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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7권, 성종 6년 7월 18일 을축 8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평안·황해도의 방비 문제에 관해 신하들과 논의하다

야대(夜對)에 나아가 《고려사(高麗史)》를 강론(講論)했다. 우부승지(右副承旨)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고려(高麗)의 말기(末期)에 합단(哈丹) 등의 군사가 제마음대로 표략(剽掠)하기를 무인지경과 같이 한 것은 국경 방비가 튼튼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 평안(平安)·황해(黃海)의 두 도(道)의 군대의 정원[軍額]이 매우 적으니, 방어(防禦)에 관한 여러가지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한 것은 세조(世祖)께서 이를 행하다가 다시 정지(停止)시켰으니, 쉽사리 할 수는 없다."

하였다. 현석규가 아뢰기를,

"지금 신(臣)이 아뢴 것은 백성을 옮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각품(各品)의 반인(伴人)628) 을 다 찾아내어 군오(軍伍)에 충당(充當)하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 고을의 수군(水軍)·정병(正兵)은 비록 사고(事故)가 있어도 즉시 충당하지 않으면서 각품의 반인은 선군(船軍)의 정병(正兵)으로 보충시킵니다. 또 취재(取才)한 군사가 합격(合格)하지 못하여 산원(散員)이 된 사람은 비록 반인으로 임명하여도 오히려 옳을 것인데, 선군의 정병은 취재한 사람도 없고 산원이 된 사람도 없는데도 반인으로 이속(移屬)시키니, 신(臣)은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말을 어디로부터 들었는가? 이는 재상(宰相)이 선군(船軍)의 정병(正兵)으로써 반인(伴人)을 삼았는가?"

하였다.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일찍이 군적 낭청(軍籍郞廳) 임수경(林秀卿)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최숙정(崔淑精)이 아뢰기를,

"임수경이 지금 군적 낭청(軍籍郞廳)이 되었으니, 어찌 알지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다면 이는 큰 잘못이니, 임수경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현석규(玄碩圭)가 또 아뢰기를,

"세조조(世祖朝)김질(金礩)이 군적사(軍籍使)로 있으면서 죄다 찾아내어 모두 군대의 정원에 충원(充員)시켰으므로, 지금에 와서 폐단을 진술하는 사람은 너무 치밀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병조(兵曹)로 하여금 군대의 정원을 적당히 줄여서 군적(軍籍)을 고치게 했으니, 진실로 좋은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령(守令) 등이 여정(餘丁)을 많이 누락(漏落)시켜 본고을의 아전(衙前)에게 보내기도 하고, 권세가(權勢家)에게 사사로이 주기도 하여 반인(伴人)으로 삼게 합니다. 이로 인하여 부유(富裕)하고 충실한 사람은 빠져 나가고, 가난하고 쇠잔한 사람만이 군오(軍伍)에 예속되니, 청컨대 중신(重臣)을 가려 보내어 간사와 협잡을 점검해서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최숙정은 아뢰기를,

"평안(平安)·황해(黃海)의 두 도(道)에는 거주하는 백성이 매우 적은데도, 그 사이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옮겨 온 백성들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미천한 백성들이 비록 토지에 안착(安着)하여 옮기기를 어렵게 여기지마는, 변방을 충실히 하는 것은 곧 만세(萬世)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금년에 약간(若干)의 호수(戶數)를 옮기고 명년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두 도(道)629) 가 충실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합당하다. 그러나 이 두 도(道)는 토지가 매우 척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고 생활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세종조(世宗朝) 때 2천여 호(戶)를 옮겼는데도, 사망(死亡)한 사람이 9백 호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런 까닭으로 차마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최숙정이 또 아뢰기를,

