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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1권, 성종 3년 8월 13일 정축 6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

호조와 병조의 전함사 제조가 조군의 번에 대해 아뢰다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함사 제조(典艦司提調)가 같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보다 앞서 해운 판관(海運判官)과 조전 경차관(漕轉敬差官) 두 관원에게 길을 나누어, 영산성(榮山城) 법성포(法聖浦)의 전세(田稅) 싣는 것을 감찰한 뒤에 또 덕성창(德城倉)에 이르러 싣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산성 법성포에서 비록 혹 싣기를 마쳤더라도 배를 출발시킬 때에는 사람이 감독(監督)하여 배를 인솔할 수가 없어서 매양 풍랑(風浪)을 핑계로 시일을 천연(遷延)하며 출발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판매(販賣)도 행해집니다. 그러한 관계로 전라도(全羅道) 조운(漕運)은 해마다 시기를 잃게 되고, 충청도(忠淸道)의 2운 조전(二運漕轉)이 더욱 늦어집니다. 매양 가을철을 당하면 바람이 높고 파도가 세어 빈배로 회박(回泊)하면서 상패(傷敗)하기가 비일비재합니다. 또 3창(倉)의 조선(漕船) 집물(什物)을 해운 판관(海運判官) 한 사람으로써는 검찰하기가 쉽지 않아 일이 많이 소우(疎虞)합니다. 청컨대 세 조창에 각각 해운 판관을 보내어 오로지 그 일만을 다스려서 적년(積年) 동안 시기를 잃는 폐단을 제(除)하게 하여 주소서. 또 지난 경인년665) 에 조선(漕船) 1백 49척에 배마다 조군(漕軍)을 20명씩으로 정하였으므로 합하여 2천 9백 80명이지마는 본래의 액수(額數)가 적었기 때문에 번(番)으로 휴식할 수가 없어 1년에 집에 있는 날이 3, 4삭(朔)에 지나지 않으므로 힘이 능히 지탱할 수가 없게 되어 장차 도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청컨대 1천 4백 90명을 더 정해 주어서 나누어 3번(番)으로 만들어 두 번은 조운을 하고 한 번은 휴식하도록 하며, 만일 사변(事變)을 만나면 각각 관할하는 배에 기계(器械)를 설치하여 한결같이 모든 포(浦)의 선군(船軍)이 방어하는 것과 같이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책 2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80면
  • 【분류】
    교통-수운(水運)

○戶曹、兵曹、典艦司提調同議啓: "前此, 海運判官、漕轉敬差官二員分道, 監載榮山城 法聖浦田稅, 後又至德城倉監載。 故榮山城 法聖浦, 雖或畢載, 發船時無人, 監督領船等, 每以風水爲辭, 遷延不發, 因行販賣。 緣此, 全羅道漕運, 年年失時; 忠淸道二運, 漕轉尤晩。 每當秋節, 風高濤惡, 空船回泊, 比比傷敗。 且三倉漕船什物, 海運判官一員, 未易檢察, 事多疏虞。 請於三倉各遣海運判官, 專治其事, 以除積年漕運失時之弊。 且去庚寅年, 漕船一百四十九隻, 每船定漕軍二十名, 合二千九百八十名, 元額數少, 不得番休, 一年在家之日, 不過三四朔, 力不能支, 將至流亡。 請加定一千四百九十名, 分爲三番, 二番漕轉, 一番休息, 如遇事變, 各於所管船, 設器械, 一如諸浦船軍防禦。" 從之。


  • 【태백산사고본】 4책 2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80면
  • 【분류】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