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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35권, 성종 4년 10월 2일 경신 2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대사간 정괄 등이 상소하여 불교·군사·의창·공역·언로·저화 등에 대해 논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상소는 이러하였다.

"신 등이 듣건대, 예로부터 수성(守成)763) 의 세대(世代)에는 흔히 즐겁게 놀고 편함에 빠져서 옛 업적을 떨어뜨리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진실로 사람의 심정은 오래 평안한 데에 습관되면 평상 상태를 지키기에 편하여 인순(因循)764) 하는 타성에 젖어서 고쳐 바꾸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뛰어나게 특별히 분발하여 쓰러진 것을 일으키고 해진 것을 기우는 조처를 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에 이룩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학문이 날로 진취하시어 바야흐로 장차 당우(唐虞) 삼대(三代)765) 로써 기대되는데, 그 초년의 정치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신(人臣)의 의리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세상을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 등이 언관(言官)에 몸담아 있으면서 매양 시위 소찬(尸位素餐)766)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감히 시무(時務) 아홉 조목을 가지고 천청(天聽)을 우러러 더럽히니, 전하께서는 재결하여 채택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1. 불씨(佛氏)767) 는 본래 오랑캐의 한 법으로,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알지 못하고, 농사 짓지 않고서 밥 먹고 누에 치지 않고서 옷 입으며, 그 인연(夤緣)768) 의 말로써 세상 사람을 미혹(迷惑)하게 하여 속이니, 바로 나라를 좀먹는 해충(害蟲)이므로 반드시 물리쳐 없애버린 뒤에야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깊이 그 해독을 통촉하시어 사사(寺社)의 노비(奴婢)와 전지(田地)를 모두 혁파(革罷)하고, 요사하고 더러움을 금(禁)하고 바른 도(道)를 밝히어, 국가 만세(萬世)를 위하는 생각이 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승도(僧徒)들이 점점 성하여지면서 횡포함이 더욱 심하여, 부력(富力)은 경상(卿相)769) 과 비등하고 세력은 능히 사람을 움직이는 자가 있으며, 저의 세력이 강함을 믿고 남의 제방[堤堰]을 빼앗는 자가 있으며, 민간에 드나들면서 음탕하고 방자하여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으며, 어물(魚物)과 소금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으며, 남의 아내나 첩을 빼앗는 자가 있으며, 남의 소송[詞訟]을 대신 맡아서 반드시 이긴다고 스스로 기약하는 자가 있으며, 떼를 지어 몽둥이를 가지고 수령(守令)을 위협하는 자가 있어서, 무릇 일이 중에 관계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감히 누구라고 말하지 못하니, 여기에 이르러 가위 마음이 아픕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옛 제왕(帝王)의 학문을 강구해 밝히시고 중정(中正)한 정치를 넓히시어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가 저절로 사라져 없어졌으나, 그 해가 되는 것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 여덟 가지 있습니다. 근래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서 국용(國用)이 넉넉하지 못하여 무릇 급하지 아니한 비용은 거의 다 줄었는데, 원각사(圓覺寺)·내불당(內佛堂)·복세암(福世菴)에 공급하는 수용(需用)은 아직 있으니, 그 하나입니다.

군사는 본래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것인데, 경중(京中)의 모든 절에서 정병(正兵)으로써 문을 파수(把守)하여 궁금(宮禁)과 비슷하니, 그 둘입니다.

강원도 한 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조세(租稅)의 수입이 매우 적어서 여러 고을의 군수곡(軍需穀)이 1백 석에 차지 못하여 진실로 우려될 만한데, 조세로 거둔 쌀을 모두 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 운반하여 이름을 ‘세헌(歲獻)’이라고 하므로 이는 한 도(道) 백성의 고혈(膏血)을 쓸데없는 중에게 버리는 것이니, 그 셋입니다.

경외(京外)의 사찰(寺刹)이 너무 많아서 있던 것을 더러 없앴는데, 요즈음 와서 절과 탑(塔)을 수리하거나 창건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어서 백성을 괴롭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니, 그 넷입니다.

역기(驛騎)는 사명(使命)을 통하고 변보(邊報)를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승도(僧徒)들의 왕래에도 역마를 타는 것을 허락하여 역로(驛路)를 수고롭게 하니, 그 다섯입니다.

청정 과욕(淸淨寡欲)은 그들의 도(道)인데, 큰 절의 세력 있는 중이 미곡(米穀)을 식리(殖利)로 늘려서 세력을 이용하고 기세를 부리어 평민을 침탈(侵奪)하니, 그 여섯입니다.

근래에 군(軍)에서 도망하고 부역(賦役)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자가 몇 천명 몇 만명이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군액(軍額)과 농민이 이로 인하여 감소하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많으니, 그 일곱입니다.

중의 아우나 조카로 용렬하고 못난 무리가 요행을 인연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퍼져서, 수령으로는 반드시 큰 고을이나 부유한 고을을 점령하고, 경관(京官)으로는 반드시 육조(六曹)의 청관(淸官)이나 요직(要職)을 얻어가지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직무는 게을리하고 백성을 못살게 하니, 그 여덟입니다.

무릇 이 여덟 가지 일은 모두 나라의 큰 폐단이니, 원컨대 이제부터 중에게 공급하는 비용을 없애고, 사찰에 문을 파수하는 군사를 없애며, 세헌(歲獻)하는 쌀을 없애고, 승족(僧族)의 벼슬을 파하며, 사찰을 창건하지 말고, 역마 타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중의 식화(殖貨)하는 것을 금하여, 모두 속공(屬公)시켜서 군수(軍需)에 보충하며, 나이가 40세 이하로서 도첩(度牒)770) 이 없는 중은 다 환속(還俗)시켜서 군액(軍額)을 채우도록 하소서.

