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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52권, 성종 6년 2월 8일 정해 16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야대에서 《고려사》를 강하다가 임금의 도와 신하의 도에 관해 이야기 하다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의종(毅宗) 15년(1161)에〉 ‘왕의 폐행(嬖倖)219)미도(媚道)220) 를 끼고 비밀히 화계(畫雞)221) 를 어상(御床)의 요 안에 넣어 두었다.’는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화계(畫雞)를 쓰는가?"

하니, 시강관(侍講官) 유순(柳洵)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듣지 못한 바인데, 이는 특히 당시에 임금에게 아첨을 보이려고 요사스러운 꾀를 낸 것입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현석규(玄碩圭)가 아뢰기를,

"임금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은 삼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의종이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믿었기 때문에 그 신하들이 많이 좌도(左道)222) 를 가지고 미혹하게 하였고, 한(漢)나라 때 무고(巫蠱)의 화(禍)223) 도 역시 무제(武帝)의 허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음양 구기가 가장 일에 방해된다."

하니, 현석규가 말하기를,

"고려(高麗) 태조(太祖)도 성덕(盛德)한 임금이었으나, 창업(創業)한 초기에 도선(道詵)224) 의 비보지설(裨補之說)을 신용하여 자손에게 준 계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 자손이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염승익(廉承益)은 주자(呪者)로서 벼슬이 재보(宰輔)225) 에 올랐으니, 이때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講)을 마치고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의 임금 가운데 의종(毅宗)이 가장 못한가?"

하니, 현석규가 말하기를,

"충혜왕(忠惠王)의 잘못됨은 의종보다 더합니다. 충혜왕의 호협 경박(豪俠輕薄)하여 추하고 더러운 행실은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조년(李兆年)이 진계(進戒)하기를, ‘무릇 유자(儒者)는, 말은 요(堯)·순(舜)을 일컫고 행실은 공(孔)·안(顔)226) 을 본받아야 하는 것인데, 전하는 이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227) 라고 하시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왕과 더불어 노는 자가 모두 무뢰한 자제(子弟)인데, 어떻게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행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송강(松岡)에서 새를 쏘므로 이조년이 간절히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자, 이조년은 물러가서 성산(星山)에 숨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뒤에 원(元)나라 사신이 왕을 붙잡아 가지고 돌아갔으나 재신(宰臣) 가운데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원나라 황제가 충혜왕을 꾸짖기를, ‘너의 고기를 찢어서 천하의 개를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겠다.’ 하고 곧 함거(檻車)에 싣고 게양(揭陽)에 왕을 귀양보냈는데, 악양(岳陽)에 이르러 길에서 훙(薨)하였으니, 이른바,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228) ’이라는 것입니다.

의종은 잔포(殘暴)한 임금은 아니고 다만 놀고 구경하는 것을 즐겨서 군신(君臣)이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국사(國事)를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또 시(詩)를 짓기를 좋아하여 문신(文臣)의 부박(浮薄)한 무리와 더불어 번갈아 서로 부르고 화답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문신들이 교만하고 사치하여져 무사(武士)를 업신여겨 보고,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며, 혹은 그 머리에 오줌을 누는 자까지 있어서 정중부(鄭仲夫)의 난(亂)229) 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이를 진실로 거울삼아서 문무(文武)를 일체(一體)로 하고 대우하기를 한결같이 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금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경들은 각각 나의 과실을 말하라."

하였다. 현석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과실이 없는데, 신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다만 지난번에 김영견(金永堅)이 대신의 잘못을 아뢰었는데, 김영견이 충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였는지, 아니면 참소하여 이간하려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였는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전에 이르기를, ‘이른바 고국(故國)230) 이라는 것은 교목(喬木)231) 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신(世臣)232) 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대신(大臣)·훈구(勳舊)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김영견이 만약 참소하여 이간하는 마음을 품었으면, 이는 이른바 ‘새것이 옛것을 이간하고 먼 이가 친한 이를 이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대(夜對)에는 경연관(經筵官)이 있고 사관(史官)이 있으니 역시 조정(朝廷)이며, 김영견이 아뢴 바도 밀계(密啓)가 아닙니다. 다만 성상의 앞에서 아뢴 말을 밖에 누설하는 것은 크게 옳지 못하니, 이른바 ‘차라리 공가(公家)를 그르치더라도 권문(權門)은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므로,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추국(推鞫)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 잡으소서."

