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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9권, 성종 3년 6월 6일 신미 7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

일본국 사량위문정수가 세조의 어용을 만든 일에 대해 논의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상송포(上松浦) 원납(源納)의 사송(使送) 사량위문정수(四良衛門正秀)가 와서 고하기를, ‘지난 정해년557) 에 내가 경극전(京極展)의 사송(使送)이 되어 왔더니, 세조(世祖)께서 인견(引見)하고 친히 교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부처를 만드는 사람을 데리고 오라」 하였습니다. 내가 명령을 듣고 잊지 아니하고 급히 본국으로 가서 양공(良工) 세 사람을 데리고 함께 주방주(周防州)에 이르러, 세조께서 안가(晏駕)558) 하였음을 들었습니다. 냉천진(冷泉津)에 이르러 부처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이곳에 잠깐 머물러 있을 터이니, 너는 먼저 조선(朝鮮)에 가서 새 전하께 아뢰어 진퇴(進退)의 명을 받아 가지고 오라」 하였으므로 이에 세조의 어용(御容)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족친(族親)들이 모두 이르기를, 「너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명을 받아 부처를 만드는 사람을 구하였고 또 어용을 받들고 가니, 반드시 은전(恩典)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신묘년559) 5월에 어용을 받들고 제포(薺浦)에 이르니, 변장이 거절하고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되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업수이 여기고 비웃었으며 부처를 만든 사람들도 또한 가혹(苛酷)하게 꾸짖고 성을 내었습니다. 내가 왕래하면서 재물을 허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조를 위하여 성심을 다한 것을 밝게 들어낼 수 없으니, 지극히 통민(痛閔)합니다. 그 어용은 박다(博多)성복사(聖福寺)에 봉안(奉安)하였는데, 사주(社主)가 이르기를, 「이 상(像)은 때때로 반딧불[螢光]과 같은 빛을 내고 또 불상(佛像)이 아니니, 급히 다른 곳으로 이안(移安)하라.」 하므로 부득이하여 이제 또 제포로 받들고 와서 변장에게도 고하지 아니하고 오라시라(吾羅時羅)의 집에 봉안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비록 원납(源納)의 사송이 되어서 왔으나 실은 이 사실을 아뢰려고 함이니, 만약 귀국에서 어용을 봉영(奉迎)하여 서울에 안치(安置)하신다면, 나의 마음이 조금 펴질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원상(院相)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인지(鄭麟趾)는 의논하기를,

"예조(禮曹)에서 마땅히 대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예(禮)가 아니니 감히 계달하지 못하겠다.’ 하고, 상주는 물품은 다른 예에 비하여 많이 하사하여 주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으며, 정창손(鄭昌孫)·홍윤성(洪允成)·김국광(金國光)·성봉조(成奉祖)는 의논하기를,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사람이 부모의 진영(眞影)을 그릴 때 한 털끝·한 터럭이라도 같지 아니하면 부모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영정을 그린다는 것은 비록 대면(對面)하고 그릴지라도 진짜 모습에 가깝기가 어려운 것인데, 사량위문정수(四良衛門正秀)가 비록 잠깐 용안(龍顔)을 대(對)하였다 할지라도 어찌 능히 어용과 꼭 같겠습니까? 이것을 받는 것이 불가하니, 마땅히 이 뜻을 사량위문정수에게 말하기를, ‘너의 충성은 지극하나, 그러나 대의(大義)가 이와 같으니 받을 수 없다.’ 하소서. 다만 이미 선왕의 어진(御眞)이라 이름하였으므로 물리치는 것도 마땅하지 아니하니, 받아서 묻는[瘞]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최항(崔恒)은 의논하기를,