1. 벼슬로 상주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인데, 위에서는 아래에 공이 없는 것을 함부로 주어서는 안되며, 아래에서는 위에 역시 요행으로써 외발되게 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위에 있으면서 함부로 주거나 아래에 있으면서 외람되게 구하면, 정사가 날로 외람되게 되어 다시 구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근년 이래로 논상(論賞)하는 길이 한번 열리자, 비록 신하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인인데도 조금만 힘들여 이룬 것이 있으면 벼슬을 주고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으레 예삿일이 되어, 혹 제조(提調)가 낭청(郞廳)의 근로(勤勞)를 스스로 추천하여 상주기를 요구하니, 낭청에게 상이 있는데 제조에게만 상이 없겠습니까? 이에 무릇 별제(別祭)의 집사(執事)나 공작 감장(工作監掌) 등의 일에 분주히 앞을 다투어 권문(權門)에 구하고 청하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국휼(國恤)의 애통한 가운데에서도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어서 염치(廉恥)의 없어져감이 어느덧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의묘(懿廟)771) 를 옮겨 모심에 당하여 비록 유식하다는 조관(朝官)마저도 천은(天恩)을 바라고, 집사(執事) 되기를 구하기에 온갖 짓을 다하여 기어코 얻은 뒤에야 그만두니, 선비 기풍(紀風)의 비루함이 어찌 이보다 심함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군공(軍功)이 특이한 자 이외에는 모두 벼슬로 상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외람된 것을 방지하여 선비의 기풍을 정(定)하도록 하소서.

1. 우리 태조(太祖)께서 고려(高麗)의 판탕(板蕩)772) 된 뒤를 이어서 세상의 도리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서 《원육전(元六典)》773) 을 창제하여 세우셨는데, 그 뒤에 세종(世宗)께서 오히려 절목(節目)의 미비함을 고려하여 또 《속육전(續六典)》을 지으셨습니다. 무릇 이 두 법전(法典)에 실린 대체의 강령(綱領)과 세소한 기율(紀律)이 지극히 자세하고 분명하니, 실로 만세에 바꾸지 못할 법전입니다. 세조(世祖)께서 중흥(中興)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를 크게 새롭게 하여 번거로운 것은 없애고 간략하게 하여서 요약(要約)하기에 힘써 이름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나라를 경륜(經綸)하는 데에 지극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기(事機)는 끝이 없는데 과조(科條)는 한(限)이 있어서, 관리가 일을 만나 법을 상고하고자 하면 법에 의거할 데가 없고 일이 처단하기 어려울 경우가 있으니, 이에 새로 교조(敎條)774) 를 세워서 한때 권도(權道)의 변통에 따르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법을 세우는 것이 점점 번거로와졌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 새로 세운 조목은 《원육전》《속육전》 두 법전에 실린 바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원육전》《속육전》 두 법전을 속지고각(束之高閣)775) 하니, 진실로 탄식할 만합니다. 신 등은 원컨대 항상 《대전(大典)》을 사용하여 세조께서 물려주신 좋은 계책을 준수하고, 그 《대전》에 없는 조문은 새로 세우지 말도록 하며, 《원육전》《속육전》 두 법전을 통용하여 선왕(先王)의 옛 법을 보존하여 분경(紛更)776) 의 조짐을 없애도록 하소서.

