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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33권, 성종 4년 8월 4일 계해 3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대사헌 서거정 등이 대신 면대·도총부 혁파·당상관의 행직 제수 등에 대해 상소하다

이보다 앞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서거정(徐居正) 등이 상소한 것이 이 때에 이르러 내려왔다. 그 소(疏)에 이르기를,

"옛날에 대신(大臣)이 정사(政事)를 논할 때는 반드시 모두 면대(面對)하였고, 만약 혹 임금이 때맞추어 접견하지 아니하면 곧 대신이 면대를 자청(自請)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국가의 큰 정사는 모름지기 이해(利害)를 모두 진술하여 면전(面前)에서 품알(稟謁)하고 시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사(矯詐)하고 옹폐(壅蔽)한 화근이 생기게 되는데, 그 염려됨이 심합니다. 지금 대신이 혹 각 아문(衙門)의 직무(職務)로서 계본(啓本)572) ·계목(啓目)573) 이 아니고 별도로 논의(論議)하여 아뢸 일이 있으면 으레껏 모두 승정원(承政院)에 말하고, 승정원은 중관(中官)574) 에게 전달하며, 중관이 임금에게 전문(轉聞)하니, 출납하고 왕복하는 사이에 아래의 정상이 혹 진달(盡達)될 수가 없어, 상하의 정의(情意)가 조격(阻隔)됨이 없지 아니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하루 세번 경연에 나아가시니 신하를 맞을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대신이 공사(公事)를 아뢰고자 하면 매양 세 번 경연에서의 인견(引見)을 허락하시고, 만일 면대할 것이 아니면 차자(箚子)를 사용하고, 차자가 아니면 단자(單子)를 쓰게 하되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전주(傳奏)하지 못하게 하여 옹폐함을 막도록 하소서.

관(官)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은 정사를 다스리고자 함인데, 지금 중추부(中樞府)는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하게 양부(兩府)로 되어, 영사(領事)·판사(判事)·지사(知事)·동지사(同知事)·첨지사(僉知事) 등 당상관(堂上官) 24원(員)과 경력(經歷)·도사(都事) 등 요좌(僚佐) 2원을 두었으나, 오로지 정사를 다스리지 아니합니다. 신 등이 일찍이 전대(前代)575) 를 상고하니, 중서성(中書省)은 정사를 논하고 추밀원(樞密院)은 군무를 관장하였습니다. 지금 의정부는 곧 옛날 중서성이니 정사를 논해야 하고, 중추부는 곧 옛날 추밀원(樞密院)인데 한갓 허명(虛名)만 안고 있으며 병무(兵務)를 맡지 않으므로, 국가에서 별도로 도총부(都摠府)를 설치하여 도총관(都摠管) 10인(人)과 요좌 8인이 군려(軍旅)를 전장(專掌)하고 있으니, 옛법에도 틀리고 현재에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도총부를 혁파하고 그곳에서 관장하던 기무(機務)를 모두 중추부에 맡기시고,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여 총관(摠管)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는 한편, 양부(兩府)의 요좌(僚佐)들도 모두 하나로 합치게 하소서.

충신(忠信)한 자에게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대접하는 바인데, 지금 당상으로 행직(行職)576) 8, 9품에 제수(除授)된 자가 거의 1백 인에 이르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우대(優待)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나, 다만 관원(官員)은 많고 빈자리는 적으니, 부득이 내려서 행직을 제수하여 그 작록(爵祿)을 끊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미 당상관이라고 하였다면 명위(名位)가 이미 높은 것인데, 아래로 사용(司勇)·사맹(司猛) 등 군졸과 함께 대오[伍]가 되는가 하면, 또는 혹 궁인(弓人)·시인(矢人)·백공(百工)·체아(遞兒)577) 도 되니, 옛날 충신(忠信)한 자에게 녹을 후하게 주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잘못은 조정(朝廷)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직자(行職者)가 된 자는 조정에 직사(職事)도 없고 국가에 작은 공효도 없이 앉아서 봉전(俸錢)만 허비하면서도 스스로 인퇴(引退)를 하지 않으니, 옛사람의 처기(處己)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잘못은 아래 신하에게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는 대우(待遇)함을 잃고 아래에서는 처신함을 잃어 위아래가 모두 할 도리를 잃고 있으니, 신 등은 그 옳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세종(世宗)의 성시(盛時)를 미루어 보건대, 당상관은 가볍게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관직의 제수를 남발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관작(官爵)을 너무 많이 남발한데다가 정해년의 북정(北征)578) 과 서정(西征)의 거사로 당상에 오른 자가 이미 많아 사람마다 준직(准職)579) 하여 제수하기가 역시 어려웠습니다. 지금 행직(行職)에 제수된 자로 문무(文武)의 사무에 능하여 가히 크게 임용할 만한 자도 있고, 용렬하고 자질구레하여 있으나마나 한 자도 있는데, 오래도록 전철만 답습하여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국가에서 인물을 쓰는 체모를 역시 잃은 것이 됩니다. 신 등은 원컨대, 이조(吏曹)·병조(兵曹)로 하여금 쓸 만한 사람을 녹용(錄用)하되 군(郡)·부(府) 이상의 수령은 그 재간(才幹)에 따라 뽑아서 제수하고, 부득이 행직(行職)을 제수할 자는 5, 6품(品) 이하로 내리지 않게 하며, 참외직(參外職)은 제수하지 말고 그 중 임용하지 못할 만한 자는 모두 다 태거(汰去)시키되, 혹 검직(檢職)580) 을 제수하여 예로 대우하여서 보내도록 하소서.

