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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50권, 성종 5년 12월 15일 병신 1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일본 국왕의 사자 정구 등 22인이 하직하므로, 선정전에서 그들을 인견하다

일본 국왕의 사자(使者) 정구(正球) 등 22인이 하직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술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전지(傳旨)하기를,

"바닷 길이 험하고 먼데, 각기 잘 돌아가도록 하라."

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그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일본 국왕 전하에게 삼가 회답합니다. 폐방(弊邦)이 귀국(貴國)과 더불어 대대로 교호(交好)의 도리를 강구해 오면서, 왕(王)이 업(業)을 이음에 미쳐서는 자주 사자를 보내어 구호(舊好)를 폈었습니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사신[使价]을 한번 보내어서 보빙(報聘)하였으나, 중도에서 풍파를 만나 마침내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에 들으니 귀국(貴國)에서는 간과(干戈)1074) 가 조용하지 않고 도로(道路)가 막혔다고 하여 다시 교빙(交聘)을 계속하지 못하였는데, 또 혜서(惠書)를 고맙게 주셨으니, 사의(辭意)가 은근(慇懃)하고, 좋은 선물로써 덧붙여 주셨으니, 신의(信義)가 겸하여 돈독하시어, 감괴(感愧)가 아울러 간절합니다. 지금 들으니 귀국은 조야(朝野)가 맑고 평안하나, 해로(海路)에 노략질하는 도둑이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의 사자도 즉시 보내서 후의(厚意)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거듭거듭 부끄럽습니다. 지난번에 세천(細川)·이세(伊勢) 양씨(兩氏)의 사자(使者)라고 일컬은 것은 모두 다 왕명(王命)을 가탁(假託)하고 와서 병비(兵費)를 요구하므로, 다만 환란을 구(救)하고 재앙을 나누는 것이 의리상 당연하고 급하게 생각되어, 그 사이에 의심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유(來諭)를 받고서야 그것이 왕명(王命)을 속인 소위(所爲)임을 알았습니다. 내사(來使)가 또 말하기를, ‘우리 국왕의 사자라는 자만이 아니고 여러 대신(大臣)이 보낸 바라고 일컫고 오는 자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다.’고 하고, 이어서 전하(殿下)의 뜻으로써 부신(符信)1075) 을 가지고 징험[驗]을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과인(寡人)도 또한 생각하기를 넓은 바다로 멀리 떨어져서 설사 조그마한 거짓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구명해 살피지 못할 것이므로, 오직 부신(符信)이라야만 가히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상아(象牙)로 부신(符信) 열 개를 만들어 가운데를 쪼개어서, 오른쪽 반쪽을 회사(回使)에게 내어 주고, 그 왼쪽 것을 두어서 다른날의 징험을 삼게 하니, 뒤에 빙문(聘問)할 때를 당하여는 반드시 부신을 주어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귀조(貴朝)의 대신(大臣)으로 일찍이 우리에게 통신(通信)한 자나 혹은 사자를 보낼 일이 있으면 또한 부신을 주어서 속임수를 막으면, 어찌 양편이 서로 다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구하신 서광원(西光院)조연(助緣)1076) 은 폐방(弊邦)이 근년에 연달아 국휼(國恤)을 당하고, 연사(年事)도 또한 흉작이 되어서, 간략하게 토산(土産) 약간을 가지고 조그마한 회포를 표하여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니, 양해[照恕]하시고, 섣달[臘天]의 추위가 심하니 진중(珍重) 자애(自愛)하소서. 불선(不宣)합니다."

하고, 별폭(別幅)에는,

"정포(正布) 5백 필, 면포(綿布) 5백 필, 백세면주(白細綿紬) 10필, 백세저포(白細苧布) 10필, 흑세마포(黑細麻布) 10필, 인삼(人蔘) 1백 근, 표피(豹皮) 5장, 호피(虎皮) 5장, 표피 좌자(豹皮坐子) 1좌(坐),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 만화석(滿花席) 10장, 만화방석(滿花方席) 10장, 봉문염석(鳳文簾席) 2장, 남사피(藍斜皮) 10장, 대요발(大鐃鈸) 1사(事), 중요발(中鐃鈸) 1사, 법고(法鼓) 1면(面), 유쟁(鍮錚) 1사, 중경(中磬) 1사, 운판(雲板) 1사, 후지(厚紙) 10권(卷), 납촉(蠟燭) 1백 자루, 해송자(海松子) 5백 근, 청밀(淸蜜) 20말[斗], 봉숭아씨[鳳仙花子] 1봉(封), 양귀비씨[罌粟子] 1봉, 맨드라미씨[鷄冠花子] 1봉, 해바라기씨[黃葵子] 1봉, 집비둘기[鴿子] 암수 아울러 2쌍, 흑봉두계[黑蓬頭雞] 암수 아울러 1쌍, 백봉두계[白蓬頭雞] 암수 아울러 1쌍, 채색 오리[彩鴨] 암수 아울러 1쌍, 꿩[野雞] 암수 아울러 1쌍."