1. 군사는 정예(精銳)함에 달려 있지 많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는 한 집에서 종군(從軍)하고 일곱 집이 이를 받들었으니, 국가에서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백성[生齒]을 보호해 기르고 오로지 농상(農桑)을 중히 하여, 집에는 남는 장정이 있고 백성은 남는 힘이 있어서 그 풍속이 여유가 있는 까닭에, 백성의 생활이 풍부하고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굳세었습니다. 이때에는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의 갑사(甲士)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그 인원수[額數]도 그리 많지 아니하였는데 시위(侍衛)가 충족하고 사방(四方)이 잘 다스려져서 편안하였으니, 나라 일을 하는 방도가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대신(大臣)들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제도(諸道)의 군적(軍籍)을 만드는 데에 많이 넣으려고 힘써서, 한 집에 부자(父子)나 형제(兄弟)가 있을 때 아비가 정군(正軍)이 되면 아들은 봉족(奉足)777) 이 되고 형이 정군(正軍)이 되면 동생이 봉족이 되며, 이 뿐만 아니라 만약 남은 장정이 있으면 빼앗아 다른 부역(賦役)으로 정하고, 아무리 노쇠(老衰)하거나 쇠잔(衰殘)한 사람일지라도 찾아 모아서 남김없이 모두 군적(軍籍)에 적어 넣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정병(正兵)이라고 이르니, 그 군사의 많음이 예전에 비해 2갑절 5갑절뿐이 아닙니다. 이에 농민이 모두 병역에 입적(入籍)되어서 군사와 농사가 함께 곤란합니다. 전하께서 이 폐단을 깊이 통촉하시어 다시 감하고 없애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백성을 쉬게 하고 기르는 데에 지극하고 극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주(州)에서 몇 사람을 줄이고 아무 현(縣)에서 몇 사람을 줄이라고만 하고 그 여(旅)778) 를 그대로 둔다면 그 여(旅)를 채우고 그 인원수를 갖추지 아니할 수 없으니, 명색으로는 줄인다고 할지라도 실상은 줄어지지 아니하여 폐단이 도로 전과 같을 것인데, 감군(減軍)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른바 기병(騎兵)이라는 것이 거개 타는 말이 없고 시위(侍衛)할 때에 이르러서야 남에게 빌어서 창졸간에 준비하는데, 구하지 못하면 걸어서 따릅니다. 정렬(庭列)779) 하는 군사에 이르러서는 몸에 누더기를 입고 발에 짚신을 신어서 그 난잡하여 정돈되지 않음이 이렇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소위 보병(步兵)이란 것은 겨우 서울에 들어오면 모두 토목(土木)의 역사에 나아가고 한 사람도 시위(侍衛)하는 자가 없게 되니, 이름은 비록 군사라고 할지라도 실상은 역졸(役卒)입니다. 그 노고(勞苦)를 견디지 못하면 사람을 사서 대신하게 하므로 두어 번 번든 뒤에는 가산이 탕진하여 민간이 소연(蕭然)780) 하게 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조종조(祖宗朝)로부터 공작(工作)이 하나가 아니었으나 숙위병(宿衛兵)을 철수하여 역사를 시켰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거꾸로 됨이 심합니다. 만약에 급한 사변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쓰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정병(正兵)의 수를 줄이고 공역(工役)의 노고를 없애며, 장건하고 튼튼한 군사를 정예(精銳)하게 훈련시켜 시위병(侍衛兵)으로 삼고, 동거하는 부자나 형제는 서로 보(保)781) 를 두지 말고 또 다른 역(役)을 허락하지 아니하면, 농사에 힘쓰는 자가 많아서 저절로 병사와 농사가 함께 충실해질 것입니다.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도 대단히 많고 정예하지 못한 폐단이 있으니, 아울러 도태(淘汰)하고 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신 등은 듣건대 공역(工役)을 일으키고 민력(民力)을 쓰는 것은 성인(聖人)이 중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므로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무릇 민력을 쓴 것이 비록 그 시의(時義)에는 적당하였는데도 오히려 경서(經書)782) 에 기록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중한 일임을 보였으니, 하물며 당연히 할 일이 아닌 데에 가볍게 민력(民力)을 쓰는 것이겠습니까? 근년에 산릉(山陵)과 침묘(寢廟)의 큰 역사가 잇따랐는데, 이런 일은 민력을 써도 부득이한 일이지마는, 그 밖에 그만둘 수가 있는 역사를 번갈아 일으켜서 그치지 아니하여, 5, 6년 사이에 공장(工匠)과 역졸(役卒)이 휴식할 때가 없고 처자(妻子)의 양육(養育)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가엾고 민망합니다. 근래에 수해와 한재가 연달아서 재앙과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고 흉작과 실농(失農)의 심함이 근년에 없는 바이니, 이는 마땅히 근심하고 걱정하여 두렵게 생각할 때입니다. 피로하여 여위고 굶주린 군사들이 일을 하면서 부르짖는 소리가 길에 끊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야흐로 이제 경비(經費)는 너무나 많은데 회계(會計)는 날로 줄어서 조세(租稅)의 수입이 전에 비해 적으니, 이는 마땅히 줄이고 덜어서 쓰는 것을 절약해야 할 때인데, 공장(工匠)의 삭료(朔料)·월봉(月俸)의 지급과 역사를 감독하는 관리의 공억(供億)하는 비용이 어지럽게 그치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은 듣건대,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몸에 비유하면 백성은 바로 맥(脈)인데, 맥이 한번 병들면 장차 다시 약으로 구제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이제부터 무릇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끊고 다시 일으키지 말아서 백성의 힘을 회복시키어 나라의 맥을 튼튼하게 하소서.

1. 요사이 호조(戶曹)의 수교(受敎)에, ‘의창(義倉)783) 의 지난해에 수납하지 못한 곡식을 수령이 기한을 지나도 수납을 마치지 못한 자는 그 푼수(分數)784) 에 따라 혹은 1자급(資級), 혹은 2자급을 낮춘다.’고 하시었으니, 무릇 수납의 기한을 설정하고 벌(罰)을 논하는 등급을 세워서 관리를 제어하는 것은 족히 영(令)이 행하여지고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나, 그러나 위에서는 아래에 구구(區區)하게 벌을 논하는 것으로써 일을 처리하는 바탕으로 삼고, 아래에서는 위에 규규(規規)하게 벌을 면하는 것으로써 고식지계(姑息之計)785) 를 삼으니, 이는 상하(上下)에서 이(利)로써 서로 대우하는 것이므로 실로 염치(廉恥)를 장려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만일 연약하고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국가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 회계(會計)를 손실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쫓아내어도 좋고 죄를 주어도 좋을 것인데, 하필이면 먼저 이 벼슬을 빼앗는 법을 마련하여 두려워서 동요하게 할 것입니까? 심히 선비를 대접하는 체통이 아닙니다. 무릇 잔혹(殘酷)한 관리는 비록 기한을 정하는 명령이 없을지라도 백성에게서 빼앗고 소란하게 하여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 길을 열어서 인도하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1분(分)을 너그럽게 하면 백성은 1분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처음 정치에 더욱이 백성에게 너그럽게 하는 것을 급무로 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신 등은 원컨대 수납(收納)의 기한을 없애고 자급을 낮추는 법을 혁파하여 민생(民生)을 넉넉하게 하소서.

