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성종실록48권, 성종 5년 10월 28일 경술 4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근본을 굳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도리와 국방에 관한 이서장 등의 상소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서장(李恕長)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예로부터 천하(天下)의 형세는 한 번 잘 다스려지면 한 번은 어지러워지고, 비(否)927) 가 극(極)하면 태(泰)928) 가 오는 것이며, 태(泰)가 극하면 다시 비(否)가 되는 것은 이치의 필연(必然)한 것입니다. 우선 우리 나라의 일로써 말한다면, 삼국(三國) 이전에는 분붕(分崩)하기도 하고 이석(離析)하기도 하여 저마다 서로 영웅되고 어른이 되려고 날로 싸움을 계속하였으므로 그 어지러움이 지극하였었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동정 서토(東征西討)하여 18년 만에 신라(新羅)가 항복하고, 또 1년 만에 후백제(後百濟)가 삭평(削平)되어 삼국의 땅이 합하여 하나로 되어서, 경내(境內)가 편안하게 다스려졌습니다. 74년을 지나면서 거란(契丹)의 병란이 있어 현종(顯宗)이 남천(南遷)하고 경성(京城)이 드디어 함락되었다가 근근히 흥복(興復)할 수 있었습니다. 또 94년에 동번(東蕃)이 변경(邊境)을 어지럽게 하므로 숙종(肅宗)·예종(睿宗)이 서로 계속하여 토벌을 이루어 비록 9성(九城)을 설치하였으나, 뒤에 다시 지키지 못하고, 전쟁의 괴로움은 수년 만에야 종식되었습니다. 또 1백 7년 만에 금산(金山)·금시(金始)의 병란이 있어서 고종(高宗)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를 보내어 몽고(蒙古)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공멸(攻滅)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몽고의 군사가 우리 강토(疆土)를 침범하여 남(南)으로는 상주(尙州)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나주(羅州)에까지 이르러 동쪽 백성들이 미란(糜爛)하여졌으므로 감히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사람 없는 땅을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40여 년 동안을 나라가 나라 같지 않다가 원종(元宗)이 친조(親朝)함에 이르러서 세자(世子)929)상주(尙主)930) 하게 된 뒤에야 차차 안정이 되었습니다. 또 91년이 되어 왜인(倭人)이 침구(侵寇)하기 시작하였고, 9년 만에 홍건적(紅巾賊)이 크게 들어오매 공민왕(恭愍王)이 또 남쪽으로 피난했다가 해가 지나서야 겨우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군려(軍旅)가 해마다 일어나고, 도적이 날로 심하여 생민(生民)의 무리가 텅텅비어 남은 것이 없게 된 지가 무릇 33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태조(太祖)께서 운(運)에 응(應)하여 나라를 여시니, 지난날에 경색(梗塞)되었던 추류(醜類)들이 바람을 따라 기쁘게 모여 오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아 태평 성대가 계속되어 80여 년 동안 방우(方宇)가 편안하고 조용하므로 생민(生民)들이 늙어 죽기까지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히 태평(太平)이 극(極)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태평한 때를 당하여 복황지계(復隍之戒)931) 를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깊이 왕고(往古)를 생각하시고, 초연(超然)한 독자(獨自)의 견지(見地)에서 마음을 무비(無備)에 유의하시어 한편으로 말하면 군적(軍籍)을 정비하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 말하면 군려(軍旅)를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4년 동안을 확장하고 완비하여 잘 정리하기에 유루(遺漏)함이 없었던 것인데, 전하(殿下)께서 몸소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손에 요도(瑤圖)932) 를 잡으셨으니, 어찌 가히 구안(久安)의 풍속으로써 고식(姑息)의 정사를 행하여 음우(陰雨)의 방비를 잊고 도충(桃蟲)933) 의 걱정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군적(軍籍)과 군기(軍器) 등의 일은 모두가 세조께서 세우신 법인데, 백성이 멀리 생각함이 없고, 구차하게 목전(目前)에만 편안하려고 하면 법이 처음 시행될 때 어찌 화연(譁然)934) 함이 없겠습니까? 세월이 이미 오래되면 형세가 반드시 첩연(帖然)935) 하여질 것이고, 인하여 그것을 지키면 길이 편안하여질 것이지마는, 만약 백성의 말을 따라서 손쉽게 변경하고 뒤에 다시 쓰려고 한다면, 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짐작하시어 굳게 지키심에 있을 뿐입니다. 그밖의 근본을 굳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도리와 적(敵)을 제어하고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은 좁은 소견을 가지고 조목(條目)으로 뒤에 진술하겠습니다.

1. 영안도(永安道)는 우리 나라 근본(根本)의 땅입니다.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는 곳으로, 태조(太祖)께서 왕업의 기틀을 여기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곳의 백성은 강한(强悍)하고 우직(愚直)하며, 일이 있으면 이(利)로써 움직이기를 쉽게 하니, 정해년936) 의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1. 이시애(李施愛)에게 괘오(詿誤)937) 되어 온 도(道)가 향응(響應)하였으니, 그 때를 당하여 병위(兵威)가 지나는 곳마다 추류(醜類)를 마구 죽이므로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미처 안정되지 못하고, 늘 공차(公差)938) 를 임명하지만 연달아 소란하여 한갓 위엄만을 겁내고 은혜로운 덕택을 입지 못하여 민심(民心)이 메마르고 초조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오래 편안하게 될 도리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軫念)하시어 남은 백성들을 어루만져 따르게 하고 다정하게 품어주셔서, 혹은 전조(田租)를 감(減)해 주시고 혹은 공물(貢物)을 제해 주어, 힘써 그 마음을 기쁘게 하여, 영원한 풍속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1. 영안도(永安道)의 풍속이 옛날에는 도둑이 없다고 일컬어 바깥 문을 닫지 않고 가축이 들판에 널렸었는데, 요새는 도적이 성행(盛行)하고 인심이 날로 경박해져 가니, 그 발단을 궁구하여 찾아보면 대개 또한 원인[漸]이 있습니다. 본도(本道)가 난(亂)을 겪은 이래로 거기다 갖다 채울 것을 꾀하여 곧 무릇 죄응(罪應)이 있거나, 행색이 도적과 같은 자나 우마(牛馬)를 재살(宰殺)한 자를 모두 여기에 돌려보냈으니, 이는 마치 호랑(虎狼)을 몰아서 양떼[羊群]에게 들여 보낸 것과 같았습니다. 도둑이 어찌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재살(宰殺)하는 자가 어찌 재살하기에 쉽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이 서로 선동하여 점점 번지고 날로 익혀서 강한(强悍)한 풍속에다 교활한 도둑질을 겸하였으니, 어찌 조정(朝廷)의 뒷날 걱정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고려 시대에 거란병(契丹兵)이 내침(來侵)했을 때에 양수척(揚水尺)939) 들이 모두 앞잡이가 되어 그 해(害)가 자못 심했으니, 뒷날에 만일 변방에 소요(騷擾)가 있으면, 이와 같은 무리가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말하는 자들이 이러한 것을 관찰하지 못하고서, 죄를 주어 옮길 자가 있으면 반드시 양계(兩界)에다가 적용을 하나, 이것이 바로 신이 한심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지금부터 범죄했거나 흉한(凶悍)하고 무뢰(無賴)한 무리들을 옮겨 들이어 그 형세를 더하지 못하도록 하여서 그 풍속을 변하게 하소서.

