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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50권, 성종 5년 12월 16일 정유 4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행 사직 정자영의 졸기

행 사직(行司直) 정자영(鄭自英)이 졸(卒)하니,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조제(弔祭)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정자영은 본관이 영덕(盈德)으로, 선덕(宣德)갑인년1078) 에 과거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고, 뒤에 여러 번 직강(直講)과 사예(司藝)를 역임(歷任)하였다. 그때에 세조(世祖)가 어느날 문신(文臣)들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였는데, 정자영의 논의(論議)가 확실하므로, 세조께서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사헌 장령(司憲掌令)을 제수하였다. 성화(成化)을유년1079) 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천전(遷轉)되었다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고,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우보덕(右輔德)으로 옮겼으며, 병술년1080)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승진되고, 정해년1081) 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배명(拜命)되었다가,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진 제수되고, 경연(經筵)에서 실대(失對)1082) 로 인하여 호분위 사직(虎賁衛司直)으로 좌천(左遷)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시호[諡]를 문장(文長)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교회(敎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는 것을 ‘장(長)’이라 하였다. 정자영은 젊어서 고학으로 공부하여 《오경(五經)》《사서(四書)》에 통숙(通熟)하고, 과거에 올라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자라서는 학관(學官)이 되어 훈회(訓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구종직(丘從直)과 더불어 세조 앞에서 경전의 뜻[經旨]을 논난(論難)하였는데, 구종직은 매양 영합(迎合)하기를 힘써서 혹은 불로(佛老)1083) 로써 옳다고 하였으나, 정자영은 확연(確然)히 소견(所見)을 바꾸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소박하고 고루하여 변통(變通)이 없었으며, 독서(讀書)함에 문의(文義)를 관찰하는 데에도 또한 고지식함이 많았다. 그리고 어릴 때에 학문(學問)을 하러 나가서 10년 동안이나 귀성(歸省)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시에 경시를 당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50권 8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7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行司直鄭自英卒, 輟朝、弔祭如例。 自英, 盈德人, 宣德甲寅登第, 補成均學諭, 轉至博士, 後累歷直講、司藝。 時世祖日與文臣, 講論經史, 自英論議確實, 世祖嘉之, 特授司憲掌令。 成化乙酉, 轉成均司成, 未幾陞通政僉知中樞院事, 遷世子侍講院右輔德。 丙戌陞嘉善同知中樞院事, 丁亥拜工曹參判上卽位, 陞授資憲知中樞府事, 以經筵失對, 左遷虎賁衛司直, 至是卒。 諡文長; 學勤好問文, 敎誨不倦長。 自英少苦學, 通熟五經四書, 登第歷仕, 長爲學官, 訓誨不倦。 嘗與丘從直, 在世祖前, 論難經旨, 從直每務迎合, 或以佛、老爲是, 自英確然不變所見。 然朴陋無變通, 讀書觀文義, 亦多固滯。 幼時赴學, 十年不赴覲, 爲時所薄。


  • 【태백산사고본】 7책 50권 8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73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