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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4권, 성종 6년 4월 17일 을미 3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압록강 연변의 수자리 군사를 2번으로 나누는 문제 등에 관해 신하들과 논의하다

이파(李坡)가 의견을 아뢰기를,

"압록강 연변의 수자리 군사를 3번으로 나누면 군졸의 수가 적고 힘이 약해지므로, 하숙부(河叔溥)의 계책을 따라 2번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적은 우리가 쳐들어 갈까 의심하여 항상 경계심을 품고 있는데, 요새지(要塞地)에 목책(木柵)을 널리 설치하여 위세를 보이는 것은 적을 매우 피곤하게 하는 술책으로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부역시켜 목책을 설치하였다가 다시 그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저들의 근거지가 될까 두렵습니다. 또 적이 이미 우리 땅을 침범하고 사냥을 핑계대어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고 있으니, 우리를 매우 얕보고 있는 것입니다. 농사철에 대규모의 공격을 하기는 어려우므로, 저들이 강의 북쪽에 와서 둔(屯)치기를 기다리며 형세가 약한 척해 보이다가 몰래 장사를 보내어 형편을 보아서 무찌르면, 반드시 저들이 마음으로 위세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배맹달(裵孟達)이 의견을 아뢰기를,

"국가가 전에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였을 때 두 곳으로 나누어 군사를 건넜습니다. 지금도 공격해 들어갈 것 같은 형세를 보이면, 두 곳으로 나누어 선박을 진열하고 기치(旗幟)를 펴서 적이 믿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영안도(永安道)에 지시하여 쳐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을 내어 성저(城底)의 야인(野人)들로 하여금 듣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이 소문을 서로 옮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적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박성손(朴星孫)·구겸(具謙)이 의견을 아뢰기를,

"여러 진(鎭)의 수자리 군사는 마땅히 2번으로 나눌 것이며, 적이 강의 북쪽에 둔(屯)을 친 뒤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적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을 살피게 하고, 밤을 타서 공격하면, 비록 죽이거나 포로를 얻지 못한다 하여도 적이 반드시 크게 두려워 하여 마음대로 날뛰지는 못할 것입니다. 목책(木柵)을 설치해 놓고 지키는 군사가 없으면 헛되이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울이 있어 적이 건널 만한 곳에 망대(望臺)를 줄지어 세우고, 활 잘 쏘는 군사로 하여금 밤낮으로 방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형(鄭亨)·이숙정(李叔貞)이 의견을 아뢰기를,

"강의 북쪽에다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것은 백성을 고단하게 할 뿐 적을 위협하는 데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강 여울의 요새지(要塞地)에 나무를 가로질러서 난간을 만들어 건너지 못하게 하고, 또 망대(望臺)를 설치하여 장사로 하여금 적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순숙(李淳叔)이 의견을 아뢰기를,

"만포(滿浦)의 강물은 여울이 있어 건널 수 있습니다. 지금 농민들이 들일을 하는 때인데, 적이 틈을 엿보아 잡아 갈까 해서 진실로 우려됩니다. 백성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것은 방비에는 도움이 안되면서 농사에 방해가 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다만 여울이 있는 곳에 가시나무를 많이 쌓아서 적의 침입로를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지키지 않으면 적이 허실을 알고 반드시 불태울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대로 망대(望臺)를 설치하고 활 잘 쏘는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방책이 이치에 맞을 것 같다. 원상(院相)들이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김질(金礩)·윤자운(尹子雲)이 의견을 말하기를,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니, 망대(望臺)를 설치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창손(鄭昌孫)이 의견을 말하기를,

"적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다시 와서 엿보는 그 간사한 계략을 알 만합니다. 지금 비록 강의 북쪽에 목책(木柵)을 설치한다 하여도 지킬 군사가 없습니다. 마땅히 여러 장수의 의견에 따라 목책을 설치하지 말고 망대(望臺)를 두어 지키게 하소서. 또 조전장(助戰將)을 보내어 각진(各鎭)의 요새지(要塞地)를 나누어 지키게 하여서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고, 신숙주(申叔舟)가 의견을 말하기를,

