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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15일 정사 7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대사헌 윤계겸 등이 9조의 시무책을 올리니 원상들에게 의논케 하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윤계겸(尹繼謙)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 등은 삼가 보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대통(大統)을 이은 지 지금 8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덕(聖德)이 날로 새로워지고 성학(聖學)이 날로 성취(成就)되어 고명(高明)하고 광대(光大)함이 천고(千古)에 으뜸이 되어서 충분히 한 세상을 운영(運營)하고 품류(品類)를 제량(劑量)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성 대비(慈聖大妃)께서 정사(政事)를 돌려주셨으니, 이는 바로 전하(殿下)께서 성력(誠力)을 다하여 노력해야 할 시기입니다. 신 등은 모두가 용렬(庸劣)한 재목으로 언직(言職)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갈고 다듬어 전하(殿下)의 유신(惟新) 정책(政策)에 보탬이 되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천박한 소견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陳述)하니, 예감(睿鑑)을 기울이시어 재택(裁擇)하소서.

1. 민생(民生)은 욕구(欲求)가 한이 없으므로 군주(君主)가 없으면 혼란이 오게 됩니다. 하늘이 이러한 점을 염려하여, 군사(君師)를 내실 때에는 반드시 총명(聰明)하고 강단(剛斷) 있는 자질(資質)과 중후(重厚)하고 포용성(包容性)이 있는 기량(器量)을 부여(賦與)해서 서물(庶物)469) 에 으뜸이 되게 하고 사방(四方)을 표정(表正)케 하는데, 이는 하늘이 지극히 어려움을 책임지운 것이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자리를 주어서 즐기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요(堯)·순(舜) 이후로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삼가고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마음으로 공경을 다하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부여(賦與)한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임무이어서 안일한 마음으로 처(處)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傳)470) 에서는, ‘임금노릇하기가 어렵다.’ 하였고, 《서경(書經)》에서는, ‘천위(天位)471) 는 어려운 것이다.’ 하였으니, 대체로 어려운 줄을 알고 대처하면 어려움도 쉽게 될 수 있지만, 어려운 줄을 모르고 쉽게 대처하려고 하면 다음날 어렵게 되어 어떻게 처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즉위(卽位)하신 이후로 성학(聖學)에 관심을 가지시고 밤낮으로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모든 시위(施爲)에 있어서 하나하나 옛 성인을 본받으시니, 어려움을 알고서 감히 쉽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없지 않으면서도 끝맺음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고금(古今)에 공통된 걱정입니다.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해이해지면 쉽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쉽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나의 다스림이 이미 만족해졌고, 나의 백성이 이미 안정되었다.’고 여겨서 베개를 높이 베고 안일한 생각이 들게 되어 나라의 근본이 흔들려도 알지 못하고, 화기(禍機)가 발생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여 상패(傷敗)한 데 이르러도 구제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이른바 다음날의 어렵게 됨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唐)나라 명황(明皇)개원(開元)의 정치는 그 얼마나 훌륭했습니까? 그런데, 천보(天寶)의 난리(亂離)472) 에 거의 망할 뻔하였으니, 다 같은 현종(玄宗) 한 사람인데, 치란(治亂)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떤 이유이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고,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끝을 맺지 못하였고 쉽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렵게 여기고 삼가하시기를 늘 오늘같이 하시고 삼가고 두려워하시기를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시어, 하늘이 맡겨주신 중대함을 생각하고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업적(業績)을 염려하셔서, 어진이를 철저하게 신임하고 간사함은 여지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착한 것이 적다 하여 노력하지 아니하지 마시고, 악한 것이 적다 하여 그대로 방치하지 마시며, 조금 이룩된 것을 만족하게 여겨서 힘을 기울이는 데 소홀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에 젖어 큰 계획에 어두워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알면 안정되게 해주기를 생각하고, 먹는 것이 백성에게 하늘이 됨을 알면 만족하게 해주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정도(正道)를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고 풍속(風俗)을 바로잡아서 출입(出入)하고 기거(起居)함과 호령(號令)을 내림에 있어서도 신중함을 다하여 태평의 다스림을 여시어 영구히 무궁한 아름다움을 보존케 하소서.