1. 평안도(平安道)압록강(鴨綠江)으로써 경계를 삼아 야인(野人)의 지경에는 진(鎭)을 두고 수자리를 벌이어서 제방(堤防)의 방비(防備)가 있는데, 중국 조정과의 경계는 산만(散漫)하여 막은 것이 없으므로, 강(江)의 얼음이 얼어붙게 되면 평탄하기가 평지(平地)와 같아지니, 이것은 국방을 굳게 하고, 강토를 봉해 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에는 중국 조정에서도 새로 참포(站舖)940) 를 설치하고 요동(遼東)과의 사이에 인가(人家)가 점점 번성하며, 애양포(靉陽鋪)에서 삭주(朔州)까지의 거리가 하룻길인데, 자유채(刺楡寨)의 사람들은 모두 다 우리 본국(本國)의 옛 백성으로서 언어(言語)가 분별은 없으나 서로 통할 수는 있습니다. 더구나 또 중국 백성들은 신역(身役)이 매우 한가한데, 우리 나라의 백성은 본도(本道)가 매우 괴롭습니다. 첫째는 방수(防戍)의 왕래에 곤(困)하고, 둘째는 사신(使臣)의 송영(送迎)에 피로하여 제민(齊民)들이 파산지경으로서 감히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전해 들으니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옛날에는 유기(鍮器)가 없어서 관세(盥洗)하는 데도 모두 목조(木造)로 된 그릇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에는 지나가는 참역(站驛)에 유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관인(館人)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유공(鍮工)이 현재 이 근처에 살면서 이 유기를 만든다.’고 합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본국(本國)에서 잡부금을 피해 온 백성이 몰래 이사와서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이니, 변어(邊圉)가 견고하지 못하고 호적(戶籍)이 밝지 아니한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도망하게 하는 소이(所以)인가 합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그윽이 스스로 한심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軫念)하시어, 수령(守令)을 엄하게 신칙하시어 더욱 회무(懷撫)를 부지런히 하여서 힘써 그 마음들을 거둬 들이며 조금이라도 그 힘들을 너그럽게 하여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호적의 법을 밝게 하여, 춘추(春秋)로 살펴서 교정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모두 다 호적에 등록하게 하며, 굶주린 자에게 진휼(賑恤)하여 은혜를 보이시면, 거의 적자(赤子)941) 의 마음을 잃지 않고, 다시는 유랑하여 옮겨 다니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1. 양계(兩界) 주진(主鎭)의 아전(衙前)을 절도사(節度使)가 대개 많은 수를 스스로 차지하여 일을 시키려고 대비하고 있는데, 감사(監司)는 능히 그 일을 참견하지 못하고, 수령(守令)도 능히 그 영(令)을 어기지 못하니, 진실로 이미 《대전(大典)》의 정한 수(數)에 합당하지 않고, 또 그 백성과 군졸들도 겹쳐서 들어가는 것에 괴로와 합니다. 한 번 아전(衙前)이 되면, 반드시 영농(營農)을 구(求)하여 성(城) 밖으로 흩어져 나가서 물과 풀을 편하게 쓰는데, 첫째는 성중(城中)의 인호(人戶)가 날로 줄어가므로 군졸(軍卒)의 수어(戍禦)하는 일이 허소(虛踈)해지고, 둘째는 성을 나가서 흩어져 살면 보오(堡伍)942) 가 없어 도적의 무리가 갑자기 이르면 반드시 남은 대로 사로잡힐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계유(戒諭)를 엄하게 내리시되, 첫째는 정한 수(數) 외에 더 차지하지 못하게 하고, 둘째는 성 밖으로 마음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여, 어기는 자는 군법(軍法)으로써 종사(從事)하게 하소서.

1. 정해943) 의 난(亂)에 강효문(康孝文)이 일개 절도사(節度使)로서 복몰(覆沒)하매 이시애(李施愛)가 그 이름을 빌어서 명령을 하니, 함흥(咸興) 이북이 온통 쏠리어 역도(逆徒)를 따랐는데, 조정(朝廷)에서 이를 징계하고, 드디어 남·북도(南北道)로 나누어 두 절도사(節度使)를 배치하여 그 권한을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한 것입니다. 일이 평정된 뒤로는 이미 3년을 지나도록 크게 간악한 도적이 없어서,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는 한갓 병마(兵馬)를 끼고 일없이 늠록(廩祿)만을 허비하면서 처노(妻孥)를 거느리고 내지(內地)에 편히 앉아 있으니, 그 헛되게 설치되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기를, ‘남도의 방수(防戍)는 갑산(甲山)삼수(三水)이다.’ 하지마는, 그러나 서로의 거리가 사흘길인데 완급(緩急)이 있을 때에 어떻게 가히 기다리겠습니까? 한 명의 절도사를 더 두는 것이 일에 해로움이 없는 것 같으나, 그러나 군관(軍官)이 있어야 하고, 아전(衙前)이 있어야 하며, 유병(留兵)944) 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물색(物色)을 내지(內地)로 모으면 변방(邊防)이 허(虛)하게 되고, 공급(供給)을 군현(郡縣)에서 두루하면 비용이 많아질 것입니다. 방어[戍禦]하는 군사를 감하고 군자(軍資)의 저축을 덜어서 이를 무용(無用)한 땅에다 기르는 것이 어찌 큰 손해가 아닙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남도 절도사를 속히 파(罷)하여서 군정(軍政)을 겸해 다스리게 하고, 그 유병(留兵)을 여러 진(鎭)의 긴절(緊切)한 곳에 옮겨 붙여서 더욱 변어(邊圉)를 굳게 하소서.

1. 길주(吉州)가 전성(全盛)할 때에는 사람과 물자가 번성(繁盛)하고 기력(氣力)이 남아 있어서, 소속(所屬)된 3구자(口子)945) , 곧 서북(西北)·사하북(斜下北)·사마동(斜麻洞)이 비록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에 마주하고 있으나,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여 방수(防戍)하기가 꽤 실하였는데, 이제는 길주(吉州)를 나누어 길성(吉城)명천(明川)으로 삼아서 토지와 인민이 각각 그 반이 되는데, 방어하는 곳으로는 길성서북·사하북 2구자를 얻고, 명천사마동 1구자를 얻었습니다. 길성은 한 현(縣)의 힘으로 두 곳을 나누어 지키게 되므로 물자와 힘이 적고 약하여, 방어하는 형세가 매우 고단(孤單)하게 되었으니, 만일 구적(寇賊)이 있으면 실로 깊이 걱정스럽고 위태롭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서북·사하북 2구자에 군졸(軍卒)을 헤아려 더하여 주고, 더욱 제방의 설비를 엄하게 하며, 길성 현감(吉城縣監)은 반드시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차견(差遣)하여 서로 구조(救助)하게 하여서 미연(未然)의 환란을 그치게 하소서.