1. 전제 별감(田制別監)은 본래 양전(量田)786) 을 위한 것이므로,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없으면 파하여 영구히 상설(常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 도(道)의 양전(量田)은 이미 끝났는데, 강원도(江原道)·영안도(永安道)·평안도(平安道)의 세 도만은 연달아 흉년이 들기 때문에 〈양전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풍년이 들 해를 미리 기약하기는 어려운데 별감을 그대로 두고 혁파하지 아니하니, 그 인원이 많아서 무려 1백여 명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일하는 사무가 없고, 또 상시로 출근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자기 집에 편히 앉아 있거나 혹은 자신이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공부(公簿)787) 에 거짓 서명(署名)하여 사만(仕滿)이 되면 계급을 더하여 유품(流品)788) 과 다름이 없어서, 자궁(資窮)789) 에 이른 자가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니, 그 외람됨이 어찌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양전(量田)하는 해를 기다려서 임시(臨時)로 임명하여 보내어도 늦지 않을 것인데, 어찌 그대로 상설(常設)로 두어서 폐단을 끼치게 할 것입니까?

신 등은 원컨대 전제 별감(田制別監)을 혁파하고 외람되게 받은 계급을 추탈(追奪)하여 간사하고 거짓된 풍습을 방지하도록 하소서.

1. 우리 조정에서 저폐(楮幣)790) 를 마련한 것은 본래 저폐 한 장(張)을 쌀 한 되[升]에 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 재물을 유통(流通)시키려고 한 것인데, 법을 세운 지 오래되어 사용 가치가 점점 천해져서 비록 2, 30장(張)이라도 쌀 한 되를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매할 때에 일체 서로 쓰지 아니하니, 그것이 폐지되어 회복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근자에 다시 쓸 길을 열고자 하여 모든 속죄(贖罪)에 일체 이것으로 징수(徵收)하게 하였으나, 저화의 값을 계산하면 장형(杖刑) 80대의 속(贖)이 면포(綿布) 한 필에 지나지 아니하여 속죄하기가 쉽게 되었으므로, 호활(豪猾)한 무리가 법을 범하는 것을 더욱 가볍게 여겨서 심한 자는 고의로 범하기도 하니, 옥송(獄訟)의 번거로움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게 되는 것이며, 저화는 마침내 사용되지도 못하면서 폐단만 다시 더 심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성이 쓰려고 하지 않는데 억지로 할 수 없고, 또 공사(公私)간에 유익함이 없으니, 폐하여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형벌을 엄하게 하여 반드시 사용하도록 기할 것이지 어찌 그대로 두고 구차하게 백성들의 자유에 맡길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저화(楮貨)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으며, 법이란 것은 인정(人情)에서 인연하여 절제(節制)하는 것인데 반드시 형벌의 말단(末端)을 취하여 그 하고자 아니 하는 것을 강제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저 지금의 저화는 고대의 전폐(錢幣)인데, 옛적에 유한(劉漢)791) 에서 일찍이 전폐(錢幣)를 통행하는 화폐로 삼았습니다. 그 처음에는 협전(莢錢)을 주조(鑄造)하였고, 고후(高后)792) 때에 팔수전(八銖錢)을 통행하였으며, 문제(文帝) 때에 사수전(四銖錢)을 통행하다가, 그 뒤로부터 혹은 가볍게 하여 삼수(三銖)로 하고 혹은 무겁게 하여 반냥(半兩)으로 하였으니, 여러 번 고치기를 좋아하여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백성이 싫어함으로 인하여 행할 수 있는 방도를 만들어 한때의 편의를 임시 변통한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저화(楮貨)를 고쳐 만들되 새로운 체제(體制)를 정하여 옛모양과 섞이지 않도록 하고, 그 찍어내는 숫자를 되도록 적게 하여 저화가 천해지지 않도록 하며, 무릇 경외(京外)의 수속(收贖)·징궐(徵闕), 노비(奴婢)의 신공(身貢), 반록(頒祿), 거가(車價) 및 일체 공사(公私)간에 매매할 때에 예전대로 쓰게 하고, 또 검찰하는 법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반드시 영구히 따르고 더욱 신용하도록 하면, 복구하여 통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언로(言路)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바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틀입니다. 옛일을 상고하면, 요(堯)임금비방목(誹謗木)793) 을 세우고 진선정(進善旌)794) 을 세워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말을 다하게 하였고, 순(舜)임금은 사방으로 견식(見識)을 넓히고 견문(見聞)을 넓혀서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뜻을 얻지 못함이 없게 하고 한 마디 착한 말이라도 혹시 빠뜨림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당우(唐虞)795) 태평[泰和]의 정치를 이루게 한 것으로서, 만대에 칭송하는 바가 된 것입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착한 말을 받아들이기를 고리[環]가 돌 듯하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못미칠 것 같이 하였으니, 모두 족히 한 시대의 다스림을 이룩한 것입니다. 영진(嬴秦)796) 은 위엄으로 육합(六合)797) 을 제압하여,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이르고 깊은 계책을 말하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여 학문하는 선비들을 갱살(坑殺)798) 하고, 간함을 받아 들이지 않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하여 천하의 입을 다물게 하였으므로, 이에 천하가 벌벌 떨면서 말하는 것을 꺼리고 숨기더니 2세(世)에 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자취를 가히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선(善)을 좋아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시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물 흐르듯 하시니, 도(道)를 논하는 신하는 아는 대로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을 말하는 관리는 감히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여, 좌우의 충성스럽고 간사함과 외정(外庭)799) 의 옳고 그름과 정령(政令)의 좋고 좋지 아니함과 생민(生民)의 이롭고 해로운 것을 모두 앞에서 진술하면, 전하께서 그 말 가운데 옳은 것을 골라서 그대로 따르시고 또 따라서 상을 주어 말하기를 인도하시므로, 융성한 태평 시대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언관(言官)으로서 혹은 말을 한 일로써 좌천(左遷)된 일이 있고, 혹은 탄핵을 입은 자의 송사함으로 인하여 벼슬이 떨어진 일도 있으며, 요즈음 또 중 설준(雪俊)의 불법(不法)한 일을 논하자, 전하께서 그 말에 따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천둥같은 위엄을 보여서 말하는 자로 하여금 말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신 일이 있으니, 신 등은 전하께서 착하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한 듯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간(諫)하는 말에 따르고 곧 행하시어 더욱 언로(言路)를 열어서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데에 이르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여 사간원에 묻기를,

