 三甫羅等, 請置於法, 殿下尙慮良民詿誤至此, 拿致京師, 命大臣更鞫, 具服得實。 然猶不卽置法, 付之來使, 足下卽令誅諸境上。 雖非殿下憐恤之意, 然足下防微杜漸, 藩衛我國之誠, 殿下甚嘉悅。" 答曰: "作賊情狀明白, 若不治罪, 慮有後日效尤者, 卽令誅之。 今者特加慰奬, 感戴實深。" 仍進酒, 欲贈臣環刀、藍段子, 臣辭之。 島主曰: "此我島舊風, 薄物不足辭。 是以我爲鄙夷也。" 臣不得已受之。 島主請曰: "殿下旣賜宣醞, 願聽樂聲。" 令工人奏樂。 島主曰: "大國管弦淸雅, 傳聞久矣。 今日試聽, 實爲可樂。" 稱歎不已。 酒七行而罷, 島主脫履, 送至庭下。 島主家前後有廳事, 又有馬廐、廚舍, 蓋以茅, 周以垣墻, 墻外環以壕塹, 引海水注之, 深廣各丈餘。 堂無階陞月臺, 以板爲四壁, 不施丹雘。 東西北壁畫山水, 島主自居後廳, 至於前廳, 則應對賓客, 酬答事務而已。 常列置皮甲五十、兜鍪五十、木弓七十、長劍二十、長箭四十部以自衛。 島內凡八郡, 率其屬分五番, 每番八九十人, 自備糧餉, 五日相遞入直, 以備使令。 島主之居有人家, 可二百五十餘戶。 二十八日, 島主使國長問安。 雙古郡守宗國次ㆍ司直皮古皮知各持環刀一柄, 石見守國古持長劍一柄同來, 贈臣强之, 乃受。 代官宗貞秀宗茂勝持酒肴來饋, 又贈臣茶葉一封、胡椒一斤、扇子一柄, 贈通事軍官伴倘桅子各一封、扇子各一柄, 仍言: "去甲午年, 以特送親朝大國, 特蒙殿下恩德, 至今感激, 何日忘之? 今聞殿下安寧, 不勝慶抃之至。 玆將薄物, 聊表區區之誠。" 二十八日, 遣通事許得江于代官宗貞秀家, 李永孫宗盛俊家, 給書契、禮物, 貞秀盛俊依島主受書契儀受之, 曰: "獲霑非分, 感愧交幷。" 饋通事酒饌, 又贈人情。 又遣徐有山仇難都老家, 給書契物件, 語之曰: ‘前年至三浦, 謂必朝京, 不意經還, 故殿下特賜物耳。" 仇難都老國長拜受謝曰: "三浦之事, 吾摠治之, 吾弟代往耳。 今受賜物, 殿下恩德, 何可勝言?" 仍饋酒饌, 贈人情。 二十九日, 國長仇難都老齎酒肴人情來遺臣, 極陳受賜感悅之意。 令通事徐有山言: "三浦居不如舊約, 宜漸刷還, 使無生釁, 永遠交好, 可也。" 國長曰: "島主後若遣我, 則當盡心刷還。" 六月初一日, 代官宗貞秀齎酒肴來慰, 從兵百餘, 皆佩弓劍, 贈臣環刀一柄曰: "殿下恩德, 感謝無已。" 仍敍遲緩之由, 臣語之曰: "足下左右島主, 凡我國事, 靡不盡心, 我殿下嘉悅, 幷賜禮物。" 答曰: "本島與貴國交好已久, 殿下恩數之隆, 又逾前昔, 一島之人, 莫不感激。 今又特加奬勸, 冞增感懼。" 臣欲三浦居漸至滋蔓, 宜令如約刷還, 以爲永久之好。 答曰: "敢不盡心。"! 臣又 ‘言使船到浦, 借恒居大船代點之奸’, 答曰: "如此奸濫事, 我與島主不曾知之, 當告島主糾治。" 初二日, 代官宗貞秀使皮古汝文來言曰: ‘點船之事, 我欲告島主, 更思之, 島主若聞之, 必拿致往來人, 推覈科罪。 若然則非徒宣慰使久留, 島主子貞秀新受寵命喜慶之初, 被刑者多, 則實爲不祥, 是以不告。 凡島中庶務, 島主委我參決, 宣慰使回還後, 我當徐告島主痛禁, 勿與島主言之。"

