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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5권, 성종 6년 5월 12일 경신 3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인수 왕대비 위차와 궁을 중수할 때 화려한 문제 등에 관한 안팽명 등의 상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안팽명(安彭命)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전지(傳旨)를 보건대 ‘위로 하늘의 견책을 삼가고 아래로 백성의 고통을 돌보아,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책망하고 곧은 말을 듣고자, 직위에 있는 신료(臣僚)로 하여금 각각 현시의 폐단을 말하게 한다.’ 하셨습니다. 신 등은 사관(史官)의 자리를 승핍(承乏)하여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데, 말이 미쳤는데도 숨기는 것은 성은(聖恩)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영예(英睿)한 자질과 관인(寬仁)한 기량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시어, 성기(聲伎)를 좋아하거나 사냥을 즐기시는 일이 없고, 한 번 호령을 하거나 한 가지 일을 행할 때에도 반드시 전례(典禮)를 지키시며, 재견(災譴)을 만날 때마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노심초사하시며, 억울하고 지체된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뭇 제사를 두루 거행하시니, 하늘이 감동하여 좋은 응답을 받으셔야 마땅한데, 근년 이래로 큰 물과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고 이제 또 크게 가무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전에 초(楚)나라 장왕(莊王) 때에는 재앙이 없었으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다하였고, 노(魯)나라 애공(哀公) 때에는 화난(禍難)이 컸으나 하늘이 꾸중을 내리지 않았으니, 지금의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어찌 하늘이 우리 전하를 사랑하여 재삼 견고(譴告)해서 성심(聖心)을 더욱 굳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들은 바에 따라 감히 어리석은 말을 아뢰겠습니다.

국가에서 의지(懿旨)를 받들어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445) 의 위차(位次)를 왕대비(王大妃)의 위에 있게 하셨으나, 신 등은 삼가 적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노(魯)나라에서 희공(僖公)을 승부(升祔)한 일을 《춘추(春秋)》에서 비평하였는데,446) 대개 민공(閔公)희공이 친속(親屬)으로는 형제이나 존비(尊卑)로는 군신(君臣)인데 형제의 의리를 군신의 의리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이 예(禮)이며, 군자(君子)는 친속을 친애(親愛)하기 위하여 존귀(尊貴)를 존숭(尊崇)하는 일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고 고금의 통의(通義)이기 때문입니다.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인수 왕대비에게 명하여 예종(睿宗)을 보호하게 하셨고, 또 장유(長幼)의 차서가 있으므로, 그 위차를 왕대비의 위에 있게 하였다.’ 하셨으나, 신 등은 알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군신의 존비(尊卑)는 천지(天地)가 이루어진 것과 같아서 보호하는 은혜와 장유(長幼)의 차서 때문에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모든 거조(擧措)에 있어서 으레 옛 제도를 지키시는데, 이 한 가지 일만은 국가의 체모에 관계되어 의리에 미안한 데가 있고, 전하께서 부모가 살아계실 때 예(禮)로써 섬기는 효도에도 미진한 데가 있으니, 전하께서 계청(啓請)하여 개정하시기 바랍니다.

《춘추》에서 무릇 민력(民力)을 쓴 것이 비록 때가 합당하고 의리에 맞더라도 반드시 기록한 까닭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경회루(慶會樓)는 선왕(先王)께서 창건(創建)하신 것인데 장차 무너질 형세이고, 경복궁(景福宮)도 오래 비워서 점점 허물어지고 새어 가니, 영선(營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경회루의 돌기둥을 보니 꽃과 용(龍)을 새겼고 용마루와 처마가 궁륭(穹隆)447) 하고 구리로 망새[鷲頭]를 만들었으며, 또 근정전(勤政殿)에는 철망을 둘렀는데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닌 듯하니, 후세에 보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 소하(蕭何)448) 가 미앙궁(未央宮)을 짓되, 그 제도를 장려하게 하고 〈한(漢)나라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후세에서 이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백량대(柏梁臺)와 건장궁(建章宮)을 미앙궁보다 몇 곱인지 모를 만큼 장려하게 지었으니, 전하께서 오늘날의 영선(營繕)을 조종(祖宗)의 제도보다 더하게 하신다면, 오늘의 제도보다 더하게 할 자손이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말해보았댔자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수리 도감(修理都監)은 임시로 설치한 지 이미 오래되므로 백성을 매우 많이 부리고 재물을 적지 않이 썼으며, 이제 경회루가 이미 이루어지고 수선이 거의 끝나가는데, 그 밖의 자질구레한 보수는 본래 맡은 관사(官司)가 있으니, 청컨대 빨리 혁파(革罷)하여 하늘의 꾸중에 응답하소서.