1. 신 등은 듣건대 천자(天子)는 삼공(三公)을 통솔하고, 삼공은 경대부(卿大夫)를 견제하며, 경대부는 사서인(士庶人)을 다스려서, 존귀(尊貴)한 이는 천(賤)한 이에게 임(臨)하고 천한 이는 존귀한 이를 받든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치의 대경(大經)으로서 그 차례는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우리 나라는 정부(政府) 이하에는 육조(六曹)가 있고, 육조 이하에는 제사(諸司)가 있는데, 제사의 직무(職務)는 육조에서 규찰하고, 육조의 직무는 정부에서 총괄하여 다스려서 계품(啓稟)하여 시행(施行)하므로, 가부(可否)가 서로 구제되고 경중(輕重)이 서로 유지되어서 정치의 대경(大經)이 여기에서 확립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한 번 내리게 되면 일이 잘못됨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아래를 부림은 마음이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과 뿌리가 가지를 견제하는 것과 같으며, 아래에서 위를 섬김은 손발이 가슴을 호위하고 지엽(枝葉)이 뿌리를 덮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태조(太祖)께서는 이렇게 창업(創業)하셨고, 태종(太宗)께서는 이렇게 업적을 물려 주셨으며, 세종(世宗)께서는 이렇게 태평을 누리셨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즉위하고서는 간신(奸臣)들이 국권(國權)을 장악하는 것을 징계하여 이에 정부(政府)의 서사(署事)를 혁파(革罷)해서 삼공(三公) 이하는 직위(職位)만 충당하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부의 권력이 편중(偏重)하게 되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로 인한 폐단으로 정권(政權)이 여러 곳에서 나오게 되는 결과가 있게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한 사(司) 가운데 하찮은 일이라도 제조(提調) 한 사람이 불가(不可)하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상달(上達)되어 그로 인해 법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법의 존폐(存廢)는 피차간에 모순이 생겨서 조령 모개(朝令暮改)가 되어 어떻게 따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하와 같은 천부적(天賦的)인 총명(聰明)이라 하더라도 하나하나 직접 결재하려 한다면 이는 임금으로서 관리(官吏)의 직무(職務)를 행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체통을 잃는 것으로서 끝내는 폐단이 없을 수 없게 됩니다. 옛부터 그 치란(治亂)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정승(政丞)에게 위임(委任)함에 있어서는 개정(改正)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한(漢)나라 광무(光武)만이 삼공(三公)에게 위임하지 않고 대각(臺閣)에 맡겼다가 동도(東都)473) 의 업적(業績)이 드디어 쇠퇴하여졌으니, 이렇게 볼 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은 바로 올바른 정승을 얻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지 정승에게 위임한 잘못은 아닙니다. 또 당 태종(唐太宗)과 같이 영특(英特)한 이로서 장상(將相)의 능력을 겸하였다고 하는 이도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재상(宰相)을 경유해야만 시행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세(理勢)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옛일을 미루어 현재를 거울삼아 정부(政府)의 서사(署事) 제도를 한결같이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처럼 되살려서 어진 재상을 가려서 위임하시면, 옛날의 ‘어진이를 찾기까지는 노력했으나 적임자에게 위임하고 나면 편케 된다.’는 뜻에 가깝게 되어 태평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재상에게 권력이 편중해질 것을 의심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신 등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신 등은 듣건대 임금은 임금의 권한이 있고, 재상은 재상의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현능(賢能)한 이를 임용(任用)하여 선악(善惡)에 따라 상벌(賞罰)을 내리는 것은 임금의 권한이며, 핵심적인 정권을 잡고 백관(百官)의 일을 조정하는 것은 재상의 권한입니다. 임금이 능히 그 권한을 지키면서 재상의 권한을 빼앗지 않으면 임금의 권한이 중하게 되어 국가가 편안하게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재상의 권한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곧 임금의 권한을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정권(政權)은 하루라도 조정에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조정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대각(臺閣)에 있으면 어지러워진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천하(天下)의 권한은 반드시 돌아가는 곳이 있게 마련이어서 저쪽에 있지 않으면 이쪽에 있게 되고, 이쪽에 있지 않으면 저쪽에 있게 되어, 이쪽에 있느냐 저쪽에 있느냐에 따라 치란(治亂)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된 이는 다스려지는 까닭과 혼란해지는 원인을 생각해서 반드시 권한은 어느 때이건 조정에 있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또 듣건대 임금은 신하에게 마음을 다하지 못할까 근심해야 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 근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진실로 위에서 그 아래를 의심하고 아래에서 그 위를 속인다면, 그러한 상태에서 다스려지기를 기대해 본들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천하(天下)에서 재상(宰相) 노릇을 제일 잘한 사람은 상(商)나라 성탕(成湯)에게 이윤(伊尹), 고종(高宗)에게 부열(傅說)이 있었는데, 그 당시 온 천하의 일을 모두 한 사람에게 맡겼으니, 그 권력이 막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탕고종은 이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대우하면서 전적으로 신임하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이윤부열과 같이 훌륭한 이는 천하의 일을 전부 맡겨도 나에게 충성을 다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윤부열이 천하의 일을 맡으면서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천하의 권력을 담당하면서도 감히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위에서 자신에게 성의를 다하여 대우하면서 적적으로 위임(委任)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일체(一體)가 되어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業績)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도 진실로 훌륭한 재상(宰相)을 구하여 이윤·부열과 같은 책임을 맡기고, 성탕·고종과 같은 성의로써 대우한다면 상(商)나라의 정치만이 전고(前古)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留意)하소서.

1. 원상(院相) 제도를 설치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에는 없던 것으로서 이는 세조(世祖) 때의 일시적(一時的)인 권의(權宜)에서 나온 것이지 영구토록 지속할 제도는 못되는 것입니다. 지난 정해년474)백옹(白顒)·황철(黃哲)·김보(金輔) 등의 사신(使臣)이 왔을 때에 거가(車駕)가 줄을 잇게 되어, 이들을 대접하는 일이 매우 번거롭고 긴요하므로, 세조께서 이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 등에게 명하여 늘 정원(政院)에 나아가서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었는데, 원상(院相)이란 이름은 그 때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 후 세조(世祖)·예종(睿宗)께서 연달아 승하(昇遐)하시자 전하(殿下)께서는 어린 나이로 대통(大統)을 계승하셨으므로, 안으로는 자성 대비(慈聖大妃)의 보도(輔導)하시는 보탬을 입으시나 밖으로도 대신(大臣)들이 아침 저녁으로 보필(輔弼)하는 힘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낸 자에게 하루 걸러 정원(政院)에 들어가서 출납(出納)하는 공사(公事)를 참상(參詳)하게 하였으니, 이는 세조 때의 권의(權宜)를 인습(因襲)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춘추(春秋)가 장성(長盛)하셔서 자성 대비(慈聖大妃)께서 이미 대정(大政)을 돌려주셨으니, 만기(萬機)475) 의 번거로움을 모두 독단(獨斷)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원상(院相)을 파(罷)하는 것은 지금이 적합한 때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때의 권의를 가지고 그만둘 수 있는 것을 그만두지 않습니까? 또 관직(官職)은 서로 침범할 수 없으며, 대신(大臣)은 마땅히 예(禮)로 대접해야 합니다. 윤음(綸音)476) 을 출납(出納)함은 승지(承旨)의 직임(職任)인데, 대신이 이를 참여하여 들으니, 이는 서로 침범하는 데에 가깝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이후로 노성(老成)한 신하에 대해서는 예의로써 대우하고 후하게 부양(扶養)하여 회좌(會坐)하는 곳을 빈청(賓廳)이라 하며, 지공(支供)하는 부서를 예빈시(禮賓寺)라 하는데, 이는 존경(尊敬)을 하면서 빈례(賓禮)로 대우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노쇠(老衰)한 이를 부축해서 일으키고 새벽같이 들어와서 정원(政院)에 모여 앉아 피곤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이것은 예의로 대접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습니까? 더구나 전하(殿下)께서는 모든 의심이 가는 일이면 반드시 여러 대신들에게 널리 자문(咨問)하시어 가부(可否)를 취(取)하신 다음에 시행(施行)하시고, 한두 사람의 의논에 그치지 않으시니, 하루 걸러 정원(政院)에 모여앉은들 끝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원상(院相)을 파(罷)하시어 관직을 서로 침노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대신을 예의로 대접하는 도리를 펴게 하소서.

