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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3권, 성종 2년 11월 18일 병진 5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김국광의 원상·영경연을 파할 것을 청하는 대사헌 김지경 등의 상소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지경(金之慶)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은 저번에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이 정부(政府)의 원상(院相)·영경연(領經筵)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여 여러 번 말과 글로써 아뢰고 파출(罷黜)하여 버릴 것을 청하였음은 실로 조정(朝廷)의 공의(公議)이옵니다. 전하께서도 정확하게 그 사실을 아시고 명하여 정부의 직사(職事)를 파(罷)하였으니, 신 등은 한편 다행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심됩니다. 원상·영경연은 진실로 이것이 정부(政府)의 직사라서 아울러 파(罷)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돌이켜보면 차마 갑자기 하지 못하여, 반드시 차차로 또한 그와 같이 하리라 뜻하고 부복(俯伏)하여 명을 기다린 지 오래이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차마 버리지 못하시고 아직도 우대하여 용납하시며, 그도 또한 탐욕에 어두워서 부끄러움 없이 즐겨 물러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천연(遷延)하고 있으니, 위로는 성덕(聖德)에 보익됨이 없고 아래로는 국체(國體)에 누(累)가 있게 되니, 심히 옳지 못한 것입니다. 신 등은 차마 함묵(緘默)하지 못하고 다시 이 더러움을 폭로하겠습니다.

대저 정부(政府)는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백료(百僚)를 통솔(統率)하며, 원상(院相)은 모든 사무를 다 다스리고 후설(喉舌)을 겸임하였으며, 경연(經筵)은 의논하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간절하여 임금의 덕성에 관계되니, 모두 그 적임자가 아니면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자(者) 중에서 가깝고 요긴한 것을 든다면 영경연(領經筵)·원상(院相)보다 으뜸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정부는 예전에 일을 대신 보던 때의 비유가 아닙니다. 육조(六曹)는 각각 그 관속을 거느리어 무릇 품의하고 결재할 것이 있으면 모두 스스로 바로 진달하니, 정부는 참여하여 듣는 것이 없으며, 3공(三公)은 비록 그 관직을 띠었더라도 3공의 직책을 행하는 것은 영경연(領經筵)과 원상(院相) 뿐이오니, 영경연(領經筵)·원상(院相)은 그 직책이 이미 중하지 않겠습니까? 3공에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직책을 파하였으면 마땅히 영경연·원상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경(輕)한 것만 버리고 중(重)한 것은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지(四肢)의 병[痛]만 폄구(砭灸)805) 하고 오장(五臟) 안의 병(病)은 버려두어, 끝내 치료한 효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주(人主)가 소인(小人)을 대하는 것은 모르면 그만이거니와, 진실로 이를 알았으면 몸에 있는 질병을 다스리듯 마땅히 먼저 그 근본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어찌 그 이름만을 파(罷)하고 그 실상을 두고서 그의 요행을 이루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보건대, 조정(朝廷)에 원상(院相)을 두는 것은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냈고 또 덕망(德望)의 칭송이 그 지위에 적합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록 일찍이 그 지위를 지낸 자라도 또한 참여할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 경연관(經筵官)을 제수하게 되면 비록 하위(下位)의 미관(微官)이라도 다 정부(政府)·육조(六曹)의 가부(可否)를 듣게 되니, 그 사람이 반드시 재덕(才德)이 구비한 뒤에야 그 선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덕망에 취할 자질이 없으면 거두지 못합니다.