전(傳)449) 에 이르기를, ‘밝고 밝게 인의(仁義)를 찾되 늘 백성을 교화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경대부(卿大夫)의 뜻이고, 황황하게 재리(財利)를 찾되 늘 가난할까 염려하는 것은 서인(庶人)의 일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꾸어 주었다가 받아들이면서 이식을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이 재화를 불리는 짓인데, 근자에는 경(卿)·사대부(士大夫)가 다 그러합니다. 그 호강(豪强)한 하인이 관위(官位)와 세력으로써 방자하여 여염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힘으로 주군(州郡)을 꺾는데, 심한 자는 적은 것을 많다 하고 있는 것을 없다 하며 묶어다가 매를 치고 살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하니, 백성의 억울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대부(大夫)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과 이토록 극심하게 이익을 다투니, 텃밭의 아욱을 뽑고 길쌈하는 아내를 내친 일450) 에 비하면 모두 어찌 그리 현격합니까? 전하께서 이미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혁파하여 공공(公共)의 관사(官司)에 붙이셨으므로, 이른바 위에서 몸소 가르치어 백관(百官)을 바루고 만민(萬民)을 바루는 때이니, 재상(宰相)의 장리는 당연히 금지해야 합니다. 더구나 석씨(釋氏)가 깨끗하고 욕심이 없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았다면 그 무리는 반드시 몸이 마르고 산중에 숨어 살아야 불교를 잘 배우는 자라고 할 것인데, 지금 신미(信眉)학열(學悅)은 존자(尊者)라고도 하고 입선(入禪)이라고도 하여 중의 영수(領袖)가 되는 자들인데도 재화를 불리기에 마음을 쓰고 털끝만한 이익이라도 헤아리며, 높은 창고에 크게 쌓아 놓은 것이 주·군에 두루 찼으니, 그 밖의 것은 알만합니다. 이러한 자는 국은(國恩)을 저버렸을 뿐이 아니라 또한 불문(佛門)의 죄인이기도 하니, 중들의 장리(長利)도 금지해야 합니다. 만약에 ‘중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수륙재(水陸齋)451) 의 경비를 만드니, 없앨 수 없다.’고 한다면, 국가에서 도리어 간사한 중이 원망을 사는 물건에 힘입어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입니까?

《서경(書經)》452) 에 ‘영(令)을 내리면 오직 시행할 뿐이지 돌이켜서는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법을 세운 것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나 폐기하고 봉행(奉行)하지 않는 관리가 자못 많은데, 그 중에서 우선 중요하고도 긴급한 것을 말하자면 재상·공신(功臣)의 반인(伴人)입니다. 근자에 국가에서 모점(冒占)453) 의 폐단을 잘 알아서 조리(條理)를 거듭 밝혀 구전(口傳)454)차첩(差牒)455) 이 없는 자는 모두 신역(身役)을 정하게 하였으나, 관리가 권세를 두려워하여 잘 봉행하지 못하므로, 반인(伴人)을 모점(冒占)하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에 대간(臺諫)이 말하고 윤대(輪對)한 자도 말하였으므로 전하께서 익히 들으셨는데도 이제까지 모두 고쳐지지 않았으니, 신 등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재상과 공신이 예전보다 많은데, 집안이 부유한 장정(壯丁)이라도 실상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공(公)을 여위게 하고 사(私)를 살찌게 하니, 이러한 조짐을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관(朝官)을 가려서 어사(御史)의 직을 겸대(兼帶)시켜 보내어 원래 수효 이외의 반인(伴人)은 모두 쇄출(刷出)하여 군액(軍額)을 채우게 하소서.