하고, 유순(柳洵)도 이것을 가지고 계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은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233) 을 같이하는데, 대신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어찌 권세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이간하려고 하는 것이겠는가? 그런데 이것을 밖에 전파한 것은 매우 잘못이다. 사관(史官)은 사실을 기록할 뿐인데, 어찌 또한 밖에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 어찌 다 국문하겠는가?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니, 유순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만약 그대로 둔다면, 대신에게 아부하는 그 조짐을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추국하여 죄를 받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현석규도 계청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 정승(鄭政丞)234) 이 말하기를, ‘김 승지(金承旨)235) 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현석규는 잠잠히 있고, 유순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김영견을 마땅히 국문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김영견이 바로 정창손에게 고한 것인지, 아니면 정창손이 다른 곳에서 듣고 김영견에게 질문하자 김영견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는지, 이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유순이 또 아뢰기를,

"예전에 소하(蕭何)236) 가 미앙궁(未央宮)을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고 고조(高祖)에게 고하기를, ‘후세에 더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제 경회루(慶會樓)는 바야흐로 세종조(世宗朝)의 융성할 때에 창건한 바로서 제도가 합당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다만 수리만 할 뿐이라고 하였으나, 이제 규모가 장려(壯麗)하여 옛 제도보다도 지나치며, 또 석주(石柱)를 조각하였으니, 만약 ‘이 누(樓)에 더할 것이 없게 한다.’고 하면 그만이지마는, 뒤의 흥작(興作)237) 은 옛 제도보다 지나치지 말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다만 조종(祖宗)의 창건한 바가 허물어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중수한 것뿐이다. 뒤에 만약 흥작이 제도에 지나침이 있으면, 너희들이 또한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5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9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219]
    폐행(嬖倖) : 총애를 받는 여자.
  • [註 220]
    미도(媚道) : 저주(詛呪) 등의 방법으로 부인(婦人)이 남자를 미혹시키려는 방술(方術).
  • [註 221]
    화계(畫雞) : 닭의 그림.
  • [註 222]
    좌도(左道) : 바르지 못한 일.
  • [註 223]
    무고(巫蠱)의 화(禍)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방사(方士)·무격(巫覡)의 무리들이 궁인(宮人)들을 고혹(蠱惑)시켜서 목인(木人:나무로 만든 우상)을 궁중에 묻고서 제사지냈다. 이때 마침 무제가 병이 들었는데, 강충(江充)은 방태자(房太子)와 틈이 있었으므로, 무제의 병은 무고(巫蠱)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궁중의 목인들을 파내고, 태자의 궁중에서 목인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상언(上言)하였다. 이에 태자는 두려워서 강충을 참(斬)하고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였다가 실패하자 자살하였다. 후에 전천추(田千秋)가 태자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강충의 집안을 멸족시켰음.
  • [註 224]
    도선(道詵) : 신라 말엽의 이름난 중. 중국에서 풍수 지리설(風水地理說)과 음양 도참설(陰陽圖讖說)을 처음으로 배워 와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었는데, 고려와 조선조의 사회·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 고려 인종 때 선각 국사(先覺國師)의 시호가 내려졌음.
  • [註 225]
    재보(宰輔) : 재상.
  • [註 226]
    공(孔)·안(顔) : 공자(孔子)와 안자(顔子).
  • [註 227]
    사개리(沙箇里) : 당시 몽고어의 유생(儒生)이라는 말인데, 여기에는 ‘물정(物情)에 어두운 서생(書生)’이라고 경멸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임.
  • [註 228]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 : 악양에서 죽을 재난.
  • [註 229]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 고려 의종 24년(1170)에 무신 정중부·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일으킨 반란. 조정에서 문신(文臣)을 우대하고 무신(武臣)을 천대하여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가던 중,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는데,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던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뇌(韓賴)에게 빰을 맞는 모욕적인 일이 생기자, 임금이 보현원에 도착할 무렵 모든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임금을 거제(巨濟)로 추방하였음.
  • [註 230]
    고국(故國) : 오래 된 나라.
  • [註 231]
    교목(喬木) : 큰 고목.
  • [註 232]
    세신(世臣) : 대대로 섬기는 신하.
  • [註 233]
    휴척(休戚) :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일.
  • [註 234]
    정 정승(鄭政丞) : 정창손(鄭昌孫).
  • [註 235]
    김 승지(金承旨) : 김영견(金永堅).
  • [註 236]
    소하(蕭何) : 한(漢)나라 개국 공신.
  • [註 237]
    흥작(興作) : 역사를 일으킴.