1.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그들로 해서 편하게 되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수고(壽考)를 누리시니 어떻게 사람을 분발하게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대체로 나라가 편안한 것은 많은 선비들이 훌륭함이며, 많은 선비들이 훌륭하게 됨은 임금이 분발시키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옛 성왕(聖王)이 인재(人材)를 양육(養育)하기를 좋아하여 선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어찌 인재는 나라의 이기(利器)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여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 때 이후로 상·서(庠序)의 교육을 신중하게 다루었으며, 거기에다 과거(科擧)의 법을 곁들여서 선비를 기르고 선비를 채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옛보다 뒤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특히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사장(詞章)을 기송(記誦)하는 것으로서 시험에 응할 수 있는 밑천으로 삼고, 실질적인 학문에는 노력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신(文臣) 가운데에서 연소(年少)하고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산방(山房)에서 글을 읽게 했습니다. 그로 해서 능통하고 박식한 선비와 깊이 있고 단아한 인재들이 빛나게 배출되어서 훌륭한 인재들이 그 당시에 제일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명망(名望)이 높은 공경(公卿)이 문형(文衡)을 담당하고 정치의 계획을 꾸미는 이는 모두가 세종(世宗)께서 양육한 것으로서 후진(後進)의 선비들은 그들을 따를 만한 이가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이러한 때에 부흥(復興)시키기를 생각지 않으셨다가 수십년(數十年) 뒤에 이 사람들이 이미 늙게 되면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누구와 문치(文治)를 꾸려나가시고 어디에 고문(顧問)을 의뢰하시렵니까? 또 사장(詞章)은 비록 말단적(末端的)인 기예(技藝)라 하더라도 중국(中國)의 문사(文士)들이 사명(使命)을 띠고 오게 되면 으레 우리 나라는 문교(文敎)가 있는 국가라 하여 거의가 시(詩)를 읊으며 화답하기를 요구해 옵니다. 그러니 만약 그들을 압도(壓倒)하여 앞서지 못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인(文人)과 재사(才士)는 국가의 꽃이어서 이미 양성(養成)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문왕(文王)이 사람을 분발시키는 일과 세종(世宗)의 고사(故事)를 본받으시어, 문신(文臣) 가운데에서 연소(年少)한 자를 잘 선발하여 그들에게 한직(閑職)을 주고, 사무(事務)는 맡기지 말아서 학문(學問)에만 전념(專念)하고 문장(文章)에만 힘을 기울일 수 있게 한다면, 거의 교양(敎養)이 알맞게 되어 인재(人材)가 배출(輩出)될 것입니다.

1. 풍문(風聞)을 듣고 탄핵(彈劾)을 하는 법은 공도(公道)에는 해가 있을 듯하나 치도(治道)에는 사실상 이익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규명(糾明)하는가 하면,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누구는 간사한 짓을 했고 누구는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일을 했다고 말하면, 그 사실의 여부는 묻지도 않고 아울러 추국(推鞫)을 하게 되니, 그 사이에 어찌 원한으로 일으킨 말과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번거롭게 다스린 것도 혹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은 날개가 없이도 날으며, 시비(是非)에 대한 소리는 다리가 없이도 잘 달려갑니다. 남이 모르게 나쁜 짓을 했는데도 논집(論執)을 당함은 전연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나오게 된다면 아무리 언건(偃蹇)477) 하고 걸힐(桀黠)478) 한 자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제멋대로 그른 짓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공도(公道)에 해가 됨은 언제나 적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됨은 항상 많습니다. 그러니 작은 손실(損失)을 가지고 큰 이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 법이, 외관(外官)들이 탐오(貪汚)하거나 학민(虐民)하는 자를 제외(除外)하고는 풍문(風聞)을 가지고 탄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요즈음 정치를 손상(損傷)시키고 도덕을 해치는 것이 어찌 탐오하고 학민하는 두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몇해 전부터 민풍(民風)과 국속(國俗)이 더욱 야박하고 악화되어서, 혹은 종[奴]으로서 주인을 침범하고 혹은 첩(妾)으로 처(妻)를 삼으며, 혹은 자제(子弟)로서 부형(父兄)을 무시하여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기까지 하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궁벽한 마을에서 몰래 일어나는 일들은 그 종적이 애매하므로 그것이 어떤 일로 인해서 드러나는 경우는 적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만약 일체 방치해 두고, 보고서도 말할 수 없고 듣고서도 물을 수가 없다면, 이는 끝내 그 허물을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무엇을 꺼림이 있겠습니까? 기강(紀綱)은 반드시 이로 인해서 무너지고 풍속(風俗)도 반드시 이로 인해서 야박해질 것이니,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법을 거듭 엄하게 하여 비록 탐오(貪汚)하고 학민(虐民)하는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로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면 모두 들추어내서 간사한 싹을 근절하고 풍속을 바로 잡게 하소서.

