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성종실록13권, 성종 2년 11월 2일 경자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유구 국왕 상덕이 자단서당 등을 보내어 내빙하고 올린 서계

유구 국왕(琉球國王) 상덕(尙德)이 중[僧] 자단서당(自端西堂) 등을 보내어 내빙(來聘)737) 하였다. 그 서계(書契)에 말하기를,

"상덕(尙德)은 진실로 황공(惶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글을 바치옵니다. 선왕(先王)738) 께서 안가(晏駕)739) 하셨으므로, 조례(弔禮)를 하기 위하여 중[僧] 자단서당(自端西堂)을 차견(差遣)하여, 범묘(梵妙)740)두루(兜樓)741) 를 가지고 가서 우러러 변변치 못한 뜻의 만(萬)에 일(一)이라도 펴게 하옵니다. 또 듣자오니, 등하(登霞)742) 하시는 시각에 불신(佛身)이 따라서 나타나고, 여러 천상계(天上界)에서 우화(雨華)743) 가 내렸다 하니, 이는 관자재 살타(觀自在薩埵)744) 가 스스로 법락(法樂)을 받아 쓰는 것이며, 여정(輿情)이 우러르는 것입니다. 상덕(尙德)내옹(乃翁)745) 도 또한 〈세조께서 승하하신 이듬해인〉 성화(成化) 5년(1469) 8월 18일에 훙(薨)하였는데, 또한 선왕(先王)의 용염(龍髥)을 휘어잡음이 아니겠습니까?746) 또 내옹(乃翁)이 유언(遺言)하기를, ‘귀국(貴國)747) 과 친교를 맺으면 시종(始終)으로 정길(貞吉)하다.’고 하였으니, 이 말을 종신토록 마음에 새기어 감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폐읍(弊邑)748) 에서 비록 해야 할 것이 많으나, 한 절[寺]을 건립하여, 헌릉(獻陵)의 소망(所望)도 채우고749) 또한 필추(苾芻)750) 로 하여금 대중(大衆)과 부지런히 명복을 빌도록 할 것이니, 선왕(先王)의 회상(繪像)·존호(尊號)와 정사(精舍)의 신한액(宸翰額)751) 을 주시면 우리의 소원도 만족할 것이고, 뭇사람의 소망도 또한 흡족할 것입니다. 청매(靑梅)에 비가 내리는 절기에, 엎드려 큰 자애(慈愛)로 특별히 살펴주시기 바라오며, 다 갖추지 못하옵니다."

하고 또 서계(書契)에 말하기를,

"이제 즉위(卽位)하신 처음을 당하여 악면(岳面)이 희색(喜色)을 띠고, 하수(河水)도 정사의 소리를 폅니다. 상덕(尙德)은 엎드려 원하건대, 동이(東夷)는 동쪽에서 서이(西夷)는 서쪽에서 사자를 원방(遠方)에서 보내 오고, 남만(南蠻)은 남쪽에서 북적(北狄)은 북쪽에서 거듭 역마를 띄우게 하소서. 그리고 또한 전조(前朝)로부터 남만 국왕(南蠻國王)이 사자를 폐읍(弊邑)에 보내어 이르기를, ‘아득히 조선국(朝鮮國)의 풍화를 듣고, 생각하고 사모한 정(情)이 오래되었다.’고 하며, 귀국(貴國)과 통호(通好)하고자 하면서, ‘남주(南州)의 화물(貨物)은 상방(上邦)에 소중한 것이 못되지만, 비록 그러나 혹시 정부(政府)의 주문하는 문권[注券]을 얻는다면, 주문한 가짓수대로 진공(進貢)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번에 주자(紬子)752) ·목면(木綿)753) 등을 주시어 두터운 은혜를 입은 것이 너무 지나쳤습니다마는 폐읍의 사자(使者)가 불행하게도 한 배[一船]를 실화(失火)한 변고가 생겨, 마침내 후하게 주신 것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어 그 죄인(罪人)을 국민 모두가 쫓아내었습니다. 또한 남만 국왕(南蠻國王)경략(經略)754) 하는 마음은 겸연(歉然)하지 않음이 없습니다만, 더구나 또 정부의 깊은 뜻에는 부끄러울 게 없지 않습니까? 비록 그러나 신중(信重)이 아뢰는 주자(紬子) 1만 필(匹), 목면(木綿) 1만 필은, 조정의 은혜를 입는다면, 남인(南人)이 백배(百拜)할 것입니다. 이에 평 좌위문위(平佐衛門尉) 신중(信重)은 귀국의 신하로서 사자(使者)가 되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내연(內緣)을 쓴 것입니다. 간곡히 고명하신 깊은 뜻을 얻으면 또한 다행하지 않겠습니까? 또 전해 듣자오니, 폐읍(弊邑)의 해도(海島)에 거처하는 자가 대소(大小)의 서권(書券)을 위작(僞作)하여 일본국(日本國)의 서사(書史)로서 상방(上邦)의 관사를 번거롭게 하였다고 하니, 폐읍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거니와 신수(信受)하지 말으소서. 그래서 부부(剖符)를 만들어 2매(枚)를 올려 바치고 또 2매는 남겨 두어 후증(後證)을 삼게 하였는데, 모두 평 좌위문위(平佐衛門尉) 신중(信重)이 연구하여 정한 것임을 아룁니다. 만약 또한 불밀(不密)하여서 해도(海島)에 거처하는 자가 듣고 전하면, 바닷가 곳곳에서 폐읍의 사자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오니, 다만 고명(高明)께서는 살피소서.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는 가짓수대로 별폭(別幅)에 썼습니다. 첫 여름의 기온은 서늘하오니, 나라를 위하여 보중(保重)하시기를 바라옵고, 다 갖추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07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