1. 《대전(大典)》 내에, ‘각사(各司)의 서리(書吏)는 여러 고을의 교생(校生)으로 나이가 지긋하고 재주가 소략(踈略)한 자로써 보충(補充)한다.’고 하였습니다.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인재(人材)를 양성하는 것은 그로써 경전을 밝히고 행실을 닦아서 나라를 경륜하는데 쓰려고 대비하는 것인데, 서리를 반드시 여기에서 취(取)한다고 하면, 진실로 선비의 기개를 기르고 유교를 중(重)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또 영안도(永安道)제주(濟州)에는 다 자제(子弟)들의 입사(入仕)할 길을 두어서 직(職)을 받고 녹(祿)을 받기에 각각 스스로 과(科)가 있으니 먼 곳의 사람을 무유(撫綏)하게 한 소이(所以)입니다. 이제 그냥 일률[一槪]로 세공(歲貢)과 서리(書吏)를 양계(兩界) 및 제주(濟州)의 세 고을에서 징용한다고 하면 어찌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있는 5진(五鎭)과 제주의 세공리(歲貢吏)들이 글[狀]을 던져 신소(申訴)한 것은 또한 그 징험인 것입니다. 첫째는 인심을 시끄럽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변방 백성을 손실(損失)하게 된다는 것이니, 그 사체(事體)를 헤아리면 매우 불가(不可)함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특별히 양계(兩界) 변읍(邊邑) 및 제주의 세 고을에 명령하시어 세공 생도(歲貢生徒)를 허락하지 말게 하여 양식을 싸가지고 역사를 받는 폐단을 제거(除去)하여서, 변방을 중히 여기며 먼 곳의 사람은 무유(撫綏)하는 본보기를 보여 주소서.

1. 구례(舊例)에 야인(野人)에게 사급(賜給)하는 것을 기구(器具)로써 하지 아니하고, 안자(鞍子)946) 의 장식(粧飾) 같은 데도 또한 두석(豆錫)947) 을 사용한 것은 대개 병기(兵器) 자료로 적(敵)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이니, 조종(祖宗)께서 후환(後患)을 염려하는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대전(大典)》 안에, ‘몰래 팔기를 금하는 물건, 곧 철물(鐵物)·우마(牛馬)·군기(軍器) 따위를 범한 자는 죄가 사형(死刑)’이어서,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근자에 변방 고을 수령(守令)들이 태만하게 법을 만들지 아니하여, 중국 사람들과의 물건매매에서 모물(毛物)을 사면서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는 오직 철물(鐵物)만을 팝니다. 의복(衣服)이나 긴요하지 않은 도구를 군국(軍國)에 유용(有用)한 기물로 바꾸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것인데, 하물며 병기를 적의 손에 넘겨주는 일이겠습니까? 전해 들으니 야인이 옛날에는 철전(鐵箭)이 없어서 모두 골촉(骨鏃)을 사용했다는데, 지금은 쇠로써 갑옷도 만드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니, 그 해(害)됨이 어찌 분명하고 심하지 않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변방 장수들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법의 뜻을 거듭 효유(曉諭)하고 범하는 자를 통징(痛懲)하여 용서하지 말며, 군민(軍民)으로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주범도 함께 처벌한다는 변금(邊禁)을 거듭 밝혀서 범에게 날개를 붙여 주는 격이 되지 않도록 하소서.

1. 야인(野人)이 우리 국경 땅에 와서 서로 장사하는 자는 반드시 빈우(牝牛)와 빈마(牝馬)948) 를 구하는데, 변민(邊民)과 수령(守令)이 많이 이용하는 것은 교환이 편한 때문인데, 얻는 것은 모피(毛皮)와 모마(牡馬)949) 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심(人心)이 안일(安逸)에 익숙해져서, 목전(目前)에만 구차(苟且)하여 자식(孶息)하는 가축을 적(敵)에게 주니, 어찌 그들에게 팔린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피는 가히 탈수가 없는 것이고 숫말은 새끼 낳고 젖 먹이지를 못하니, 그 군국(軍國)의 정사에서 어찌 결손(缺損)만 있게 하여 구원(久遠)한 걱정을 끼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軫念)하셔서 금제(禁制)를 엄중히 하시어 병기와 철물을 주는 것과 동일한 사례로 시행하게 하소서.

1. 5진(五鎭)인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는, 인물(人物)은 풍성하나 전지(田地)가 협착(狹窄)하여 경이(耕犂)950) 의 미치는 데가 산정(山頂)에까지 이르러 몽예(蒙翳)951) 한 곳도 없는데, 어찌 초서(貂鼠)·토표(土豹)의 종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물(貢物)은 해마다 정한 수량이 있으니, 이것은 오로지 야인에게서 바꾸고 사들여서 바칩니다. 상공(常貢)을 가히 없앨 수가 없는데, 야인들이 때를 타서 좋은 값으로 맞이하니, 이것이 병철(兵鐵)이 빈축(牝畜)으로 더불어 국경 밖으로 유출(流出)되는 소이(所以)이므로, 그 유출을 방지하려면 먼저 그 근원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5진(五鎭)에서 생산되지 않는 모물(毛物)은 특명(特命)으로 견제(蠲除)하게 하여 금령(禁令)을 엄하게 하소서.

1. 야인에게 녹봉을 주는 것은 구례(舊例)가 아닙니다. 그 처음에 한때의 권의(權宜)에서 나온 것인데, 버릇에 젖어서 격례(格例)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상관(堂上官)으로 수직(受職)한 자가 간혹 원청(援請)하는 것이 있어서 상사(常賜)하는 외에 또 녹봉을 받는데, 형편상 곡식을 싣고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일가붙이로 귀화해 와서 사는 자를 연유하여 사사로 매매를 통해서 안 가져가는 물건이 없으며 실어갈 때에 역로(驛路)의 폐단도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습숙(習熟)이 심상(尋常)하게 되매, 상하(上下)가 서로 편하게 여겨서 방금(防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두려워하는 것은 잠시 신하가 되고서 녹봉을 받는 자가 더욱 많아지고, 녹봉으로 인하여 농간을 부리는 자가 점점 생기면 나라의 이기(利器)가 장차 적인(敵人)의 자력(資力)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도모하여 녹봉을 주지 말게 하여서 그 폐단을 막게 하소서.

