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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34권, 성종 4년 9월 2일 경인 4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전산전이 보낸 부관인 양심이 일본의 전란에 대하여 글을 올려 설명하다

예조(禮曹)에서 전산전(畠山殿) 사인(使人)에게 음식을 먹였다. 그 부관인(副官人) 양심(良心)이 서계(書契)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일본국(日本國)에서 큰 난리가 일어난 원인을 추구하여 보겠습니다. 본래 세천전(細川殿) 우경 대부(右京大夫) 원승원(源勝元)산명전(山名殿) 좌위독(佐衛督) 원지풍(源持豐)은 국왕의 일가[一姓]로서 누대(累代)의 대신(大臣)인데, 좌우로 보필(輔弼)하여 나라의 권력을 잡아서 조(趙)나라에 염파(廉頗)681) ·인상여(藺相如)682) 가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두 집에서 위세를 다투어 연달아 틈이 있었는데, 장차 싸우기에 미쳐서는 온 나라가 둘로 나뉘어 사졸(士卒)이 서울에 몰린 것이 몇 천만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국왕이 여러 번 화친(和親)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나,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법이므로 점점 번져서 도모하기가 어렵게 되어 드디어 난세(亂世)가 되었습니다. 이에 원승원에게 붙은 자를 동군(東軍)이라고 일컫고 원지풍에게 붙은 자를 서군(西軍)이라고 일컬었는데, 대개 그 사는 곳이 동쪽과 서쪽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서(東西)로 진(陣)을 치고 지척간(咫尺間)에 있으면서 바야흐로 선봉(先鋒)이 나와서 승부[雌雄]를 결단하려고 하였는데, 이때에 원승원이 갑자기 악중(幄中)에게 기묘한 계책을 세워, 급히 궁내(宮內)의 사면을 포위하고 우리 군영(軍營) 속에까지 들어와서 곧 도랑을 깊이 파고 성을 높게 쌓아서 봉련(鳳輦)683)용기(龍旗)684) 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원지풍 일당이 중도에서 좌절되어 또한 이와 같게 되자, 예전에 원지풍과 더불어 친근하며 당류가 된 자가 갑옷을 벗고 활을 놓고서 국왕의 군사에게 항복하기를 아무리 청하여도, 원승원이 모역(謀逆)한 무리라고 일컬어 항복을 받지 못하게 하므로, 서군(西軍)이 분하고 원망하여 원승원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옛날보다 갑절이나 많았으니, 비록 임금에게 불충(不忠)하기는 하나 싸우지 아니하고는 어찌 그치겠습니까? 서군의 속마음이 진실로 임금에게 적이 되려고 한다면 비록 백만의 군사가 있을지라도 천주(天誅)685) 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어찌 많은 세월을 기다린 뒤에야 멸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서군을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전(傳)686) 에 이르기를, ‘조돈(趙盾)이 진(晉)나라 경계를 나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이름이 있다.’687)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저들의 무리는 서울[京都]을 나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전투하여 유혈(流血)이 낭자하고 비고(鼙鼓)688) 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 것이 이미 7년이나 되었으므로, 위로는 왕후(王侯)로부터 아래로는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천신 만고(千辛萬苦)하여 국가가 날마다 쇠하였으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지만 아침 햇볕이 침노하지 아니하여도 반딧불은 저절로 빛이 없어지는 것처럼, 처음 서군에 있던 자가 이제 동군에 항복한 자는 10에, 6, 7인데 동군에 있던 자가 서군의 무리에게 붙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정(定)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이치입니다. 지금 보는 바로는 서군의 무리가 불과 한두 해에 망할 것입니다. 이에 전산전(畠山殿) 좌경 대부(左京大夫) 의승(義勝)이 처음에는 종제(從弟)인 전산전(畠山殿) 우위문(右衛門) 독의(督義)를 따라 서군에 있었는데, 지난해 봄에 국왕이 비밀히 조서(詔書)를 내려 수레를 기다리지 말고 부름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월전주(越前州)·월중주(越中州)·고등주(孤登州)·가하주(加賀州) 네 주(州)는 관새(關塞)가 이미 열려서 행려(行旅)가 저절로 편해지고 낙예(洛汭)에 양식을 운반함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게 되었으니, 북번(北藩)이 안정된 공은 오직 의승(義勝)의 한 거사(擧事)에 있기 때문에, 이제 관령(管領)의 벼슬을 더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3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681]
    염파(廉頗) : 춘추 전국 시대 조나라의 명장.
  • [註 682]
    인상여(藺相如) : 조나라의 대신으로 염파와 한 조정에서 같이 권력을 잡았음.
  • [註 683]
    봉련(鳳輦) : 임금의 수레.
  • [註 684]
    용기(龍旗) : 임금의 기.
  • [註 685]
    천주(天誅) : 임금의 토벌.
  • [註 686]
    전(傳) : 《좌전(左傳)》.
  • [註 687]
    ‘조돈(趙盾)이 진(晉)나라 경계를 나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이름이 있다.’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선공(宣公) 2년에 조돈(趙盾)의 사촌인 조천(趙穿)이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시해하였는데, 조돈은 아직 국경인 산을 넘지 않았을 때 되돌아왔더니,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쓰고 그것을 조정(朝廷)에 내보였기 때문에 조돈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나, 동호는 "당신은 한 나라의 정경(正卿)이면서 달아났으나 미처 국경을 넘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함.
  • [註 688]
    비고(鼙鼓) : 전쟁에서 치는 북.