1.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국가(國家)의 경비(經費)에 대한 제도가 미진(未盡)함이 있으므로, 이를 크게 한 번 바로잡지 아니하면 성법(成法)이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2, 3 대신(大臣)과 다시 상정(詳定)해서 정밀하게 다듬으려고 했으나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고, 팔음(八音)이 갑자기 끊기게 되었습니다.479) 그런데 전하(殿下)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아 드디어 그 일을 끝마치었으니, 이는 바로 선대(先代)에서 계획하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여 선대의 업적에 빛이 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용도(用度)를 제정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절약하였고, 세금을 매기는 데 있어서도 지나치게 줄였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제도보다 가볍게 하려 함은 대맥(大貊) 가운데에서 소맥(小貊)이며, ·의 제도보다 가중하게 하려 함은 대걸(大桀) 가운데에서 소걸(小桀)480)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요순의 제도는 중도(中道)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금을 제정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그 용도(用度)의 다과(多寡)를 헤아리고 물산(物産)의 풍족하고 부족함을 고려하여 가볍게 하더라도 맥(貊)에 이르지 않게 하고 가중하더라도 걸(桀)에 이르지 않게 해야만, 비로소 중도(中道)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며, 만세(萬世)에 통행(通行)해도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정(詳定)한 법은 약 1년 정도의 조도(調度)로서 세금을 거두는 수(數)를 정한 것이라면 그런 대로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교린(交隣)·사대(事大)·공헌(貢獻)·향빈(享賓)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너무 지나치게 절감하여 도저히 시행할 수 없으므로 이에 옛 관례에 의하여 실시하게 되는데, 옛 관례에 따르게 되면 비용이 따라서 많게 되며, 비용이 많아졌는데도 세금을 거두는 수는 그전보다 많아지지 않는다면, 그 형편이 반드시 계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의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사신(使臣)을 지대(支待)함은 하나의 작은 비용입니다. 그런데도 석자(席子)를 쓰고자 하니, 담당한 자가 없다고 고(告)하므로 할 수 없이 시장에서 석자(席子)를 사왔으며, 두터운 종이를 쓰고자 하니, 담당한 자가 또다시 없다고 고하므로 할 수 없이 시장에서 종이를 사왔으며, 또 군기시(軍器寺)에서 가져다가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 밖의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의 작은 비용에 있어서도 그 지경이었는데, 만약 큰 비용이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지대(支待)하시렵니까? 이는 만세(萬世)에 통행(通行)하여도 폐단이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미 완성된 법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선왕(先王)의 제도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이미 시행해본 결과를 가지고 과연 시행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를 고찰하여, 줄일 것은 줄이고 보탤 것은 보태어 요(堯)·순(舜)의 중도(中道)에 맞게 하기를 힘쓰시면, 아마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절도(節度)가 있고 국가에는 용도가 결핍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1. 우리 나라는 외진 바다 밖에 있기 때문에 중국(中國)과는 어음(語音)이 같지 않은데, 조빙(朝聘)·공헌(貢獻)으로 인하여 왕래(往來)가 빈번하므로 역학(譯學)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여 그 일을 전담케 했고, 습독관(習讀官)을 두어 그 일을 익히게 했으며, 또 통사(通事)로서 중국 조정에 가는 자는 돌려가면서 골고루 가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등(三等)의 법을 세워 통사(通事) 가운데에서 정통(精通)하고 숙달[諳練]된 자를 선택하여 1등(等)을 삼고, 그 다음은 2등, 또 그 다음은 3등을 삼아, 경사(京師)481) 에 갈 때에 1등은 통사(通事)에 적용시키고, 2등은 압물(押物)·압마(押馬)에 적용시키고, 3등은 타각(打角)에 적용시켜서 잘하고 못함이 서로 구제되고 공평하게 왕래할 수 있게 했으니, 사실은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경사(京師)에 가는 사신(使臣)들이 데리고 가는 통사(通事)를 대부분 스스로 지정하여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등급(等級)을 무시했습니다. 그로 해서 늘 중국에 조회(朝會) 가는 자는 몇 사람이 돌려가면서 가는 데에 불과했으며, 그 나머지는 5, 6차례나 8, 9차례를 갔다온 경력이 있어야 혹 통사가 되기도 하고 못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초에 법을 만든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습니까? 대체로 폐단이 생긴 일에 있어서는 좋은 법을 가지고 구제할 수 없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좋은 법을 마련해 놓고서도 이를 지킬 수가 없다면 폐단은 언제라야 제거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신(臣) 등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또 중국은 우리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 하여 사신(使臣)을 보낼 때에는 반드시 학행(學行)이 겸비(兼備)한 선비를 골라서 보냅니다. 이번에 왔던 기순(祁順)·장근(張瑾)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사(名士)들이어서 읍양(揖讓)482) 을 하는 사이에 경서(經書)나 《사기(史記)》에 있는 말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 많았는데, 통사(通事)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심지어는 사신(使臣)이 손바닥 위에 글자를 써서 보여주어야만 그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당한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중국말[華語]에 능통하여 그 중간에서 제대로 주선할 만한 익숙한 선비가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이는 매우 조정(朝廷)에 빛이 나지 않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 이미 제정한 법을 다시 천명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통사(通事)를 지정하지 못하게 하고 각각 그 등급에 따라 순번대로 데리고 가게 할 것이며, 또 연소(年少)한 문신(文臣)들을 널리 선발해서 중국말[漢訓]을 배우게 하여, 능한 자에게는 상(賞)을 주어 그 나머지 사람도 권장이 되게 해서 중국으로 하여금 우리 조정에서 사대(事大)하는 성의와 모화(慕華)483) 의 뜻을 알게 하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1. 백성들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으며, 수령이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감사(監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監司)로 적임자를 얻게 되면 출척(黜陟)484) 이 밝아질 것이며, 출척이 밝아지면 선(善)을 한 사람은 노력을 할 것이고, 악(惡)을 한 사람은 경계를 하여 사람마다 공수(龔遂)황패(黃覇)485) 가 될 수 있어서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로 적임자를 얻지 못할 경우 출척이 밝아지지 못할 것이고, 출척이 밝아지지 못하면 부지런하고 착실한 사람이 반드시 권장되지 못하고 탐욕(貪慾)한 자는 징계됨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혜택이 아래에는 이르지 못하여 백성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監司)를 선택함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무성한 감당(甘棠) 나무 베지를 말라. 소백(召伯)이 거기에서 쉬어간 곳이니라.’486) 하였는데, 지금으로서는 소백처럼 당시에도 덕(德)을 베풀고 후세에까지 사랑을 끼친 이가 과연 없단 말입니까? 신(臣) 등은 듣건대 요즈음 감사(監司)들은 옛일을 본받아 교화(敎化)를 펴는 것은 여사(餘事)로 삼고, 권문(權門)에 뇌물을 바치는 것을 급무(急務)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읍(下邑)에서 주구(誅求)하여 먼저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것들이 왕왕(往往) 그러한 것입니다. 또 전최(殿最)487) 를 매길 때에도 그 사람들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헤아리지도 않고, 오직 세력이 있고 없는 것만을 비교하여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 하면 승진(陞進)시키고, 누가 누구의 아우라 하면 승진시키며, 누구의 인아(姻婭)라 하면 승진시키고, 평소에 교분(交分)이 있으면 승진시킵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포상(褒賞)을 받고 징계를 받는 자는 거의 없게 되어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있으니, 훌륭한 이들은 더욱 해체(解體)되고, 못난 자들은 더욱 방자해집니다. 이렇게 하고서는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아서 그 덕을 생각하게 하고자 해도 어려운 것입니다. 나라에서 감사를 선발할 때에는 의정부(議政府)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는데, 반드시 2품(品) 이상을 취하는 것은 그 책임을 중하게 여긴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임자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거듭 염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신(臣) 등의 생각으로는, 주(周)나라의 소백(召伯)과 같은 이는 지금 얻을 수 없으나, 원하건대 다시 정밀하게 선택하여 2품 이상으로 한정하지 말고 3품도 겸해서 취하여, 오직 훌륭함과 능력만을 위주로 승선(承宣)의 임무를 맡기게 되면 아마 출척(黜陟)이 밝아지고 권징(勸懲)이 시행(施行)되어, 정치가 공평해지고 송사[訟]가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실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평안도(平安道)는 중국과 조빙(朝聘)할 때에 왕래(往來)하는 길이며, 야인(野人)들이 입구(入寇)하는 요충지여서 노역(勞役)에 이바지하는 것이 다른 도(道)보다 배나 되는데, 지역(地域)은 넓은 데다가 인구(人口)는 적어서 물력(物力)이 모자라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남도(南道)의 백성을 이주(移住)시켜 이를 충당시켰는데, 지금 여러 고을의 백성 중에 실호(實戶)로 불리워지는 자는 모두 그 때에 옮겨온 사람으로서 여러 고을에서 그들의 힘을 입게 되었으니, 이는 만세(萬世)를 위한 깊은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변경(邊警)이 자주 있게 되자 번거로운 사명(使命)이 전보다 더 많아져서 온 도(道)가 어수선하여 편안하게 쉴 여가가 없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고생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이런 때에 그들을 보호하여 안정되게 해주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臣) 등은 세조(世祖)께서 이주(移住)시킨 백성들이 따라서 이산(離散)될까 걱정입니다. 신 등은 듣건대 중국 경사(京師)에 가는 사신(使臣)이 연로(沿路)의 각관(各官)에서 착취한 물건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을 귀신(鬼神)도 수송(輸送)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반드시 그 일이 연로(沿路)의 백성에게 미치게 되어, 이를 번갈아가면서 운반하여 행인(行人)이나 거인(居人)이나 모두가 재송(齎送)하느라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와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 심지어는 파산(破産)까지 하게 되며, 그렇게 해서 의주(義州)까지 이르면 또 그것을 호송 군사(護送軍士)에게 나누어 주어 태마(駄馬)에 싣게 합니다. 군사(軍士)들의 말은 본래가 파리하고 약한데, 무거운 짐을 싣고서 험하고 먼 길을 가게 되면 말이 어떻게 죽지 않으며, 사람은 어찌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평안도의 큰 고통입니다. 나라에서 보내는 검찰관(檢察官)은 그 일행(一行)을 규찰(糾察)하여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험난한 만리(萬里) 길에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오는데, 사정(私情)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니, 비록 비행(非行)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규명하여 들추어 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편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감찰(監察)을 보내지 마시고, 한훈 학관(漢訓學官)을 선택해서 서장(書狀)을 주어 보내며, 의주(義州)에다 대원(臺員)을 보내어, 가지고 가는 일체의 물품을 정해진 수와 대조 점검해서 만일 규정을 범한 자가 있을 때 즉시 그 죄를 다스린다면,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거의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殿下)께서 또 그들의 요역(徭役)을 가볍게 해주고 세금을 줄여서, 급하지 아니한 공세(貢稅)는 면제하여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해주시면, 어찌 연로의 백성뿐이겠습니까? 온 도(道)의 백성들이 모두 소복(蘇復)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하였다. 상소(上疏)가 올라가자 임금이 제1조(條)에 어서(御書)하기를,

