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혜 왕후의 장례를 치르다
신시(申時)에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재궁(梓宮)이 현궁(玄宮)348) 에 내리니 입주전(入主奠)349) 을 거행하고, 반우(返虞)350) 뒤에 안릉전(安陵奠)351) 을 거행하였다.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왕후 한씨는 서원(西原)352) 의 대계(大系)이다. 원조(遠祖) 한난(韓蘭)은 고려 때에 책훈(策勳)되어 저명하였고, 황증조(皇曾祖) 한상덕(韓尙德)은 자헌 대부(資憲大夫) 도평의사사사 예문 춘추관 태학사(都評議使司事藝文春秋館太學士)의 벼슬에 이르고 문렬(文烈)로 증시(贈諡)되었으며, 황조(皇祖) 한기(韓起)는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기가 예문 응교(藝文應敎) 이적(李逖)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금의 수충 위사 협책 정난 동덕 좌익 보사 병기 정난 익대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겸 영경연춘추관사 병조 판서(兼領經筵春秋館事兵曺判書)인 한명회(韓明澮)를 낳았고, 한명회가 지금 여흥 부부인(驪興府夫仁)으로 봉작(封爵)된 민씨(閔氏),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대생(閔大生)의 딸에게 장가 들어, 경태(景泰)353) 7년354) 10월 11일(정미)에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왕후를 낳았다.
왕후께서는 나면서 총예(聰睿)가 남달랐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懿醇)하며 숙경(肅敬)하셨다. 성화(成化)355) 3년356) 에 세조(世祖)께서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를 자산군(者山君)으로 봉(封)하고 배필을 가리실 때에 뜻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께서 덕용(德容)을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시어, 그해 정월 12일에 예를 갖추어 그 집에서 친영(親迎)할 때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에게 혼사를 주관하게 하여 예를 이루었다. 왕후께서 들어와 뵈매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애중(愛重)하셨다. 그때 왕후께서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老成)한 사람처럼 엄전하셨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敬謹)하기가 갈수록 지극하시니, 이 때문에 권우(眷遇)가 날로 더해 갔다. 상(上)께서 천조(踐祚)357) 하시어 왕비로 책봉(冊封)되셔서는 더욱 스스로 경외(敬畏)하여 삼전(三殿)358) 을 극진한 효도로 받들어, 매양 진기한 것을 구하여 반드시 맛있는 것을 갖추어서 바치되 오래 되어도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며, 후궁(後宮)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대범하여 중도(中道)에 맞으셨으며, 양로(養老)·세원(歲元)359) 같은 내전(內殿)의 예연(禮燕)의 의도(儀度)에도 모두 규구(規矩)에 맞으셨으므로, 궁중(宮中)이 다 바라 보고 찬복(贊服)하였다. 서사(書史)에 뜻을 두고 여전(女傳) 같은 것을 읽는 일을 일과(日課)로 삼으셨다. 왕후께서는 장차 빈어(嬪御)360) 를 뽑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극히 정려(精麗)하게 장만해 두었다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내리시고, 그 뒤로는 복식(服飾)·패완(佩玩)361) 을 끊임 없이 내려 주고 은례로 대우하여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계사년362) 7월에 왕후께서 병환으로 한명회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시니, 상께서 하루 걸려 거둥하여 애써 약을 드리도록 이르셨다. 병환이 나아 궁으로 돌아오셨으나 12월에 병환이 도지시니, 왕후께서 증세가 낫기 어려움을 여러 번 아뢰고 하루아침에 불숙(不淑)363) 이 오게 될까 참으로 염려하여 별전(別殿)에 나가려고 원하는 뜻이 간절하시므로, 갑오년 3월에 구현전(求賢殿)으로 옮겨 거처하도록 명하고 상과 삼전(三殿)께서 날마다 거둥하여 보살피시고 종묘(宗廟)·사직(社稷)과 뭇 사(祠)에 기도하고 또 대사(大赦)를 내렸다. 상께서 한명회에게 명하여 부인과 함께 때때로 들어와 병환을 돌보게 하였는데, 왕후께서 훙서(薨逝)하기에 임박하여, 한명회와 부인이 여러 날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명하여 밥을 먹게 하고, 더불어 결별(訣別)하여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삼전(三殿)을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하시고 드디어 훙서하시니, 이날이 4월 15일(기사)이었다.