"부(富)가 경상(卿相)과 같으면서 남의 제방을 빼앗은 자가 누구이며, 여염(閭閻)에 드나들면서 음탕하고 방자한 자가 누구이며,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고 물고기와 소금을 파는 자가 누구이며, 서울 안 여러 절 가운데 문을 파수(把守)하는 것이 어느 절이며, 이른바 역마를 탄다는 자가 누구이며, 아우나 조카가 관직에 벌여 있다는 자가 누구인가? 그것을 말하라."

하니 정언(正言) 이계통(李季通)이 대답하기를,

"문을 파수하는 절은 원각사(圓覺寺)·내불당(內佛堂)이고, 역마를 타고 다니는 자는 신미(信眉)학열(學悅)이며, 중외(中外)에 벌여 있다는 것은 김수경(金守經)·김수화(金守和)·김민(金旼)·김영추(金永錘)의 무리입니다. 그밖에 부(富)가 재상과 같다는 등의 일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다만 옛 폐단을 일일이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절의 문을 파수하는 것은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이고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며, 만일 맡겨서 부릴 일이 있으면 비록 승도(僧徒)일지라도 역마를 타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아우나 조카가 만일 어질다면 어찌 중의 친족이라고 쓰지 아니할 것인가? 부(富)가 재상과 같다는 등의 일은 비록 이왕에 있었던 일이라 할지라도 임금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일일이 써 가지고 오도록 하라."

하니 이계통이 대답하기를,

"학열(學悅)이 지난날에 강릉(江陵)의 제방을 점령하여 고을 백성들의 소송을 일으겼으니, 이것은 남의 제방을 빼앗은 것입니다. 신미(信眉)·학열(學悅)·정심(正心)·설준(雪俊)의 무리가 거만(巨萬)의 재물을 축적하였고 여러 큰 절의 호승(豪僧)이 대개 이와 같으니, 이는 부유함이 재상과 같은 것입니다. 음탕하고 물고기·소금을 판매하는 중은 예전에 많이 있었는데, 이제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전에 있었던 것이어서 이제 낱낱이 들 수 없단 말인가? 말하지 아니함은 잘못이다. 제방은 세조께서 하사한 것이고 학열이 스스로 점령한 것이 아니다."

하고, 명하여 술을 먹여서 보내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3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역(軍役) / 금융-화폐(貨幣)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불교(佛敎) / 농업-수리(水利) / 구휼(救恤) / 교통-육운(陸運) / 출판-서책(書冊)

  • [註 763]
    수성(守成) : 창업(創業)한 뒤를 이어받아 지킴.
  • [註 764]
    인순(因循) : 구습에 따라 행함.
  • [註 765]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766]
    시위 소찬(尸位素餐) :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에 나오는 말로, 재덕이나 공로가 없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갖 자리만 차지하고 녹(祿)만 받아먹음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
  • [註 767]
    불씨(佛氏) : 불교.
  • [註 768]
    인연(夤緣) : 인과(因果).
  • [註 769]
    경상(卿相) : 대신.
  • [註 770]
    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의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 증명서.
  • [註 771]
    의묘(懿廟) : 성종의 부(父)인 의경 세자의 묘.
  • [註 772]
    판탕(板蕩) :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짐.
  • [註 773]
    《원육전(元六典)》 : 《경제육전(經濟六典)》.
  • [註 774]
    교조(敎條) : 교시의 조목.
  • [註 775]
    속지고각(束之高閣) : 오래 사용하지 않음.
  • [註 776]
    분경(紛更) : 어지럽게 고침.
  • [註 777]
    봉족(奉足) : 조선조 때 정군(正軍)의 집에 주던 조호(助戶). 정군 1명에 대하여 봉족(奉足) 한두 사람을 지급하여 정군을 돕게 하고, 정군이 출역(出役)하였을 경우에는 그 집안 일을 돕게 한 급보 제도(給保制度).
  • [註 778]
    여(旅) : 군제의 한 편대.
  • [註 779]
    정렬(庭列) : 뜰에 줄지어 섬.
  • [註 780]
    소연(蕭然) : 쓸쓸한 모습.
  • [註 781]
    보(保) : 봉족(奉足).
  • [註 782]
    경서(經書) : 곧 《춘추》를 말함.
  • [註 783]
    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 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궁기(春窮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었음.
  • [註 784]
    푼수(分數) : 과거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서 성적의 점수를 매기던 것. 첫째를 대통(大通), 그 다음을 통(通), 그 다음을 약통(略通), 그 다음을 조통(粗通)이라 하였음.
  • [註 785]
    고식지계(姑息之計) : 당장에 편한 것만을 취하는 계책.
  • [註 786]
    양전(量田) : 조선조 때 토지의 넓이를 측량하던 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에 한 번씩 측량하고, 양안(量案)을 새로 작성하여 호조(戶曹)·도(道)·군(郡)에 비치하였음.
  • [註 787]
    공부(公簿) : 관리가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그 이름을 적던 장부. 제조(提調)가 날마다 점검하여 이유 없이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는 그 이름 밑에 동그라미[圈]를 쳤는데, 이를 기준으로 관리의 근태(勤怠)를 평가하였음. 공좌부(公座簿).
  • [註 788]
    유품(流品) : 정1품에서 종9품 사이에 들어가던 모든 품계를 통칭하는 말임.
  • [註 789]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이 됨.
  • [註 790]
    저폐(楮幣) : 고려 공양왕 4년(1392)부터 조선조 현종 8년(1667)까지 국가에서 받들어 통용된 지폐임. 저화(楮貨).
  • [註 791]
    유한(劉漢) :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전한(前漢).
  • [註 792]
    고후(高后) : 여후(呂后).
  • [註 793]
    비방목(誹謗木) : 요(堯)임금 때에 나무를 교량(橋梁) 위에 세워서, 백성들에게 정치(政治)의 과실(過失)을 쓰게 하여, 임금이 스스로 반성하였다고 함.
  • [註 794]
    진선정(進善旌) : 요(堯)임금 때 정기(旌旗)를 오달(五達)의 길에 세워놓고, 선언(善言)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밑에서 말하게 하였음.
  • [註 795]
    당우(唐虞) : 요순 시대.
  • [註 796]
    영진(嬴秦) : 진 시황 시대.
  • [註 797]
    육합(六合) : 천하.
  • [註 798]
    갱살(坑殺) : 중국의 진 시황(秦始皇)이 즉위 34년에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에 관한 책만을 제외하고 모든 서적을 모아서 불살라 버리고, 이듬해 함양(咸陽)에서 수백(數百) 사람의 유생(儒生)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 [註 799]
    외정(外庭) : 외방.