"내가 마땅히 자나깨나 잊지 않겠다."

하고, 이어 원상(院相)에게 명하여 의논(議論)하게 했다. 정인지(鄭麟趾)·김질(金礩)·김국광(金國光)이 제2조를 의논하기를,

"국초(國初)에서 20년 뒤인 갑오년488) 에 이르러서 서사(署事)를 파(罷)하였다가 20년 뒤인 계축년489) 에 이르러 서사를 복설(復設)하였으며, 그리고 20년 뒤인 을해년490) 에 다시 서사를 혁파했는데, 이는 모두 때에 따라 손익(損益)한 것이니, 주상(主上)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고,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조석문(曺錫文)·김질(金礩)·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이 제3조를 의논하기를,

"상소(上疏)대로 따르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한명회·조석문·김질·윤자운이 제4조를 의논하기를,

"이조(吏曹)로 하여금 상의(商議)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고, 정인지·정창손·한명회·조석문·김질·윤자운·김국광이 제5조를 의논하기를,

"풍문(風聞)을 금하게 한 법은 본래 애매한 일로 인하여 상해(傷害)를 입은 자가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종(祖宗)께서 금하는 법을 엄하게 만든 것이니, 다시 시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고, 정인지가 제6조를 의논하기를,

"공안(貢案)의 횡간(橫看)491) 은 사실 지나친 점이 있으니, 때에 따라 알맞게 시행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고, 정인지·정창손이 제7조를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하소서. 그러나 이미 강습관(講習官)을 두었으니, 굳이 다른 법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고, 정창손·한명회·조석문·김질·윤자운이 제8조를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하소서."

하였고, 조석문·김질이 제9조를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하소서."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제2조의 정부(政府)의 서사(署事)는 복설(復設)하기 어려운 것이며, 제3조의 원상(院相)을 파(罷)하자는 것은 이보다 앞서서도 말한 자가 많았고, 또 예(禮)로 대신(大臣)을 대접하는 도리에도 어긋나므로 부득이해서 따르겠으며, 제9조에 감찰(監察)을 보내지 말고 대관(臺官)을 보내자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법으로 삼을 수는 없으며, 제4조와 제5조와 제6조와 제7조와 제8조는 모두 여러 의논에 따르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67권 8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4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재정-국용(國用) / 재정-공물(貢物) / 호구-이동(移動) / 윤리-강상(綱常) / 어문학-문학(文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註 469]
    서물(庶物) : 모든 만물.
  • [註 470]
    전(傳) : 《논어(論語)》.
  • [註 471]
    천위(天位) : 임금의 자리.
  • [註 472]
    천보(天寶)의 난리(亂離) :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말함.
  • [註 473]
    동도(東都) :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으로, 후한(後漢)의 광무(光武)가 여기에 도읍(都邑)을 하였으며, 동도(東都)라 불리웠음.
  • [註 474]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475]
    만기(萬機) : 온갖 정무(政務).
  • [註 476]
    윤음(綸音) : 임금의 명령.
  • [註 477]
    언건(偃蹇) : 거드럭거리는 것.
  • [註 478]
    걸힐(桀黠) : 교활함.
  • [註 479]
    팔음(八音)이 갑자기 끊기게 되었습니다. : 임금이 승하(昇遐)함을 일컫는 말로, 요(堯)임금이 죽자 천하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 팔음(八音)은 여덟 가지의 음악.
  • [註 480]
    대걸(大桀) 가운데에서 소걸(小桀) : 농민(農民)에게 세금을 거둠에 있어서 국용(國用)에 알맞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 고자장 하(告子章下)에서 인용된 것임.
  • [註 481]
    경사(京師) : 중국 서울.
  • [註 482]
    읍양(揖讓) : 주고받는 인사.
  • [註 483]
    모화(慕華) : 중국을 사모함.
  • [註 484]
    출척(黜陟) : 상벌(賞罰).
  • [註 485]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 이들은 한(漢)나라의 순리(循吏)로서 지방 태수(地方太守)가 되었을 때에 농사를 권장하니, 백성이 부유(富裕)해져서 경내(境內)가 잘 다스려졌음.
  • [註 486]
    ‘무성한 감당(甘棠) 나무 베지를 말라. 소백(召伯)이 거기에서 쉬어간 곳이니라.’ : 주(周)나라 소백(召伯)이 남국(南國)을 순행(巡行)하면서 교화(敎化)를 펼 때에 감당 나무 아래에서 쉬어간 적이 있는데, 그 후 그곳 사람들이 그의 덕을 못잊어 읊은 노래임.
  • [註 487]
    전최(殿最) : 최(最)는 상(上), 전(殿)은 하(下)를 뜻한 것으로, 관리(官吏)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는 것을 말함.
  • [註 488]
    갑오년 : 1414 태종 14년.
  • [註 489]
    계축년 : 1433 세종 15년.
  • [註 490]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491]
    횡간(橫看) : 간단한 일의 순서. 또는 물목(物目)을 난을 설치하여 표시하는 문서.