영경연·원상의 중함이 이와 같거늘, 일찍이 김국광이 이 반열에 참여할 수 있다고 이르겠습니까? 그 자신에게는 다행이라 하겠지만, 국가의 체통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국광은 덕행(德行)과 학술(學術)이 없고 탐욕하여 염치가 없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함께 아는 것이옵고, 전하께서도 이미 다 아심은 굳이 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명백합니다. 권세를 끼고 사사로운 정실을 두고 몰래 은밀한 계책을 모의한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나, 참으로 국가를 병들게 한 것은 또 하나 둘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선 그것을 사람의 이목(耳目)으로 듣고 본 것으로서, 명확하고 또 드러난 것을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조(先朝)에 있어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제도(諸道)의 역로(驛路)가 조잔(彫殘)한 것을 진념(軫念)하시어 소복(蘇復)할 대책을 생각하시었는데, 그 때에 경기(京畿)산예역(狻猊驛)이 유독 조폐(彫弊)가 심하므로 명하여 부실(富實)한 사람 10여 호(戶)를 주어 그 힘을 돕게 하였으나, 3년 만에 김국광(金國光)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선 본역(本驛)은 벌써 다시 부성(富盛)하여졌다고 아뢰어 혁파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해 동안 조폐한 나머지인데 3년 안에 갑자가 부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옵고 새로 붙인 자[新屬者]가 그 노역(勞役)하는 것을 꺼리어 그 재산의 부실(富實)함에 자뢰하여 김국광으로 하여금 용권(用權)하는 수단을 쓰게 한 데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본역은 더욱 조폐(彫弊)하여 지탱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또 인호(人戶)를 주어 그 힘을 돕게 하였습니다. 김국광이 혁파하기를 청할 때에는 일찍이 부성(阜盛)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권세를 제 마음대로 쓰고 사사로운 일을 행하였음이 세상에 또한 이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때를 당하여 김국광이 병권(兵權)을 오래 맡은 것에 대한 물의와 논란이 비등하고, 도성(都城) 사람들은 방(榜)을 붙이기에 이르렀으며, 언관(言官)이 핵실할 것을 청하였는데, 불문(不問)에 붙이기는 하였으나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종조(睿宗朝)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권세를 씀이 그전과 같으니 물의와 논란도 예전과 같아 예종(睿宗)께서 장차 면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는 즉시 파직하고 대신과 더불어 말씀하기를, ‘내가 김국광의 병권을 파(罷)함은 보전(保全)하게 하고자 함이다.’ 하였으니, 가령 김국광이 올바르게 나왔다면 예종께서 하필이면 파직하면서도 또한 무엇 때문에 보전하는 것을 근심하셨겠습니까? 저번에 그의 여서(女壻) 이한(李垾)이 장죄(贓罪)를 범하고 도망하여 있으므로, 국가에서 바야흐로 수색하여 잡으려고 하니, 김국광이 몸소 그 있는 곳을 두세 번을 아뢰었으되 모두 실지로써 아뢰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곧은 정상이 있는 듯이 하면서 속으로는 사실상 비호(庇護)하여 감춰 두었으니, 그것은 누구를 기망함입니까? 그의 사위[壻]가 장죄를 범(犯)하고 망명(亡命)하였으니,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다만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족하겠거늘, 다시 무슨 소망이 있어서 또 지목하여 상언(上言)하게 하고 공신이 되기를 도모하였겠습니까? 김국광이 어찌 그 옳지 못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진실로 그 마음은 조정(朝廷)이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아, 대신(大臣)의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어떤 법으로 처치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비록 법으로는 처치할 수가 없으시더라도, 또한 원상(院相)을 삼으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결연(決然)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찌 김국광이 일찍이 선조(先朝)에 작은 공로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생각하건대, 대신(大臣)으로서 대신(大臣)의 도리가 없으면 또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온데, 전하께서는 어찌 반드시 대신으로 대우하십니까? 김국광이 벼슬하여 수십 년이 지나 지위가 이렇게 지극한 데 이르렀으니, 가령 오늘날 원상·영경연을 파하고 물러나 집에 가게 하여도 또한 족히 군(君)을 봉(封)하고 녹(祿)을 먹게 되어 종신(終身)토록 안부(安富)하면서 넉넉히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의 혜택인데 또한 어찌 보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일찍이 작은 공로가 있다는 것은 실은 사사일을 경영한 것이어서 보답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결단하여 유중(留中)하지 마시고 빨리 원상·영경연의 직책을 파(罷)하여 공의(公議)에 답(答)하시면 조정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나, 계류(啓留)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11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註 805]
    폄구(砭灸) : 침 놓는 것과 뜸질하는 것. 곧 병을 치료하는 것임.