○司諫院大司諫鄭佸等上疏曰:

臣等聞, 自古守成之世, 多溺宴安而隳舊業, 所以然者, 誠以人情, 習於久安, 安於守常, 惰於因循, 憚於更變故也。 苟非挺特奮發, 爲興替補弊之擧, 則無以有爲於斯時也。 恭惟我殿下春秋鼎盛, 學問日就, 方將以唐虞三代爲期, 其於鼎初之治, 有何難乎? 然人臣之義, 必憂治世而危明主。 臣等待罪言官, 每以尸素爲愧, 敢將時務九條, 仰塵天聽, 伏惟殿下裁擇焉。 一, 佛氏, 本夷狄之一法耳, 不知君臣ㆍ父子之倫, 不耕而食, 不蠶而衣, 其夤緣之說, 惑世誣民, 乃蠧國之蟊賊也, 必闢之然後, 可以治天下國家矣。 我太宗深燭其害, 盡革寺社奴婢田地, 禁邪穢, 明正道, 其爲國家萬世慮深矣。 厥後僧徒漸熾, 橫肆益甚, 有富侔卿相, 而勢能動人者, 有恃其豪强, 奪人堤堰者, 有出入閭里, 宣淫自恣, 汚亂風俗者, 有販魚鹽之利者, 有奪人妻妾者, 有代人詞訟而自期必勝者, 有成群持杖, 威脅守令者, 凡事有干於僧者, 則人皆畏縮, 莫敢誰何言之, 至此可謂痛心。 殿下卽位以來, 講明古昔帝王之學, 恢弘中正之治, 邪妄之徒, 自然消散, 而其爲害猶未盡祛者有八。 比來連歲凶荒, 國用不裕, 凡不急之費, 減省殆盡, 而圓覺寺內佛堂福世菴供給之需猶在, 一也。 軍士本以衛王室也, 京中諸寺, 以正兵把門, 擬諸宮禁, 二也。 江原一道, 地瘠民貧, 租稅之入甚少, 諸邑軍需, 或不滿百碩者, 誠爲可慮, 而收稅之米, 盡輸金剛山諸寺, 名曰歲獻, 是一道人民膏血, 委之於無用之僧, 三也。 京外寺刹, 已爲多矣, 在所汰去, 近來修創寺塔, 無歲無之, 勞民傷財, 四也。 驛騎, 所以通使命達邊報也, 而僧徒往來, 亦許乘馹, 勞敝驛路, 五也。 淸淨寡欲, 乃其道也, 巨刹豪僧, 滋殖米穀, 乘勢使氣, 侵奪平民, 六也。 頃者逃軍避役, 祝髮爲僧者, 不知其幾千萬人矣, 軍額農民, 因此減耗, 而坐食者多, 七也。 僧之弟姪, 昏庸殘劣之輩, 因緣僥倖, 布列中外, 守令則必占大州富邑, 京官則必得之六曹淸要, 所至無不曠官殘民, 八也。 凡此八事, 皆國之大弊也, 願自今除僧人供給之費, 去寺刹把門之兵, 革歲獻之米, 罷僧族之職, 勿創寺刹, 勿許乘馹, 禁僧殖貨, 竝令屬公, 以補軍需, 年四十以下, 無度牒僧人, 悉刷還俗, 以充軍額。 一, 爵賞, 人君之大柄也, 上之於下, 固不可以無功而濫加, 下之於上, 亦不可以僥倖而冒求, 苟在上而濫加, 在下而冒求, 則政事日趨於猥濫, 而不可復救矣。 國家近年以來, 論賞之門一開, 雖人臣職分當爲, 而小有辦集, 則加官賜物, 例以爲常, 或提調自薦郞廳勤勞, 以要其賞, 郞廳有賞, 則提調獨不與乎? 於是凡別祭執事工作監掌等事, 奔走爭先, 求請權門, 恬不爲愧, 以至國恤哀慟之際, 無不盡然, 廉恥道喪, 一至於此, 良可痛心。 今當懿廟移安, 雖有識朝官, 希望天恩, 求爲執事, 無所不至, 必得之而後已, 士風之卑陋, 孰甚於此? 願自今軍功特異者外, 竝勿許賞職, 以防猥濫, 以定士風。 一, 我太祖高麗板蕩之餘, 爲維持世道之制, 創立《元典》, 其後世宗猶慮節目之未悉, 又作《續典》。 凡此二典所載大綱小紀, 極其詳明, 實萬世不易之典也。 世祖中興, 誕新一代之制, 刪煩就簡, 務要省約, 名曰《經國大典》, 此亦經綸之至要也。 然而事機無窮, 科條有限, 官吏遇事, 而欲考之於法, 則法無可據, 事有難斷, 於是不得不新立敎條, 以應一時權宜之變, 而立法漸煩矣。 然其新立之條, 皆不出《元》《續》二典所載, 《元》《續》二典, 則束之高閣, 良可嘆已。 臣等願常用《大典》, 以遵世祖貽謀之善, 而其《大典》所無之條, 不許新立, 通用《元》《續》二典, 以存先王之舊, 以除紛更之漸。 一, 兵在精, 不在多。 古者一家從軍, 七家奉之, 國家自祖宗以來, 涵育生齒, 專以農桑爲重, 家有餘丁, 民有餘力, 其俗優游不迫, 故民生豊富, 士馬精强。 於斯時也, 宿衛之兵, 不過內禁、別侍甲士, 其額亦不猥多, 而侍衛充足, 四方乂安, 爲國之道, 如斯而已。 頃者因大臣獻議, 爲諸道軍籍, 務欲其多, 一家有父子兄弟, 則父爲正軍而子爲奉足, 兄爲正軍而弟爲奉足, 不特此也, 若有餘丁, 則奪定他役, 雖疲癃殘廢之人, 搜括無遺, 皆錄之軍籍, 謂之騎、步正兵, 其兵之多, 視古不啻倍蓰。 於是農民盡籍於兵, 而兵、農俱困矣。 殿下深燭其弊, 再降減汰之命, 其休養生息, 至矣盡矣。 然而某州減幾人, 某縣減幾人, 而其旅猶在, 不得不充其旅, 以備其數也, 名爲減汰, 實爲不減, 弊復如前, 減軍之意安在? 所謂騎兵者, 率皆無馬, 至侍衛之時, 借乞於人, 以備倉卒, 而不得焉, 則徒步從之。 至如庭列之兵, 身衣藍縷, 足躡草屨, 其荒雜不整, 一至於此。 所謂步兵者, 纔入京師, 盡赴土木之役, 無一人侍衛者, 雖名爲兵, 其實役卒也。 