제왕(帝王)의 도리는 친친(親親)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친친을 하는 길은 위(位)를 높이고 녹(祿)을 후하게 주어 직사(職事)를 맡기지 아니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공이 있어도 벼슬을 더하지 아니하고 따라서 죄가 있어도 형벌을 더할 수 없어서, 대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역대 제왕 및 우리 조종(祖宗)은 이런 도리를 준용하여 종친을 임용하지 않았는데, 중간에 종친이 동반(東班)·서반(西班)에 많이 참렬(參列)하였고, 또 문과(文科)·무과(武科)에 부시(赴試)함을 허락하였습니다. 우리 전하(殿下)는 이미 부시법(赴試法)을 혁파하고 또 가벼이 동반직(東班職)을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전관(宣傳官)·위장(衛將)은 오히려 옛날부터 임용하기도 하니,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청컨대 모두 혁파하여 조종의 법을 따르도록 하소서.

옛날 환관의 직임은 단지 궁위(宮闈)를 소제(掃除)하기 위하여 두었을 따름이었는데, 후세에는 의임(倚任)함이 과중하여 변란과 국망(國亡)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진실로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이전에는 환시(宦寺)에게 참직(參職)을 제수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억제를 가함에 있어서는 조종의 법제를 본받아 또한 종2품(從二品)을 초과하지 아니하였었는데, 근자(近者)에는 환시(宦寺)가 훈열(勳列)에 많이 참여하고 요행을 인연(因緣)하여 혹은 1품에 이르고 혹은 정2품(正二品)에 이르러 높은 자리에 빨리 올라가니, 구법(舊法)이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앞으로 환관(宦官)은 《대전(大典)》에 의하여 관품(官品)이 종2품에 이르면 그치도록 하고, 그 승급(陞級) 역시 그 품질(品秩)을 넘지 못하도록 하며, 비록 공신으로 품계가 높은 자라도 직질(職秩)은 종2품을 넘지 못하게 하여 명기(名器)를 아끼도록 하소서.

국가에서 부민(部民)의 고소(告訴)581) 를 금함이 있으나, 자신의 원억(冤抑)함은 이에 들어주어 처리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고소하는 자는 수령의 불법(不法)을 조목조목 진술하고 한두 가지 자신의 원억함을 그 가운데에 넣어, 법사(法司)에서 들어서 처리할 때 만약 고소가 부실(不實)하면 으레껏 모두 도망합니다. 대저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어찌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였다가 도피하면서 구차하게 면하려고 하겠습니까? 또 오늘날 부민(部民) 중에서 고소하는 자는 끊임없이 계속되나 수령으로 죄를 받은 자는 몇백 명에 한 둘도 없으니, 어찌 수령은 모두 올바른 데서 나왔고 부민은 모두 무고했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추국(推鞫)할 때에 고소한 것이 사실이고 수령이 범(犯)한 것이 많으면 품관 향리(品官鄕吏)가 수령과 부동(符同)하여 고소한 자에게 뇌물이 후히 주고 꾀어서 도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도망은 했다고 하지만 처자(妻子)의 생업은 옛과 다름이 없으며, 수령의 무양(撫養)함은 더욱 돈독하고 대우는 더욱 후하게 하니, 그 고소한 자는 이미 수령을 욕하고 또 후한 이익을 얻게 되어 스스로 득계(得計)했다고 하며, 죄를 다스리는 자는 이로 인하여, ‘고소한 자가 도망하여 증험(證驗)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죄를 묻지 않고 버려두니, 고소한 자나 피소(被訴)된 자가 모두 교묘한 계략으로써 국법을 빠져나갑니다. 신 등은 원컨대 부민으로서 수령을 고소한 자가 도망할 경우에는 무고(誣告)로써 논죄하여 처(妻)나 자식을 타도(他道)의 잔역(殘驛)에 소속시키고, 수령이 고소한 자를 꾀어서 도피시키게 한 자는 그 고소한 내용대로 처벌하도록 하소서. 그리하면 고소한 자는 비록 상을 주어도 도망하지 않을 것이고, 수령으로 피소(被訴)된 자도 역시 구차하게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관을 설치하고 직무를 분담시켜 각기 맡은 바 직책이 있으니, 결송(決訟)을 맡은 관아가 넷으로, 장례원(掌隷院)·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본부(本府)가 그것인데, 관장하는 바가 아니면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전택(田宅)에 관한 일은 장례원에서는 맡지 아니하고, 강상(綱常)에 관한 일은 형조에서는 맡지 아니하고, 도적(盜賊)에 관한 일은 본부에서는 맡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각 아문(衙門)의 소송자(訴訟者) 중에서 만일 상피(相避)582) 할 관원과 마주치게 되면 소송을 정지하고 체임(遞任)을 기다렸다가 다시 소송하였는데, 오늘날의 관리들은 만일 상피(相避)를 당하게 되면 상호간에 조사하도록 미루어, 장례원에서 상피할 것이 있으면 형조로 이관하고, 형조에서 상피할 것이 있으면 한성부로 이관하고, 한성부에서 상피할 것이 있으면 본부로 이관하고, 본부에서 상피할 것이 있으면 부득이 사간원(司諫院)·의금부(義禁府)에 이관하여, 돌아가며 서로 미루고 이관시키므로 언제 단결(斷決)할지 모르게 됩니다. 신 등은 원컨대, 각 아문의 소송자 중 만일 상피할 관원과 마주치게 되면 구례(舊例)대로 소송을 정지하여 체임(遞任)을 기다릴 것이고, 부득이 소송을 청리(聽理)할 것이 있으면 응당 회피할 관원은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다른 관원이 청리토록 하여 조사를 미루지 말도록 하되, 어긴 자는 처벌하도록 하소서. 오직 판서(判書)·판윤(判尹)·대사헌(大司憲)을 판결하는 사건은 한 관(官)의 장(長)이므로 응당 회피할 것이니, 모름지기 체임을 기다렸다가 청리하도록 허락하소서.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래로 사족(士族)의 집에는 모두 노비를 두어 대대로 계권(契券)583) 을 지켜왔으므로, 노비가 주인에 대하여는 군신(君臣)의 명분이 있어 상하 존비(上下尊卑)의 구별이 정연하여서 문란함이 없었는데, 장용대(壯勇隊) 설치 이후부터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기 시작하였고, 더욱이 정해년 북정(北征)의 전역(戰役)으로 공사 천민이 화살과 쌀을 운반하여 천인의 신분을 면하고 양민이 된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천민이 바뀌어 양인(良人)이 되는 것도 이미 분수가 아닌데, 지금은 지나치게 많이 갑사(甲士)가 되어 으레껏 높은 관직에 올라 개중에는 노비와 주인이 동렬(同列)에 있는 자도 있고, 개중에는 노비가 오히려 높은 직위에 있는 자도 있으니, 명분(名分)이 크게 무너지고 예속(禮俗)이 날로 그릇되고 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갑사(甲士)가 비록 군직(軍職)이지만 역시 무반(武班)이므로 벼슬이 대부(大夫)에 이르면 그치는데, 의관 자제(衣冠子弟)로 입속(入屬)한 자가 또한 많으니, 앞으로는 천인의 신분을 면하여 양인이 되는 자는 갑사에 소속됨을 허락하지 말고, 모두 정병(正兵) 혹은 제사(諸司) 장인(匠人)에 예속시키어 명분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혼인(婚姻)은 생민(生民)의 시작이며 만복(萬福)의 근원이니, 혼인할 때를 잃으면 인도(人道)가 혹 퇴폐해집니다. 지금 의관(衣冠)·사족(士族)의 집에서 혹은 빈핍(貧乏)하거나 혹은 부모 구몰(俱沒)로 인하여 제때에 혼가(婚嫁)를 못하였고, 혹은 계모를 두었다가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장성한 남매들이 노비와 전택(田宅)을 겸병하는 자가 있으면 고의로 혼인을 하지 아니하며, 혹은 나이 4, 50이 되거나 혹은 종신토록 혼가(婚嫁)를 하지 않은 자, 혹은 강제로 집에서 내쫓아 여승[尼]이 되게 하는 자가 있어, 풍속이 박악(薄惡)하기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여자 나이 25세로 시집가지 못한 자와 처녀로 삭발하여 여승이 된 사람 중에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죄주고, 계모(繼母) 및 동생 형제(同生兄弟)로서 겸병하여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는 불자 불목(不慈不睦)의 죄로 논하며, 또 《대전(大典)》 노비 합집(合執)584) 의 사례에 의하여 그가 마땅히 얻은 노비와 전택은 그 사람에게 급부(給付)하게 하여 박악한 풍속을 혁신하도록 하소서.

