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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9권, 성종 6년 9월 21일 정묘 5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예조에 회간왕 부묘(祔廟)의 절차 준비를 명하다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의(義)는 계통(繼統)보다 더 중한 것이 없고, 정(情)은 존친(尊親)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다. 내가 예종(睿宗)의 뒤를 계승하여 이미 예종을 황고(皇考)라 하였음은 이 계통(繼統)의 중함을 입은 것이요, 그 회간왕(懷簡王)을 백고(伯考)라 일컫고서 월산 대군(月山大君)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한 것은, 이는 곧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의(義)이었다. 또 생각하건대, 내가 강보(襁褓)에 있을 적에 회간(懷簡)이 훙서(薨逝)하셨으므로 망극(罔極)한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종천지통(終天之痛)867) 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지극한 정성을 하소연하여 천자(天子)에게 주청(奏請)하였더니, 천자가 시호(諡號)를 주어 왕을 삼았고, 또 우리 인수 왕비(仁粹王妃)를 봉(封)하며 특히 관복(冠服)을 내렸으니, 아아, 제명(帝命)의 은총(恩寵)과 나의 감회(感懷)가 어찌 유명(幽明)으로써 차이가 있겠는가? 돌이켜 생각하건대, 예(禮)에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제(祔祭)할 수 없다고 하였은즉, 대군(大君)이 회간(懷簡)을 아버지[考]로 삼는 것은 그 예가 아님이 명확하다. 종묘(宗廟)에 부(祔)하고자 하면 또한 의논할 만한 자가 있어야 하니, 이에 하는 수 없이 동반(東班) 3품 이상과 서반(西班) 당상관(堂上官) 이상으로 하여금 궐정(闕庭)에 모이어 상의하도록 하였더니, 각각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갑(甲)은 옳다 하고 을(乙)은 아니다 하여, 의논한 것이 한결같지 못하니, 내 과매(寡昧)한 몸으로 식견(識見)이 천박(淺薄)하니, 어찌 절충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한(漢)나라의 선제(宣帝)는 중흥(中興)의 임금이어서 선유(先儒)는 은(殷)의 고종(高宗)과 주(周)의 선왕(宣王)으로 비유하기에 이르렀는데, 도고(悼考)를 추존하여 황고(皇考)를 삼고, 경사(京師)에 입묘(立廟)하였었다. 우리 나라 고려(高麗)의 성종(成宗)대종(戴宗)경종(景宗)보다 위에 올렸는데, 이제현(李齊賢)은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으로서 그 성종을 찬양함에 있어, 이에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정한 것으로 현군(賢君)이라 하였다. 한(漢)·당(唐)으로부터 송(宋)·원(元)에 이르도록 몇 천백년 동안 방지(旁支)로써 대통(大統)을 계승한 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혹 손자(孫子)로, 혹 숙질(叔姪)로, 혹 형제(兄弟)로, 혹 소속(疎屬)으로, 계통을 이어 계승한 의(義)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끝내 낳아준 이를 숭봉(崇奉)하는 예(禮)는 폐(廢)하지 않았으니, 비록 부향(祔享)하는 제도가 다르고, 등쇄(等殺)의 마땅함을 달리 하였더라도 그 높은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하는 그 정의(情義)의 소재(所在)는 하나이었다. 