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의 의견에 따라 성균관 대사성에 행 사과 강노를 임명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헌납(獻納) 윤현손(尹顯孫)이 아뢰기를,
"송익손(宋益孫)은 재물을 탐하는 것이 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파직(罷職)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또 서임(敍任)을 명하니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하고, 지평(持平)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고려말에 사풍(士風)이 크게 무너졌었는데, 우리 태조(太祖) 때부터 세종(世宗) 때에 이르기까지에 사풍이 다시 떨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조조(世祖朝) 이후로 탕연(蕩然)하게 기강(紀綱)이 없어져서, 대신으로서 탐오(貪汚)하고 절제가 없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송익손(宋益孫)은 양민(良民)을 숨기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꺼림이 없으니, 이러한 조짐을 키울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직(職)을 파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영사(領事)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옛날에 현관(賢關)이라 일컬었으며, 진신(縉紳)163) 의 선비가 모두 여기를 거쳐 나왔습니다. 마땅히 나이가 높고 덕망(德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교양(敎養)을 맡겨야 합니다. 전일 대사성(大司成) 이육(李陸)이 제생(諸生)에게 무시를 당하는 바가 되었는데, 이는 여러 학생을 복종시킬 만한 덕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사성(大司成) 한언(韓堰)도 또한 대간(臺諫)의 말로 인연하여 갈게 하였으니 청컨대 학문(學問)과 명망(名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조(銓曹)164) 에 명하여 육조 참의(六曹參議)와 서로 바꾸게 하였다."
하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육조 참의 가운데 반드시 사유(師儒)가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반드시 참의(參議)와 바꾸게 합니까? 대저 문무(文武)는 어느 한쪽도 버릴 수가 없는데, 인주(人主)의 숭상하는 바로써 서로 성(盛)해지기도 하고 쇠(衰)해지기도 합니다. 세종(世宗)께서 유술(儒術)을 좋아하고 숭상하여 문교(文敎)가 크게 진작(振作)하였으며, 세조(世祖)께서는 뜻을 무(武)에 기울여서 학교(學校)가 침체하고 쇠퇴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유술을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인재(人材)가 점차 성(盛)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표(師表)를 가려서 인재(人材)를 교육(敎育)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기를,
"사표(師表)로 임명할 만한 자를 뽑아서 아뢰라."
하니 승정원에서 행 사과(行司果) 강로(姜老)를 추천하여 아뢰니, 곧 이조(吏曹)에 전교하여 강노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6책 4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9책 9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御經筵。 講訖, 獻納尹顯孫啓曰: "宋益孫貪饕無厭。 罷職未久, 又命敍之, 爲惡者, 何所憚乎?" 持平蔡壽啓曰: "高麗之季, 士風大壞, 自我太祖以至世宗, 士風復振。 世祖朝以後, 蕩然無紀, 大臣貪汚無節者多有之。 今益孫容隱良民, 恣行無忌, 漸不可長。 請罷其職。" 不聽。 領事申叔舟啓曰: "成均館, 古稱賢關, 縉紳之士, 皆由此出。 宜擇年尊德邵者, 以任敎養。 前日大司成李陸, 嘗爲諸生所謾, 無德望可以厭服故也。 今大司成韓堰, 亦因臺諫之言而遞之, 請擇有學問名望者代之。" 上曰: "已命銓曹, 以六曹參議相換矣。" 叔舟曰: "六曹參議, 未必有師儒, 何必以參議換之? 大抵文武不可偏廢, 而以人主所尙, 相爲隆替。 世宗雅尙儒術, 文敎大振, 世祖銳意用武, 而學校寢衰。 殿下崇儒重道, 人材漸盛, 當擇任師表, 敎育人才。" 上命承政院: "擇可任師表者以啓。" 承政院以行司果姜老擬啓, 卽傳吏曹, 以《老》爲大司成。
- 【태백산사고본】 6책 4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9책 9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