영안도(永安道)·평안도(平安道)는 나라의 후문(後門)이 되므로 군병(軍兵)과 양저(糧儲)를 채우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앞서는 양계(兩界)의 전세(田稅)를 모두 본도(本道)에 수납하여 양향(糧餉)585) 이 마땅히 여분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정해(丁亥) 북정(北征)하던 수 개월 사이에 양향이 절핍되어 조정에서 비만(飛輓)586) 하게 한 것이 매우 번거로왔습니다. 지금은 양도(兩道) 갑사의 녹봉을 모두 본도(本道)에서 지급하니, 살피건대 군량이 날로 소모되어 유사시에 의지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 등은 원컨대 양도에 사는 제사(諸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587) 을 포물(布物) 대신 미곡으로 시가(時價)에 따라 각각 본관(本官)에서 수납하여 군수(軍需)를 비축하게 하소서.

해변의 주민은 오로지 어염(魚鹽)을 생업(生業)으로 삼고 있고, 주현(州縣)에서는 역시 그들의 이익을 바탕으로 세금을 거두어 경비로 쓰며, 호조에서도 세금을 거두어 국용(國用)에 충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도(諸道)의 어전(魚箭)은 많이 별사(別賜)되어 권문 세족이 그 이익을 독점하여 백성을 침탈(侵奪)하므로 세민(細民)들은 추호의 이익도 얻지 못하며, 주현(州縣)에서는 하사(下賜)를 받지 못해서 국용 또한 손실이 되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천지(天地)는 만민을 위하여 재물을 내었으니 권문 세가가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앞서 별사한 어전(魚箭)을 모두 국가에 환속(還屬)하도록 하여 평민으로 하여금 이익을 보도록 한 다음, 호조에서는 어전을 상·중·하로 나누어 장부를 비치하고 매년 세금을 징수하여 국용을 넉넉하게 하도록 하소서.

세습(世襲)하는 제도가 비록 오래 되었으나, 아비가 생존해 있을 때에 아들이 습직(襲職)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종친(宗親) 중 아비가 봉군(封君)되어 있는데도 아들 또한 봉(封)해지는 자가 제법 많으니, 다만 옛법에 합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리상으로도 미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수세(收稅)상의 수입은 한계가 있는데 종친으로 수봉(受封)될 자가 한없이 많아서, 이로 말미암아 녹과(祿科)가 옛날의 배(倍)가 됩니다. 신 등은 원컨대 종친의 적장자(嫡長者)로 으레 봉군(封君)될 자는 그의 아비가 죽은 뒤에 습봉(襲封)하도록 하소서.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천하(天下)의 대국을 통치하면서도 이직(吏職)을 감손(減損)하여 단지 3백 70원(員)을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작기가 중국의 십 분의 일밖에 안되는데도 이원(吏員)의 많기가 당(唐)나라와 거의 마찬가지이니, 크게 줄여도 오히려 용관(冗官)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관습 도감(慣習都監)·사옹원(司饔院)·상의원(尙衣院) 등 별좌 아문(別坐衙門)이 모두 육시(六寺)와 비슷하고, 장원(掌苑)·사포(司圃)·사축(司畜)·사지(司紙)·전설수(典設守)와 같은 것이 모두 녹관(祿官)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지난날에 별좌(別坐)로서 다스렸을 때 손해본 것은 어떤 일이며 지금 녹관(祿官)으로 다스려서 이루어 놓은 것은 어떤 일입니까? 한갓 늠록(廩祿)만 허비할 따름입니다. 광흥창(廣興倉)의 일년 조부(租賦)의 수입이 일년의 녹봉액을 지급하기에 부족하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 등은 원컨대 앞서의 녹이 없는 여러 아문은 모두 구제(舊制)를 복구하여 낭비를 줄이도록 하소서.