전하께서 양좌(良佐)를 잃었음을 애통하시고 삼전께서도 슬퍼 목메시어 며칠 동안 음식을 폐하셨고, 궁액(宮掖)의 시어(侍御)와 중외(中外)의 모든 신료(臣僚)가 누구나 다 호곡(號哭)하였다. 상께서 뭇 신하에게 명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하게 하여 시호를 내려 공혜(恭惠)라 하였고, 6월 7일(경신)에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동쪽 을산(乙山)의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하여 순릉(順陵)이라 하였다. 왕후께서는 덕성(德性)의 아름다움을 천부(天賦)로 받으셨으므로, 내치(內治)를 잘 주관하여 궁위(宮闈)가 엄숙하고 화목하였으며, 위로 자극(慈極)364) 을 받들면 삼전께서 서로 기뻐하셨으며, 지존(至尊)을 내찬(內贊)하면 일국(一國)이 교화에 승순(承順)하였다. 예전부터 어진 후비(后妃)를 만나기 어려운데, 천명에 분수가 있어 수명을 오래 누리지 못하시니, 신민(臣民)으로서 슬퍼하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4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11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348]현궁(玄宮) : 재궁을 묻는 광중(壙中).
- [註 349]
입주전(入主奠) : 새로 신주(神主)를 만들어 모시고서 올리는 제전(祭奠)을 말함.- [註 350]
반우(返虞) : 장사를 치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말함. 반혼(返魂).- [註 351]
안릉전(安陵奠) : 임금 또는 왕비의 장례(葬禮) 때에, 매장이 끝난 뒤에 제물을 차려 지내는 제전을 말함.- [註 352]
서원(西原) : 청주(淸州)의 옛 이름.- [註 353]
경태(景泰) : 명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註 354]
7년 : 1456 세조 2년.- [註 355]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註 356]
3년 : 1467 세조 13년.- [註 357]
천조(踐祚) : 즉위.- [註 358]
삼전(三殿) : 정희 왕후(貞熹王后:세조의 비) 윤씨(尹氏)·소혜 왕후(昭惠王后:덕종의 비) 한씨(韓氏)·안순 왕후(安順王后:예종의 계비) 한씨(韓氏)를 말함.- [註 359]
세원(歲元) : 정초.- [註 360]
빈어(嬪御) : 후궁.- [註 361]
패완(佩玩) : 노리개.- [註 362]
○庚申/(甲)〔申〕 時, 恭惠王后梓宮下玄宮, 行立主奠, 返虞後, 行安陵奠。 其誌文曰:
王后韓氏, 西原大系。 遠祖蘭, 高麗時策勳著名, 皇曾祖尙德, 資憲大夫都評議司使[都評議使司] 事藝文春秋館大學士, 贈諡文烈, 皇祖起,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議政府領議政。 議政娶藝文應敎李逖之女, 生明澮, 今爲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上黨府院君兼領經筵春秋館事兵曹判書, 娶閔氏, 今封驪興府夫人, 知中樞府事《大生》之女, 以景泰七年丙子十月丁未, 生王后于蓮花坊私第。 后生而聰睿異常, 稍長溫懿而肅。 成化三年歲丁亥, 世祖封我主上殿下爲者山君, 爲之擇配, 無可意者, 知后有德容, 召見卽定婚, 以其年正月十二日, 備禮親迎于其第, 命永膺大君 琰主之, 禮成。 后入見, 言動中禮, 世祖與大王大妃愛而重之。 時后年幼, 而儼如老成, 常侍左右, 敬謹愈至, 由是眷遇日隆。 及上踐祚, 冊爲王妃, 益自敬畏, 奉三殿盡孝, 每求珍異, 必具甘旨以進, 久而不懈。 待後宮, 寬簡得中, 如養老、歲元, 內殿禮燕儀度, 悉合規矩, 宮中瞻望贊服。 留神書史, 讀女傳之類, 逐日爲課。 后聞將選嬪御, 備衣服極其精麗, 待入以賜, 自後服飾佩玩, 賜與不絶, 遇以恩禮, 無纖芥嫌色。 癸巳七月, 后以疾, 移御韓明澮第, 上間日臨幸, 諭勉服餌。 疾愈還宮, 十二月疾復, 后累陳證勢沈緜, 誠恐一朝奄至不淑, 願出別殿, 辭旨懇款, 甲午三月, 命移御求賢殿, 上與三殿, 日賜臨視, 禱于宗、社、群祀, 又爲之大赦。 上命明澮, 與夫人時入視疾, 后臨薨, 見明澮與夫人累日不食, 命饋飯, 與訣曰: ‘死生有命, 但恨永違三殿, 爲孝不終, 以貽父母憂耳。’ 遂薨, 四月己巳也。 殿下痛失良佐, 三殿亦悲咽, 輟膳數日, 宮掖侍御曁中外大小臣僚, 莫不號哭。 上命群臣議諡, 賜諡曰 ‘恭惠。’ 六月庚申, 葬于坡州 恭陵之東, 乙山卯坐酉向之原, 號曰 ‘順陵。’后德性之美, 鍾於天賦, 故克主陰治, 宮闈肅穆, 上奉慈極, 則三殿交歡, 內贊至尊, 則一國承化。 自古后妃之賢, 鮮有儷者, 獨其大命有數, 享壽不永, 臣民罔不悲憾云。
- 【태백산사고본】 6책 4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11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