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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32권, 성종 4년 7월 3일 임진 2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복창군 김수녕의 졸기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頤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410) 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411) 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412)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413)세조(世祖)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414) 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415) 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416) 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417) 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418) 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419) 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福昌君)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420) 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421) 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3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410]
    속문(屬文) : 글을 얽어서 만듦.
  • [註 411]
    경태(景泰)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412]
    천순(天順) 신사년 : 1461 세조 7년.
  • [註 413]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414]
    성화(成化)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415]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416]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417]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註 418]
    사재(史才) : 역사를 쓰는 재주.
  • [註 419]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420]
    간고(簡古) : 간단하고 예스러움.
  • [註 421]
    위포(韋布) : 가난한 사람을 형용하는 말.

福昌君 金壽寧卒, 輟朝、弔祭、禮葬, 如例。 壽寧頤叟, 號養素堂, 安東人, 折衝將軍之子也。 幼聰慧, 七歲能屬文, 時謂神童。 其外祖左參贊安崇善奇愛之, 嘗曰: "此兒, 他日當大鳴於世。" 景泰癸酉, 年十八, 春中生員試, 秋擢文科第一人, 授集賢殿副修撰, 歷兵曹佐郞、司諫院獻納、藝文館應敎。 時上黨君 韓明澮咸吉平安江原黃海忠淸五道體察使, 署爲從事官。 天順辛巳, 明澮遣奏邊事, 面對甚悉, 世祖嘆賞曰: "今聞爾言, 雖隔千里, 如與明澮面語", 特加一階。 壬午, 世祖慶會樓, 命藝文諸儒, 論難古昔帝王得失, 壽寧證據經史, 辨析是非, 輒言動聽, 又命加階, 尋擢爲承政院同副承旨, 以事罷。 成化乙酉, 拜僉知中樞院事, 尋拜禮曹參議。 丙戌復拜左承旨, 遞爲工曹參議, 歷刑曹、戶曹參議。 戊子進階嘉善, 庚寅拜大司諫。 參撰世祖睿宗兩朝實錄, 時稱有良史才。 辛卯賜純誠佐理功臣號, 封福昌君, 陞嘉靖, 歷戶曹、工曹參判, 是年復拜福昌君。 至是卒, 年三十八。 諡文悼, 博問多見文, 中年早夭悼。 壽寧天資明敏, 學問該博, 爲文章超邁簡古, 操筆立就, 不蹈襲前人語。 然不置槀, 以是詩文傳世者少。 外和內剛, 苟非其人, 雖達官貴要, 終日相對, 未嘗與之言, 如其人也, 雖韋布之士, 必屣履迎接。 不營産業, 常待祿而飽, 僦屋而居, 終身坦蕩, 細故不(芥)〔介〕 于胸。 但滑稽多大言, 無君子謹默之容, 人以是短之。


  • 【태백산사고본】 5책 3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