전(傳)456) 에 이르기를, ‘검소는 덕(德)의 공통된 것이고, 사치는 악(惡)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치를 믿고 의리를 잊는 것은 상(商)나라의 교만하고 음란한 풍속이고, 경대부(卿大夫)가 결백하고 검소한 것[羔羊素絲]은 주(周)나라의 아름다운 교화입니다. 이제 사대부의 집을 보면 날마다 사치를 일삼고 서로 다투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그 중에서 심한 것을 말하자면, 크고 작은 연회(宴會)에 그림을 그린 그릇이 아니면 쓰지 않고 부녀자의 복식(服飾)에 초구(貂裘)가 없으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것으로 보면 풍속의 퇴폐를 더욱 알만합니다. 대저 그림을 그린 그릇은 중국에서 나는 것이므로 실어 날라 오기가 어려운데도 집집마다 있습니다. 사신(使臣)의 행차 때에 금령(禁令)이 엄하기는 하나 이처럼 법을 어기므로, 평안도의 백성이 이 때문에 고달파서 살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초피(貂皮)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하나 야인(野人)에게서 얻는 것이 대부분인데, 마소[牛馬]로나 철물(鐵物)로나 무슨 짓이고 다해서 저들에게 사므로, 국가에서 이미 그 폐단을 알고 공물(貢物)을 줄여 주었는데도 폐단이 다시 전과 같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초피의 장식은 3품까지로 한정되어 있으나 모든 은대(銀帶)457) 를 하는 자가 거의 다 혼란하게 장식하여 금지하기 어려우므로, 초피의 값이 올라가게 되어 적(敵)에게 이익을 주게 되니, 역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림 그린 그릇을 쓰는 일을 일체 금지하고, 당상관(堂上官)이라야 초피를 쓰고 4품이라야 서피(鼠皮)를 쓸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도 이와 같이 한정하며, 부인의 복식도 지아비를 따르게 하소서. 그러면 모피(毛皮)의 값이 싸져서 폐단이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소(疏)를 원상(院相)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세조께서 일찍이 인수 왕비(仁粹王妃)를 우대(優待)하시고 예종(睿宗)에게 ‘어머니처럼 섬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왕대비(王大妃)가 인수 왕비에게 굳이 사양하고 윗자리를 차지하지 않기에, 내가 세조의 유의(遺意)에 따라 왕대비가 바라는 대로 특별히 인수 왕비를 왕대비의 위에 자리하게 하였더니, 인수 왕비도 굳이 사양하였으나, 내 명을 거듭 어기다가 드디어 자리에 나아갔던 것이다. 이 일은 실로 내가 명한 것이고 주상(主上)의 본의가 아닌데, 도리어 주상의 과실이라 하니, 주상의 뜻이 편안하겠는가? 이미 시행한 일을 말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것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하니, 원상 정창손(鄭昌孫)·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두 분 왕비의 차서는 조정에 있어서의 차서가 아니고 궁중의 집안 일일 뿐인데, 더구나 세조의 유의(遺意)이겠습니까? 이제 희공(僖公)의 묘(廟)를 민공(閔公)보다 승부(升祔)한 일에 견준 것은 인용(引用)한 것이 유사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5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23면
  • 【분류】
    신분(身分) /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건설-건축(建築)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금융-식리(殖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의생활(衣生活)