1. 국가(國家)가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히어 있어서 방어(防禦)의 준비는 반드시 주즙(舟楫)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제 각 포구(浦口)의 병선(兵船)은 실로 심히 허술합니다. 이는 오래 편안하였던 현상이니, 진기(振起)하고 경장(更張)시키지 아니하면, 마침내 게을러지고 쇠약해지는 데에 이르러 걱정을 남길 것은 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또 배 만드는 나무는 반드시 소나무를 써야 하는데, 그 재목을 양성하려면 반드시 백년 뒤라야 쓸 만한 것입니다. 이제 들으니 배 만드는 재목인 변산(邊山)의 소나무는 이미 다 없어져서 완도(莞島)로 자리를 옮겼다니, 완도에서 만약 다 없어지게 되면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예로부터 강원도(江原道) 1도가 재목의 연수(淵藪)라고 일컬어 오는데, 이제 또한 다 없어져 간다고 하니, 만약 금제(禁制)하지 아니하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배 만들기에 알맞은 재목도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당(唐)나라 말기를 상고해 보니, 내신(內臣) 융수(戎帥)가 다투어 정관(亭館)과 제택(第宅)을 치장(治裝)하였으므로 당시에 목요(木妖)라고 호칭하였으며, 송(宋)나라 초기에는 관(官)에서 진롱(秦隴)의 대목(大木)에 대하여 사판(私販)을 금지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을 비교하여 보건대 어찌 산림(山林)의 재목이 당나라 말기 제사(第舍)의 사치(奢侈)에서 다 없어졌기 때문에 송나라 초기에 크게 금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가사(家舍)의 제도를 엄하게 하고 사치하는 습관을 막게 하여 산림의 금제를 신칙(申飭)함으로써 재목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배 만드는 데 사용할 재목을 저축하도록 하소서.

1. 바닷가 여러 고을의 성(城)들이 수축(修築)하지 아니한 것이 많고, 내지(內地)의 산성(山城)도 또한 모두 폐기되어 허물어졌으며, 평안도(平安道) 전체와 청천강(淸川江) 이서(以西)의 여러 고을은 엉성하여 보장(堡障)이 없습니다. 삼가 《춘추전(春秋傳)》을 상고해 보니, ‘거(莒)나라는 성(城)이 허술하여 초인(楚人)이 그들을 공벌하여 협순(浹旬)952) 동안에 3성(城)을 이겼다.’ 하였는데, 그것은 전하는 자가 그들의 준비 없음을 기롱한 것입니다. 승평(昇平)한 때에 인순(因循)하고 구차히 하여 태만하고 소홀하게 여겨 아무 것도 아니하다가, 일을 당한 뒤에야 분주(奔走)하고 피로(疲勞)하게 하더라도 기울어지고 망그러져서 손쓰지 못하게 되니, 이는 어느 나라나 통상적인 걱정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아직 흐리고 비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벗겨다가 창과 문을 얽어 막으면, 이제 이 백성들이 누가 감히 나를 업신여길 것이냐?’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살피고 헤아리게 하여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아서 점차로 영건(營建)하게 하면, 거의 역사를 번거롭고 무겁게 하지 않더라도 성의 보수(保守)가 길이 굳게 될 것입니다.

1. 전라도(全羅道) 여러 포구(浦口)에 봄·여름의 전운(轉運)을 하는 때에는 조선(漕船)이 부족하여 병선(兵船)으로써 보충하는데, 왕래하는 사이에 자칫하면 순월(旬月)을 지나게 되니, 이는 포구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비하는 날은 적고 포구를 떠나와 옮겨 다니면서 역사하는 때가 많습니다. 아무런 사건이 없으면 그만이지마는, 사건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한 군데가 기울어져 무너지면 왜구(倭寇)가 물밀듯 밀려올 것인데, 남쪽 백성들은 오래도록 편안하기만 했으니, 누가 능히 저항할 것입니까? 사민(士民)들은 분파(奔波)하여 곧 구학(溝壑)953) 에 굴러 떨어질 것이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비록 지혜 있는 자라도 능히 꾀를 쓰지 못할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살피지 못하고서 구차하게 눈 앞의 무사한 것만을 보고 병선(兵船)을 옮겨다 쓰자고 할 뿐 아니라, 국가의 큰 역사에는 반드시 말하기를, ‘마땅히 선군(船軍)을 영솔(領率)해야 한다.’고 하니, 신 등은 항상 간절히 마음아파합니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내가 대비(對備)한 것이 있음을 믿으라.’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남방(南方)은 항상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항상 왜노(倭奴)의 도둑질이 발생할 것 같이 하여, 병선을 가히 사용하지 못할 곳에 두지 말며, 선군(船軍)을 당연히 노고(勞苦)하지 않을 곳에 노역시키지 마시고, 더욱 변방의 방비에 힘쓰게 하여 길이 치안(治安)을 도모하소서.

1. 만호(萬戶)라는 것은 장수(將帥)의 관직으로서 그 소임(所任)이 지극히 무거운 것인데, 재기(材器)가 가히 쓸 만한 자로써도 모두 나아가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어찌해서입니까? 대개 그 거지(居止)가 사람의 견딜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은 가옥(家屋)에서 나고 자라서, 주즙(舟楫)은 본래 천성에 맞는 것이 아닌데, 꼭 만호(萬戶)로 하여금 늘 배 안에만 있게 하니, 호걸(豪傑)의 선비가 그 선발(選拔)에 나오지 않으려는 것이 당연합니다. 법(法)을 세우고서 아래에서 받들어 행하지 아니하면 그 법을 시행하는 것이 모두 구차할 따름입니다. 지금의 만호들은 예사로 배에서 거처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저사(邸舍)를 지어 침식(寢息)을 편히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법에 어긋난 줄을 알므로, 두려워하며 오직 군졸(軍卒)의 고알(告訐)이나 감사(監司)의 적발(摘發)을 겁내어 날로 군하(群下)와 더불어 같은 마음으로 잘못을 가리어 덮고 있으니, 어느 여가에 군령(軍令)을 엄하게 하여 그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법을 제정(制定)함에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봉공(奉公)함에 있어서 바른 대로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만호가 방어(防禦)하는 장소에 여사(廬舍)를 설치하도록 허락하여, 상시(常時)로 비록 배에 있지 않더라도 군사(軍士) 사항을 빠뜨리지 않게 하고 호령을 잃지 않게 하여 행선(行船)과 습전(習戰)과 비어(備禦)에 소양(素養)이 있는 자는 상(賞)을 주고, 이와 반대되는 자는 벌(罰)을 주며, 인하여 재기(材器)와 인망(人望)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포상하고 등용한다면 사람들이 등용되기를 즐겁게 여길 것이며, 장수를 임용하는 방법도 터득될 것입니다.

