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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3권, 성종 2년 11월 21일 기미 4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김국광의 원상·영경연 파직을 청하는 대사헌 김지경·사간 성준 등의 상소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지경(金之慶) 등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의 심행(心行)은 취할 것이 없음을 나라 사람들이 다 한가지로 아는 것이옵고, 전하께서도 이미 다 아시는 것이므로 반드시 말할 필요도 없고 또한 말할 것도 못됩니다만, 우선 인심(人心)이나 국가의 체통[國體]에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아뢰옵니다. 인주(人主)는 만민(萬民)을 위하여 상신(相臣)을 택(擇)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에서 모두 어질다고 하여도 옳지 못하며, 제대부(諸大夫)가 모두 어질다 하여도 옳지 못하며,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도 이를 살펴서 참으로 어짊을 본 뒤라야 임용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를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임명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그 힘을 다하여서 다스리는 공[治功]을 이루는 것이 있습니다.

김국광(金國光)의 상신이 됨과 같은 것은 좌우(左右)·제대부(諸大夫)·나라 사람이 모두 옳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전하께서도 또한 그가 옳지 못함을 아시고서 그 상신을 파(罷)하셨으니 그를 분명히 알았다고 이를 만합니다마는, 오히려 차마 쉽게 끊지 못하시고 그대로 원상(院相)·영경연(領經筵)을 허락하심은 이미 전적으로 임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은총과 영화(榮華)를 탐모(貪冒)하여 물러날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가 이와 같음을 생각한다면 또한 예(例)에 따라서 진퇴(進退)할 것이니, 어찌 즐겨 중(重)한 것으로 자임(自任)하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하겠습니까? 이것은 원상(院相)에 보익됨이 없는 것입니다. 인주(人主)의 배움에 귀중한 것은 단아한 사람과 정직한 선비가 이를 위하여 전후 좌우에 있어, 그 보는 바는 반드시 정직한 선비고, 듣는 바는 반드시 정직한 말이어서 거기에 함양(涵養)하고 훈도(薰陶)되어 덕성(德性)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즉위[臨御]하신 이래로 비록 엄한 추위와 심한 더위라 하더라도 경연(經筵)을 폐하지 않으시니, 어찌 한갓 서사(書史)만을 섭렵(涉獵)하여 고금(古今)을 볼 뿐이겠습니까? 그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하여 특별히 보익(輔翼)함이 있기를 바라고자 하심일 것입니다. 김국광과 같은 자는 비록 경연 영사(經筵領事)라고 일컫고 있으나, 반열을 같이한 이가 같이 동료되기를 부끄러워하고, 저도 또한 스스로 떳떳하지 않게 생각하여 움츠러짐이 쌓여서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는데, 어찌 일찍이 바른 의논[正論]과 바른 논의[讜議]809) 를 한 번이라도 그의 입에서 토로하여 성덕(聖德)의 만분의 하나라도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무엇을 자뢰하시는 것입니까? 신 등은 듣건대, ‘명기(名器)의 귀천(貴賤)은 그 사람에 따라 정해진다.’라고 합니다. 김국광이 원상과 영경연에 있어서 어찌 한갓 무익(無益)할 뿐이겠습니까? 신 등은 정히 명기(名器)가 따라서 천(賤)하여지고 조정도 낮아질까 두렵습니다.

