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예(李芮)가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전번의 하유(下諭)로 인하여, 문화현(文化縣)의 옛 노인 전 사직(司直) 최지(崔池)·전 전직(殿直) 최득강(崔得江)을 방문하고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을 얻어 그것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1. 속언(俗諺)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우(祠宇)는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그 뒤에 절 아래 작은 봉우리[小峯]로 옮겼고,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대증산(大甑山)과 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1.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경태(景泰) 경오년178) 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重創)하고, 무인년179) 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丹靑)을 베풀었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하윤(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 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 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 사자(四直使者)가 있는데, 그 위판(位板)은 모두 남향하여 있습니다.
1. 예전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없었는데, 매좌(梅佐)가 삼성당(三聖堂) 아래에 초옥(草屋) 수칸을 지어 치도(緇徒)180) 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고, 제사 때는 여기에서 재숙(齋宿)하고 제물(祭物)도 또한 여기에서 장만하였습니다.
1. 삼성당의 서북쪽 3리(里) 쯤에 두 절이 있고, 5리 쯤에 한 절이 있고, 동북쪽 4리 쯤에 한 절이 있습니다.
1. 패엽사(貝葉寺)도 또한 삼성당 서쪽 6리 쯤에 한 고개와 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1. 삼성당의 제기(祭器)는 옛적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왜란(倭亂) 이후 사기(沙器)를 쓰다가 매좌(梅佐)가 비로소 유기(鍮器)를 만들었습니다.
1. 묘우(廟宇)를 평양(平壤)으로 이전한 뒤로는 이 당(堂)의 제사를 폐지한 것이 벌써 60여 년이 되었다 하고, 혹은 태종조(太宗朝)경진년181) ·신사년182) ·임오년183) 사이라고도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한 의궤(儀軌)도 또한 상고할 수 없습니다.
1. 구월산(九月山) 상봉(上峯)에는 천왕당(天王堂)이 아니고 이름을 사왕봉(四王峯)이라 하며, 또한 예전에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하던 곳이 있었는데, 태종(太宗)을미년184) 사이에 처음 혁파하였다 하나 그 당기(堂基)를 일찍이 본 사람이 없고, 이제 또한 얼음이 얼어 위험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1.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 고적(古跡)을 기재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구월산(九月山) 마루[頂]에는 사왕사(四王寺)가 있는데, 옛적에 성수[星宿]에 초례(醮禮)185) 하던 곳이다.’ 하였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을 평양으로 옮긴 뒤로부터 비록 국가에서는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할 때는 현관(縣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친히 제사지내며, 제사에는 백병(白餠)·백반(白飯)·폐백(幣帛)·실과(實果)를 쓰고 이 밖에 다른 제사는 행할 수가 없는데, 고을의 풍속에는 영험(靈驗)이 있다고 일컬어 사람들이 감히 와서 제사하지 못합니다.
1. 기우 용단(祈雨龍壇)은 삼성당(三聖堂) 아래 백여 보에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현(縣)에 소장된 송(宋)나라 경덕(景德) 3년 병오년186) 5월 의주(儀注)에는, ‘떡[餠]·밥[飯]·술[酒]과 흰 거위[白鵝]를 사용하여 제사를 행했다.’고 기재되었으나, 지금은 흰 닭[白雞]을 대신 쓰고 돼지는 쓰지 않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조밀(稠密)하였는데, 제사를 파한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닭·돼지를 도살하여 신령이 싫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예조(禮曹)에서 이것을 근거하여 아뢰기를,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을 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그러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하였고, 지금 본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34면
-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 [註 178]경태(景泰)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179]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180]
치도(緇徒) : 중[僧].- [註 181]
경진년 : 1400 태종 즉위년.- [註 182]
신사년 : 1401 태종 원년.- [註 183]
임오년 : 1402 태종 2년.- [註 184]
○黃海道觀察使李芮馳啓曰: "臣因前下諭, 訪問文化縣古老人前司直崔池、前殿直崔得江, 得三聖堂事跡, 條錄以聞。 一, 諺傳檀君初爲神, 入九月山, 祠宇在貝葉寺西大甑山, 臨佛刹。 後自移于寺下小峯, 又移于小甑山, 卽今之三聖堂也。 大甑山及貝葉寺下小峯, 今無堂基, 其時致祭與否及幷祭三聖, 未可知。 一, 檀君及父檀雄、祖桓因, 稱爲三聖, 建祠宇祭之, 自祀廢後, 堂宇傾頹。 逮景泰庚午, 縣令申孝源重創, 戊寅縣令梅佐施丹靑。 一, 三聖堂 桓因天王南向, 檀雄天王西向, 檀君天王東向, 幷板位。 俗傳古皆木像, 我太宗朝河崙建議, 革諸祠木像, 三聖木像亦例罷, 儀物設置與否未可知。 一, 三聖堂西夾室, 九月山大王居中, 左土地精神, 右四直使者, 竝位板南向。 一, 古無典祀廳, 梅佐乃於三聖堂下作草屋數間, 令緇徒居之, 祭祀時則齋宿于此, 祭物亦於此辦設。 一, 三聖堂西北三里許有二寺, 五里許有一寺, 東北四里許有一寺。 一, 貝葉寺亦在三聖堂西六里許, 隔一嶺、一澗。 一, 三聖堂祭器, 古用金銀, 自倭亂後, 用沙器, 梅佐始造鍮器。 一, 廟宇移平壤後, 罷此堂之祭, 今已六十餘年。 或云我太宗朝庚辰、辛巳、壬午年間也, 未知是否, 其降香致祭儀軌亦不可考。 一, 九月山上峯非天王堂, 乃名爲四王峯, 亦古降香致祭處, 我太宗乙未年間始革之, 其堂基曾無見者, 今亦氷凍危險, 人不得上。 一, 《關西勝覽》載文化縣古跡云: ‘九月山下聖堂里, 有小甑山, 有桓因、檀雄、檀君 三聖祠; 九月山頂有四王寺, 古之星宿醮禮處。’ 一, 自三聖堂移平壤後, 雖國家不致祭, 若祈雨、祈晴, 縣官具朝服親祭, 祭用白餠、白飯、幣帛、實果, 此外不得行他祭, 邑俗稱爲靈驗, 人不敢來祭。 一, 祈雨龍壇在三聖堂下百餘步, 未知設置日月。 縣所藏宋 景德三年丙午五月儀注載: ‘用餠、飯、酒及白鵝, 行祭。’ 今代用白雞, 不用豚。 一, 三聖堂下近處人家稠密, 自罷祭後, 惡病始發, 人家一空, 其雞、豚宰殺, 爲神所厭之語則未聞。" 禮曹據此啓: "百姓皆謂: ‘三聖堂移設于平壤府, 不致祭, 其後惡病乃興。’ 是雖怪誕、無稽之說, 然古記: ‘檀君入阿斯達山, 化爲神。’ 卽今本道文化縣 九月山其廟存焉, 且前此降香致祭。 請從民願, 依平壤 檀君廟例, 每年春秋降香祝行祭。" 從之。
- 【태백산사고본】 4책 1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34면
-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 역사-전사(前史)
- [註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