初四日, 島主使人邀臣, 至其第, 島主與子秀庭下迎, 引入廳事西偏房, 客東主西, 相向對揖, 貞秀就前揖, 臣答揖, 各就坐行茶禮。受〈宗〉秀敍前日未親得受書契之由, 仍贈環刀一柄ㆍ鴉靑段子一匹。 島主言: "貞秀禮當拜, 疾未痊, 不能屈伸, 但行揖禮, 勿訝。 力疾而出, 勢難久坐, 今欲還入, 恐以爲無禮。" 裹頷下有鍼灸處, 神色不寧, 卽令還入。 設酒饌以饗, 下至僕從, 贈人情有差。 臣謂島主曰: "初貴島人因商販來寓三浦, 我先王與先島主約留六十戶。 其後日益繁資, 潛投者亦多。 今薺浦三百八戶, 釜山浦六十七戶, 鹽浦三十六戶。 地窄人衆, 非徒生計甚艱, 一或失火, 連燒殆盡。 且逋逃奸細之徒, 間或來居, 時時行詐, 他日必生邊釁, 不可不預爲之防。 今足下專使刷還, 誠可喜賞。 留存之數, 遠過初約, 是必不忍一時遽還耳, 足下宜思彼此利害, 須漸刷還, 期於如約。" 答曰: "敢不從命。" 臣又言: "甲午冬, 島船十五艘略慶尙之境, 西指全羅諸道。 乙未春, 我國咸安鎭人尹自平導八人入海捕魚, 夜遇島, 被害者五人, 逃而生者三人, 船中衣糧器具, 被掠無餘, 又有島船八艘, 乃於是年四月到慶尙道 南海縣、錦山等處, 出沒島嶼間, 若受足下文引, 何難照經知世浦哉? 是必潛往境上, 伺便窺利也。 若此不已, 終必構釁。 前日禮曹移書, 諭足下使之禁戢, 足下宜更伸舊約, 禁戢島人, 以永舊好。" 答曰: "吾非不禁制, 但海途遼隔, 聞見未及耳。 然未必皆我島人所爲也。 今京都兵亂, 散爲海賊, 側聞此輩潛犯大國, 當盡心捕獲痛治。" 臣又言: "諸酋使船各有定約, 而違約加送者有之, 貴島年例使船, 亦或有額外出來者, 以有足下文引, 故特許引接, 若常如此, 則容有詐僞, 非以信相與之義也。 是必奸人冒受書契, 而足下亦未及察耳。 去甲午年茂勝回還時, 禮曹奉旨移書, 使加痛禁, 其後亦有宗貞秀使送多難灑毛, 宗馬多而難, 沙豆汝文, 宗盛俊使送都小只, 秦盛幸使送時難灑毛, 敎之使送難延都老, 源實次使送都汝文, 藤熙久使送老仇灑毛, 家次使送信汝文, 源吉使送皮古汝文, 爲幸使送陳等只, 忠吉使送信汝文, 甲午年疊來, 源實次使送多羅沙而文, 持平使送三甫羅汝毛, 藤熙久使送可文老愁戒, 忠吉使送舍文老愁戒, 宗盛俊使送竹本邊沙也文, 宗茂世使送沙同古羅, 乙未年疊來, 弊復無窮。 我國不得已拒不接待, 則來者失望, 有乖聖上撫綏之意, 足下嚴加究治, 以杜奸僞。" 答曰: "常加檢覈, 不意差誤至此。 當更考書示。" 臣又言: "日本國王屢使通信, 故我國亦欲遣使報聘, 今足下諭以兵亂不可通信之意, 然則兵亂何時而止?" 又問兵亂勝敗之狀, 答曰: "兵亂不知何日平定, 其初構釁之由及今相戰形勢, 當以書示之。" 島主語臣曰: "遐裔窮僻之地, 無以爲娛。 請觀射的。" 卽於庭中設小的, 使管下人射之, 雙古郡守宗國次能中之。 島主請軍官射之, 見內禁衛金四知射, 曰: "此人射法絶異, 他日必受大任。" 親執盞饋之, 贈環刀、扇子、箭鏃。 初七日, 臣糧食乏絶, 將以綿布換米於商船, 島主聞之, 使國長送米六十碩。 臣令徐有山將米價綿布六十匹, 送于島主家, 島主曰: "兩國交好, 今使臣辱臨, 我縱不能朝夕供設, 敢使賣布而用乎? 是將欲不恤我島百姓也。 大國之恩重如丘山, 本島雖貧, 今此薄小之米, 安敢受直?" 怒形於色, 拒之甚確, 不得已還持來。 初十日, 一岐州護軍三甫郞大郞持酒肴來慰。 