재상(宰相)의 직책은 오직 나라를 다스림에 있는 것이며, 세세한 일을 돌보는 것이 아니니, 진평(陳平)588) 이 전곡(錢穀)의 수를 몰랐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는 삼공(三公)의 도제조(都提調)는 다만 승문원(承文院)·서운관(書運觀) 양사(兩司)뿐이었는데, 승문원은 사대(事大)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고 서운관은 역상(曆象)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낸 자 및 이미 정1품(正一品)직을 거친 자가 와서(瓦署)·장악원(掌樂院)·조지서(造紙署)·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 등의 도제조가 되어 친히 사소한 일을 돌보니, 대신(大臣)을 높이고 예우한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구제(舊制)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감사(監司)는 국가를 위해 한 지방을 선화(宣化)하고 병사(兵使)는 국가를 위해 천리를 절충(折衝)함이 그들의 임무이므로, 그들이 마땅히 주(州)·군(郡)을 순행(巡行)하여 이익되는 점과 병폐되는 점을 논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평안도(平安道)·영안도(永安道) 양도의 감사와 병사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는 직임이므로, 이미 처자를 거느렸기 때문에 아문(衙門)에 있는 날이 많아서 한 해에 한두 번 순행하거나 혹은 도사(都事)나 평사(評事)를 파견하여 대신 순행하게 하고 유유히 세월만 보내면서 체임(遞任)될 기한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출척(黜陟)과 지휘[節度]하는 자의 직책에 너무도 맞지 않습니다. 하물며 감사가 있는 곳에 도사(都事)가 있고 검률(檢律)·심약(審藥)이 있고 반인(伴人)이 있고 또 육방(六房)이 있으며, 병사가 있는 곳에 우후(虞候)가 있고 군관(軍官)·심약이 있고 또 육방이 있어, 인수(人數)가 너무 많고 경비도 호번(浩繁)하니, 평양(平壤)·영흥(永興)·북청(北靑)·영변(寧邊)이 아니면 한 관원이 능히 혼자서 맡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가족을 거느리는 수령의 노비와 구마(廐馬)와 태재(駄載)589) 의 수가 정수(定數)를 어기면 감사와 병사가 규찰하겠지마는, 감사와 병사의 과실은 누가 이를 규찰하겠습니까? 감사와 병사가 먼저 스스로 법을 어긴다면 어찌 백성을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 등은 원컨대 양계(兩界)의 감사와 병사는 모두 가족을 거느리지 못할 직임으로 하도록 하소서.

부사(府使)·서도(胥徒)는 모두 사류(士類)입니다. 중국 조정에는 여러 아문의 이서(吏胥)가 모두 월봉(月俸)이 있어 처자를 부양했었는데, 지금의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는 사사로이 양식을 가져와야 하니, 고생스럽게 근무합니다. 녹사는 사일(仕日)이 만료되면 수령으로 취재(取才)하고 서리는 역승(驛丞)으로 취재하여, 전조(銓曹)에서 장부를 만들어 자리가 비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장부에 기록된 자는 많고 빈자리는 적어서 곧바로 제수하지 못합니다. 지금 들으니 녹사 중에 취재되어 장부에 기록된 자가 5, 60명 선에서 내려가지 않고, 사일(仕日)이 만료된 자도 끊임이 없어 많기가 땔감 더미만 하다고 합니다. 가령 5, 60명 내에서 일년에 한 사람씩 수직(受職)된다면 5, 60년이라야 바야흐로 모두 제수될 것이고, 일년에 두 사람씩 수직한다면 25년 내지 30년이라야 바야흐로 모두 제수될 것이니, 나머지는 모두 이를 미루어 보아 수직될 날이 없으므로 헛되이 공로를 버리고 죽는 자도 또한 많을 것입니다. 늘 하정일(下政日)에 사람마다 목을 빼고 일명(一命)이 더해 지기를 기다리나, 문득 발이 빠른 자가 탈취해 버려서 단지 지붕만 쳐다보고 탄식만 할 따름입니다. 신 등이 세종조(世宗祖)를 보니 성중관(成衆官)590) 에는 선차(宣差)591) 됨이 있거나 녹사가 있거나 내직(內直)이 있거나 사준(司樽)이 있어 도목(都目)마다 으레 모두 사람을 들이거나 거관(去官)함에 모두 단망(單望)으로 득천(得薦)하여, 혹은 수령도 되고 혹은 경관(京官)도 되는 등 곧바로 서용(敍用)되어 조금도 엄체(淹滯)됨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단지 한결같이 녹사일 따름이니, 엄체됨이 이와 같습니다. 신 등은 원컨대 수령의 임용 대상 장부에 기록된 자는 그 연월(年月)의 오래되고 가까움을 상고하여 하정(下政) 때마다 빈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제수하되, 천주(薦注)에는 삼망(三望)592) 을 하지 말고 옛날 제도대로 단망(單望)으로 제수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하소서.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근원이고, 예의(禮義)를 솔선하는 곳인데, 근래에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의 여러 유생이 사장(師長)을 속이고 업수이 여기고 나쁜 말로 함부로 욕하며, 혹은 시장(詩章)으로 전파시키고 혹은 편지로 써서 갖은 방법으로 비방을 하여, 풍교(風敎)의 훼손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서경(書經)》593) 에 이르기를, ‘훈전(訓典)을 따르지 아니하거든 그 정강(井疆)594) 을 따로 하여 능히 두렵고 사모하게 하라.’ 하였고, 《예기(禮記)》595) 에 이르기를, ‘변화되지 않으면 교외로 옮기고 그래도 변화되지 않으면 향수(鄕遂)로 옮긴다.’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 중에는 재주를 믿고 세력을 믿어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을 하고 복식(服飾)을 남과 달리 한 자가 있어 방종(放縱)하고 방자하여 자질구레한 예절을 삼가하지 않으려는 자가 있고, 마음 속에 절조를 행하려 함이 없어 예교(禮敎)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자가 있습니다. 생원(生員)·진사(進士)는 강등시켜 기재생(寄齋生)596) 과 동렬이 되게 하고, 기재생은 사학(四學)으로 내리고 사학 생도는 경기 주현(州縣)의 향교(鄕校)로 내리어,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게 한 연후에 복원(復元)하게 하며, 그 중 혹 마음을 고쳐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학교에서 내쫓아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부거(赴擧)를 정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장(師長)을 속이고 업수이 여기며 명교(名敎)를 간범(干犯)하고 풍속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북을 쳐 학교에서 내쫓아 영영 부거(赴擧)를 정지시키고 다시는 학도(學徒) 속에 끼워주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학교의 벌은 관부(官府)의 형벌과 다른데, 지금 유생의 범죄는 으레 유사(有司)에 이관하여 관부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니, 유생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앞으로 유생의 범죄는 학관(學官)이 교형(敎刑)으로 논단(論斷)하고 유사에게 이관하지 말도록 하고, 만약 죄를 범한 것이 심중(深重)하여 모름지기 유사를 경유하여 논단할 자는 이 사례에 구애되지 말도록 하소서.