○禮曹, 饋畠山殿使人。 其副官人良心呈書契曰:

凡今原日本國大亂之起, 本矣細川右京大夫源勝元山名左衛督源持豊, 國王一姓, 累代之大臣, 而左輔右弼, 執朝家之權柄, 喩如兩家。 爭威連日有隙, 將及戰鬪, 則天下中分, 士卒輻輳於京師者, 不知其幾千萬之計。 國王屢雖下和親之詔, 而人多則勝天, 滋蔓難圖, 遂爲亂世矣。 於此屬於勝元者稱東軍, 屬於持豐者稱西軍, 蓋其所居之地, 以在東西也。 東西張陣, 旣在咫尺之間, 方出先鋒, 欲決雌雄, 及此時, 勝元不意運奇策於幄中, 而急圍宮內之四面, 以入我軍營之裏, 卽深溝高壘, 不使鳳輦龍旗出於外, 則持豐一黨, 中流失舟, 亦如斯乎, 故與持豊比而黨者, 舍甲弛弓, 雖請降於國王之軍, 勝元稱謀逆之徒, 不使受其降, 西軍忿怨含讎於勝元者, 倍萬於舊日, 雖似致不忠於君, 不戰而何其息矣? 西軍中心, 實欲爲敵於君, 則縱雖有百萬之師, 天誅不可易逭, 豈其待歲月後滅沒矣哉? 然則西軍其無罪者歟? 何其然乎? 傳云: "趙盾不出境, 而有弑君之名", 況今彼等卑衆, 不去京都, 日夜戰鬪, 流血漂杵, 鼙皷之聲, 動天地者, 旣及七年, 上自王侯下至士庶人, 百辛千苦, 國家日瘦薾, 何其以言語足說之乎? 雖然朝陽不侵, 而螢爝自然熄光, 初在西軍者, 今降於東軍者十其六七, 未聞在東軍者屬於西軍之黨, 是乃天定勝人之理也。 如今所見, 則西軍之徒黨, 不過於一兩年而亡者歟? 爰畠山左京大夫義勝, 始隨於從弟畠山右衛門督義, 就在西軍, 去年之春, 國王密下詔, 不竢駕而就召。 由是, 越前越中孤登加賀四州, 關塞旣開, 行旅自穩, 運糧於洛汭, 不異於平日, 北藩靜謐之功, 但在義勝之一擧, 故今添管領之職。


  • 【태백산사고본】 6책 3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9책 58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