○司憲府大司憲尹繼謙等上疏曰:

臣等伏覩主, 上殿下嗣大歷服于玆 八年。 聖德日以新, 聖學日以就, 高明光大, 卓冠千古, 足以運掉一世, 劑量群品。 故慈聖大妃還政, 此正殿下憂勤惕慮之秋也。 臣等俱以庸材, 待罪言職, 日夜淬礪, 思補殿下惟新之治。 謹以鄙見條陳于後, 幸垂睿鑑裁擇。 一。 民生有欲, 無主乃亂, 上天眷命, 作之君師, 必予之以聰明剛斷之資, 重厚包容之量, 使首出庶物, 表正四方, 此蓋天以至難任之, 非予之可安之地而娛之也。 以來, 聖帝明王所以兢兢業業小心畏懼者, 誠知天之所畀乃至難之任, 而不可以易心處之也。 《傳》曰: "爲君難。" 《書》曰: "天位艱哉!" 蓋以難處之, 則難或可易; 不知爲難而以易處之, 則他日之難, 有不可爲者矣。 殿下卽位以來, 游心聖學, 宵旰圖治, 凡所施爲, 動法前聖, 可謂知所難而不敢以易處之也。 然靡不有初, 鮮克有終, 古今通患。 難之之心或弛, 則易之之心得以入之, 易之之心入之, 則必曰: "吾治已足矣, 吾民已安矣", 可以高枕肆志矣, 邦本已搖而不知, 禍機垂發而不悟, 至於傷敗, 亦無可救, 所謂他日之難, 有不可爲者, 此也。 嗟! 夫明皇 開元之治, 何其盛也? 天寶之亂, 幾至傾覆, 玄宗一身, 而其治亂若是其異者何也? 此無他, 難之之心不能有終, 而易之之心得以入之故也, 可不戒哉? 伏願殿下其難其愼, 常若今日兢兢業業, 終始惟一, 思皇天畀付之重, 全念祖宗艱大之業, 任賢勿貳, 去邪勿疑。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不去, 毋安於小成而忽於力行, 毋狃於近利而昧於大猷。 知民爲邦本, 則思所以固之, 知食爲民天, 則思所以足之。 必明正道, 必闢異端, 必振綱紀, 必正風俗, 以至出入起居發號施令, 罔有不欽, 用開太平之治, 永孚無疆之休。 一。 臣等聞天子統三公, 三公制卿大夫, 卿大夫治士庶人, 貴以臨賤, 賤以承貴。 此爲治之大經, 而其序不可紊也。 竊觀我國自政府而下有六曹焉, 六曹而下有諸司焉, 諸司之所職, 六曹得以糾之, 六曹之所職, 政府摠而治之, 啓稟而行之, 可否相濟, 輕重相維, 而爲治之大經, 於是乎立矣! 夫如是故, 政令出, 一事無過擧。 上之使下, 猶心腹之運手足根本之制枝葉, 下之事上, 猶手足之衛心腹枝葉之庇根本。 太祖以此而開基, 太宗以此而貽謀, 世宗以此而致太平。 世祖大王卽位之初, 懲奸臣之竊柄, 乃罷政府署事, 三公以下充位而已。 其初足以矯政府權重之失, 而不知其流有政出多門之弊矣。 今夫一司之中, 一事之微, 一提調以爲不可, 則皆得直達而法由是立。 是故法之廢立, 彼此矛盾, 朝令夕改, 莫適所從。 雖以殿下之聰明天性, 欲一一親自裁決, 則是以人君而下行吏職, 殆失所謂體統, 而終亦不能無弊矣。 自古天下, 其治亂雖殊, 所以任相, 則未有改者也。 獨 光武不任三公, 事歸臺閣, 而東都之業遂衰, 是知國之不治, 正由相不得人, 非任相之罪也。 且以 太宗之英特, 號爲身兼將相, 然猶必使天下之事, 關由宰相然後施行, 蓋謂理勢之當然, 有不可得而易者。 願殿下推古鑑今, 復政府署事之制, 一如祖宗故事, 擇賢相而任之, 則庶幾 ‘古者勞於求賢、逸於任人之義’, 而太平之治, 可馴致矣。 若以權重爲疑, 則臣等竊以爲不然。 臣等聞人主有人主之權, 宰相有宰相之權。 任用賢能, 賞善罰惡, 人主之權也, 秉鈞當軸, 宅揆百工, 宰相之權也。 人主能自守其權而不奪宰相之權, 則人主之權重而國家治安。 重宰相之權, 所以重人主之權也。 古人有言曰: "政權不可一日不在朝廷。 在朝廷則治, 在臺閣則亂。" 夫天下之權, 必有所歸, 不在乎彼, 則在乎此; 不在乎此, 則在乎彼, 在彼在此, 治亂隨之。 然則爲人主者, 可不思所以治, 思所以亂而必使權柄常在於朝廷乎? 臣等又聞人主患不推誠, 人臣患不竭忠。 苟上疑其下, 下欺其上, 將以求理, 不亦難乎? 古之善相天下者, 若伊尹之於成湯, 傅說之於高宗, 擧天下之事而付之一人之手, 其權可謂重矣。 然成湯高宗推誠以待之, 任之而不疑者。 誠知之賢可以任天下之事, 而盡忠於我也。 之所以任天下之事而不敢辭, 當天下之權而不敢懼者, 亦知夫上之推誠以待己, 而委任之專也。 是故其君臣之間一體相成, 而功烈如彼其盛也。 殿下誠能得一賢相, 責之以之任, 待之以成湯高宗之誠, 則家之治, 不得專美於前矣。 願殿下留意焉。 一。 院相之設, 祖宗朝所無, 乃出於世祖一時之權宜, 非所以永久持循之制也。 頃在丁亥, 白顒黃哲金輔諸使臣之來, 車駕相望而支待之事甚煩且緊, 世祖乃命申叔舟韓明澮具致寬常詣政院, 與議處置, 院相之名自此而始。 世祖睿宗相繼禮陟, 殿下以幼沖之年, 入承大統, 內藉慈聖大妃輔導之益, 而以爲外不可無大臣朝夕贊襄之力。