옛날 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의 2관(二館) 및 승문원의 참외관(參外官)은 양 도목(兩都目)597) 마다 한 사람씩 거관(去官)하였는데, 성균관에는 관원이 두 사람씩 거관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을 쌓아 천전(遷轉)하는 것이라 현부(賢否)를 논할 것 없이 차례대로 거관한 사람들이므로, 거관의 일에 당해서는 자리가 없어 옮기지 못한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도목에서 제수할 때 비록 삼관(三館)의 거관자라도 삼망(三望)을 비열(備列)하여 만약 수점(受點)하지 못하면 거관될 수 없으니, 도목(都目)하여 거관(去官)하는 법에 매우 어긋납니다. 신 등은 원컨대 삼관의 거관 당차자(當次者)도 역시 삼망하지 말고 단망으로 천주(薦注)하도록 하소서.

《대명률(大明律)》에는 사사로이 승니(僧尼)가 됨을 금지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정전법(丁錢法)598) 을 만들었으나, 법을 무릅쓰고 중[僧]이 된 자가 오히려 많은데, 항차 여승[尼]이 되는 데는 금지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사족(士族)의 부녀(婦女)가 삭발하여 출가(出家)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캐어보면 성심(誠心)으로 부처에 귀의한 자는 한두 명도 없고, 혹은 실행(失行)하여 여승이 된 자가 있고, 혹 남편이 죽은 후에 명복(冥福)을 빈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제멋대로 음탕한 짓을 펴기 위해 여승이 된 자도 있습니다. 지금도 승니(僧尼)들 중에는 서로 왕래하여 추문이 널리 퍼진 자가 있으니, 어찌 세상의 도의가 한심(寒心)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원컨대 앞으로는 사족의 부녀로서 여승이 된 자는 한결같이 모두 금단(禁斷)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원상(院相)과 의논하여 그 중에 여덟 조목을 채용(採用)하였으니, 차자(箚子)를 사용하게 하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전주(傳奏)하지 못하게 하며, 환관은 종2품으로 그치게 하고, 부민(部民)이 수령을 고소하고 도망한 자는 무고(誣告)로써 논죄하며 수령 중 꾀어서 도피시킨 자는 고소대로 처벌하게 하고, 천인의 신분을 면하여 양민이 된 자는 갑사(甲士)에 소속시키지 말며, 양계(兩界)에 사는 제사(諸司) 노비의 신공(身貢)은 미곡(米穀)으로 수납하게 하고, 녹사(錄事)는 단망(單望)으로 주천(奏薦)하게 하며, 유생은 교형(敎刑)으로 논죄하고, 사족의 부녀로 여승이 된 자를 금단하는 등의 일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3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48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궁관(宮官) / 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병참(兵站) / 수산업(水産業) / 신분-천인(賤人) / 사법-치안(治安) / 풍속-예속(禮俗)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윤리-강상(綱常) / 사상-불교(佛敎)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572]
    계본(啓本) : 임금에게 상주하는 글월.
  • [註 573]
    계목(啓目) : 계본에 붙이는 목록.
  • [註 574]
    중관(中官) : 환관(宦官).
  • [註 575]
    전대(前代) : 고려.
  • [註 576]
    행직(行職) : 품계는 높으나 임직(任職)은 낮은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 이러한 경우 그 직함의 앞에 행(行)자를 붙이므로, 이 이름이 있음.
  • [註 577]
    체아(遞兒) :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직으로 거관(去官)되어야 할 때 적당한 자리가 없으면 임시로 오위(五衛)의 상호군(上護軍)·사직(司直)·사과(司果)·사맹(司猛) 등의 무관직에 보(補)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이러한 관직은 관명만 있고 실제 직무는 없으며, 녹봉만 주는 직으로 대기직과 비슷함.
  • [註 578]
    정해년의 북정(北征) : 세조 13년(1467)에 서변 4군(西邊四郡)에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을 보내어 서변의 야인을 소탕하고 그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목을 베고 개선한 사건.
  • [註 579]
    준직(准職) : 품계에 준하는 실직(實職)의 벼슬을 주는 것.
  • [註 580]
    검직(檢職) :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정원 외에 임시로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설치한 허직(虛職)을 말함. 주로 나이가 많은 원로(元老)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녹봉만 받고 하는 일이 없었음.
  • [註 581]
    고소(告訴) : 수령의 관할 안에 있는 백성들이 그 수령의 잘못을 직접 고소하는 것. 존장자(尊長者)를 우대하기 위하여 이를 금지하였음.
  • [註 582]
    상피(相避) : 친족(親族) 또는 기타의 관계로 인하여 같은 부서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聽訟)·시관(試官) 같은 것을 피함.
  • [註 583]
    계권(契券) : 계약서.
  • [註 584]
    합집(合執) :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져야 할 노비(奴婢)와 전토(田土)를 한 사람이 모조리 강제로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함.
  • [註 585]
    양향(糧餉) : 양식.
  • [註 586]
    비만(飛輓) : 군량의 운송을 말함.
  • [註 587]
    노비 신공(奴婢身貢) : 노비가 신역 대신에 바치던 공물.
  • [註 588]
    진평(陳平) : 한(漢)나라의 재상(宰相).
  • [註 589]
    태재(駄載) : 짐바리.
  • [註 590]
    성중관(成衆官) : 왕의 근시(近侍)·숙위(宿衛)만 맡은 관리로, 고려 때 때부터 있었던 관직임. 몽고어의 성중 애마(成衆愛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내시(內侍)·다방(茶房)·사순(司循)·사이(司彝)·충용(忠勇)·사의(司衣) 등이 이에 속하고, 조선조 때도 있었는데 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 등이 이에 속함.
  • [註 591]
    선차(宣差) : 무과에 급제한 사람을 선전관으로 임명하는 것.
  • [註 592]
    삼망(三望) :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
  • [註 593]
    《서경(書經)》 : 주서(周書) 필명편(畢命篇).
  • [註 594]
    정강(井疆) : 마을 경계.
  • [註 595]
    《예기(禮記)》 : 왕제편(王制篇).
  • [註 596]
    기재생(寄齋生) : 성균관(成均館)에서 기거(起居)하며 공부하는 유생(儒生)을 말함.
  • [註 597]
    양 도목(兩都目) : 한 해 동안 관리의 근무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출척(黜陟)을 두 차례나 하던 것을 말함. 6월에 하는 것을 소정(小政), 12월에 하는 것을 대정(大政)이라 하였음.
  • [註 598]
    정전법(丁錢法) : 중이 군역(軍役)을 면제하기 위하여 도첩(度牒)을 받을 때, 관아에 바치던 군포(軍布)의 대납금(代納金)을 내던 법. 보통 정포(正布) 30필씩을 내었음.