1. 바닷가의 백성들이 고기잡이로 업을 삼아 원도(遠島)와 절포(絶浦)에 깊이 들어가서 채포(採捕)954) 하게 되는데, 갑자기 왜인(倭人)을 만나게 되면, 사사로이 서로 다투다가 강약(强弱)의 승부로 살해(殺害)까지 하게 되니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 비록 상선(商船)이 지나가는 것을 진장(鎭將)이 점검(點檢)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이는 장사하는 배에만 행하는 것이고, 수령(守令)이나 만호(萬戶)가 경내(境內)의 백성에게 심상(尋常)히 여기는 데에 익숙해져서 금지를 가하지 않고 있다가 잘못되는 데 미쳐서도 또한 잘못을 숨기는 일이 많으니, 조정에서 어디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알겠습니까? 옛부터 변방에서 흔단이 발생하는 것은 커다란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범사(凡事)는 환란이 닥친 다음에 이를 도모하는 것보다는 환란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막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니, 근일 흥양(興陽)의 왜(倭)가 그 사단(事端)의 하나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변비(邊鄙)를 엄하게 신칙하여 무인 절도(無人絶島)에 함부로 들어가서 어렵(漁獵)하는 자는 수령이나 만호를 아울러서 경외(境外)로 탈출하는 데 관한 율(律)로써 죄주게 하소서.

1. 삼포(三浦)에 늘 살고 있는 왜인(倭人)이 변민(邊民)과 더불어 교통하여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습관화되어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전해 들으니 왜인들이 재빠르게 포구(浦口) 가까운 주현(州縣)의 땅에 들어와서 거민(居民)들과 더불어 지나치게 사음(私淫)한다 하니, 심히 족류(族類)를 분별하고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또 걸할(傑黠)955) 한 자가 있어서 곡식을 저축하여 이식(利息)을 붙여 장리(長利)라고 하는데, 우리 백성들이 가난하므로 따라서 빌어 썼다가 오래 쌓이어 갚지 못하면 전토(田土)를 전당잡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왜인은 그 이(利)를 먹고, 우리 백성은 그 세(稅)를 대납하게 되니, 왜인은 날로 부(富)해지고, 우리 백성은 날로 가난해져서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합니다. 군현(郡縣)의 정치가 왜인에게 미치지 못하여 수령(守令)이 비록 안다고 하더라도 요량하여 처리하지를 못하니, 인순(因循)하고 구차(苟且)하게 여겨 일찍이 제약(制約)하지 않고 침점(浸漸)함이 날로 넓어져서 형세가 장차 금하기 어려울 때 하루 아침에 갑자기 고치려 하면 불화(不和)가 반드시 생길 것이니, 진실로 영구히 서로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닐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조약(條約)을 엄하게 세우고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금방(禁防)을 엄격히 하여 번져감을 막고 미세(微細)할 때 없애어서 변환(邊患)을 그치게 하소서.

1. 경상도(慶尙道) 조세(租稅) 수입의 태반(太半)은 왜인을 응접하는 비용에 소모되므로 바닷가 여러 고을의 창름(倉廩)이 일제히 비게 되어서 지금은 상도(上道) 주현(州縣)의 쌀을 옮겨서 모자라는 것에 보충합니다. 왜료(倭料)라면 그냥 충분한데 군자(軍資) 같은 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먼저 자국(自國)부터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현의 저축을 비워가면서 왜인의 욕구(欲求)를 채워주고 안연(晏然)하게 태평 백년의 평안을 보존하려는 것이 어찌 소홀하지 않겠습니까? 근자에는 조정에서도 또한 그 폐단을 염려하여 조세의 수량을 반으로 나누어 주(州)에다 유치(留置)해 주도록 하였으나, 창름이 비어 있는 것은 예와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바닷가의 여러 고을 및 수로(水路)로 통행하여 가히 실어 나를 만한 여러 고을의 전세(田稅) 미곡(米穀)을 수년(數年)만 한정하여 상납(上納)하지 말고 모두 주창(州倉)에 실어다 놓고 군수(軍需)에 충당하게 하고 왜료에도 보충하게 하여, 주현으로 하여금 족히 스스로 보전하게 하여, 관곡(館穀)이 궤핍(匱乏)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1. 모든 위(衛)의 장수(將帥)의 직분은 반드시 위령(威靈)이 있어야 족히 사졸(士卒)을 복종시키고 지략(智略)이 있어야 족히 사변(事變)에 적응을 합니다. 그리하여 평거(平居)에는 궁내(宮內)에서 숙위(宿衛)하고, 일이 있으면 곤외(閫外)956) 에서 절충(折衝)하게 하며, 임명할 때는 반드시 그 재주에 맞게 하고, 양성할 때는 반드시 그 소질(素質)대로 한 연후에야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치는 의리와 제몸을 잊고 나라에 순직(殉職)하는 정성을 책임질 것입니다. 지금 장수의 책임을 맡은 자가 과연 모두 장수의 재목에 합당하겠습니까? 명령을 병과(兵戈)의 즈음에서 받고 승리를 이로(夷虜)의 장소에서 결단할 이가 몇 사람이 있겠습니까? 충신(忠信)한 이에게 녹(祿)을 무겁게 하는 것은 선비를 권장하는 소이인데, 조정에서 미리 그 사람을 가려서 직위(職位)를 맡기고 녹봉(祿俸)으로 기르지 아니하고, 일에 다다라 이를 한산(閑散)한 하류(下流)에서 구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사력(死力)을 얻으며, 그것으로 원방(怨謗)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진념하시어, 참으로 경외(境外)의 일을 맡을 만한 재략이 있는 자를 얻어서 군사를 거느리는 상관(上官)으로 삼아서 성실과 신의로써 대우하고 넉넉한 녹봉으로써 기르시면, 장사(將士)의 마음을 잃지 않고 완급(緩急)의 효용(効用)에 대비하게 될 것입니다.

위 건(件) 일의 조목은 모두 이것이 국론(國論)의 실마리에서 나왔으며 도로(道路)에서 전해 들은 것이고, 간혹 개인의 견해를 말한 것도 있사온데, 비록 감히 다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또한 감히 스스로 쓸데없다고 생각지는 아니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범상(泛常)한 것으로써 소홀히 보지 마시고, 외쇄(猥瑣)한 것이라 하여 그저 버리지 않으신다면, 근본을 굳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도리와 적(敵)을 제어하고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에 반드시 조금의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제 남과 북의 형세(形勢)가 모두 강한 적들입니다. 그러나 피차(彼此)를 비교하여 헤아려 보면 남쪽이 더 중합니다. 북쪽은 산천이 험조(險阻)하고 적로(賊路)의 수(數)가 있지마는 남쪽은 바다의 포구(浦口)가 산만(散漫)하여 적로(賊路)의 수가 없습니다. 북쪽은 변진(邊鎭)이 부유(富裕)하고 충실(充實)하며 병력(兵力)도 제법 정예(精銳)한데, 남쪽은 군졸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북쪽은 거민(居民)들이 강한(强悍)하고 군사에 익숙하여 설사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놀라고 소요하지 않을 것이지마는 남쪽 사람들의 성질은 유약(柔弱)한데다가 군려(軍旅)를 익히지 아니하여 쉽게 꺾이고 패할 것입니다. 또 북쪽은 변방 고을들이 으레 모두 겹쳐 들어가 있으므로, 적이 오더라도 처음에는 뜻을 얻지 못할 것이지마는, 남쪽은 인가가 서로 접해 있고 사람과 물자가 야지(野地)에 널려 있으므로, 적이 온다면 형세가 반드시 이(利)를 얻을 것이고, 한번 형세를 타게 되면 뒤에 장차 금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틀이니, 이를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정신을 유의하여 주옵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다 가납(嘉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4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59면
  • 【분류】
    역사-전사(前史)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교육(敎育) / 농업(農業) / 교통(交通) / 금융-식리(殖利)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법제(法制) / 호구-이동(移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수산업-어업(漁業)