臣問日本國兵亂何如, 答曰, ‘兩國深溝樹柵, 至今相持, 勝負未決。’ 又問, ‘我國使船可以得達國王處乎?’ 答曰: "南路兵亂, 散無統紀, 必爲海賊所掠。 若自一岐州北海而行, 則風便八日可到若狹州, 自若狹州陸行三息, 至伊麻豆站, 乘船由水路行三息, 至沙可毛道站, 陸行一息, 至國王處。 博多一歧商販人皆由此路往來。 大國若遣通信使, 我當指路矣。" 宗職家領兵百餘, 齎酒饌來慰, 贈人情, 職家乃島主子貞秀妻兄也。 十一日, 博多居僧少由因商販來寓隣舍, 見通事徐有山言曰: "豐前州有八郡, 少二殿與大內殿分半, 各統四郡。 自少二殿失土後, 大內殿兼取之, 今少二殿欲復舊疆, 使宗職盛宗國久等領兵四千, 前到豐前州, 入據古城, 大內殿代官愁延都老聞之, 亦率兵三千, 相對置陣, 又築新城以拒之。 去五月交兵, 大內兵死者六十人, 少二兵死者六人, 勝負未決, 至今相持, 終必大戰以決雌雄, 然後乃已。" 平茂(績)〔續〕 亦潛語之曰: "少二殿移書島主請兵, 今欲遣兵助戰。 但本島壯士, 多從少二殿, 往居博多, 今又發兵而往, 則本島空虛, 故秘之, 不使他國知也。"

十五日, 島主與其兄宗盛俊ㆍ代官宗貞秀率弓釰軍士四百餘人來見, 設宴張樂饋之。 二十一日, 島主使人請觀獵, 島主着我國所賜笠子, 幷帶我國弓箭, 前後導從百餘人皆持槍劍。 先行引路, 至打圍處, 軍士四百餘人驅山而下, 竟無一獸。 島主使代官宗貞秀來言: "觸熱動勞, 不獲一禽, 深愧之。 欲獻一杯, 以無兼味未果耳。’ 二十三日, 島主遣國長來遺書錄二道, 其一曰, 日本國 應仁丁亥正月, 畠山右衛門督義就尾張守政張〔尾長守政張〕 自相爭, 而一日之內, 戰死者數萬人。 洛下從此人心洶洶, 不敢寧處。 於是五月細川右京大夫勝元山名左衛門督入道敎豐不虞起兵, 相鬪而無止, 因是日本國稱大名者, 或右袒, 或左袒, 父子兄弟雲雨翻覆, 不言而可知焉。 吾殿下以寬宥之意, 命以和親之事, 細川輒雖應公命, 山名拒以不相應。 雖然殿下猶憫其愚戇, 急不加兵, 漸欲令服之。 文明癸巳三月, 山名入道病死, 同五月, 細川右京大(人)〔夫〕 亦病死矣。 甲午八月, 山名入道嫡孫彈正少弼延一色左京大夫肉袒以乞降, 殿下憫以許之, 大內新介政弘畠山右衛門督義就今出川殿以爲兇首餘孽, 相聚成亂, 蠅營狗苟, 驅去又來, 殿下猶同仁一視, 不忍血刃, 謀而奪掠其國郡邑, 欲令彼衰耗而自然歸服, 以是因循至今。 夫關東奧陸津輕合浦外濱諸公者, 不遑枚擧。 凡貴國所聞知, 終始忠心無二者, 細川二黨、赤松一黨、左武衛義敏畠山尾張守畠山義勝、佐佐木大膳大夫、內道頓敎之也。 九州之諸豪, 各班次以遣卒伍於洛, 自守其封疆, 專外國之扞禦者也。 于前畠山、大內遣使船於貴國, 雖有難于擧書, 吾每歲遣貢船於洛, 風順則發此而直到若狹州, 若非意有逆風, 則不能避彼敵國。 且又請通信於貴國, 以私讎不可廢公義 於貴國雖云已後, 不可默止, 莫怪焉。 其二曰, 夫若五島一歧松浦之諸子, 每歲使船之員數, 成化六年九月二十八日賜書特有定額, 邇來守以無相違。 揣其去歲遣例船, 或爲風濤被阻隔, 而若臘月若翌年正二月到貴國, 而今年又遣今年之例船, 貴國以去年例船不幸而今年到, 用之於今年之例船, 而多被減, 今年之例船, 以是有差謬者歟 不如以年月考也。 又五島宇久守, 疇昔每歲遣三船, 成化六年減一船, 以兩船爲定額。 