故乃令曾經政丞者, 更日入政院, 參詳出納公事, 蓋亦因襲世祖之權宜而爲之耳。 今則春秋長盛, 慈聖大妃已歸大政, 萬機之煩, 悉皆獨斷, 院相之罷, 此其時也。 豈可以一時之權宜, 而得已不已乎? 且官職不可以相侵, 而大臣當以禮接。 綸音出納, 承旨之職, 而大臣乃得與聞, 不幾於相侵乎? 國家自祖宗以來, 於老成之臣, 其待之也以禮, 其養之也以厚, 會坐之地, 名曰賓廳, 支供之司, 名曰禮賓, 所以示尊敬而以賓禮待之也。 今也直使之扶衰而起, 凌晨而入, 寄坐政院, 勞倦移日, 斯不亦有乖於禮接乎? 況殿下凡有疑, 必廣詢博訪於諸大臣, 取其可否然後施行, 非止於一二人之議, 則更日坐院, 竟有何益? 伏望亟罷院相, 以祛官職相侵之弊, 以伸禮接大臣之義。 一。 《詩》云: "濟濟多士, 文王以寧。" 又曰: "文王壽考, 何不作人?" 蓋邦國之安寧, 由於多士之濟濟, 而多士之濟濟, 本之人主之作興。 古昔聖王所以樂育人材而譽髦斯士者, 豈非以人材國之利器, 而不可以一日無也歟? 我朝自祖宗以來, 謹庠序之敎, 申科目之法, 養士取士之道, 無讓於古。 而世宗大王特患其應科目之選者, 率以記誦詞章之習, 以爲進取之資, 而不復勉强於學問之功。 乃揀文臣年少聰敏者, 使讀書於山房。 於是通敏博洽之士, 雄深雅健之才, 彬彬輩出, 人材之多, 於斯爲盛。 今之名卿鉅公, 典文衡、潤皇猷者, 皆世宗之所作養, 而後進之士無有髣髴者。 殿下不於此時思有以作興, 而數十年之後, 斯人旣老, 則未審殿下誰與而飾文治, 於何而資顧問? 且詞章雖爲末技, 中朝文士奉使而來, 以我國文敎所在, 率作賦詩以索續和。 若不能壓倒而出於其右, 則其無輕我之心乎? 故文人才士, 國之華也, 不可以不預養。 伏望體文王之作人, 法世宗之於故事, (妙)〔抄〕 揀文臣年少者, 授以閑職, 不任以事, 使得專意於學問, 肆力於文章, 則庶幾敎養得宜, 而人材輩出矣。 一。 風聞擧劾之法, 似妨於公道, 而實有益於治。 何以明其然也, 今有人言, 某也爲奸, 某也爲敗常亂俗之事, 則不問其實歟否歟, 竝加鞫劾, 其間豈無言由怨起事非其實者, 或見繁治乎? 及夫毁譽之言, 無翼而飛, 是非之聲, 無脛而走。 爲惡在於隱伏, 而論執出於不測, 則雖有偃蹇桀黠者, 豈敢肆然而爲非哉? 是其妨於公道者常少, 而有輔於治者常多, 固不可以見小損而遺大益也。 今其法, 除外官貪汚、虐民者外, 不得以風聞擧劾。 嗚呼! 今之傷於治、害於道者, 豈止貪汚、虐民二事而已哉? 頃年以來, 民風國俗薄惡尤甚, 或以奴奸主, 或以妾爲妻, 或以子弟而陵父兄, 以至毁亂綱常者, 豈無其人, 而委巷之間陰私之事, 其蹤跡闇昧, 鮮有因事而發者。 今若一切置之, 見焉而不得言, 聞焉而不得問, 則是終無有執其咎者矣, 爲惡者安所顧忌哉? 紀綱必由此而散毁, 風俗必由此而澆漓, 甚非細故也。 伏望申嚴是法, 雖非貪汚虐民者, 苟係干綱常, 則皆得發擧, 以絶奸萌, 以正風俗。 一。 世祖大王以國家經費制有未盡, 不一大定, 則無以爲成法。 故乃與二三大臣, 更加詳定, 務要精備, 功未告成, 八音遽遏。 殿下遹追先志, 遂訖就緖, 可謂善繼善述而光于前烈矣。 竊恨其制用之過約, 而制貢之過寡也。 《孟子》曰: "欲輕之於之道者, 大也, 欲重之於之道者, 大也。" 蓋之道, 中而已矣。 故制貢之法, 必先度其用, 度之多寡, 權其物産之豐嗇, 使輕不至於, 重不至於, 然後始可以得中, 通行於萬世而無弊。 今詳定之法, 約一年之調度, 以定收貢之數, 蓋庶幾焉, 而如交隣事大貢獻享賓之物, 裁損過中, 不可施行。 故乃依其舊例而爲之, 依其舊例, 則費用稍廣, 費用稍廣, 而收貢之數不加於前, 則其勢必有難繼之患。 以近日之事觀之, 使臣支待, 一小費耳。 欲用席子, 而典者告匱, 不得已貿席於市肆, 欲用厚紙, 而典者又告匱, 不得已而貿紙於市肆, 又取於軍器寺而用之。 類此而推之, 他可知矣。 以一小費, 而其匱乏乃爾, 脫有大費, 將復何支? 殆非所謂通行於萬世而無弊者也。 伏望勿謂已成之法而不可改, 勿謂先王之制而不可改。 因其已行者而驗其果可行果不可行, 當損者損之, 當益者益之, 務合於之中, 則庶幾取民有制, 而國無用乏之憂矣。 一。 我國邈在海表, 與中國語音殊異, 而朝聘貢獻往來陸續, 以爲譯學不可以不重。 故設司譯院以專其事, 置習讀官以肄其業, 又懼通事之赴朝者未得循環均往。 故立三等之法, 於通事之中, 擇其精通(請)〔諳〕 練者爲一等, 其次爲二等, 又其次爲三等, 赴京之際, 一等以擬之通事, 二等以擬之押物押馬, 三等以擬之打角, 夫能否相濟, 往來適均, 實法之良者。 頃年以來, 赴京使臣帶行通事, 率多自占, 惟其所欲, 無復等第。 由是每行入朝者, 不出於數輩之輪環, 而其餘則或歷五六行或歷八九行, 而後乃始有得焉有不得焉。