  • [註 927]
    비(否) : 불운한 일, 또는 막히는 일.
  • [註 928]
    태(泰) : 행운, 또는 통하는 일.
  • [註 929]
    세자(世子) : 뒤의 충렬왕.
  • [註 930]
    상주(尙主) : 공주(公主)를 아내로 삼음.
  • [註 931]
    복황지계(復隍之戒) : 성의 둘레에 해자(垓字)를 파서 그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무너져서 흙이 해자로 도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진 뒤에는 난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함.
  • [註 932]
    요도(瑤圖) : 아름다운 계획.
  • [註 933]
    도충(桃蟲) : 뱁새.
  • [註 934]
    화연(譁然) : 시끄러운 모양.
  • [註 935]
    첩연(帖然) : 침착하여 편안한 모습.
  • [註 936]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937]
    괘오(詿誤) : 남을 속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함.
  • [註 938]
    공차(公差) : 관(官)이나 궁가(宮家)에서 파견되는 관원이나 사자(使者)를 말함.
  • [註 939]
    양수척(揚水尺) : 무자리.
  • [註 940]
    참포(站舖) : 역참(驛站)과 점포(店鋪).
  • [註 941]
    적자(赤子) : 백성.
  • [註 942]
    보오(堡伍) : 보루(堡壘)와 대오(隊伍).
  • [註 943]
    정해 : 1467 세조 13년.
  • [註 944]
    유병(留兵) : 유방 정병(留防正兵).
  • [註 945]
    구자(口子) : 변방 국경 지대인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있는 요해지에 군사 시설을 갖춘 작은 관방(關防)을 말함.
  • [註 946]
    안자(鞍子) : 말 안장.
  • [註 947]
    두석(豆錫) : 놋쇠.
  • [註 948]
    빈마(牝馬) : 암말.
  • [註 949]
    모마(牡馬) : 숫말.
  • [註 950]
    경이(耕犂) : 경작(耕作).
  • [註 951]
    몽예(蒙翳) : 수목으로 덮이어 있음.
  • [註 952]
    협순(浹旬) : 열흘.
  • [註 953]
    구학(溝壑) : 구렁텅이.
  • [註 954]
    채포(採捕) : 어로 작업.
  • [註 955]
    걸할(傑黠) : 교활(巧黠).
  • [註 956]
    곤외(閫外) : 도성 밖.

○司憲府大司憲李恕長等上疏曰:

自古天下之勢, 一治一亂, 否極則泰來, 泰極則復爲否, 理之必然。 姑以我國之事言之, 三國以前, 分崩離析, 自相雄長, 日尋干戈, 其亂極矣。 高麗太祖東征西討, 十有八年而新羅投降, 又一年而百濟削平, 三國之地, 合而爲一, 境內乂安。 歷七十四年, 而有契丹之兵, 顯宗南遷, 京城遂陷, 僅得興復。 又九十四年, 而東蕃擾邊, 肅宗睿宗相繼致討, 雖置九城, 後復不守, 戰爭之苦, 數年乃息。 又百有七年, 而有金山金始之兵, 高宗趙冲金就礪, 與蒙古合兵攻滅。 自是蒙古之兵侵軼我疆, 南至于尙州, 又南至于羅州, 東民糜爛, 莫敢誰何, 如行無人之地。 四十餘年國非其國, 及元宗親朝, 以世子尙主然後稍定。 又九十一年, 而倭人始寇, 九年而紅賊大至, 恭愍王又南遷, 經年乃還。 厥後軍旅歲興, 寇賊日滋, 生民之類, 蕩無孑遺, 凡三十三年。 而我太祖應運開國, 向之梗化之醜, 望風款附, 列聖相承, 重熙累洽, 八十餘年方宇寧謐, 生民老死不識兵革, 可謂太平之極矣。 當泰之時, 復隍之戒, 不可不謹, 世祖大王深惟往古, 超然獨見, 留心武備, 一則曰整軍籍, 一則曰治軍旅。 十四年間張皇克詰, 罔有遺漏, 殿下躬承大統, 手握瑤圖, 豈可以久安之俗, 行姑息之政, 忘陰雨之備, 忽桃蟲之患乎? 軍籍、軍器等事, 皆世祖建立之法, 民無遠慮, 苟安目前, 法之初行, 豈無譁然? 歲月旣久, 勢必帖然, 因而守之, 可以永安, 若從民言, 隨手變更, 後將復用, 其又奈何? 此在殿下斟酌而固執之耳。 其他固本恤民之道, 制敵備邊之策, 僅將管見條陳于後。 一, 永安道我國根本之地。 祖宗陵寢所在, 太祖龍興肇基於此。 其民强悍愚直, 有事則易動以利, 丁亥之事是已。 一, 爲施愛詿誤, 擧道響應, 當其時, 兵威所過, 醜類克殲, 殘民驚駭, 尙未寧定, 每遇公差, 自相繹騷, 徒懾威靈, 未沾恩澤, 民心燥燥, 誠非久安之道。 伏望殿下軫念, 撫循遺民, 示以懷綏。 或減田租, 或蠲貢物, 務悅其心, 以安遠俗, 以固邦本。 一, 永安之俗, 舊稱無盜, 外戶不閉, 牛畜布野, 今則盜賊盛行, 人心日漓, 究求其端, 蓋亦有漸。 本道經亂以來, 謀其所以實之, 則凡有罪應, 流若盜賊者, 宰殺牛馬者, 皆歸之, 是猶驅虎狼而入羊群也。 盜安得不爲盜. 宰殺者豈不便於宰殺乎? 愚民相扇, 漸漬日習, 以强悍之俗, 兼狡獪之盜, 豈不爲朝廷他日之慮乎? 昔高麗時, 兵來侵, 楊水尺皆爲鄕導, 其害頗甚, 異日倘有邊警, 如此之徒, 寧不爲虞? 議者不此之察, 每有罪徙者, 必擬兩界, 此臣之所寒心也。 伏望殿下軫念, 自今犯罪凶悍無賴之徒, 勿令徙入以益其勢, 以變其俗。 一, 平安道鴨綠江爲界, 野人之境, 置鎭列戍, 隄防有備, 中朝之界, 漫無障塞, 江氷若合, 坦若平地, 甚非固國封疆之義。 目今中朝新置站鋪, 遼東之間, 人家漸盛, 靉陽鋪朔州一日程, 而刺楡寨之人, 皆是本國舊民, 言語無辨, 可以相通。 加又中朝之民, 身役甚閒, 而我國之民, 本道甚苦。 一則困於防戍之往來, 二則疲於使臣之迎送, 齊民破産, 莫敢聊生。 傳聞中朝一路, 舊無鍮器, 盥洗率用木造, 今則所過站驛, 多有鍮器。 問之館人, 答云: "鍮工見居近地, 爲此器。" 臣等竊恐, 本國逃賦之民, 潛徙而有此事也, 邊圉不固, 戶籍不明, 所以敎民逃也。 思之至此, 竊自寒心。 伏望殿下軫念, 嚴勅守令, 益勤懷撫, 務收其心, 少寬其力。 仍明戶籍之法, 春秋考校, 老者弱者皆得籍錄, 飢者賑以示恩, 則庶幾不失赤子之心, 更無流徙之患矣。 一, 兩界主鎭衙前, 節度使率多自占, 以備使令, 而監司不能檢其事, 守令不能違其令, 固已不合於《大典》之數, 又其民卒常苦於疊入。 一爲衙前, 必求營農, 散出城外, 以便水草, 一則城中人戶日就凋耗, 軍卒戍禦虛疏, 二則出城而散居無保伍, 寇虜猝至, 必遺之擒, 其爲弊豈不多哉? 伏望殿下軫念, 嚴加戒諭, 一則不得數外加占, 二則不得城外放出, 違者以軍法從事。 一, 丁亥之亂, 康孝文以一節度使覆沒, 施愛假其名以令, 咸興迤北靡然從逆, 朝廷懲之, 遂分南、北道, 置二節度, 所以分其權, 使相制也。 事定之後, 已經八年, 無大奸寇, 而南道節度使徒擁兵馬, 徒費廩祿, 率其妻孥, 安坐內地, 其爲虛設, 不言可知。 借曰: "南道防戍甲山三水", 然相距三日程, 緩急胡可待也? 一節度之置, 似若無害於事, 然有軍官焉, 有衙前焉, 有留兵焉, 物色萃於內地而邊防虛矣, 供給周於郡縣而費耗廣矣。 減戍禦之兵, 損軍資之儲, 養之於無用之地, 豈非大害也? 伏望殿下軫念, 亟罷南道節度使, 兼治軍政, 以其留兵移屬諸鎭緊切處, 益固邊圉。

