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 대사간 김수녕 등이 상소하여 시사를 조목별로 아뢰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수녕(金壽寧)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은 모두 재주가 없으면서 직책이 언책(言責)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헌체(獻替)284) 하여 위로 성덕(聖德)을 도운 것이 없고, 오직 시위 소찬(尸位素餐)285) 만 하여,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삼가 시사(時事)를 조목별로 몽매함을 무릅쓰고 아뢰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들어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대저 아비가 낳아주고 어미가 길러주심은 하늘이 나를 덮고 땅이 나를 싣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망극(罔極)한 은혜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지 않으나, 아비가 죽으면 참최(斬衰) 3년을 하고 어미가 죽으면 자최(齋衰)를 하는 것은 경(輕)하고 중(重)함이 아니라 그 분수(分數)가 그러한 것입니다. 예(例)에 아비가 있으면 어미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게 되어 있는데, 아들이 어미에게 비록 아비를 위하여 굽혀서 기년(期年)을 하더라도 오히려 심상(心喪)286) 3년을 하니, 어찌 굽혀서 기년을 할 것이겠습니까? 지존(至尊)이 있으면 감히 그 사은(私恩)을 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살펴보건대, 아비가 있으면 어미를 위하여 자최(齋衰) 11개월 만에 연제(練祭)287) 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大喪)을 지내고, 15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게 되어 있는데, 신 등은 생각하건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대개 담제(禫祭)를 지내면 즉시 길복(吉服)을 입고, 길복을 입으면 슬픔이 다하여 의복과 음식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으니, 이른바 심상(心喪)이라 하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재여(宰予)의 단상(短喪)에 대하여 꾸짖기를, ‘자식은 나서 3년이 된 뒤에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予)288) 도 그 부모로부터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겠느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3년으로써 제도를 삼아, 현자(賢者)로 하여금 굽혀서 나아가게 하고 불초(不肖)한 자는 꾀하여 미치게 하였습니다. 대저 연작(燕雀)289) 도 오히려 주초(啁噍)290) 의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3년을 다하여도 오히려 그 어버이에 대한 보답이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기년(期年)이겠습니까?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인도하여도 백성은 오히려 박(薄)한 데로 나가는데, 박(薄)한 것으로 인도하면 그것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 명하여 상담(祥禫)291) 의 제도는 한결같이 고전(古典)에 의하여, 예(禮)를 존중하고 풍속을 후(厚)하게 하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예(禮)에, 처(妻)를 취(娶)할 때에는 동성(同姓)을 취하지 않고 첩(妾)을 사는 데 그 성(姓)을 알지 못하면 점쳐서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마친(緦麻親)292) 의 바깥으로는 성(姓)이 비록 같더라도 친(親)함이 이미 다하였으므로 타인(他人)과 같은데, 타인과 더불어 장가드는 것이 의리에 무엇이 상(傷)하겠습니까마는, 감히 장가들지 못하는 것은, 왜냐하면 성(姓)이 같으면 계통이 같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고, 계통이 같아서 장가들지 않는 것은 분별을 후(厚)하게 하는 소이입니다. 우리 나라의 풍속에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든 일이 있었으니[豫壻制], 이성의 친함과 은의(恩義)의 분별이 동성과 별다름이 없습니다. 대부(大父)293) 가 있으면 종형제(從兄弟)를 한 집에서 양육하고, 증대부(曾大父)가 있으면 재종형제(再從兄弟)를 한 집에서 양육합니다. 대저 한 집에서 양육하므로, 어러서부터 장년(壯年)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서로 형제(兄弟)라 하고, 스스로 서로 숙질(叔姪)이라 하며, 스스로 서로 조손(祖孫)이라고 하니, 그 은애(恩愛)가 과연 동성(同姓)의 친족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제 재종형제(再從兄弟)가 서로 더불어 혼인을 하고, 족백숙조부(族伯叔祖父)와 당질손녀(堂姪孫女)가 서로 혼인하는 자가 있으니, 비록 법으로 금함은 없더라도 인정(人情)에 크게 불안(不安)한 것이 있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장차는 당고(堂姑)·당질(堂姪)·당백숙부(堂伯叔父)·당질녀(堂姪女)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서로 혼인을 할 것입니다. 