  • [註 445]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 덕종(德宗)의 비(妃)로서 성종(成宗)의 모(母)임.
  • [註 446]
    《춘추(春秋)》에서 비평하였는데, : 《춘추(春秋)》의 문공(文公) 2년조에, "태묘에 대사를 치를 때 희공의 묘(廟)를 승부(升祔)하였다.[大事于太廟躋僖公]"라고 하였는데, 태묘는 태조(太祖) 즉 주공의 묘이고, 대사는 길제(吉祭)로서 3년상이 끝난 후 태조의 묘에 합제(合祭)하는 것임. 이때 희공이 죽은 지 22개월이기 때문에 아직 길제를 행해서는 안되었고, 또 문공(文公)은 그의 아버지 희공이 민공(閔公)의 서형이어서 묘좌(廟坐)를 민공 위에 둔 것은 역사(逆祀)이므로, 모두 예(禮)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기록해서 풍자한 것임.
  • [註 447]
    궁륭(穹隆) : 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이 차차 낮아지는 모양.
  • [註 448]
    소하(蕭何)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공신.
  • [註 449]
    전(傳) :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
  • [註 450]
    텃밭의 아욱을 뽑고 길쌈하는 아내를 내친 일 : 중국 춘추 시대에 공의휴(公儀休)가 노(魯)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관리가 집안에서 야채를 기르고 길쌈을 한다면 민생(民生)을 압박하게 된다고 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으니, 청렴한 관리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음.
  • [註 451]
    수륙재(水陸齋) : 고려·조선조 때 불가(佛家)에서 바다와 육지에 있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 등 잡귀(雜鬼)를 위하여 재(齋)를 올려서 경문(經文)을 읽던 일.
  • [註 452]
    《서경(書經)》 : 주서(周書)편.
  • [註 453]
    모점(冒占) : 불법으로 차지함.
  • [註 454]
    구전(口傳) : 3품 이하의 관원을 선임할 때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낙점(落點)을 거치지 않고 뽑아서 씀.
  • [註 455]
    차첩(差牒) : 사령서(辭令書).
  • [註 456]
    전(傳) : 《춘추좌전(春秋左傳)》.
  • [註 457]
    은대(銀帶) : 정3품으로부터 종6품까지의 문무관이 띠는, 가장자리에 은으로 새겨 장식을 붙인 띠. 이를 품대(品帶)라고 하는데, 정·종1품관은 서대(犀帶), 정2품관은 금대(金帶), 종2품관은 학정금대(鶴頂金帶), 정3품부터 종6품관은 은대(銀帶), 정7품관 이하는 오각대(烏角帶)를 띠었음.

○藝文館奉敎安彭命等上疏曰:

