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남도 절도사를 혁파하는 것과 갑산진을 혜산으로 옮기는 문제를 의논하다
일찍이 영안도(永安道)의 감사(監司)와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자를 불러서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를 혁파하는 것과 갑산(甲山)을 혜산(惠山)으로 옮기는 편부(便否)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더니, 허종(許琮)·어유소(魚有沼)·김교(金嶠)·이계손(李繼孫)·박서창(朴徐昌)·민효원(閔孝源)·이서장(李恕長)이 의논하기를,
"남도(南道)의 절도사를 혁파(革罷)하지 아니하는 것이 가하다고 여기는 것은 한 가지이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영안도(永安道) 한 도는 안변(安邊)부터 오진(五鎭)에 이르기까지 도리(道里)가 요원(遼遠)하여, 꼬리가 커서 흔들기가 어려운 형세이니, 모름지기 내지(內地)에다가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진압하여야 한다는 것이 한 가지 가(可)한 것입니다. 남도(南道)의 군사(軍士)가 북방(北方)을 방어(防禦)하게 되는데, 재능(才能)이 있는 자는 모두 남도의 본영(本營)에서 역(役)을 맡고 있기 때문에 방어하는 군졸이 모두 잔약(殘弱)하다는 것이 첫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북청(北靑)은 야인(野人)이 내왕(來往)하는 길이며, 대장(大將)이 있는 곳인데, 만약 단약(單弱)해지면 족히 위엄을 보이지 못할 것이며, 그 형세를 장(壯)하게 하고자 하면 힘이 또한 넉넉지 못할 것이고, 그 다른 것으로는 앉아서 군식(軍食)을 허비하며, 역로(驛路)를 노폐(勞敝)하게 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을 모두 열거할 수가 없는 것이 둘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이른바 가하다는 것은 만세(萬世)에도 반드시 있지 않을 일을 위한다는 것이고, 이른바 불가하다는 것은 오늘날의 긴절(緊切)한 폐해(弊害)를 위한 것이니, 혁파하는 것이 편합니다. 또 적로(賊路)의 완급(緩急) 때문에 갑산진(甲山鎭)을 혜산(惠山)을 옮긴다면, 갑산에도 역시 적로(賊路)가 있는데 진동보(鎭東堡)·동인보(同仁堡)에 만약 변고(變故)가 있으면 멀어서 미처 구원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폐단 때문에 갑자기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견수(金堅壽)는 의논하기를,
"영안도(永安道)는 남쪽과 북쪽이 멀리 떨어져 있고, 절도사는 멀리 변진(邊鎭)에 있으므로 내지(內地)의 군무(軍務)는 여러 수령(守令)에게 맡겼기 때문에 병정(兵政)이 해이(解弛)했었습니다. 남도를 설치하면서부터 군려(軍旅)가 정제(整齊)되어 옛날과는 서로 현격(懸隔)한 차이가 있는데, 더욱이 여러 종류의 야인(野人)이 끊임없이 내조(來朝)하여 내지(內地)에 중진(重鎭)이 없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혹시라도 업신여긴다면 계책이 아닌 것입니다. 또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가 궐원(闕員)이 있으면 남도 절도사가 가서 이를 대신할 수 있으므로, 완급(緩急)에 서로 구원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양진(兩鎭)을 설치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로(賊路)의 요해(要害)라 하여 갑산진(甲山鎭)을 혜산(惠山)으로 옮긴다고 하면, 내지(內地)에도 또한 적로가 있는데, 하물며 진동·동인 두 곳의 보(堡)도 또한 군력(軍力)이 단약(單弱)해져서 능히 서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끝을 중하게 여기고 근본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본읍(本邑)의 군졸을 뽑아서 혜산의 경비(警備)를 늘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6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9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命召曾經永安道監司ㆍ節度使者, 議革南道節度使及移甲山于惠山便否, 許琮、魚有沼、金嶠、李繼孫、朴徐昌、閔孝源、李恕長議: "不罷南道節度使有可者一, 不可者二。 永安一道, 自安邊至五鎭, 道里遼遠, 有尾大難掉之勢, 須於內地, 設巨鎭以壓之, 此一可也。 南道軍士皆防禦北道, 而有才能者, 皆役於南道本營, 故防禦之卒, 類皆殘弱, 一不可也。 北靑 野人來往之路, 大將所在之處, 若單弱, 則不足以示威, 欲壯其形勢, 則力亦不贍, 其他坐費軍食, 勞敝驛路, 病民之事, 不可殫擧, 此二不可也。 所謂可者, 爲萬世不必有之事, 所謂不可者, 爲今日緊切之害, 革罷爲便。 且以賊路緩急, 而移甲山鎭於惠山, 則甲山亦有賊路, 而鎭東、同仁堡若有變, 遠未及救必矣。 不可以小弊遽革也。" 金堅壽議: "永安道南北遼隔, 節度使遠在邊鎭, 內地軍務委諸守令, 兵政解弛。 自置南道以來, 軍旅整齊, 視古相懸, 況諸種野人絡繹來朝, 知內無重鎭, 而心或易之則非計也。 且北道節度使有闕, 南道節度使可往代之, 緩急相須如此。 世祖之置兩鎭, 自有深意, 不可遽革也。 若以賊路要害, 移甲山於惠山, 則內地亦有賊路, 況鎭東、同仁兩堡, 亦軍力單弱, 不能相援, 此則重末而輕本也。 莫若抽本邑之卒, 增戍惠山之爲愈也。"
- 【태백산사고본】 9책 6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9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