不堪勞苦, 雇人自代, 數番之後, 家産蕩盡, 民間爲之蕭然, 此非細故也。 況自祖宗朝, 工作不一, 而未聞撤宿衛之兵, 爲之役也, 其爲顚倒甚矣。 脫有緩急, 將何以用之? 臣等以爲, 汰正兵之數, 除工役之勞, 精鍊壯實, 以爲侍衛之兵, 而其同居父子兄弟, 不相爲保, 又不許他役, 則力農者衆, 而自然兵農俱實也。 甲士、別侍衛, 亦有猥多不精之弊, 竝加汰減可也。 一, 臣等聞, 興工役, 用民力, 聖人之所重也。 故春秋, 凡用民力, 雖得其時義, 猶書于經, 以見勞民爲重事, 而況輕用民力於所不當爲者乎? 近年山陵寢廟大役相繼, 然此雖用民力, 在所不得已也, 又有可已之役, 迭擧而不已, 五六年之間, 工匠役卒, 無時休息, 妻子之養, 亦不遑顧, 誠可憐憫。 比來水旱相仍, 災變屢作, 凶歉之甚, 近歲所無, 是宜憂勤惕慮之秋也。 疲羸飢饉之卒, 勸力呼耶之聲, 不絶於路何耶? 方今經費浩繁, 會計日減, 而租稅之入, 視古爲少, 是宜減省節用之時也, 工匠朔料俸之給, 董役官吏供億之費, 紛然不已何耶? 臣等聞, 民惟邦本, 本固邦寧。 比之一身, 民惟脈也, 脈一病, 將不復救藥矣。 臣等願, 自今凡不急之役, 絶不更擧, 以蘇民力, 以固國脈。 一, 近日戶曹受敎, ‘義倉往年未納之穀, 守令有過限未畢收納者, 隨其分數, 或降一資或二資’, 夫設收納之限, 立論罰之等, 以馭官吏, 似足以令行事成矣, 然上之於下, 區區焉以論罰, 爲辦事之資, 下之於上, 規規焉以免罰, 爲姑息之計, 是上下以利而相待, 實非所以勵廉恥之道也。 如有疲軟庸愚, 不體國家之意, 使會計虧欠者, 則黜之可也, 罪之可也, 何必先設此奪爵之法, 而恐動之乎? 甚非待士之體也。 凡殘酷之吏, 雖無期限之令, 侵擾奪攘, 無所不至, 況開其門而導之乎? 古人有言曰: "寬民一分, 則民受一分之賜", 殿下初政, 尤宜以寬民爲急。 臣等願除收納之限, 革降資之法, 以厚民生。 一, 田制別監, 本爲量田也, 故有事則置, 無事則罷, 非久遠常設者也。 今諸道量田已訖, 獨江原永安平安三道, 因歲連荒, 未可爲耳。 豐稔之年, 難以預期, 而別監因仍不革, 其員之多, 無慮百餘人。 旣無所治之務, 又無常仕之人, 皆安坐其家, 或身居外方, 而冒署公簿, 仕滿加階, 無異流品, 以至資窮者, 不知其幾許, 其猥濫孰甚於此? 待其量田之年, 臨時差遣, 未爲晩也, 何必因循常置, 以貽其弊乎? 臣等願革罷田制別監, 追奪濫受之階, 以防詐僞之風。 一, 我朝楮幣之設, 本欲以一張, 準米一升, 使民用之流通貨財者也。 立法旣久, 用之漸賤, 雖以二三十張, 猶不得換米一升, 故於貿易之際, 絶不相用, 其廢而不復也明矣。 近者欲開興用之路, 凡所贖罪, 一以此徵之, 然計楮貨之價, 則杖八十之贖, 不過綿布一匹而已, 贖罪旣易, 豪猾之徒, 犯法益輕, 甚者故犯之, 獄訟之煩, 未必不由於此, 楮貨卒不能用而弊復滋甚矣。 或云: "民之不欲, 不可强之, 且無益於公私, 廢革之可也。" 或云: "嚴刑峻罰, 期於必用, 豈可因仍, 苟且任民自爲乎?" 臣等以爲, 楮貨行之旣久, 不可一朝而遽革, 法者緣人情, 而爲之節制者也, 又不可取必於刑罰之末, 而强其所不欲也。 夫今之楮貨, 卽古之錢幣也, 昔劉漢嘗以錢幣爲通行之貨。 其初鑄莢錢, 高后時, 行八銖錢, 文帝時, 行四銖錢, 自是以後, 或輕而爲三銖, 或重而爲半兩, 非苟樂屢更也, 皆因民之所厭, 而爲可行之門, 以權衡一時之宜者也。 臣等以爲, 改作楮貨, 定爲新制, 使之不渾舊樣, 其印出之數, 務令尠少, 使楮貨不賤, 而凡京外收贖、徵闕、奴婢之貢、頒祿、車價, 及一應公私買賣之際, 依舊用之, 又嚴檢察之法, 使民必從, 悠久而益信, 則可以興用也。 一, 言路通塞, 乃治亂安危之機也。 稽之於古, 帝堯立誹謗之木, 建進善之旌, 使天下得以盡言, 大明四目達四聰, 無有一夫之不獲自盡, 而一善之或遺, 此所以成唐虞泰和之治, 爲萬代所稱頌者也。 唐宗納善若轉環, 從諫如不及, 皆足以成一代之治。 至如贏, 威制六合, 忠諫者謂之誹謗, 深計者謂之妖言, 坑殺學士, 愎諫自賢, 以箝天下之口, 於是乎天下澟澟, 以言爲諱, 二世而亡。 其治亂安危之迹, 可以鑑矣。 殿下卽位以來, 樂善不倦, 從諫如流, 論道之臣, 知無不言, 言事之官, 敢言不諱, 左右之忠邪、外庭之得失、政令之臧否、生民之利害, 畢陳于前, 殿下擇其言之善者而從之, 又從而賞之, 導之使言, 蔚然有太平之治矣。 然頃者言官或以言事左遷, 或因見劾者所訟而落職, 近又論僧雪俊不法事, 殿下不惟不從其言, 微示雷霆之威, 使言者不得盡言, 臣等恐殿下欲善之心寢, 不如初也。 《書》曰: "非知之艱, 行之惟艱", 願殿下從諫卽行, 益開言路, 以臻至治。