前歲遣漂流之僧侶, 其回來書又加賜一書云: "同鳴島主亦每歲所許遣一船" 云, 何所有疑哉? 又三浦之居人猶以多所諭, 夫居人雖多, 其地猶有界畔, 至暴惡顯著者, 豈又不罰折乎? 伏聞命耳。 又釣魚船之往于貴國者, 各出文引以緊密其事者, 于前已警畢, 今又聞足下屢陳, 重以命執事者也。 又自今以後(菊地)〔菊池〕 每歲遣兩船者, 重朝也。 吾固雖守執事之命, 猶恐有違失, 時之被敎誘者多幸。 又國長以島主之言語臣曰: "博多宗金之孫三未三甫羅, 善畫者也。 去甲午年, 以畠山殿押物前往大國回還時, 因船毁未還本土。 我愛其才, 留在本島, 後日欲於五十船內出送, 乞啓殿下。 護濟宗貞秀使船, 每年依約出送, 今云甲午年加送三船, 詳考之, 只戊子年金好仁回還時, 以一船數外護送耳。 想必中間奸詐者所爲也。 且乙未年所遣三船, 拒而不納, 其故何也? 請令該司細考甲午乙未年所遣人名以示之。 吾兄宗成俊蒙大國厚恩。 然使船不過於三, 今欲更請加船。 乞善爲陳啓。 宗盛家使船本七艘, 今其子職家繼業而減三船。 乞啓殿下, 許依舊額。" 臣答曰: "宗盛家本四船, 以一時微勞, 權加三船。 今盛家身死, 故還依舊約耳。" 二十五日, 島主使人請臣, 至其家, 迎入廳事西偏房。 島主曰: "國分寺賴殿下助緣受圖書, 歲遣船今始營建。 乞啓殿下, 更加船數, 使得畢構, 以爲諸僧祈祝之所。" 又言: "代官貞秀歲遣一船, 甲午年加四船, 殿下之恩至矣。 此人吾所信任者, 乞啓殿下, 更加憐恤。" 臣語之曰: "使船留浦日限, 皆有定約。 然與主人相爲表裏, 故爲稽留者頗多。 若不嚴禁, 恐多行詐謀, 從此構釁矣。 自今如有無故稽留者, 幷主人科罪, 以杜奸計。" 答曰: "如此事, 吾不得聞。 當問於三浦頭, 推覈嚴治。" 島主贈環刀, 臣辭不得受之。 島主子貞秀以病不出, 使人贈人情以謝之。 島主臨別, 再言深感殿下之恩。 島主遣蓆野將堅, 子貞秀八郞佐衛門來謝恩, 令與臣偕行。 二十六日, 島主使宗大膳送修答書契二道, 進上草綠段子一匹、鴉靑段子一匹、環刀二柄、箭鏃一百根, 子貞秀修答書契一道, 進上鴉靑段子一匹、環刀二柄、箭鏃一百根。 是日臣發船, 代官宗貞秀國長宗職續宗茂勝伊勢守乘船, 左右(俠)〔挾〕 衛, 至訓羅浦貞秀設酒樂, 極盡慇懃之意, 下至通事、軍官, 皆有所贈。

謂臣曰: "殿下旣慰我島主, 以及微賤, 不勝感激。 遠來送于此耳。 我本歲遣一船, 去甲午年又加四船, 殿下之恩至重。 我之祖父爲代官時, 歲贈米豆衣服, 吾年前據此轉達, 未蒙準, 是我之薄福也。 何敢再言? 本國聞島主厚蒙大國之恩, 嘆羨無已。 本島執事者, 惟我一人耳, 伏望啓殿下, 加定歲船, 則更竭忠誠, 終始不渝。" 又以島主之語謂臣曰: "國長糾察三浦久矣, 但貴國未之知耳。 三浦居人行詐冒濫之事, 互相隱蔽, 故無由得知, 必令國長來往推覈, 然後乃可痛治。 然則此人未必無補, 豈不愈深遠處不急之人乎? 乞將此意啓殿下, 給圖書定歲船幸甚。" 初五日辰時, 臣與島主特送蓆野將堅等發沙然那浦, 申時到釜山浦


  • 【태백산사고본】 10책 6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62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