송조(宋朝)의 제유(諸儒)가 복왕(濮王)의 일을 의논함에 서로가 의견이 엇갈렸으니, 만약 그 극진함을 추측하건대 호씨(胡氏)의 논(論)도 또한 지극하지 못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예(禮)는 정(情)을 연유하여 나오고 사(事)는 의(義)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 계통(繼統)이 중한 까닭으로 예종(睿宗)을 일컬어 고(考)라 하고, 존친(尊親)이 큰 것이 되는 까닭으로 회간(懷簡)종묘에 부제(祔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회간을 일컬어 백고(伯考)라 하는 것은 혐이(嫌貳)를 분별하기 위한 것인데, 의논하는 자는 ‘회간예종(睿宗)의 위에 올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나, 만약 천속(天屬)의 차례로써 이를 말하면, 회간예종의 적형(嫡兄)이니, 이제 예종회간의 위에 올리면, 예종의 영혼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회간왕(懷簡王)이 저군(儲君)이 되었을 때, 예종은 대군(大君)이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졌다고 이를 수 있은즉, 이제 예종의 위에 올리는 것은 정의(情義)에 합하니, 민공(閔公)·희공(僖公)이 군신(君臣)의 위(位)를 바꾼 것의 비유가 아니다. 하나는 계통(繼統)의 의(義)를 엄히 함이고, 하나는 존친(尊親)의 예(禮)를 중히 함이며, 하나는 천속(天屬)의 서열을 돈독히 함이니, 은의(恩義)를 병행(竝行)하게 하고 정문(情文)도 갖추었다. 모든 고전(古典)을 상고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인정(人情)을 참작하여도 또한 합당하거든, 하물며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매양 이로써 나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므로 내가 박절(迫切)한 정(情)으로 부득이한 것이니, 오직 그대 예조(禮曹)는 내 뜻을 다 알아 부묘(祔廟)하는 모든 일을 마련(磨鍊)하여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59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7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867]
    종천지통(終天之痛) : 이 세상에서는 다시 없을 극도의 슬픔.

○傳旨禮曹曰: "義莫重於繼統, 情莫切於尊親。 予承睿宗之後, 旣以睿宗爲皇考, 此重繼統之蒙也, 其以懷簡王稱伯考, 而使月山大君主祀者, 此乃爲人後, 不顧私親之義也。 第念予在襁褓, 懷簡薨逝, 追惟罔極之恩, 曷勝終天之痛? 頃控危懇, 奏于天子, 天子錫諡爲王, 又封我仁粹王妃, 特賜冠服, 於戲! 帝命之寵, 予懷之感, 豈以幽明而有間哉? 顧惟, 《禮》, ‘大夫不得(祖)〔祔〕 諸侯’, 則大君之考懷簡, 其非禮明矣。 欲祔宗廟, 則亦有可議者, 玆不獲已令東班三品以上ㆍ西班堂上官以上, 會于闕庭, 商確擬議, 而各執所見, 甲可乙否, 爲論不一, 予以寡昧, 識薄見淺, 豈能折衷? 昔 中興之主, 先儒至以殷宗周宣比之, 而尊悼考爲皇考, 立廟京師。 我國高麗 成宗戴宗景宗之右, 李齊賢一代名臣也, 其贊成宗, 乃以立宗廟定社稷, 爲賢君。 自, 不知幾千百年, 以旁支繼大統者非一。 或以孫、或以叔姪、或以兄弟、或以踈屬, 所繼之義雖重, 而終不廢崇奉所生之禮, 雖祔享異制, 等殺殊宜, 而其尊尊親親情義所在則一也。 朝諸儒議濮王事, 互相牴牾, 若推其極, 胡氏之論亦未爲至。 予惟禮緣情出, 事由義制。 繼統爲重, 故稱睿宗爲考, 尊親爲大, 故祔懷簡於廟。 然其稱懷簡爲伯考者, 所以別嫌貳也, 議者以 ‘懷簡不可躋睿宗之上’, 若以天屬之序言之, 懷簡, 睿宗之嫡兄也, 今躋睿宗懷簡之上, 則睿宗之靈, 其肯安乎? 況懷簡王爲儲君之時, 睿宗大君也, 可謂君臣之分已定, 則今躋睿宗之上, 合於情義, 非君臣易位之比也。 一以嚴繼統之義, 一以重尊親之禮, 一以惇天屬之序, 使恩義竝行, 情文亦備。 稽諸古典而不戾, 酌之人情而亦合, 況大王大妃每以此屬予諄至, 予以迫切之情, 所不得已, 惟爾禮曹, 其悉予意, 祔廟諸事, 磨鍊以啓。"


  • 【태백산사고본】 9책 59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7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