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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2권, 성종 6년 2월 14일 계사 4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안팽명 등이 《경연일기》를 비밀히 아니하도록 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사경(司經) 안팽명(安彭命)이 아뢰기를,

"어제 전교(傳敎)에 《경연일기(經筵日記)》는 비밀히 하지 말게 하였습니다. 《일기》는 먼저 강서(講書)의 전말(顚末)을 쓰고 다음으로 상교(上敎)와 제신(諸臣)의 아뢴 말을 쓰는데, 아침마다 경연관이 강서(講書)의 전말을 알고자 하여 가지고서 봅니다만, 《일기》가 비록 비밀의 글은 아닐지라도 사관(史官)이 쓰면 사필(史筆)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당시의 사초(史草)를 보고자 하였으나 사관이 올리지 아니하였으니, 임금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습니까? 청컨대 《일기》를 두 질(帙)로 나누어서, 하나는 오로지 시사(時事)만 기록하여 비밀히 하고, 하나는 진강(進講)한 전말을 써서 경연관의 참고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책을 나누지 아니할지라도 만약 진강한 전말을 작은 종이에 별도로 써서 경연관의 참고에 응하도록 하면 되지, 어찌 반드시 《일기》를 취해 볼 것인가?"

하였다. 인하여 지사(知事) 홍응(洪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홍응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하므로, 안팽명이 말하기를,

"나라의 큰 일을 모두 경연에서 의논할 수 있는데, 이제 만약 비밀히 하지 아니하면 외부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것이니, 사필(史筆)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말하기를, ‘야대(夜對)에서 아뢴 말을 주강 일기(晝講日記)에 쓰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심한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 말을 듣고 비밀히 하지 말게 하였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현석규(玄碩圭)가 말하기를,

"사국(史局)의 일은 비밀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종조(睿宗朝)민수(閔粹)가 대신의 과실은 썼는데, 실록(實錄)을 편찬함에 미쳐서 그 대신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가 그것을 볼까 두려워하여 그 일을 지우고자 하였으나 그 사고(史藁)가 이미 사국(史局)에 들어갔으므로, 강치성(康致誠)에게 부탁하여 구해 얻어서 지워 없앴습니다. 그러므로 강치성은 사고(史藁)를 단속하지 아니한 죄로 사형되고, 민수는 외방에 장류(杖流)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일기를 비밀히 하지 아니하면 대신으로서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가지지 아니한 자가 또한 모두 사관을 위협하여 취해서 볼 것이니, 마침내 직필(直筆)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남의 하지 아니한 일을 쓰면, 그 사필(史筆)은 마침내 고칠 수 없어서 밝힐 길이 없을 것이니, 이는 사관이 마땅히 삼가야 할 바이다."

하니, 현석규가 말하기를,

"누가 감히 사필을 잡고서 미워하고 사랑함으로써 헐뜯거나 기리거나 하겠습니까? 비록 혹시 무상(無狀)한 무리가 있어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남의 허물과 악함을 함부로 쓸지라도, 후세에 저절로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응이 아뢰기를,

"비단 강치성의 무리뿐만 아니라 세종조에 권제(權踶)·안지(安止)도 사사로이 사고(史藁)를 고쳤는데, 마침내 중한 죄를 받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기를 비록 비밀히 하지 아니하도록 하였을지라도 사람마다 보이도록 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주야(晝夜)의 일기를 한 책에 합해서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5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편사(編史)

○御晝講。 講訖, 司經安彭命啓曰: "昨日傳敎, 《經筵日記》毋得秘密。 日記先書講書顚末, 次書上敎及諸臣進言, 每朝經筵官欲知講書顚末, 取而見之, 日記雖非秘書, 史官書之則爲史筆。 昔 太宗欲見時史, 史官不以進, 人主不得見, 況外人乎? 請日記分兩帙, 一則專記時事而秘之, 一則書進講顚末, 以備經筵官參考。" 上曰: "雖不分帙, 若別書進講顚末于小紙, 以應經筵官之考, 何必取見日記乎?" 仍顧謂知事洪應曰: "此言何如?" 曰: "上敎是也。" 彭命曰: "國之大事, 皆得議於經筵, 今若不秘, 則外人皆得而知之, 不可謂史筆也。" 上曰: "領議政申叔舟言: ‘夜對進言, 不書於晝講日記, 人共疑之’, 故予聞此言, 使毋得秘密也。" 同副承旨玄碩圭曰: "史局之事, 不可不秘也。 睿宗朝, 閔粹書大臣過失, 及修實錄, 其大臣亦與焉。 恐其見也, 欲削其事, 然其史藁已納史局, 囑康致誠, 求得削之。 致誠坐不秘史藁誅, 杖流于外。 今若不秘日記, 大臣之不帶春秋館者, 亦皆脅史官取見, 終無直筆矣。" 上曰: "若以傳聞, 書人所不爲之事, 則其史筆終不可改, 無路自明, 此史官之所當愼也。" 碩圭曰: "誰敢秉史筆, 以憎愛爲毁譽乎? 雖或有無狀之輩, 以私怨, 濫書人過惡, 後世自有公論也。" 洪應曰: "非徒致誠輩也, 世宗權踶安止, 亦以私改史藁, 竟受重罪。" 上曰: "日記雖云不秘, 非謂人人而示之也。 晝夜日記宜合書一秩。"


  • 【태백산사고본】 8책 5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