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에서 관복 제도에 대해 아뢰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제 전교(傳敎)를 받자오니, 왕세자(王世子)의 삭망 조하(朔望朝賀) 때의 관복(冠服)을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상정(詳定)하라 하시어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니, 한나라 제도[漢制]는 원유관(遠遊冠)의 양(梁)513) 이 천자(天子)는 5량(梁), 태자(太子)는 3량(梁), 제후왕(諸侯王)은 통용하여 입게 하였고, 수나라 제도[隋制]는 황태자(皇太子)가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어 알묘 환궁(謁廟還宮)하고, 원일(元日)·삭일(朔日)의 입조(入朝)에 입게 하였습니다. 당나라 제도[唐制]는 황태자(皇太子)가 3량의 원유관, 강사포를 갖추어서 입었는데, 원일(元日)·동지(冬至)·삭일(朔日)의 입조(入朝)와 원정(元正)·동지에 궁신(宮臣)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입었고. 친왕(親王)과 서자(庶子)의 관례(冠禮)도 또한 원유관·강사 단의(絳紗單衣)를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조(本朝)는 왕세자(王世子)가 정지(正至)514) ·조하(朝賀)·탄일(誕日)과 대사(大祀)·경성(慶成)에는 7장 면복(七章冕服)을 갖추고, 보통 때에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었으며, 삭망 조하(朔望朝賀)와 정지(正至)·생신(生辰)에 하례받을 때에는 공복(公服)을 갖추어, 군신(君臣)으로 더불어 명제(名制)의 분별이 없어서 대체(大體)에 미편(未便)하니, 바라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왕세자가 삭망 조하와 정지(正至)·생신에 하례 받을 때에는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게 하소서. 그리고 원유관의 양수(梁數)는 한(漢)·당(唐)의 고제에, 황태자는 모두 3량(梁)을 썼으나, 그러나 제사 직장(諸司職掌) 안에 있는 문무관 조복(文武官朝服)에는, 모두 관상(冠上)의 양수(梁數)를 분등(分等)하여, 공복(公服)은 8량(梁), 후백(侯伯)과 1품관(一品冠)은 7량(梁), 2품은 6량(梁), 3품은 5량(梁), 5품은 3량(梁)이고, 본조(本朝)의 제도는 문무관 1품관(一品冠)은 5량(梁), 2품은 4량, 3품은 3량이니, 고제(古制)에 의하여 단지 3량만을 씀은 미편(未便)합니다. 이제 전하(殿下)의 원유관은 면복 9장(冕服九章)을 의방하여 9량(梁)을 쓰고, 왕세자의 원유관도 또한 면복 7장을 의빙하여 7량(梁)을 씀이 편하겠습니다마는, 단지 중조(中朝)515) 의 제도를 상고하지 않고 경이(輕易)하게 상정(詳定)함은 미편하니, 후일 입조(入朝)하는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중국의 친왕(親王)·세자(世子)의 관복 제도(冠服制度)를 자세히 문의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8책 584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관복(官服) / 역사-고사(故事)
- [註 513]
○禮曹啓: "今承傳敎, 王世子朔望朝賀時冠服, 考古制詳定。 謹按《通典》, 漢制: 遠遊冠, 天子五梁, 太子三梁, 諸侯王通服之; 隋制: 皇太子具遠遊冠、絳紗袍, 謁廟還宮, 元日、朔日入朝, 則服之; 唐制: 皇太子具服有遠遊冠三梁、絳紗袍, 元日、冬至、朔日入朝及元正、冬至, 受宮臣朝賀服之, 親王及庶子冠禮, 亦加遠遊冠、絳紗單衣。 本朝王世子, 正至、朝賀、誕日及大祀、慶成, 則具七章冕服; 常時, 則具翼善冠、袞龍袍; 朔望朝賀及正至、生辰受賀, 則具公服, 與群臣, 名制無別, 大體未便。 乞依古制, 王世子於朔望朝賀及正至、生辰受賀, 具遠遊冠、(紗)〔絳〕 紗袍, 而遠遊冠梁數, 則漢、唐古制, 皇太子皆用三梁。 然諸司職掌內文武官朝服, 俱以冠上梁數分等, 公服八梁、侯伯及一品冠七梁、二品六梁、三品五梁、五品三梁。 本朝之制, 文武官一品冠五梁、二品四梁、三品三梁, 則依古制, 只用三梁未便。 今殿下, 遠遊冠倣冕服九章, 用九梁; 王世子, 遠遊冠亦依冕服七章, 用七梁爲便。 但不考中朝之制, 輕易詳定未便, 令後日入朝使臣, 詳問中朝親王、世子冠服制度, 而後更議施行, 何如?" 從之。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8책 584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관복(官服)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