一, 吉州全盛之時, 人物繁盛, 氣力有餘, 所屬三口子, 若西北斜下北斜麻洞, 雖當賊路要衝, 聲勢相倚, 防戍稍實, 今分吉州吉城明川, 土地人民各有其半, 而防禦之所, 則吉城西北斜下北兩口子, 明川斜麻洞一口子。 吉城以一縣之力, 分戍二處, 物力寡弱, 防禦之勢, 甚爲孤單, 倘有寇賊, 實深憂危。 伏望殿下軫念, 西北斜下北二口子, 量加軍卒, 益嚴隄備, 吉城縣監必擇有武才者差遣, 使相救助, 以弭未然之患。 一, 《大典》內, ‘各司書吏, 以諸邑校生年壯才疏者充補。’ 設鄕校儲養人材, 欲其明經修行以備經邦之用, 而必取書吏於此, 固非養士氣重儒術之道。 且永安道濟州皆有子弟入仕之路, 受職受祿各自有科, 所以綏遠人也。 今乃一槪徵歲貢、書吏於兩界及濟州三邑, 豈不開怨懟之懷也? 近有五鎭與濟州歲貢吏投狀申訴, 亦其驗也。 一則擾人心, 二則損邊民, 量其事體, 有甚不可。 伏望殿下軫念, 特令兩界邊邑及濟州三邑, 不許歲貢生徒, 以除贏糧受役之弊, 以示重邊綏遠之體。 一, 舊例野人賜給, 不以器具, 如鞍子粧飾, 亦用豆錫, 蓋不欲以兵器資敵, 祖宗慮患之意深矣。 《大典》內, ‘潛賣禁物, 如鐵物、牛馬、軍器之類, 犯者罪死’, 法非不嚴也, 近者邊郡守令慢不奉法, 換易毛物, 必於彼人而惟鐵物是售。 以衣服不緊之具, 換軍國有用之器, 固爲不可, 況以兵刃輸敵手乎? 傳聞野人舊無鐵箭, 率用骨鏃, 今則至有以鐵爲甲者, 其爲害豈不明甚? 伏望殿下軫念, 嚴勅邊將, 申諭法意, 犯者痛懲不饒, 軍民有犯, 竝坐主者, 以申邊禁, 毋爲虎傳翼。 一, 野人之來境上和市者, 必求牝牛牝馬, 邊民與守令多用之, 以便換易, 所得不過毛皮與牡馬耳。 人心狃安, 苟且目前, 以孶息之畜與敵, 豈不爲其所賣也? 毛皮不可騎, 牡馬絶字乳, 其於軍國之政, 豈不有虧而貽久遠之患乎? 伏望殿下軫念, 申嚴禁制, 與兵鐵一例施行。 一, 五鎭會寧鍾城穩城慶源慶興人物阜盛, 田地窄狹, 耕犂所及至於山頂, 未有蒙翳之地, 安有如貂鼠、土豹之類哉? 然於貢物, 歲有常數, 此則專用貿得於野人也。 常貢不可闕而野人乘時以邀善價, 此兵鐵與牝畜之所以流出塞外也, 欲止其流, 先塞其源。 伏望殿下軫念, 五鎭不産之毛物, 特命蠲除, 以嚴禁令。 一, 野人給祿非舊例也。 其初出於一時之權宜, 浸成格例。 堂上官受職者間有援請, 常賜之外, 又受祿俸, 勢不可載穀而還, 必緣族類之向化來居者, 私通買賣, 無物不取, 駄運之際, 驛路之弊, 不可勝言, 況歲月旣久, 習熟尋常, 上下相安, 莫爲防禁。 臣等竊恐, 乍臣而受祿者益多, 因祿而爲奸者漸生, 國之利器, 將爲敵人所資。 伏望殿下軫念, 深惟遠圖, 勿給祿俸以防其弊。 一, 國家三面距海, 防禦之備, 必仗舟楫, 今各浦兵船實甚虛疏。 此久安之常態也, 不振起更張, 終至於怠惰, 委靡而遺患, 不可言矣。 加又造船之板, 必用松木, 而其養成材, 必百年而後可用。 今聞漕船之材, 邊山之松已盡, 而移於莞島, 莞島若盡, 又將何歸? 舊稱江原一道材木淵藪, 今亦將盡, 若不禁制, 數年之後, 必無中船之材矣。 謹按末, 內臣戎帥競治亭館第宅, 時號木妖, 初官禁私販秦隴大木, 比事以觀, 豈非山林之材盡耗於末第舍之奢侈, 故不得不爲宋初之大禁也? 伏望殿下軫念, 嚴家舍之制, 杜奢侈之習, 以申山林之禁, 毋使材木殫焉, 以儲舟船之用。 一, 沿海邑城多不修築, 內地山城亦皆廢墜, 平安一路淸川江以西諸邑, 蕩無堡障。 謹按《春秋傳》, ‘城惡, 楚人伐之, 浹旬之間, 克其三城。’ 傳者譏其無備。 昇平之時, 因循苟且慢易而不爲, 有事之後, 奔走疲勞, 傾毁而不及, 此有國之常患也。 《詩》云, ‘迨天之未陰雨, 撤彼桑土, 綢繆牖戶, 今此下民或敢侮予?’ 伏望殿下軫念, 令諸道觀察使審量, 今年築一城, 明年築一城, 漸次營建, 庶幾役不煩重而城守永固。 一, 全羅諸浦當春夏轉運之時, 漕船不足, 補以兵船, 往還之間, 動經旬月, 是在浦留防之日少, 出浦移使之時多也。 無事則已, 有事則奈何? 一處傾潰, 寇逬溢, 南民久安, 孰能枝梧? 士民奔波, 立顚溝壑, 當此之時, 雖有智者, 不能爲之謀矣。 議者不此之察, 苟玩目前之無事, 不徒兵船之移用, 國家大役則必曰: "當領船軍", 臣等常切疚心。 《兵法》曰: "毋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之。" 伏望殿下軫念, 勿以南方爲恒安, 常若奴之竊發, 毋置兵船於不可用之處, 毋役船軍於不當勞之地, 益勤邊防, 永圖治安。 一, 萬戶者, 將帥之職, 其任至重, 而材器可用者, 皆不屑就何歟? 蓋其居止非人所堪也。 凡人生長室屋, 舟楫本非所性, 必使萬戶長在船中, 宜乎豪傑之士不出其選也。 立法而下不奉行, 則其爲法也皆苟而已矣。