옛사람은 간(諫)하는 데 상원(常員)이 없었고, 사람은 누구나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하게 된다면 비록 반드시 일일이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따르는 것이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후세에 와서 간하는 데 상원(常員)을 두어 말하는 자가 한정되었으니, 말하는 자가 한정되면 비록 일일이 그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혹 듣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도(大度)810) 를 널리 펴시어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덕은 예전에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 등은 무사(無似)811) 하면서 반드시 말하는 말마다 다 따르게 하고자 하니, 죄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국광의 일을 아는 자는 많은데도 이를 말하는 자는 신 등에 그치고 있으므로, 신 등의 말은 실로 조정 백관(朝廷百官)과 사방 만민(四方萬民)의 마음입니다. 김국광이 이 임직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못한 것은 신 등이 전후에 올린 글[書]과 말[言]에 그 실정을 갖추었습니다. 무릇 대간(臺諫)이 인군(人君)에게 진언(進言)하는 것은 특히 일시(一時)에 아는 것이 아니고, 사필(史筆)에 이를 기재하고 드리워서 썩지 않는 것이온데, 만약 우용(優容)을 빌어서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신다면 사방 후세에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전하께서 한 소인(小人)의 연고 때문에 납간(納諫)하는 미덕(美德)을 훼손하실까 하여 두렵습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소인(小人)은 쓰지 말라.’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간사한 자는 의심없이 버리라.’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결단을 머무르지 마시고, 빨리 김국광의 원상과 영경연의 임직을 파(罷)하시어, 명기(名器)를 중히 하고, 조정(朝廷)을 바루시면 국가의 체통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내 끝내 불청(不聽)하겠으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12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司憲府大司憲金之慶等、司諫院大司諫成俊等上疏曰:

金國光心行之無取, 國人所共知, 殿下所已悉, 不必言亦不足道也。 姑以在人心、國體不可容焉者, 復之。 人主爲萬民擇相, 故左右皆曰賢, 未可也; 諸大夫皆曰賢, 未可也; 國人皆曰賢, 然後察之; 見賢焉, 然後用之。 惟其知之明, 故任之專; 任之專, 故有以盡其力, 而成治功焉。 若國光之爲相, 左右諸大夫、國人皆以爲不可, 殿下亦知其不可, 而罷其相, 可謂知之明矣。 猶不忍輕絶, 許仍院相、經筵, 已非任之專矣。 彼雖貪冒、寵榮, 不能引去, 自惟其若是也, 則亦隨例進退耳, 詎肯自任以重, 而盡其心力乎? 此則無補於院相也。 所貴乎人主之學者, 爲有端人正士, 爲之前後左右, 使其所見必正士, 所聞必正言, 有以涵養、薰陶, 成就德性耳。 殿下臨御以來, 雖隆寒、盛暑, 不廢經筵, 豈徒爲涉書史、觀古今而已哉? 欲其接賢士大夫, 而冀有所輔翼耳。 如國光者, 雖稱經筵領事, 同列羞與爲僚, 彼亦自懷不慊, 蓄縮不敢出氣矣。 何曾有正論、讜議, 一吐於其口, 以裨聖德之萬一乎? 然則殿下何所資也? 臣等聞, 名器之貴賤, 以其人也。 國光之於院相、經筵, 豈徒無益而已哉? 臣等正恐名器從而賤, 而朝廷卑矣。 古者諫無常員, 人無不言。 人無不言, 則雖不必一一從之, 其從之也必多。 後世諫有常員, 言之者有限, 言之者有限, 則雖一一從之, 或有所不聞。 今殿下恢弘大度, 好察邇言, 納諫之德, 古所未有。 臣等無似, 必欲言, 言而盡從, 似難逃罪。 然國光之事, 知之者衆, 而言之者止於臣等, 臣等之言, 實朝廷百官、四方萬民之心也。 國光之所以不宜在是任者, 臣等前後所上書與言, 其實備矣。 凡臺諫進言於人君者, 非特一時知之, 載之史筆, 垂之不朽, 若優容假借, 終不果去, 四方後世, 謂殿下何如主也? 臣等竊恐, 殿下以一小人之故, 而虧損納諫之美德也。 《易》曰: "小人勿用。" 《書》曰: "去邪勿疑。" 願殿下夬斷無留, 亟罷國光院相、經筵之任, 以重名器, 以正朝廷, 國體幸甚。

傳曰: "此事, 予終不聽, 勿復言。"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12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