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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65권, 성종 7년 3월 11일 갑인 8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경혜 공주의 아들인 중부 참봉 정미수의 문과 시험의 응시를 허락하다

중부 참봉(中部參奉) 정미수(鄭眉壽)가 상언(上言)하여 문과(文科) 시험에 응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내가 들으니, 경혜 공주(敬惠公主)334) 의 아들을 허통(許通)335) 시킨 일은 세조께서 예종(睿宗)에게 명하여 이를 써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전지(傳旨)를 내렸다고 한다. 그 어필(御筆)을 수색(搜索)하여서 아뢰어라."

하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두루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이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기축년336) 4월 12일을 상고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전교(傳敎)하기를, ‘지난 번에 내가 옆에서 모시고 있을 때 세조(世祖)의 전교(傳敎)를 친히 받들었는데, 「경혜 공주의 아들은 난신(亂臣)의 아들 예(例)로서 논할 수가 없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즉시 일기(日記)를 썼었다. 지금 일기를 상고하니, 성훈(聖訓)이 그대로 계시니, 마땅히 종친(宗親)의 예(例)로써 서용(敍用)하도록 하라.’고 하니, 원상(院相) 한명회(韓明澮)와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정종(鄭悰)은 선왕조(先王朝)에 죄가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관계되니, 그 아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인데, 지금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 태종조(太宗朝)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끝내 세종조(世宗朝)에 서용되지 않았으니, 정종은 선왕조(先王朝)에 죄를 지었으므로 종실(宗室)의 예(例)로써 서용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친히 세조의 전교를 받아서, 내가 경혜 공주의 아들을 쓰는데, 무슨 불가(不可)한 점이 있겠는가?’고 하고, 이어서 이조와 병조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경혜 공주의 자식은 다른 예에 의하여 서용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이것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전교(傳敎)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 4관(四館)337) 을 불러서 이를 물으니, 4관에서 아뢰기를,

"정미수는 난신(亂臣)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를 논박(論駁)하여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명하여 부시(赴試)하도록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6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27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정론-정론(政論)

  • [註 334]
    경혜 공주(敬惠公主) : 문종(文宗)의 딸. 정종(鄭悰)에게 출가하였음.
  • [註 335]
    허통(許通) : 벼슬길이 막힌 사람에게 벼슬길에 나오도록 허락하여 주던 일.
  • [註 336]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337]
    4관(四館) : 성균관·예문관(藝文館)·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을 말함.

○中部參奉鄭眉壽上言, 請赴文科試, 傳曰: "予聞敬惠公主子許通事, 世祖睿宗, 書之下傳旨吏、兵曹。 其搜索御筆以啓。" 承政院旁搜不得, 乃考《承政院日記》己丑年四月十二日書云: "傳曰: ‘曩予侍側世祖, 親承傳敎: 「敬惠公主之子, 不可例論亂臣之子」, 予卽書于《日記》。 今考《日記》, 聖訓猶在, 當以宗親例敍用’, 院相韓明澮及政院啓曰: ‘鄭悰於先王朝, 罪關宗社, 其子得保首領幸矣, 今不可輕赦。 且太宗朝得罪人, 終世宗朝不敍。 鄭悰得罪先朝, 不可以宗室例敍用。’" 傳曰: "予親承世祖傳敎, 予用敬惠公主之子, 何不可之有?’ 仍下傳旨于吏曹、兵曹曰: ‘敬惠公主子息, 依他例敍用。’" 政院將此以啓, 傳曰: "睿宗大王傳敎如此, 何不錄名?" 其召四館問之, 四館啓曰: "眉壽, 亂臣之子, 故駁之不錄名。" 命許赴。


  • 【태백산사고본】 10책 6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27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