臣等伏覩傳旨: "上以謹天譴, 下以恤民隱, 兢兢自責, 佇聞讜論, 令在位臣僚, 各言時弊。" 臣等承乏史官, 昵侍左右, 言及而隱, 是孤聖恩。 我殿下英睿之資寬仁之量, 超出百王, 無聲伎之好、遊田之娛, 發一號, 行一事, 必遵典禮, 每遇災譴, 避殿減膳, 側身焦勞, 審理冤滯, 遍擧群祀, 宜其昭感以獲嘉應, 而近年以來, 水旱相仍, 今又亢旱何也? 昔楚莊無災而以致戒懼, 魯哀禍大而天不降譴, 今之咎徵, 豈非皇天仁愛我殿下, 丁寧譴告, 益堅聖心也歟? 臣等謹以所聞, 敢陳瞽說。 國家欽奉懿旨, 位仁粹王大妃於王大妃之上, 臣等竊以爲未安。 《僖公》, 《春秋》譏之, 蓋《閔》《僖》二公, 親則兄弟, 分則君臣, 兄弟之不先君臣禮也, 君子不以親親害尊尊, 此天地之常經, 古今之通義也。 懿旨若曰: "世祖嘗命仁粹王大妃, 保護睿宗, 且有長幼之序, 其位次序於王大妃之上", 臣等竊有未解。 君臣之分, 天健地設, 不可以保(獲)〔護〕 之恩長幼之序而紊之也。 殿下凡一擧措, 動遵古制, 獨此一事, 大關國體, 而義有未安, 於殿下生事以禮之孝, 亦有未盡, 伏望殿下啓請而改正焉。 《春秋》凡用民力, 雖時且義, 必書者, 重勞民也。 慶會樓先王所創, 而勢將傾頹, 景福宮亦因久曠, 漸至破漏, 營繕之役, 不可廢也。 然臣等竊觀慶會樓石柱, 雕花刻龍, 棟宇穹隆, 銅鑄鷲頭, 又於勤政殿籠以鐵網, 似非先王舊制, 不可示後世也。 昔蕭何未央宮, 壯其制度, 曰: "無令後世加焉", 厥後栢梁建章之作, 比未央不知幾倍, 殿下今日營繕, 殆過祖宗之制, 安知子孫不有過於今日之制者乎? 雖然已成之事, 言之無益。 但修理都監權設已久, 役民甚衆, 費財不少, 今慶會樓已成, 而修繕幾訖, 其餘小小補葺, 自有該司, 請亟革罷, 以答天譴。 傳曰: "明明求仁義, 常恐不能化民者, 卿大夫之意也, 皇皇求財利, 常恐乏困者, 庶人之事也。" 夫斂散取息, 本小民貨殖之爲也, 近者卿、士大夫滔滔皆是。 其豪奴席勢恣橫, 馳騖閭閻, 力折州郡, 甚者以小爲多, 指有爲無, 係累鞭撻, 剝膚椎髓, 民之冤抑, 可勝道哉? 彼身居大夫之位, 而與民爭利, 至於此極, 其視拔園葵去織婦, 一何遠也? 殿下旣革內需司長利, 付與公有司, 所謂身敎於上, 而正百官正萬民之時也, 宰相長利, 在所當禁。 況釋氏以淸淨寡欲爲敎, 則爲其徒者, 必枯槁其形, 雲霞其迹, 然後乃爲善學佛者也, 今信眉學悅或稱尊者或稱入禪, 髡緇之領袖者, 而騖心貨殖, 計利秋毫, 高廩巨積, 遍于州郡, 則其他可知。 若此者非特辜負國恩, 抑亦桑門之罪人也, 僧徒長利, 亦所當禁。 借曰: "僧徒藉此爲水陸之費, 不可無也", 則曾謂國家反賴邪僧斂怨之物, 以資先王、先后之冥福乎? 《書》曰: "令出惟行, 不惟反", 今朝廷立法詳備, 而官吏廢閣者頗多, 姑以重且急者言之, 宰相功臣之伴人是已。 近者國家審知冒占之弊, 申明條貫, 無口傳差牒者, 悉令定役, 然官吏怵於權勢, 未克奉行, 冒占伴人, 無一動搖。 前此臺諫言之, 輪對者亦言之, 殿下熟聞, 而至今未盡更張, 臣等竊有未解。 今之宰相功臣, 視古爲衆, 而家富丁壯者, 實歸其門, 瘠公肥私, 漸不可長。 伏願擇遣朝官, 兼帶御史, 數外伴人悉令刷出, 以充軍額。 《傳》曰: "儉者, 德之共也, 侈者, 惡之大也。" 怙侈滅義, 俗驕淫之習, 羔羊素絲, 家風化之義也。 今觀士大夫之家, 日事侈麗, 爭相誇美, 以其甚者言之, 大小宴集, 非畫器不用, 婦之服飾, 無貂裘, 羞與爲會, 卽此而觀之, 習俗之弊, 益可想矣。 夫畫器, 上國所産, 駄載爲難, 而家家有之。 使臣之行, 禁令雖嚴, 而冒法如是, 平安之民, 緣此困敝, 不能聊生, 是誠可慮。 貂皮雖曰, 我國之産, 然得於野人者居多, 或以牛馬, 或以鐵物, 市索於彼, 無所不至, 國家旣知其弊, 量減貢物, 而弊復如前何也? 貂皮之飾, 雖限以三品, 凡帶銀者, 率以爲飾, 混淆難禁, 致令貂皮價高, 敵人資利, 亦非細故。 伏願畫器之用, 一切禁斷, 堂上官然後, 得用貂皮, 四品然後, 得用鼠皮, 其餘以此而定限, 婦人服飾, 亦從其夫, 則毛物價賤, 而弊可祛矣。 伏惟殿下垂覽焉。

大王大妃以疏示院相曰: "世祖嘗優待仁粹王妃, 謂睿宗曰: ‘事之如母。’ 以故王大妃於仁粹王妃, 固讓不居右, 予遵世祖遺意, 從王大妃之願, 特令仁粹王妃序於王大妃之上, 仁粹王妃亦固讓, 然重違予命, 遂就位。 此擧實予所命也, 非主上本意, 反以主上爲過, 其於主上之意安乎? 業已爲之, 言之何益? 是不當言而言也。" 院相鄭昌孫申叔舟啓曰: "兩王妃序坐, 非於朝廷之上, 特宮壼中家人事耳, 況世祖遺意乎? 今以躋之事比焉, 所引非其類也。"


  • 【태백산사고본】 8책 5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9책 223면
  • 【분류】
    신분(身分) /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건설-건축(建築)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금융-식리(殖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