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에서 궁실 짓는 문제, 전라도의 풍습 등에 대해서 논의하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목(綱目)》488) 을 강독(講讀)하다가 ‘위(魏)489) 나라에서 궁실(宮室)을 크게 지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극기(李克基)가 아뢰기를,
"경회루(慶會樓)는 선왕(先王)께서 창건하신 것인데 이제 무너져가니 수리해야 합니다마는, 돌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용(龍)을 새기는 것은 옛 제도와 다르므로, 대간(臺諫)·조신(朝臣)들이 흔히 말을 합니다."
하고,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지금 바야흐로 가뭄의 재변이 있으니, 공사(公私)의 영선(營繕)을 일체 금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성상께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찬선(饌膳)을 줄이시더라도, 아랫사람들은 거의 꺼리는 것이 없어 제 마음대로 모여서 마십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구궁(舊宮)을 수리하는 것일 뿐이니, 위예(魏叡)490) 가 영작(營作)한 유례와는 다르다."
하였다. 이극기가 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근래에 오래 비워 두었으므로, 위에는 〈비가〉 새고 아래에는 습기가 차서 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위예와 같겠습니까?"
하고, 전경(典經) 정회(鄭淮)가 아뢰기를,
"경회루는 돌기둥에 용을 새겨서 사치하고 웅장하기를 극진하게 하였더라도 이미 지난 일이므로 그만이겠으나, 이제 경회루의 일이 끝났고, 그 나머지 수리는 본래 해사(該司)가 있으니, 청컨대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파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리(修理)는 도감이 아니면 잘 해낼 수 없다."
하였다. 또 강독하다가 ‘위(魏)나라에서 육형(肉刑)을 회복하기로 의논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이극기가 아뢰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에 ‘3인이 떼를 지어 도둑질하면, 우두머리가 된 자는 장물(贓物)이 많건 적건 논할 것 없이 일체 교형(絞刑)에 처한다.’ 하였으므로, 3인이 도둑질하였는데 1인이 잡히면 관리가 으레 우두머리라고 공초(供招)를 받아서 반드시 극형에 처합니다. 모든 사수(死囚)는 반드시 세 번 복심(覆審)하여서 아뢰어 살릴 길을 찾는 법인데, 이들에게 어찌 억울한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매를 때리는데 무엇인들 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혹 원통함을 품고 숨지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가?"
하니, 이극기가 말하기를,
"세조(世祖) 말년에 도둑이 더욱 치성(熾盛)해가는 것을 걱정하여 임시로 이 법을 설치한 것이고, 만세에 전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도둑이 조금 그쳤으니, 폐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세운 법을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으니, 널리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맹현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인심이 각박하고 악하여 도둑이 무리져서 일어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풍속은 백년 동안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으므로,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염려해야 하니, 무릇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이런 풍속을 엄하게 징계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옛 백제(百濟)의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甄萱)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이극기가 말하기를,
"견훤 이후로 고려[前朝] 5백 년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가 되어도서도 거의 1백 년이 되었으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 완악(頑惡)하니, 명심하고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5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27면
- 【분류】풍속-풍속(風俗)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註 488]
○御夕講。 講《綱目》, 至 ‘魏大營宮室。’ (右)〔左〕 副承旨李克基啓曰: "慶會樓, 先王所創, 今將傾圮, 所當修也, 但用石爲柱, 鐫龍於上, 異於舊制, 故臺諫、朝臣多以爲言。" 侍講官李孟賢啓曰: "時方亢陽爲災, 公私營繕一禁何如? 上雖避殿減膳, 而下則略無畏忌, 會飮自恣。" 上曰: "此只修舊宮, 非魏叡營作之比也。" 克基曰: "景福宮, 近因久曠, 上漏下濕, 不可不修, 豈與魏叡同乎?" 典經鄭淮啓曰: "慶會樓鐫龍石柱, 雖極侈壯, 旣往已矣, 今樓已成, 其餘修理, 自有該司, 請罷修理都監。" 上曰: "修理, 非都監, 不能也。" 又講至, ‘魏議復肉刑不果行’, 克基啓曰: "《大典續錄》, ‘三人成群作賊, 以上爲首者, 不論贓多少, 一切處絞’, 三人作賊, 而一人見獲, 爲官吏者, 例以爲首取招, 必置極刑。 凡死囚必三覆奏, 以求生道, 豈〔無〕 有冤抑乎? 然箠楚之下, 何求不得? 恐或有含冤隕命者。" 上曰: "此法昉於何時?" 克基曰: "世祖末年, 患盜賊滋熾, 權設此法, 非欲傳萬世也。 今則盜賊稍弭, 革之便。"上曰: "先王立法, 不可卒革, 其廣議以啓。" 孟賢曰: "全羅道, 人心薄惡, 盜賊群起, 以下陵上者, 比比有之。 風俗非百年敎化, 則不能移易, 在君上, 所當軫念, 凡有犯係關綱常, 則雖小勿赦, 痛懲此風爲便。" 上曰: "全羅道古百濟地也。 民染甄萱餘習, 至今未能盡變, 故其俗如是。" 克基曰: "甄萱之後, 歷前朝五百年, 及我朝, 亦幾百年, 然遺風未殄, 人皆頑惡, 非存心敎化, 不能變之也。" 上嘉納。
- 【태백산사고본】 8책 5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27면
- 【분류】풍속-풍속(風俗)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