"강을 건너가서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일은 민력(民力)을 동원하지 않고 다만 수비군(守備軍) 만으로 목책을 간략하게 설치하되, 목책의 양쪽 끝이 강줄기를 안듯이 하여 초생달 모양과 같이 되게 하면, 우리 편에게는 왕래에 편리하고 적은 이를 빼앗아 점령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목책을 설치하는 본래의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그와 같으니 억지로 목책을 설치할 필요는 없고, 다만 강 이쪽편 여울의 건널 만한 곳에 작은 목책을 설치하여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여울이 얕아서 건널 만한 곳은 군사를 2번으로 나누고, 여울이 깊어서 건널 수 없는 곳은 군사를 3번으로 나누어, 때에 따라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여러 대신(大臣)과 정형(鄭亨) 등의 의견을 채택하여 유서(諭書)를 초(草)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하숙부(河叔溥)에게 유시하기를,

"이번에 경의 보고로 적이 강의 북쪽에 와서 둔치고 있음을 알았다. 적이 이미 우리의 경계를 범하고 우리가 쳐들어 갈 것을 우려하여, 우리가 하는 바를 와서 엿보고 있는 것이다. 방비하는 모든 일은 해이하게 할 수 없으며, 또 먼저 스스로 소동을 일으켜서도 안될 것이다. 다음의 사목(事目)을 잘 살피고 옳게 조치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1. 강의 북쪽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쳐들어 갈 것 같이 보이게 하라고 한 전번의 지시는 실행하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아직 목책을 설치하지 못하였다면, 다만 강 이쪽편의 건널 만한 여울이 있는 곳에 작은 목책을 세우고 망대(望臺)를 세워서 여울의 길을 지킬 것.

1. 강 연변 진(鎭)의 수자리 군사는 각각 그 땅을 지키게 하되, 적이 쳐들어올 때는 합번(合番)하고, 무사할 때는 분번(分番)하게 하라. 분번하거나 합번하는 일이 모두 한 고을 안의 일이어서 왕래하는 폐단은 없을 것이며, 이 일은 변장(邊將)의 일시적인 권한으로 하는 일이라 반드시 번수(番數)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농사철을 당해서 농사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니, 경이 짐작해서 처리하여 농사에 방해되지 않게 할 것.

1. 적이 강의 북쪽에 와서 통사(通事)를 부른 것은 반드시 이야기하려고 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여진 훈도(女眞訓導)를 이산(理山) 등의 고을에 두어 항상 익히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저들이 말한 바를 듣지 못하였으며 대답할 통사가 없는가? 군사적인 교섭이 있으면 양쪽의 사정이 반드시 통해야 할 것이니, 앞으로는 반드시 여진말을 아는 자로 하여금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듣게 할 것.

1. 대개 성보(城堡)는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우며, 여장(女墻) 안에도 평탄한 길을 만들어야 성첩(城堞)364) 을 지키는 군사의 걸음걸이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에는 축성(築城)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 겨우 석축(石築)만을 쌓고 흙을 두텁게 메우지 않기 때문에 위험해서 사람들이 걸을 수 없다. 전에 지시하기를, 여러 진성(鎭城)의 안쪽에는 흙을 메워서 말타고 줄지어 지나갈 수 있게 하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 10년이 되도록 이와 같이 쌓은 성(城)이 하나도 없다. 겨울철이 되어 얼어서 미끄러우면, 비록 성에 올라가서 적을 막으려고 한들 막을 수 있겠는가? 금년 겨울의 방비가 반드시 긴요할 것이니, 흙을 두텁게 쌓도록 하되, 미처 다하지 못하면 우선 강 연안의 진성(鎭城) 안에 나무를 가로질러서 기틀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메워서 적의 방비에 편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5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15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정론-정론(政論)

  • [註 364]
    성첩(城堞) : 성 밑의 낮은 담.

