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장에게서 세를 거두는 것과 화폐 등의 일을 원상들이 의논하여 아뢰다
이보다 앞서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국폐(國幣)로 행용(行用)하는 면포(綿布)에 인(印)을 찍는 것과 철장(鐵匠)에게서 세(稅)를 거두는 것이 편리한지를 원상(院相)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성봉조(成奉祖)·김질(金礩)이 의논하기를,
"태종조(太宗朝)에서 시중(市中)의 포화(布貨)와 잡물(雜物)은 경시서(京市署)를 시켜 인을 찍고 세를 거두고서야 팔고 살 수 있게 하였는데, 번거로와서 원망을 일으켰으므로 마침내 행해지지 못했으며, 저화(楮貨)는 세종조(世宗朝)에서 유정현(柳廷顯)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시사(市舍)에 앉아 혹심(酷甚)하게 형벌을 썼으나 역시 행해지지 못했습니다. 지금 국폐(國幣)에 관한 법이 이미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나, 행용되게 할 방법으로는 별다른 계책이 없으니 예전대로 하소서. 행상(行商)에게서 세를 거두는 것은 《대전》에 이미 적혀 있으나, 정철장(正鐵匠)은 주철장(鑄鐵匠)·수철장(水鐵匠)의 유(類)가 아니므로 《대전》에 세로 거두는 법을 싣지 않았으니, 세법을 새로 세우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고 신숙주(申叔舟)가 의논하기를,
"우리 나라의 화폐(貨幣)가 행용되지 않는 데에는 그럴 까닭이 있습니다. 경성(京城) 이외에는 시포(市鋪)가 없으니, 화폐가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화폐가 행용되게 하고자 하여도 그 근본을 연구하지 않으면, 이는 백성을 소요하게만 하는 법이 될 뿐입니다. 화폐가 행용되게 하는 방법은 경외(京外)에서 시포를 열어 백성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게 하는 것밖에 없는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자면 물건을 날라 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돈의 유통(流通)에 힘입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화폐는 반드시 시포가 있어야 통용된다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시포를 설치하는 것은 인심의 소원에 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경인년133) 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힘입어 보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외방에 시포를 설치하는 기회였으나, 호조(戶曹)에서 수령(守令)들에게 물으니 수령들이 이해(利害)를 살피지 않고서 전에 없던 일이라 하여 다들 금지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상습만을 좇는 소견이었습니다. 다만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영견(李永肩)은 금지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호조에서는 굳이 금지하여 천년에나 한 번 있을 기회를 잃었으니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신이 전에도 이것을 아뢰었고 지금도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큰 의논을 세우는 자는 아래로 민심(民心)에 순응하면 그 성취가 쉽습니다. 지금 남쪽 고을의 백성은 전에 이 때문에 스스로 보전하였으므로 그들이 바라는 것이 반드시 같을 것입니다. 이제 외방의 큰 고을과 백성이 번성한 곳에 시포를 설치하도록 허가하되, 강제로 시키지 말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여 민심이 향하는 바를 관망하면 실로 편리할 것입니다. 포(布)를 화폐로 쓰는 것은 전조(前朝)134) 에서 늘 행하였는데, 백성이 지금까지 일컫고 사모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늘 행하다가 오래지 않아 폐지하였는데, 이것은 포를 인세(印稅)로 삼았으므로 백성이 그것을 꺼려서 오래 행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저화(楮貨)를 인세로 삼으면, 저화는 포보다 가벼우므로 반드시 매우 꺼리지는 않을 것이니 행해 볼 만합니다. 중국은 토지가 비옥하여 조세(租稅)로 거둬들이는 것이 매우 많은데도 한 해의 경비로는 화폐를 많이 쓰므로 상하가 서로 의지하고, 밖으로 사이(四夷)135) 를 접하는 것이 성행하여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토지가 척박한데도 오로지 조세로 거둬들이는 것에만 의지하니, 이것이 용도(用度)가 날로 군색해 가되 구제할 방법이 없는 까닭입니다. 신이 전에 이것을 세조(世祖)께 아뢰니 세조께서도 옳게 여기셨으나, 그때 바야흐로 변혁(變革)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 일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 번 시험하시기 바랍니다. 또 주철장(鑄鐵匠)은 바로 녹여서 그릇을 만드나, 정철장(正鐵匠)은 녹이는 자와 그릇을 만드는 자가 각각 다르므로 세를 거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예전대로 세를 거두지 마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8면
- 【분류】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 상업-시장(市場)
- [註 133]
○前此, 傳于承政院曰: "國幣行用綿布踏印、鐵匠收稅便否, 令院相擬議以啓。" 至是鄭麟趾、鄭昌孫、韓明澮、成奉祖、金礩議: "太宗朝市裏布貨雜物, 令京市(暑)〔署〕 踏印收稅, 然後許買賣, 煩擾起怨, 竟不能行, 楮貨則世宗朝柳廷顯爲首相, 坐於市舍, 用刑甚酷, 亦不能行。 今國幣之法, 已載大典, 興用之術, 別無他策, 請仍舊。 行商收稅, 已著《大典》, 正鐵匠非鑄鐵、水鐵匠之比, 《大典》不載收稅法, 新立稅法未便。" 申叔舟議: "我國泉幣之不行, 有由然矣。 京城之外, 無有市鋪, 雖有泉貨, 何所用之? 欲泉幣之興行, 而不究其本, 是徒爲擾民之法耳。 泉幣興行之術, 不過京外開市鋪, 使民有無相遷, 欲有無之相遷, 路有遠近, 必資輕重相推, 然後可致也, 此泉幣之所以必待市鋪而通行者也。 設市鋪, 苟不因人心之所欲, 必不得成。 庚寅之荒, 全羅一道人民, 自相聚集以開市鋪, 號爲場門, 人賴以全。 此正外方設市鋪之機, 而戶曹訪問於守令, 守令不審利害, 以爲前日所無, 皆欲禁之, 此則循常之見耳。 獨羅州牧使李永肩請勿禁, 戶曹固禁之, 乃失千載一機, 惜哉! 臣嘗以是上聞, 今反覆思之, 建大議者, 下順民心, 則其成也易。 今南州之民, 嘗以是自全, 其欲之也必同矣。 今於外方大官及人民繁庶之處, 許置市鋪, 亦勿强之, 從其情願, 以觀民心之所趨, 實爲便益。 以布爲幣, 前朝常行之, 民至今稱慕之。 我國亦常行之不久而罷是, 則以布爲印稅, 故民情憚之, 未能久行。 今以楮貨爲稅, 楮貨輕於布, 必不甚憚, 可試行之。 中國土地肥饒, 租入甚多, 而一年經費, 泉貨居多, 故上下相資, 外接四夷, 沛然有餘。 今我國土瘠, 而專仰租入, 此用度之日窘, 而無救之之術者也。 臣嘗以是, 陳於世祖, 世祖亦以爲然, 而時方變革甚多, 不暇及此。 臣願一試。 且鑄鐵直鎔而成器, 正鐵, 鎔者ㆍ成器者, 各異, 不宜有稅, 仍舊勿稅。"
- 【태백산사고본】 5책 2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9책 8면
- 【분류】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 상업-시장(市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