"신 등이 반복하여 생각을 하니, 왕화(王化)의 밖에 사는 사람이 선왕의 명을 듣고 수로(水路) 수천 리에서 고생해가면서 경영(經營)하여, 공인(工人)을 초청하고 또 선왕을 위하여 성용(聖容)을 모각(摹刻)하였으니, 비록 공로를 받기 위함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씀은 정성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족히 선왕의 위엄과 덕(德)이 멀리 퍼졌다 하겠으니, 마땅히 포상(褒賞)을 해야 합니다. 다만 성용(聖容)을 관음 현상(觀音現相)의 그림에 의거하여 모사하였으므로 진영(眞影)이 아니니, 진실로 정자(程子)의 말씀과 같습니다. 받으면 외이(外夷)에게 모만(侮慢)당하는 바가 되어 대체(大體)를 손상하게 되고, 물리치면 저들이 혹 더럽게 하여 버리고 그 분풀이를 하거나 혹은 다시 거추(巨酋)에게 의탁하여 왕래하면서 진청(陳請)하면, 사단(事端)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마땅히 사량위문정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선왕의 명(命)을 잊지 아니하여 매우 수고하였고, 또 성용(聖容)을 모사하였다 하니 진실로 가상한 일이며, 실로 깊이 비감(悲感)하는 바이다. 그러나 범인(凡人)은 군왕(君王)의 어용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요 범하는 사람은 중한 죄를 준다. 우리 나라 사람 같으면 용서할 수가 없으나, 너는 대의(大義)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꾸짖지 아니하고 도리어 상을 주어 너의 정성에 보답하노라.’ 하고, 그 성용(聖容)은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친히 제포(薺浦)에 이르러 그들이 보는 곳에서 단(壇)을 설치하여 소각(燒却)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신숙주 등의 의논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64면
  • 【분류】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예술-미술(美術) / 왕실-종사(宗社)

○禮曹啓: "日本國 上松浦 源納使送四良衛門正秀〔四郞衛門正秀〕 來告曰: ‘在丁亥年, 吾爲京極殿使送而來, 世祖引見親敎曰: 「汝歸本國, 率造佛人來。」 我聞命不忘, 急趨本國, 得良工三人, 偕到周防州, 聞世祖晏駕。 至冷泉津, 造佛人謂我曰: 「吾姑留於此, 汝先到朝鮮, 稟新殿下, 進退之命。」 於是爲造世祖御容, 吾族親皆云: 「汝承朝鮮國王命, 求造佛人, 又奉御容而去, 必蒙異恩矣。」 辛卯五月奉御容, 到薺浦, 邊將拒而不納。 及我回還, 人皆侮笑, 而造佛者亦責怒甚苛。 余之往來費財姑勿論, 爲世祖用心之勤, 無以暴白, 至甚痛憫。 其御容安於博多 聖福寺, 社主曰: 「此像時時放光如螢, 且非佛像, 其急移安。」 不得已今又奉至薺浦, 不以告邊將, 安於吾羅時羅家。 吾今雖爲源納所使而來, 實欲導達此事也。 若奉迎御容, 安於京都, 則余心庶或小伸矣。’" 命院相議之, 鄭麟趾議: "禮曹宜答云: ‘此事非禮, 不敢啓達。’ 賞物比他例, 優賜可也。" 鄭昌孫洪允成金國光成奉祖議: "程子曰: ‘人寫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 大抵寫眞者, 雖對面摹畫, 逼眞甚難。 今正秀雖暫對龍顔, 何能一如御容乎? 受之甚不可, 宜以此意語正秀曰: ‘汝之忠誠至矣, 然大義如此, 不可受。’ 但旣名爲先王之眞, 不宜却也。 受而奉瘞爲便。" 申叔舟韓明澮崔恒議: "臣等反覆思之, 化外之人, 聽先王之命, 水路數千里, 艱苦經營, 爲招工人, 又爲先王摹刻聖容, 雖爲邀功, 其用心勤矣。 亦足見先王威德遠被矣。 宜加褒賞, 但聖容以觀音現相圖爲據, 則摹肖不眞, 誠如程子之言也。 受之則爲外夷所侮, 傷於大體; 却之則彼或賤汚棄之, 以洩其忿。 或更托於巨酋, 往來陳請, 則事端不絶矣。 當語正秀曰: ‘不忘先王之命, 勤勞甚至, 又摹刻聖容, 誠亦可嘉, 實深悲感。 然凡人爲君王不得寫容, 犯之者罪重。 在我國人, 則不可赦也; 汝則不知大義, 故不責而反賞之, 以答汝誠。’ 其聖容, 令觀察使親至薺浦, 於其所見處, 設壇奉燒, 何如?" 從申叔舟等議。


  • 【태백산사고본】 4책 1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64면
  • 【분류】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예술-미술(美術)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