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소사식의 사관 임명 문제를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경(司經)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무릇 사관(史官)은 결원(缺員)이 있으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하의 관원이 삼관(三館)171) 관원의 사조(四祖)172) 를 취(取)하여 그 세계(世系)를 살펴보고, 또 그 인품(人品)을 살펴보고서 이를 천거하고, 춘추관(春秋館)의 관원까지 모두 의정부(議政府)에 모여서 그 가부(可否)를 의논하고서 그 가(可)한 사람은 이에 그 재주를 시험한 후에 이를 뽑게 됩니다. 그런데 소사식(蘇斯軾)은 재주를 시험할 때 마침 봉교(奉敎) 이하의 관원이 모두 죄를 범하여 산관(散官)173) 이 되었으므로, 소사식이 이 틈을 타서 얻게 되었습니다. 대저 신진(新進)이 처음에 명예와 절개를 힘써 닦는 사람도 오히려 그 종말까지 잘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처음부터 구차스럽게 진출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간원(司諫院)에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174) 하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이고, 다만 족계(族系)에 흠이 있는 것만이 아니니, 개차(改差)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영사(領事)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찌하겠는가?"
하니, 김질(金礩)이 대답하기를,
"권경우(權景祐)의 아뢴 바가 옳습니다. 신(臣)이 여러 번 사관(史官)의 취재(取才)한 것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본관(本館)175) 에서 천거한 바를 임용했는데, 지금 소사식(蘇斯軾)은 본관(本館)의 천거한 바가 아니니,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집의(執義) 이형원(李亨元)이 아뢰기를,
"건국(建國) 초기에는 사관(史官)은 재주를 시험보는 법이 없었으며, 다만 여러 사관(史官)들이 의논을 정해서 천거하면 이조(吏曹)에서 천거에 따라 이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박은(朴訔)이 정승이 되자 건의(建議)하기를, ‘중요한 인선(人選)을 연소(年少)한 하사(下士)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재주를 시험보는 법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소사식(蘇斯軾)은 본관(本館)에서 천거한 바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동료(同僚) 사이에 끼기도 여려우니, 개차(改差)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64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0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가족-가족(家族) / 신분-양반(兩班) / 사법-법제(法制)
- [註 171]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의 세 기관을 말함.
- [註 172]
사조(四祖) : 부(父)·조부·증조부·외조부의 총칭.- [註 173]
산관(散官) : 실지로 맡은 직무가 없는 벼슬.- [註 174]
서경(署經) : 임금이 새로 관리를 임명할 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그 인선(人選)에 동의하여 신임관(新任官)의 고신(告身)에 서명(署名)하던 일.- [註 175]
본관(本館) : 예문관(藝文館).○御經筵。 講訖, 司經權景祐啓曰: "凡史官有闕, 則藝文館奉敎以下官取三館員四祖, 審其世系, 又察其人品薦之, 兼春秋館員皆會議政府, 議其可否, 而其可者乃試其才而取之。 斯軾試才時, 適奉敎以下官皆犯罪作散, 斯軾乘間得之。 大抵新進之初, 砥礪名節者, 尙不克終, 況自初有苟進之心乎? 諫院之不署告身者以此, 非但族系有咎也, 請改差。" 上顧謂領事曰: "何如?" 金礩對曰: "景祐所啓是也。 臣累觀史官取才, 必用本館所薦, 今斯軾不爲本館所薦, 恐不可。" 執義李亨元啓曰: "國初史官無試才法, 但諸史官定議而薦, 吏曹從薦授之。 至朴訔爲相, 建議云: ‘重選, 不可委之年少下士’, 更立試才法。 今斯軾非本館所薦, 亦難齒於僚中, 改差爲便。"
- 【태백산사고본】 10책 64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0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가족-가족(家族) / 신분-양반(兩班) / 사법-법제(法制)
- [註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