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부원군 홍윤성의 졸기
인산 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이 졸(卒)하니,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홍윤성의 자(字)는 수옹(守翁)이니, 회인현(懷仁縣) 사람이다. 경태(景泰) 경오년802)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선보(選補)되었고, 무재(武才)가 있다 하여 특별히 사복직(司僕職)을 겸하였다. 신미년803) 에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뛰어 배수하고,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사복 주부(司僕注簿)를 역임하였으며, 세조(世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문종(文宗)이 명하여 진서(陣書)를 찬(撰)하게 하니, 홍윤성은 낭좌(郞佐)로 참여하였다. 문종이 승하(昇遐)하자 세조(世祖)는 주상이 젊으므로 나라가 위태함을 근심하였었는데, 홍윤성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은미한 뜻을 나타내니, 홍윤성이 제일 먼저 권남(權擥)에게 천거되었다. 계유년804) 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여서는 수충 협책 정난 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본시 판관(本寺判官)으로 승직하였으며, 갑술년805) 에 또 소윤(少尹)에 오르고, 얼마 있다가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천전(遷轉)하였다. 을해년806) 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다가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니, 통정 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제수하고, 또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었다. 병자년807) 에 계자(階資)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참판(參判)으로 올라, 인산군(仁山君)을 봉(封)하였고, 얼마 있다가 병조(兵曹)에 천직하였다가 또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올라 다시 예조(禮曹)에 제배(除拜)되었다. 천순(天順)정축년808)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판서(判書)에 오르고, 이 해에 모상(母喪)을 당하였는데, 기복(起復)809) 하여 경상우도 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를 삼았다. 기묘년810) 에 다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배되었고, 경진년811)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더하였다. 당시에 모련위(毛憐衛) 낭보군(浪甫軍)이 반란하니, 세조(世祖)께서 신숙주(申叔舟)를 장수[將]로 삼고, 홍윤성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으며, 돌아오자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더하였다. 갑신년812) 에 인산군(仁山君) 겸판예조(兼判禮曹)를, 성화(成化) 정해년813) 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제배하였다. 기축년814) 에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예종(睿宗)이 고명(誥命)을 받음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경인년815) 에 인산 부원군(仁山府院君)으로 체봉(遞封)되고, 신묘년816)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발에 종기[足疳]를 앓다가 졸(卒)하니, 나이는 51세이다. 시호(諡號)는 위평(威平)이니, 용맹하여 강인한 결단력이 있음이 위(威)이며, 능히 화란(禍亂)을 평정함이 평(平)이다. 홍윤성(洪允成)은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는 가난하였는데 힘써 배워서 급제하니, 사람들이 재능이 있는 웅걸로 기대하였다. 세조(世祖)를 만나게 되자, 총애하여 돌봄이 매우 융숭하였고, 홍윤성이 본시 빈궁하였음을 알고 많은 양전(良田)을 내려 주었다. 홍윤성이 재화를 늘리는 데 힘써 홍산 농장(鴻山農莊)에 쌓인 곡식은 거만(鋸萬)817) 이었고, 노복(奴僕)은 세도를 믿고 함부로 방자하여서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혹 장살(杖殺)하기도 하였다. 세조(世祖)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여 목욕(沐浴)할 제, 사족(士族)의 부인 윤씨(尹氏)가 상언(上言)하여, 그 지아비[夫]가 홍윤성의 노복에게 살해되었음을 호소하니, 명하여 유사(有司)에 국문하게 하여, 그 노복을 환형(轘刑)하고 홍윤성은 국문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홍윤성(洪允成)의 거칠고 광망(狂妄)한 태도와 교만하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형상을 성감(聖鑑)은 통조(洞照)하소서."
하니, 당시에 이르기를,
"그의 잘못을 똑바로 맞추었다."
고 하였다.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妻] 남씨(南氏)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士族)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5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5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註 802]경태(景泰) 경오년 : 1450 문종 즉위년.
- [註 803]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 [註 804]계유년 : 1454 단종 원년.
- [註 805]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806]을해년 : 1455 단종 3년.
- [註 807]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808]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809]기복(起復) : 기복 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상제의 몸으로 벼슬길에 나아감을 가리킴.
- [註 810]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811]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812]갑신년 : 1464 세조 10년.
- [註 813]성화(成化)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814]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815]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816]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817]거만(鋸萬) : 아주 많은 것.
○仁山府院君 洪允成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允成字守翁, 懷仁縣人也。 景泰庚午, 中文科, 選補承文院副正字, 以有武才, 特兼司僕職。 辛未, 超拜漢城參軍, 歷通禮門奉禮郞、司僕注簿。 世祖在潛邸, 文宗命撰陣書, 允成以郞佐與焉。 及文宗昇遐, 世祖以主少, 國危爲憂, 見允成奇之, 微示以意, 允成首薦權擥。 癸酉世祖靖難, 賜輸忠 協策 靖難功臣之號, 陞本寺判官, 甲戌又陞少尹, 尋遷司憲掌令。 乙亥判司僕寺事, 世祖卽位, 授通政禮曹參議, 又賜佐翼功臣之號。 丙子, 階嘉善, 陞參判, 封仁山君, 俄遷兵曹, 又陞嘉靖, 復拜禮曹。 天順丁丑, 陞資憲判書, 是年丁母憂, 起復爲慶尙右道都節制使, 己卯, 復拜禮曹判書, 庚辰加正憲, 時毛憐衛 浪甫軍叛, 世祖以申叔舟爲將, 允成爲副以討之, 及還加崇政, 甲申, 以仁山君兼判禮曹, 成化丁亥, 拜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 己丑陞左議政, 睿宗受誥命, 充謝恩使如京, 及還陞領議政。 庚寅遞封仁山府院君, 辛卯賜純誠 明亮 經濟 弘化 佐理功臣之號, 至是病足疳而卒, 年五十一。 諡威平, 猛以剛果威, 克定禍亂平。 允成狀貌雄偉, 膂力絶人, 少窮貧, 力學登第, 人以才雄待之。 及遇世祖, 寵眷甚隆, 知允成素貧, 多賜以良田。 允成務殖貨, 鴻山農莊積穀鉅萬, 奴僕憑勢橫恣, 少有違逆, 或杖殺之。 世祖幸溫陽湯沐, 有士族婦尹氏上言, 訴其夫爲允成奴所殺, 命有司鞫之, 轘其奴, 不問允成。 司憲府彈啓曰: "允成麤踈狂妄之態, 偃蹇跋扈之狀, 聖鑑所洞照。" 時謂之正中其失。 侍妾、奴僕少違忤, 輒不貸, 至有用弓劍, 時妻南氏無子, 同縣士族金自謀有女, 勒娶之。
- 【태백산사고본】 9책 5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5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