○司憲府大司憲金之慶等上疏曰:

臣等頃者, 以光山府院君 金國光不宜在政府院相、經筵, 以言、以書, 累請罷去, 實朝廷公議也。 殿下的知其實, 命罷政府職事, 臣等且幸、且疑。 以爲院相、經筵, 實是政府之職, 所宜竝罷, 顧不忍遽爾, 意必漸亦如之, 俯伏竢命久矣。 殿下不忍去之, 姑且優容, 彼亦貪昧、無恥, 不肯退去, 至今遷延, 上無補於聖德, 下有累於國體, 甚不可也。 臣等不忍緘默, 復此塵露。 夫政府, 百官之長, 統率百僚; 院相, 摠治庶務, 任兼喉舌; 經筵, (地)〔至〕 切論思, 係開君德, 皆不可任非其人。 然於三者, 擧其昵且要者, 則莫經筵、院相之爲最也。 況今之政府, 非古署事時比也。 六曹各率其屬, 凡有稟裁, 皆自直達, 政府無所與聞, 三公雖職帶其官, 所以行三公之職, 只於經筵、院相而已。 經筵、院相, 其責不旣重乎? 以爲不宜於三公, 而罷其職, 則當自經筵、院相始也, 不應去其輕而與之重也。 是猶砭四肢之痛, 而委五內之病, 終無効於醫也。 人主之待小人, 不知則已, 苟知之, 則如疾病之在身, 當先去其根本。 豈可罷其名, 存其實, 以成其幸也! 臣等竊觀, 朝廷置院相, 以曾經政丞, 而又須德望之稱其位者。 是故, 雖曾經其職者, 亦有不得與者焉。 其授經筵官, 則雖下位之微, 悉聽政府、六曹可否, 其人必才德之俱, 然後得與於其選, 苟德之無取才, 不收焉。 經筵、院相, 其重如是, 曾謂國光而與是列乎? 於其身則幸矣, 於國體何如? 國光之無德行、學術, 貪饕無恥, 國人所共知、殿下所已悉, 不待言而後明也。 至於竊權挾私, 潛謀秘計, 人所不知, 而實病於國者, 又不可一二數也。 姑擧其在人耳目, 明且著者言之。 在先朝世祖大王, 軫念諸道驛路彫殘, 念所以蘇復之。 于時京畿 狻猊驛獨彫弊甚, 命給富實人戶十餘, 以助其力。 旣三年, 國光判兵曹, 以本驛已復富盛啓, 革之。 夫積年彫弊之餘, 而三年之內, 遽至富盛, 無是理也。 此無他, 新屬者憚其勞役, 而其資財之富, 有以使國光用權之手也。 厥後本驛愈彫弊不支, 不獲已又給人戶助其力。 當國光請革時, 曾未阜盛可知已。 其弄權行私, 世亦有斯人乎? 當是時, 國光久典兵權, 物論旁騰, 至於都人張榜、言官請劾。 夫有所不問爾, 豈曰無罪? 至睿宗朝, 猶用權如舊, 物論如舊, 睿宗知將不免, 卽罷之, 語與大臣曰: "吾所以罷國光兵權, 欲使保全之也。" 使國光果出於正, 睿宗何必罷之, 而亦豈保全之虞乎? 頃者, 其女壻李垾, 犯贓在逃, 國家方且搜捕之, 國光親啓其所在處再三, 皆不以實。 陽爲自直之狀, 而陰實庇護匿藏, 其誰欺乎? 見其壻犯贓亡命, 罪在不赦。 當此時, 苟完性命足矣, 復有何望, 而且指使上言, 圖爲功臣? 國光, 豈不知其不可哉, 誠以其心不見有朝廷耳。 噫! 大臣之所爲如此, 宜置之何法乎? 今縱不能置於法, 又相之乎? 殿下不敢決然去之者, 豈不以國光嘗有微勞於先朝耶? 臣等以爲, 大臣無大臣之道, 則亦恒人而已。 殿下何必遇以大臣哉? 國光歷仕數十年, 位至此極, 假使今日罷院相、經筵, 退而之私第, 亦足以封君、食祿, 安富終身, 裕及後昆, 皆殿下賜也。 亦豈無報云乎哉? 況其曾有微勞, 實所以營私, 無可報者哉? 願殿下夬決無留, 亟罷院相、經筵之職, 以答公議, 朝廷幸甚。

啓留。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8장 B면【국편영인본】 8책 611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