○先是, 司憲府大司憲徐居正等上疏, 至是乃下。 其疏曰:

古者, 大臣論事, 必皆面對, 若或人主, 不以時賜見, 則大臣自請面對, 誠以國家大政大事, 必須敷陳利害, 面稟施行。 不然有矯詐壅蔽之禍, 其爲慮深矣。 今大臣, 或有各衙門職務, 非啓本啓目, 別有論奏事, 則例皆言於承政院, 承政院傳於中官, 中官轉聞于上, 出納往復之間, 下情或不能盡達, 上下情意, 不無阻隔。 臣等以爲, 殿下日三御經筵, 待臣下有時。 若大臣欲奏公事, 每許三時經筵引見, 若非面對, 則用箚子, 非箚子則用單子, 勿使中官傳奏, 以防壅蔽。 設官分職, 將欲治事, 今中樞府與議政府, 敵爲兩府, 有領事、判事、知事、同知事、僉知事堂上二十四員, 經歷、都事僚佐二員, 專不治事。 臣等嘗考前代, 中書省論政事, 樞密院掌軍務。 今議政府, 卽古中書省, 論政事, 中樞府, 卽古樞(察)〔密〕 院, 徒擁虛名, 不任兵務, 國家別設都摠府, 都摠管十人、僚佐八人, 專掌軍旅, 不合古宜。 今臣等願, 革都摠府, 其管掌機務, 竝委中樞府, 擇人選授以代摠管之任, 兩府僚佐, 竝合爲一。 忠信重祿, 所以待士也, 今堂上授行職八九品者, 幾至百人。 國家非不欲優待, 但員多闕少, 不得已降授行職, 不絶其祿而已。 然旣曰堂上官, 名位已尊, 下與司勇、司猛軍卒同伍, 又或爲弓人、矢人、百工、遞兒者, 似非古者忠信重祿之意, 是失在於朝廷也。 爲行職者, 無職事於朝, 無寸效於國, 坐費俸錢, 不自引退, 似非古人處己之道, 是失在於下也。 上失待遇, 下失處己, 上下俱失其道, 臣等未見其可也。 臣等及見世宗盛時, 堂上官, 不輕授之。 當此之時, 旣無濫授, 安有是弊? 近年以來, 官爵大濫, 重以丁亥北征西征之擧, 陞堂上者旣多, 人人準職除授亦難矣。 今授行職者, 有文武吏能, 可大任用者, 有闒茸猥瑣, 不能爲有無者, 悠悠一轍, 沈滯屈抑, 於國家用人之體, 亦爲未得。 臣等願, 令吏、兵曹, 錄可用者, 於郡、府以上守令, 隨其才幹選授, 不得已授行職者, 不下五六品, 勿授參外職, 其不可任者, 悉皆汰去, 或授檢職, 優禮遣之。 帝王之道, 親親爲大, 親親之道, 在於尊位重祿, 不任以事。 有功不可加官, 有罪不可加刑, 處之甚難。 歷代帝王及我祖宗, 遵用是道, 不任宗親, 間者宗親多列於東西班, 又許文武科赴試。 我殿下, 旣罷赴試之法, 又不輕授東班。 然宣傳官、將, 猶或依舊任用, 恐未可也。 請悉罷之, 以遵祖宗之法。 古者黃門之任, 但備掃除宮闈而已, 後世倚任過重, 亂亡相繼, 誠可嘆已。 高麗 忠烈王以前, 宦寺不授參職, 其裁抑得體祖宗之制, 亦不過從二品, 近者宦寺多參勳列, 因緣僥倖, 或至一品或至正二品, 驟陞高秩, 舊法漸壞。 臣等願, 自今宦官, 依《大典》官至從二品而止, 其陞級亦毋過其品, 雖爲功臣階高者, 職秩不過從二品, 以惜名器。 國家有部民告訴之禁, 自己冤抑, 乃許聽理。 今之告訴者, 條陳守令不法, 間以一二自己冤抑, 法司聽理, 若告訴不實, 則例皆逃亡。 夫守令民之父母, 民者守令之子, 安有子訴其父, 避逃苟免乎? 且今之部民告訴者, 相繼不絶, 而守令受罪者, 百無一二, 豈守令盡出於正, 而部民皆誣告乎? 但於推鞫之際, 告者實, 而守令犯多, 則品官鄕吏, 與守令符同, 厚賂告者, 誘令逃亡。 雖曰逃亡, 而妻子之生業自若, 守令撫之益篤, 待之益厚, 其告者旣辱守令, 又得厚利, 自以爲得計, 按罪者因曰: "告者逃亡, 無證可驗。" 置而不問, 訴者被訴者, 皆以巧計, 得逃邦憲。 臣等願, 部民訴守令者, 在逃者以誣告論, 妻子屬他道殘驛, 守令誘令逃避者, 以其所告抵罪。 然則訴者, 雖賞之不逃, 守令被訴者, 亦不得苟免矣。 