○御夜對。 講《高麗史》, 至, ‘王之嬖倖挾媚道, 密置畫雞於御床褥中", 上曰: "何以用畫雞也?" 侍講官柳洵對曰: "古所未聞, 是特當時欲見媚於主, 爲妖術耳。" 同副承旨玄碩圭啓曰: "人主好尙, 不可不愼。 毅宗信陰陽拘忌, 故其臣多挾左道以惑之。 如時巫蠱之禍, 亦是武帝之過。" 上曰: "陰陽拘忌, 最是害事。" 碩圭曰: "高麗 太祖亦是盛德之主, 然創業之初, 信用道詵裨補之說, 貽謀不臧, 故後世子孫, 類皆如此。 廉承益以呪者, 位登宰輔, 時事可知矣。" 講訖, 上曰: "高麗之君, 毅宗最劣乎?" 碩圭曰: "忠惠王之惡, 浮於毅宗忠惠之豪(浹)〔俠〕 輕薄醜穢之行, 口不可道。 李兆年進戒曰: ‘夫儒者, 言稱, 行法, 殿下目爲沙箇里, 此何等語耶? 王所與遊者, 皆無賴子弟, 何由聞正言見正事乎?’ 厥後彈雀松岡, 兆年切諫, 王不聽, 兆年退隱星山, 終身不仕。 其後使縛王以歸, 宰臣無一追之者。 帝數忠惠曰: ‘礫汝之肉, 啖天下之狗, 猶爲不足。’ 卽以檻車, 流王于揭陽, 至岳陽道薨, 所謂岳陽亡故之難也。 毅宗非殘暴之主, 特耽於遊觀, 君臣酣飮, 不恤國事。 又好賦詩, 與文臣浮薄之輩, 迭相唱和。 由此文臣驕奢, 傲睨武士, 羞與爲婚, 或有溲溺其頭者, 馴致仲夫之亂。 此誠可鑑, 文武一體, 待之如一幸甚。" 上稍前曰: "卿等各言予之過失。" 碩圭啓曰: "聖上無失, 臣何言哉? 但日者金永堅啓大臣之失, 臣不知永堅盡忠而有是言也, 抑懷讒間而有是言也。 古云: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大臣、勳舊之臣之失, 固當言之。 永堅若懷讒間, 則所謂 ‘新間舊, 遠間親。’ 然夜對有經筵官。 有史官, 亦朝廷也, 永堅所啓, 非密啓也。 但以上前所啓之言, 漏洩於外者, 則大不可, 所謂 ‘寧誤公家而不負權門’, 此非細故。 請推鞫明正其罪。" 亦以是啓請。 上曰: "大臣與國同休戚, 言大臣之過者, 豈欲奪權, 亦豈欲離間? 以是而騰播於外則甚非。 史官記事而已, 亦何可言于外哉? 然未知誰所言, 豈可盡鞫? 今姑置之。" 曰: "上若置之, 阿附大臣, 其漸不可長也。 臣意推鞫抵罪便。" 碩圭亦啓請不已。 上曰: "鄭政丞言: ‘金承旨與我言之。’" 碩圭默然, 洵曰: "若然則永堅, 是當鞫者也。 但永堅直告昌孫耶, 抑昌孫聞諸他處, 而質于永堅, 永堅答之以實歟, 是未可知也。" 上曰: "置之。" 又啓曰: "昔蕭何未央宮極壯麗, 告高祖曰: ‘令後世無以加焉。’ 今慶會樓, 方世宗朝殷盛之時所創, 制度得中。 殿下初則但曰修理而已, 今規模壯麗, 過舊制遠甚, 又雕琢石柱, (豈)〔若〕 曰: ‘無加此樓’, 則已矣, 後有興作, 願毋過舊制。" 上曰: "爾之言然也。 第以祖宗所創, 不可坐視廢墜, 故修創耳。 後若興作過制, 爾等亦當言之。"


  • 【태백산사고본】 8책 5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9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건설-건축(建築)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