"평안(平安)·황해(黃海)의 두 도(道)에는 백성의 역역(力役)이 다른 도(道)에 비교하면 수배(數倍)나 됩니다. 1년 3대절(大節)과 일정한 시기도 없이 북경(北京)가는 사행(使行)들이 말에 짐을 싣고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말먹이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므로 일행(一行)의 말에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몇 마리가 없고, 길가에 쌓인 말의 해골(骸骨)이 곳곳마다 있습니다. 지금은 또 연전(年前)에 야인(野人)이 변방을 침범한 이유로써 조전장(助戰將)을 많이 보냈는데, 이들이 각기 군관(軍官)을 데리고 가게 되니, 접대하는 일이 매우 번거롭게 됩니다. 평안도(平安道)는 축적(蓄積)이 본디 적은데, 지금 용도(用度)의 번거로움이 이와 같으니, 이른바 변방의 소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국맥(國脈)이 저절로 쇠잔해진다는 것입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지위가 높은 대신(大臣)을 보내어 절도사(節度使) 이하의 관원을 모두 통치(統治)하도록 하고, 겸하여 내지(內地)의 수령(守令) 중에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가려서 요해지(要害地)를 나누어 웅거하여 중간에서 지휘(指揮)하도록 한다면 일이 체통(體統)이 있어서 접대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 가는 조전장(助戰將)들은 지위가 모두 절도사(節度使)의 아래에 있으니, 절도사가 넉넉히 통치(統治)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전년(前年)에는 적(賊)의 기병(騎兵)이 3천 명에 이르렀으니, 예로부터 이같이 많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적이 만약 군사를 나누어 침범 노략한다면 한 사람의 대신(大臣)이 어찌 능히 승리(勝利)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조전장을 많이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변진(邊鎭)을 나누어 지켜서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5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4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호구-이동(移動)

  • [註 628]
    반인(伴人) : 공신(功臣)이나 고급 관료(官僚)를 따라다니면서 그 몸을 보호하던 병졸.
  • [註 629]
    두 도(道) : 평안도와 황해도.

○御夜對。 講《高麗史》。 右副承旨玄碩圭啓曰: "高麗之季, 哈丹等兵縱橫剽掠, 如入無人之境者, 以防戍未固也。 今平安黃海兩道軍額甚少, 防禦諸事, 不可不慮也。" 上曰: "徙民實邊, 世祖行之而復停, 未可輕易爲也。" 碩圭曰: "今臣所啓者, 非欲徙民也。 欲盡括各品伴人, 以充軍伍也。 諸邑水軍、正兵, 則雖有故, 不卽充差, 各品伴人, 則至以船軍正兵塡差。 且取才軍士不中格作散者, 雖差伴人猶可, 船軍正兵無取才, 無作散者, 而移屬伴人, 臣竊痛心。" 上曰: "豈有是理? 此言何從得聞? 宰相誰以船軍正兵爲伴人乎?" 碩圭曰: "其詳不可得知, 嘗聞於軍籍郞廳林秀卿。" 侍讀官崔淑精啓曰: "秀卿今爲軍籍郞廳, 夫豈不知而云然?" 上曰: "信如是, 此大錯也, 其問秀卿以啓。" 碩圭又啓曰: "世祖金礩爲軍籍使, 搜括無遺, 悉充軍額, 至今陳弊者, 以爲太詳。 今則令兵曹量減軍額而改籍, 誠爲良法。 然守令等多漏餘丁, 或差本邑衙前, 或私與權勢爲伴人。 因此富實者脫漏, 貧殘者獨隷軍伍, 請擇遣重臣, 點檢奸僞, 懲一警百。" 淑精啓曰: "平安黃海兩道, 居民甚少, 而其間設園籬而居者, 皆徙民也。 古人云: ‘興大利者, 不計小害。’ 小民雖安土重遷, 實邊乃萬世之利也。 今年徙若干戶, 明年亦如之, 則民不騷擾, 而兩道實矣。" 上曰: "爾言甚當。 然此兩道, 土地甚薄, 人難聊生。 世宗朝, 徙二千餘戶, 而死亡者至九百戶, 以故不忍爲也。" 淑精又曰: "平安黃海兩道, 人民力役, 視他道數倍。 一年三大節及無時赴京之行, 騎駄往返之間, 不用心養飼, 一行之馬, 生還者無幾, 路傍積骸, 處處有之。 今又以年前野人犯邊, 多遣助戰將, 各帶軍官, 供億甚煩。 平安道蓄積本少, 今用度之煩如是, 所謂邊塵不起, 而國脈自殘者也。 臣意以爲, 遣位重大臣, 節度使以下皆令統治, 兼擇內地守令有武才者, 分據要害, 而居中指揮, 則事有體統, 而無供億之弊矣。" 上曰: "爾言甚當。 然今去助戰將位, 皆在節度使之下, 節度使足以統治矣。 且前年賊騎, 至於三千, 自古未有若此之多也。 賊若分兵寇掠, 則一大臣安能制勝乎? 今多遣助戰將者, 欲其分守邊鎭, 以防不虞也。"


  • 【태백산사고본】 9책 5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4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