  • [註 737]
    내빙(來聘) : 외국인이 예물을 가지고 찾아 옴.
  • [註 738]
    선왕(先王) : 세조(世祖).
  • [註 739]
    안가(晏駕) : 임금의 죽음. 붕어(崩御)함.
  • [註 740]
    범묘(梵妙) : 불교의 신묘함.
  • [註 741]
    두루(兜樓) : 향(香) 이름. 두루바향(兜樓婆香)을 줄인 말임.
  • [註 742]
    등하(登霞) : 제왕의 죽음을 이르는 말.
  • [註 743]
    우화(雨華) : 불교(佛敎)에서 쓰이는 용어로, 모든 보살(普薩)이 대법리(大法利)를 얻을 때 공중(空中)에서 만다라화(曼陀羅華)가 내려오는 것을 말함.
  • [註 744]
    관자재 살타(觀自在薩埵) : 관자재(觀自在)는 자비(慈悲)의 화신(化身)으로 온갖 것을 자유자재로 함을 말하며, 살타(薩埵)는 보리 살타(菩提薩埵)를 줄인 말로, 큰 용맹심(勇猛心)을 갖고 불교(佛敎)를 탐구하고, 대자비(大慈悲)의 마음으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자로서 부처의 다음가는 경지(境地)에 도달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세조(世祖)의 득도(得道)한 경지를 비유한 말임.
  • [註 745]
    내옹(乃翁) : 부왕(父王)을 말함.
  • [註 746]
    용염(龍髥)을 휘어잡음이 아니겠습니까? : 선왕(先王)을 따라갔다는 말로,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황제(皇帝)가 수산(首山)의 구리[銅]를 캐어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鑄造)하였는데, 그 솥이 완성되자 어떤 용(龍)이 턱수염을 드리우고 황제를 맞이하여, 황제는 용을 타고 올라 갔으나 여러 신하는 올라가지 못하고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말.
  • [註 747]
    귀국(貴國) : 조선국.
  • [註 748]
    폐읍(弊邑) : 자기 고장을 낮추어 일컫는 말.
  • [註 749]
    헌릉(獻陵)의 소망(所望)도 채우고 : 헌릉(獻陵)은 태종(太宗)의 능(陵)으로 태종을 가리킨 말인데, 태종이 태조(太祖)를 위하여 문소전 불당(文昭殿佛堂)을 창건(創建)하였으므로 이른 말임. 세종 15년 2월 16일 조에 보임.
  • [註 750]
    필추(苾芻) : 비구(比丘).
  • [註 751]
    신한액(宸翰額) : 임금이 친필로 쓴 액자.
  • [註 752]
    주자(紬子) : 명주.
  • [註 753]
    목면(木綿) : 솜.
  • [註 754]
    경략(經略) : 통솔하여 다스림.

琉球國王尙德, 遣僧自端西堂等來聘。 其書契曰:

尙德誠惶誠恐, 頓首奉書朝鮮國王殿下。 先王晏駕弔禮, 差遣使僧自端西堂, 令梵妙兜樓, 仰攄區區志萬一云。 且羕聞登霞之刻, 佛身應現。 諸天雨華, 寔是觀自在薩埵, 自受用法樂也, 輿情所仰也。 尙德之乃翁, 亦成化五年八月十八日薨, 亦匪攀先王龍髯乎? 且乃翁遺言云: "通好於貴國, 則終始貞吉。" 此言終身銘心不敢忘, 故敝邑雖多虞, 建立一寺, 充望獻陵, 亦敎苾芻, 衆勤行宓, 希賜先王之繪像曁尊號, 竝精舍之宸翰額, 則所謂我願旣滿, 衆望亦足也。 靑雨滌, 伏惟鴻慈特賜鑑察, 不備。

又書契曰:

當今卽位之初, 岳面生喜色, 河水宣政聲。 尙德伏願, 東夷東、西夷西, 遣使于遠; 南蠻南、北狄北, 重驛于今。 抑亦自前朝, 南蠻國王遣使於弊邑曰: "遙聞(朝鮮圖)〔朝鮮國〕 之風, 懷景慕情日久矣。’ 欲通好於貴國。 南州之貨物, 則上邦之所不重, 雖然儻得政府之注券, 則任注文件件可進貢。" 云云。 仍前度紬子、木綿等之賜, 厚霑恩霈剩, 敝邑使者不幸, 而有一船失火之變, 遂不傳達厚貺, 彼罪人擧國放逐耳。 且亦經略南蠻國王之中心, 靡不歉然, 矧又不愧政府深旨乎? 雖然信重啓上紬子一萬匹、木綿一萬匹, 沐朝恩, 則南人百拜百拜。 爰平佐衛門尉信重, 乃以貴國臣請爲使者, 蓋用內緣耳。 懇得高明深旨, 則不亦幸耶? 且傳聞處, 敝邑之海島者, 大小僞作書券, 以爲日本國中之書史, 煩上邦之官處, 敝邑所不知也。 敢請勿信受。 以故剖符二枚則上進, 亦二枚則留, 以爲後證, 皆平佐衛門尉信重之所諳定, 可啓上者歟。 若亦不密, 而處海島者聞傳, 則海涯處處, 敝邑之使者不安, 但高明攸察也。 不腆土宜, 件件在別幅。 孟夏天涼, 爲國保重, 不備。


  •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8책 607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