國家設官分職, 各有職掌, 決訟之官有四, 曰掌隷院, 曰刑曹, 曰漢城府, 曰本府, 非其所掌, 不可相侵。 如田宅之事, 不宜於掌隷院, 綱常之事, 不宜於刑曹, 盜賊之事, 不宜於本府。 世宗朝, 各衙門訟者, 如遇相避官則停訟, 以待遞任復訟。 今之官吏, 如遇相避, 互相推調, 於掌隷院有避, 則移刑曹, 於刑曹有避, 則移漢城府, 於漢城府有避, 則移本府, 於本府有避, 則不得已移司諫院、義禁府, 轉相推移, 斷決無時。 臣等願, 各衙門訟者, 如遇相避官, 依舊例停訟, 以待遞任, 有不得已聽訟者, 則應回避官不參, 他員聽理, 勿許推調, 違者罪之。 唯判書、判尹、大司憲判決事, 則一官之長, 應回避者, 須待遞任, 方許聽理。 吾東方, 自箕子受封以來, 士族之家, 皆有奴婢, 世守契券, 奴之於主, 有君臣之分, 上下尊卑之別, 整然不紊。 自設壯勇隊以後, 奴始背主, 重以丁亥北征之役, 公私賤口, 輸箭運米, 免賤從良者, 不知其幾。 變賤爲良, 已非分矣, 今則濫得爲甲士, 例陞高秩, 或有奴主同伍者, 或奴反居上者, 名分大壞, 禮俗日非。 臣等以爲, 甲士雖軍職, 亦武班, 官至大夫而止, 衣冠子弟入屬者亦多, 自今免賤爲良者, 勿許屬甲士, 皆隷正兵, 或諸司匠人, 以正名分。 婚姻生民之始, 萬福之源, 婚姻失時, 人道或廢。 今衣冠士族之家, 或因貧乏, 或父母俱沒, 不以時婚嫁, 或有繼母, 或有父母俱亡, 長娚妹有欲兼幷奴婢田宅者, 則故不爲婚嫁, 或年四五十, 或終身不嫁者, 或强令出家爲尼者, 風俗薄惡, 一至此極。 臣等願, 女年二十五歲未嫁者, 處女剃髮爲尼者有父母者, 罪其父母, 繼母及同生兄弟兼幷專利者, 論以不慈不睦之罪, 又依《大典》奴婢合執之例, 其當得奴婢田宅, 給付其人, 以革薄風。 永安平安道, 爲國後門, 軍兵糧儲, 不可不實。 在前兩界田稅, 皆於本道收納, 糧餉宜若有餘, 丁亥北征數月之間, 糧餉之絶, 至煩朝廷飛輓。 今則兩道甲士祿俸, 皆給於本道, 竊恐軍儲日耗, 緩急不可爲倚。 臣等願, 兩道居諸司奴婢身貢, 除布物以米穀, 隨其時直, 各於本官收納, 以備軍需。 濱海之民, 專仰魚鹽, 以爲生業, 州縣亦資其利, 以支調度, 戶曹亦收稅, 以充國用。 今諸道魚箭, 多以別賜, 豪勢貴近之家, 獨專其利, 侵牟百姓, 細民不得秋毫之利, 州縣未受其賜, 國用亦損。 臣等以爲, 天地爲萬民生財, 貴勢不當與民爭利。 在前別賜魚箭, 皆還屬公家, 聽平民自利, 戶曹分魚箭上中下置簿, 歲收其稅, 以贍國用。 世襲雖古, 然未聞父在子襲。 近來宗親之父在封君, 而子亦得封者頗多, 非徒不合於古, 於義亦未安。 且收稅之入有限, 宗親之受封者無窮, 由是祿科倍舊。 臣等願, 宗親嫡長, 例應封君者, 俟其父沒得襲。 昔 太宗, 以天下之大, 減損吏職, 只置三百七十員。 我國之小, 比天下十分之一, 吏員之多, 視唐無幾, 大加汰省, 尙懼猥冗。 今以慣習都監、司饔、尙衣等院, 別坐衙門, 皆比於六寺, 如掌苑、司圃、司畜、司紙、典設守之類, 皆爲祿官。 臣等以爲, 嚮者以別坐治之, 而所損者何事, 今者以祿官治之, 而所建者何事? 徒費廩祿而已。 廣興倉一年租賦之入, 不足以支一年祿俸之數, 誠非細故。 臣等願, 前此無祿諸衙門, 皆復舊制, 以省濫費。 宰相之職, 唯在經邦, 不親細事, 如陳平不知錢穀之數是已。 世宗朝, 三公都提調, 但承文院、書雲觀兩司而已, 承文院重事大也, 書雲觀重曆象也。 今曾經政丞及已經正一品職事者, 爲瓦署、掌樂院、造紙署、司僕寺、軍器寺等司都提調, 親履細事, 非所以尊禮大臣也。 乞依舊制。 監司, 爲國家宣化一方, 兵使, 爲國家折衝千里, 是其任, 宜巡行州郡, 咨訪利病。 今平安永安兩道監司、兵使, 挈家之任, 旣坐妻子之累, 在衙日多, 一歲或一二巡行, 或遣都事、評事代行, 悠悠歲月, 以待遞期, 甚不合於黜陟、節度者之責。 