命問司諫院曰: "富侔卿相, 奪人堤堰者誰耶? 出入閭里, 宣淫自恣者誰耶? 奪人妻妾, 販魚鹽者誰歟? 京中諸寺把門者何寺? 所謂乘馹者誰耶? 弟姪布列者誰耶? 其言之。" 正言李季通對曰: "把門, (圖覺寺)〔圓覺寺〕 內佛堂也, 乘馹, 信眉學悅也, 布列中外, 金守經金守和金旼金永錘之類也。 其他富侔卿相等事, 皆在已往, 但歷擧舊弊而言之也。" 傳曰: "把門, 自先王朝已然, 非自今始, 如有任使, 雖僧徒, 乘馹何妨? 弟ㆍ姪如其賢也, 豈可以僧而不用乎? 富侔卿相等事, 雖在旣往, 不言於君前可乎? 其一一書來。" 季通對曰: "學悅前日占江陵堤堰, 致邑民訴訟, 此奪人堤堰也。 信眉學悅正心雪俊輩, 畜積巨萬, 諸巨刹豪僧, 大率如此, 此富侔卿相也。 如宣淫販賣之僧, 舊多有之, 今難枚擧。" 傳曰: "舊有之, 今不可枚擧耶? 不言之非也。 堤堰世祖所賜, 非學悅自占也。" 命饋酒而遣之。


  • 【태백산사고본】 6책 3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9책 6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역(軍役) / 금융-화폐(貨幣)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불교(佛敎) / 농업-수리(水利) / 구휼(救恤) / 교통-육운(陸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