噫! 當初立法之意, 豈如是乎? 夫事之有弊者, 患不得良法以救之, 而得良法又不能守也, 則弊將何時而祛? 臣等竊惑焉。 且中國以我東方禮義之國, 凡遣使臣, 必擇學行兼備之士。 玆者出來兩使, 皆中朝名流, 揖讓之間, 多以經史之語白上, 而通事皆未能曉解, 至有使臣畫字於掌上以示然後乃悟。 噫! 以堂堂禮義之國, 而曾不得一傳給之士, 能通華語者, 周旋於其間哉? 其無光於朝廷甚矣。 伏望申其已立之法, 使赴朝使臣毋得自占通事, 各以其等輪次帶行, 又選年少文臣, 使習漢訓, 能者賞之, 以勸其餘, 使中國知朝廷事大之誠慕華之意, 不勝幸甚。 一。 民生之休戚, 關於守令, 守令之賢否, 在乎監司。 監司得其人, 則黜陟明, 黜陟明, 則爲善者聳厲, 爲惡者戒懼, 人皆可以爲而民受其賜矣。 監司不得其人, 則黜陟不明, 黜陟不明, 則勤謹者未必勸, 貪殘者無所懲, 澤未下究而民生日困矣。 然則監司之選, 其可不之重乎? 《詩》云: "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 其施德於當時而遺愛於後, 未果有如召伯者乎? 臣等頗聞今之爲監司者, 以承流宣化爲餘事, 以行賄權門爲急務, 誅求下邑而先自病民者, 往往而是。 且於殿最之際, 不計其人之賢否, 惟視夫勢之冷暖, 某也某之子也則陞之, 某之弟也則陞之, 某之姻婭也則陞之, 素所交好也則陞之。 由是所褒者皆是而所貶者無幾, 是非顚倒, 賢者益以解體, 不肖者益以恣肆。 如是而欲民之受其賜思其德, 難矣! 國家之選監司也, 使議政府、臺諫薦之, 而必取於二品以上者, 所以重其任也。 然不得其人猶若是, 豈不重可慮也哉? 臣等以爲召伯, 今不可得, 願更加精擇, 勿限二品以上, 兼取三品, 惟其賢能, 以委承宣之寄, 則庶幾黜陟明勸懲行, 政平訟理而民受實惠矣。 一。 平安一道, 當朝聘往來之路, 野人入寇之衝, 供頓勞役倍於他道, 而地廣人稀, 物力耗弱, 莫之能支。 故世祖大王徙南道之民以實之, 今諸邑之民號爲實戶者, 皆其所徙之人, 而諸邑賴之, 其爲萬世計深矣。 比年以來, 數有邊警, 使命之繁, 又加於前, 擧道騷然, 未遑寧息, 民生困苦, 不可忍言。 殿下若於此時不思所以懷保而撫安之, 則臣等恐世祖所徙之民, 又從而離散矣。 臣等頗聞赴京使臣, 於沿路各官行索所需, 所獲旣多, 而不能神運鬼輸, 則必役及於沿路之民, 遞相轉輸, 行齎居送, 盡室在塗, 顚頓勞瘁, 至於破産, 而逮至義州, 則又分授護送軍士, 使之駄載。 軍士馬畜, 本皆羸弱, 而壓以重負, 觸冒險遠, 馬安不得斃, 人安得不困哉? 此平安一大病也。 國家之遣檢察官, 所以糾一行而防此弊也。 然間關萬里, 同行同返, 不得無情, 則雖見非(患)〔行〕 亦不堪痛加糾擧, 此其勢然也。 請自今勿遣監察, 擇漢訓學官借以書狀遣之, 別遣臺員于義州, 一應挾帶之物, 照數盤點, 如有所犯, 卽治其罪, 則沿路之民庶幾復蘇。 而殿下又輕其徭薄其賦, 罷不急之貢, 以厚其生, 則豈徒沿路之民? 一道之民擧皆蘇復矣。 願殿下察焉。

疏上, 御書第一條曰: "予當寤寐不忘。" 仍命院相議之。 鄭麟趾金礩金國光議第二條: "自國初至甲午二十年而罷署事, 二十年至癸丑年間復署事, 又二十年至乙亥復革署事, 是皆因時損益, 在上裁。" 鄭麟趾鄭昌孫韓明澮曺錫文金礩尹子雲金國光議第三條: "依上疏, 便。" 韓明澮曺錫文金礩尹子雲議第四條: "令吏曹商議施行。" 鄭麟趾鄭昌孫韓明澮曺錫文金礩尹子雲金國光議第五條: "禁風聞之法, 本爲因曖昧事見傷者多, 故祖宗嚴立禁制, 恐難復立。" 鄭麟趾議第六條: "貢案橫看, 實有過當處。 臨時取中施行爲便。" 鄭麟趾鄭昌孫議第七條: "依所啓。 然旣置講肄官, 不必更立他法。" 鄭昌孫韓明澮曺錫文金礩尹子雲議第八條: "依所啓。" 曺錫文金礩議第九條: "依所啓。" 傳曰: "第二條政府署事, 復之爲難, 第三條罷院相, 前此言者亦多, 且有乖接大臣以禮, 故不得已從之, 第九條勿遣監察, 別遣臺官可。 然不可爲式 第四條、第五條、第六條、第七條、八條, 竝從諸議。"


  • 【태백산사고본】 10책 67권 8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4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재정-국용(國用) / 재정-공물(貢物) / 호구-이동(移動) / 윤리-강상(綱常) / 어문학-문학(文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