이라 하였다. 【부신[符驗]의 체재는 둘레[周圍]가 4촌(寸) 5푼(分)이고, 원지름[圓徑] 1촌 5푼이다. 한 면(面)에는 ‘조선통신(朝鮮通信)’이라는 4자를 전자(篆字)로 쓰고, 한 면에는 ‘성화 10년 갑오(成化十年甲午)’라는 6자를 쓰며, 또 부(部)마다 한 면 좌우(左右)에 각각 제1부터 제10에 이르는 번호를 쓴다.】


  • 【태백산사고본】 7책 50권 7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72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1074]
    간과(干戈) : 전쟁(戰爭).
  • [註 1075]
    부신(符信) : 나뭇조각이나 두꺼운 종잇조각에 글자를 쓰고 증인(證印)을 찍은 뒤에 이것을 다시 두 조각에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게 주고 다른 한 조각은 자기가 보관하였다가 뒷날에 서로 맞추어서 증거를 삼게 만든 물건.
  • [註 1076]
    조연(助緣) : 찬조금.

○丙申/日本國王使正球等二十二人辭, 上御宣政殿引見, 置酒以慰。 仍傳曰: "海路險遠, 其各好還。" 賜物有差。 其答書曰:

朝鮮國王奉復日本國王殿下。 弊邦與貴國, 世講交道, 及王嗣業, 數遣使以申舊好。 在我先王. 嘗一遣使价報聘. 中遭風沒. 竟未得達。 尋聞貴國干戈不淸, 道路梗塞, 未復繼聘, 又辱惠書, 辭意(殷)〔慇〕 懃, 副以嘉貺, 信義兼篤, 感愧交切。 今聞貴國朝野淸夷, 然海路鈔竊, 尙有未戢, 又不得卽遣一介, 以答厚意, 慙負慙負。 往者稱細川伊勢兩氏之使, 皆假王命來, 索兵費, 第念救患分災, 義所當急, 不暇致疑於其間。 玆承來諭, 乃知矯命所爲也。 來使且言: "非止我國王之使, 其稱諸大臣所遣, 而來者亦多類此。" 仍以殿下之意, 請符爲驗。 寡人亦以爲, 滄溟夐絶, 縱有纖僞, 未易究覈, 惟符可驗。 乃以象牙作符十枚, 中分之, 將右畔就付回使, 留其左以爲他日之驗, 後當聘問之時, 必授符以遣。 貴朝大臣曾通信於我者, 如或有遣使, 亦且授符, 以杜欺誑, 豈非兩相幸哉? 所索西光院助緣, 敝邦近年連遭國恤, 歲又不登, 略將土産若干, 聊以表懷, 具如別幅照恕, 臘天寒酷, 珍重自愛。 不宣。

別幅:

正布五百匹、綿布五百匹、白細綿紬一十匹、白細苧布壹拾匹、黑細麻布一十匹、人蔘一百斤、豹皮五張、虎皮五張、豹皮坐子一坐、雜彩花席一十張、滿花席一十張、滿花方席一十張、鳳文簾席二張、籃斜皮一十張、大鐃鈸一事、中鐃鈸一事、法皷一面、鍮錚一事、中磬一事、雲板一事、厚紙一十卷、蠟燭一百柄、海松子五百斤、淸蜜二十斗、鳳仙花子一封、(鷪)〔罌〕 粟子一封、雞冠花子一封、黃葵子一封、鴿子雌雄幷二雙、黑蓬頭雞雌雄幷一雙、白蓬頭雞雌雄幷一雙、彩鴨雌雄幷一雙、野雞雌雄幷一雙。

【符驗制, 周圍四寸五分, 圓徑一寸五分。 一面書朝鮮通信四字用篆, 一面書成化十年甲午六字, 又每部一面左右, 各書第一以至第十】


  • 【태백산사고본】 7책 50권 7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72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