況監司所在, 有都事焉, 有檢律、審藥焉, 有伴人焉, 又有六房焉, 兵使所在, 有虞候焉, 有軍官、審藥焉, 又有六房焉, 人數甚多, 支調浩繁, 非平壤永興北靑寧邊, 一官所能獨辦。 至如挈家守令臧獲、廐馬、駄載之數, 有過制者, 則監司、兵使得以糾擧, 監司、兵使之失, 孰得而糾之? 任方面者, 先自犯法, 何以令爲? 臣等願兩界監司、兵使, 皆不得挈家之任。 府史胥徒, 亦士之流也。 中朝則諸衙門吏胥, 皆有月俸, 以養妻子, 今之錄事、書吏, 齎私糧, 艱苦從仕。 錄事則仕滿, 守令取才, 書吏則驛(承)〔丞〕 取才, 銓曹置簿, 以待窠闕。 然置簿多, 而窠闕少, 不卽除授。 今聞錄事取才置簿者, 不下五六十人, 仕滿者相繼不絶, 多如積薪。 假令五六十人內, 一年一人受職, 則五六十年, 方可畢除, 一年二人受職, 則三十、二十五年, 方可畢除, 餘皆類推, 受職無日, 虛棄功勞, 身死者亦多。 每下政之日, 人人引領, 顒望一命之加, 而動爲疾足者所奪, 但仰屋嘆息而已。 臣等及見世宗朝, 成衆官有宣差焉, 或錄事焉, 有內直焉, 有司樽焉, 每都目, 例皆入人去官, 皆單望得薦, 或爲守令, 或爲京官, 隨卽敍用, 不少淹滯。 今則只一錄事而已, 淹滯若是。 臣等願, 守令置簿者, 考其年月久近, 每政有窠闕, 必先除授, 薦注不必三望, 依舊制單望除授, 以解鬱抑。 學校, 風化之源, 禮義相先之地, 近來成均ㆍ四學諸生, 欺侮師長, 惡言慢罵, 或播於詩章, 或筆之於書, 誹謗百端, 風敎之毁, 一至於此, 良可痛也。 《書》曰: "不率訓典, 殊厥井疆, 俾克畏慕", 《禮》曰: "不變移之郊, 不變移之遂", 今儒生之有恃才、恃勢, 巧言令色, 服飾違衆者, 放縱自肆、不矜細行者, 無心行節操, 不順禮敎者。 生員、進士降齒於寄齋, 寄齋下四學, 四學生徒下京畿州縣鄕校, 使之悔過改行, 然後復之, 其或不悛心率敎者黜學, 計年停擧。 有欺侮師長, 干犯名敎, 傷風敗俗者, 鳴皷黜學, 永永停擧, 不復齒於學徒。 且學校之罰, 異於官府之刑, 今儒生犯罪, 例移有司, 治以官府, 非待儒生之道。 自今儒生犯罪, 學官以敎刑論斷, 勿移有司, 若罪犯深重, 須經有司論斷者, 勿拘此例。 昔者藝文、校書二館及承文院參外官, 兩都目每一人去官, 成均館員多二人去官, 是皆積功遷轉, 不論賢否, 次次去官者也, 當去官之日, 未有無闕未遷者。 今則都目除授時, 雖三館去官者, 備列三望, 若不受點, 未得去官, 甚有乖於都目去官之法。 臣等願, 三館去官當次者, 亦不三望, 單望薦注。 《律》有私度僧尼之禁, 故國家立丁錢之法, 然冒法爲僧者尙多, 況爲尼無禁制, 故士族婦女, 剃髮出家者甚衆。 然究其實, 誠心歸佛者, 再無一二, 或有失行而爲尼者, 或有見制於兄弟親戚而爲尼者, 或有夫死之後, 託言薦冥福, 實欲遊偏寺刹, 恣意宣淫, 而爲尼者。 今亦有僧尼互相往來, 醜聲騰聞者, 豈不爲世道寒心哉? 臣等願, 自今士族婦女爲尼者, 一皆禁斷。

上議諸院相, 採用八條, 用箚子, 勿使中官傳奏, 宦官從二品而止, 部民訴守令在逃者, 以誣告論, 守令誘令逃避者, 以所告抵罪, 免賤爲良者, 勿屬甲士, 兩界居諸司奴婢身貢, 以米穀收納, 錄事單望奏薦, 儒生以敎刑論, 士族婦女爲尼者禁斷等事也。


  • 【태백산사고본】 5책 3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9책 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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