今之萬戶, 例不舟居, 私營邸舍, 以便寢息, 自知非法, 惴惴焉, 惟恐軍卒之告訐, 監司之發擿, 日與群下同心掩覆, 何暇嚴軍令盡其職乎? 此無他制法不得其宜, 奉公難於守正也。 伏望殿下軫念, 萬戶防禦之所, 許置廬舍, 常時雖不在船, 軍士無闕, 號令不失, 行船、習戰、備禦有素者有賞, 反此者有罰, 因選有材器人望者, 褒而用之, 庶幾人樂爲用, 而任將之道得矣。 一, 沿海之民, 以漁釣爲業, 遠島絶浦深入採捕, 猝遇倭人, 私相喧鬨, 强弱勝負以至殺害, 其來久矣。 雖有商船所過, 鎭將點檢之法, 此則行於商賈之船也, 守令ㆍ萬戶於境內之民, 狃於尋常, 不加禁戢, 及其違誤, 又多匿過, 朝廷何由知之? 自古邊釁之生, 不在於大。 凡事患至而圖之, 不若防患於未然, 近日興陽, 卽其事端之一也。 伏望殿下軫念, 嚴勅邊鄙, 其擅入無人絶島漁獵者, 幷守令、萬戶, 以出境外之律罪之。 一, 三浦恒居倭人與邊民交通, 歲月旣久, 狎習不忌。 傳聞, 倭人駸駸至於近浦州縣之地, 與居民過從私淫者, 甚非所以辨族類嚴內外也。 又有桀黠者, 貯穀出息以爲長利, 吾民貧乏, 從而假貸, 積久不償, 典以田土。 於是倭人食其利, 我民代其稅, 倭人日富, 我民日貧, 其弊有不可勝言者。 郡縣之政, 不及倭人, 守令雖知, 莫爲料理, 因循苟且, 不早制約, 浸漸日廣, 勢將難禁, 一朝頓革, 釁隙必生, 誠非永久相安之道。 伏望殿下軫念, 嚴立條約, 令州縣深加禁防, 杜漸塞微, 以弭邊患。 一, 慶尙道租稅之入太半, 耗於應接倭人之費, 沿海諸邑倉廩一空, 今則移上道州縣之米, 以補其闕。 料則苟完矣, 其如軍資何? 爲國之道, 當先自治。 空州縣之儲, 以奉倭人之欲, 晏然欲保太平百年之安, 豈不疏哉? 近者朝廷亦慮其弊, 租稅之數, 分半留州, 倉廩之空猶古也。 伏望殿下軫念, 沿海諸邑及水路通行, 可以漕運諸邑田稅米穀, 限數年勿令上納, 悉輸州倉, 以充軍需, 以補料, 使州縣足以自保, 而館穀不至於匱乏。 一, 諸衛將帥之職, 必得威靈, 足以服士卒, 智略足以應事變。 平居則宿衛宮內, 有事則折衝閫外, 任之必當其才, 養之必有其素, 然後可以責見危授命之義, 忘身(絢)〔殉〕 國之誠矣。 今之任將帥之責者, 果皆稱將帥之才歟? 受命於兵戈之際, 決勝於夷虜之場, 有幾人哉?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朝廷不預擇其人, 任之以位, 養之以祿, 而臨事求之於閑散下流, 其能得其死力乎? 其能弭怨謗乎? 伏望殿下軫念, 誠得有才略可以任境外之事者, 爲將兵之官, 忠信以待之, 優祿以養之, 無失將士之心, 以備緩急之用。 右件事條, 率是出於國論之緖餘, 得於道路之傳聞, 而間有臆見之說, 雖未敢盡謂之必然, 亦不敢自以爲無用也。 願殿下勿以泛常而見忽, 勿以猥瑣而是遺, 則其於固本恤民之道, 制敵備邊之策, 未必無少補也。 且今南北之勢, 皆是勍敵。 然校量彼此, 南方爲重。 北方山川險阻, 賊路有數, 南方海浦散漫, 賊路無數。 北方邊鎭富實, 兵力稍精, 南方軍卒, 無一可恃。 北方居民强悍習兵, 縱令有事, 不甚驚擾, 南方人性柔弱, 不習軍旅, 易爲摧敗。 北方邊郡例皆疊入, 賊來初不得志, 南方烟火相接, 人物布野, 賊來勢必獲利, 一爲所乘, 後將難禁。 此誠治亂安危之機, 不可不爲之圖也。 伏惟殿下留神焉。

上皆嘉納。


  • 【태백산사고본】 7책 4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9책 159면
  • 【분류】
    역사-전사(前史)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교육(敎育) / 농업(農業) / 교통(交通) / 금융-식리(殖利)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법제(法制) / 호구-이동(移動)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수산업-어업(漁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