李坡議: "沿江戍卒分三番, 則兵少力寡, 從叔溥策, 分二番爲便。 且賊疑我入討, 常懷戒心, 要害之處, 廣設木柵, 多張聲勢, 似合於極肄以疲之之術。 然役民設柵, 而復不能守, 恐爲彼人所據。 且賊旣犯我境, 佯爲射獵, 覘我虛實, 其輕我甚矣。 農月大擧入攻爲難, 俟彼來屯江北, 佯示之弱, 密令壯士, 伺便以殲之, 則彼必畏威, 不復來矣。" 裵孟達議: "國家前討建州衛時, 分二處渡軍。 今欲示入攻之勢, 則當於二處, 陳船張幟, 以疑賊心。 且諭永安道, 聲言入討, 使聞城底野人, 彼必轉相報告, 賊不得安意治農矣。" 朴星孫具謙議: "諸鎭戍兵, 宜分二番, 賊屯江北, 令邊將審賊衆寡, 乘夜襲攻, 則雖不得首虜, 賊必震恐, 不得恣行矣。 設柵無戍兵, 徒勞而無益。 唯於有灘可涉處, 列置望敵臺, 令能射者, 晝夜防禦爲便。" 鄭亨李叔貞議: "江北設柵, 徒勞民, 無益於威敵。 但於江灘要害處, 橫木爲欄, 使不得渡, 又設望敵臺, 令壯士守之爲便。" 李淳叔議: "滿浦江水, 有灘可渡。 今農民在野, 賊伺隙潛虜, 誠爲可慮。 役民設柵, 無益而有妨農之弊。 只於灘底, 多積荊棘, 以斷賊路爲便。" 傳曰: "設柵而不守, 則賊知虛實, 必焚之。 誠如群議, 設望敵臺, 令能射者, 禦之之策, 似有理。 更議院相以啓。" 金礩尹子雲議: "設柵似無益, 設望敵臺, 宜從群議。" 鄭昌孫議: "賊不得利, 更來窺覘, 其譎計可知。 今雖設柵江北, 無兵可守。 宜從諸將之議,勿設柵, 置望敵臺以守之。 又遣助戰將, 分戍諸鎭要害處, 以備不虞。" 申叔舟議: "渡江設柵, 非用民力, 但以守護之兵, 略設木柵, 兩端抱江, 如偃月形, 在我則便於往來, 賊亦不得奪據, 此設柵本意。 然衆議如此, 不必强設, 但於此邊江灘可涉處, 設小柵, 分兵守之。 灘淺可涉則爲二番, 灘深不可涉則爲三番, 隨時處之。" 上令叔舟, 采諸大臣及鄭亨等議, 草諭書。 諭平安道節度使河叔溥曰: "今因卿啓, 知賊又來屯於江北。 賊旣犯我境, 慮我入攻, 來覘我所爲耳。 防備諸事, 不可緩弛, 且不可先自騷敝。 看詳事目, 措置得宜, 毋貽後悔。 一, 前諭設柵江北, 示將入攻, 未知已設乎。 若時未設柵, 則但於此邊有灘可渡處, 設小柵, 爲望敵臺, 以守灘路。 一, 沿江鎭戍兵, 各守其地, 有事則合番, 無事則分番。 或分或合, 皆在一邑之內, 非有往來之弊, 是乃邊將一時權宜之事, 不必拘於番數。 但當農月, 民事亦不可緩, 卿其酌量審處, 勿妨農務。 一, 賊到江北呼通事, 必欲有所語也。 國家設女眞訓導于理山等邑, 常時肄習, 乃爲此也。 何不聽其所言而答以無通事乎? 兵交而兩情必通, 今後須令解語者, 聽其所言。 一, 凡城堡, 外築以石, 內實以土, 女墻之內, 平衍成路, 然後守堞者步武, 不礙矣。 今監築者不爲遠計, 石築纔畢, 塡土不厚, 使之傾側, 人不得躡。 前此下諭, 諸鎭城內面塡土, 使騎可成列, 于玆十年, 而曾無一城如此。 若冬月凍滑, 則雖欲登城禦賊得乎? 今冬防禦必緊, 塡土功重, 勢將不及, 姑於沿江諸鎭城內, 橫木爲機, 鋪土其上, 以便禦敵。"


  • 【태백산사고본】 8책 5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215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