예(禮)라고 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따르는 것이니, 인정(人情)에 따르지 않는다면 예(禮)는 무엇에 의거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 명하여, 이성(異姓)이 서로 혼인하는 한계를 정함으로써 인정에 따르고 예전(禮典)을 바르게 하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예(禮)에, 부인(婦人)이 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가리고, 규문(閨門) 안에 해가 미치는 것을 가리며, 백리(百里) 밖의 초상에는 달려가지 아니하고, 비록 부모가 있더라도 1년에 한 번 친정에 가서 문안드리게 한 것은, 출입을 막고 삼가서 남녀의 분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인(婦人)의 외출에 있어, 혹 위로 면사(面紗)를 거둔다든가 아래로 버선과 치마를 입지 아니하여 부의(婦儀)가 이미 예전보다 더 멀어졌고, 기이한 구경거리를 만날 때마다 문득 장막(帳幕)을 펴서 자부(子婦)가 다 모이는데, 얼굴을 드러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심한 자는 이웃과 종족(宗族)을 몸소 맞이하는 예(禮)를 혹은 강(江) 밖에서 혹은 산간(山間)에서 행하여, 출입하는 것이 법도가 없고 거듭하여 풍속을 이루었으며, 왕왕 추한 소문이 유포(流布)되어 집안에 수치가 되는 일까지 있으니, 풍속이 비악(鄙惡)합니다. 한 번 여기에 이르자 근자에 사인(士人) 윤광비(尹光棐)의 처(妻)가 최복(衰服)을 벗고 사람을 따라갔으니,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 명하여 부인의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여 예속(禮俗)을 이루게 한다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선비는 스스로 임금에게 교분을 맺을 수 없고, 임금은 스스로 그 선비를 알 수 없습니다. 이에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것이니, 과거(科擧)라는 것은 바로 계급이 없이 진취하는 자를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이제 종친(宗親)에게 부시(赴試)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대저 왕실(王室)에 폐부(肺腑)가 되는 권속(眷屬)으로 관직이 높고 지위가 〈임금과〉 가까우며 진실로 재행(才行)이 있다면 성상께서 알지 못하심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한미[孤寒]한 선비와 더불어 재주를 다투어 진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얻었다 하여도 영화가 되지 못하며, 얻지 못하면 다만 스스로 자기만 경솔할 뿐입니다. 또 그 임용(任用)할 때에 불행(不幸)하게도 알맞지 않게 되었을 경우, 이를 다스리면 은혜를 상(傷)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법을 폐(廢)하게 되며, 혹 판자(板子)294) 를 끌고 당기어 나라에 수치스러움만 남기게 된다면, 위임을 맡은 자가 어찌 보전(保全)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도리(道理)는 도움이 되는 것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중용(中庸)》 구경장(九經章)에서도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도리를 논하였으나 단지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중하게 하는 것만을 말하고 일을 맡기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니, 성인(聖人)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종친(宗親)의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말고 일을 맡기지 말아서,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은혜를 온전하게 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명하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첫째 상제(喪祭)의 조목에 대하여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이 의논하기를,
"아비가 있어 어미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고, 관직을 해면하고 심상(心喪) 3년을 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법제(法制)이니,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고 황제(高皇帝)가 《효자록(孝子錄)》을 만들어, 부모에게 모두 참최(斬衰) 3년을 하게 한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닙니다."
하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최항(崔恒)·홍윤성(洪允成)·조석문(曺錫文)·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이 의논하기를,
"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자세히 고제(古制)와 실록(實錄)을 상고한 뒤에 의의(擬議)하게 하소서."
하였다. 둘째 취처(聚妻)의 조목에 대하여 신숙주·한명회·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이 의논하기를,
"고제(古制)와 실록(實錄)을 자세히 상고하게 하소서."
하였고, 네째 과거(科擧)의 조목에 대하여 정인지·신숙주·한명회·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이 의논하기를,
"마땅히 상소(上疏)한 대로 따르소서."
하고 정창손이 의논하기를,
"재상(宰相)의 아들이 한미한 선비와 더불어 진취(進取)를 다툼은 불가합니다. 재상의 아들도 불가한데, 하물며 종친(宗親)이겠습니까? 상소(上疏)대로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7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풍속-예속(禮俗)
- [註 284]헌체(獻替) : 선(善)을 취하고 악(惡)을 버림. 곧 임금을 돕는 것.
- [註 285]
시위 소찬(尸位素餐) : 직책을 다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여 녹만 받아 먹는 일.- [註 286]
심상(心喪) : 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애모하는 일.- [註 287]
연제(練祭) : 소상(小祥).- [註 288]
여(予) : 재여(宰予).- [註 289]
연작(燕雀) : 제비와 참새.- [註 290]
주초(啁噍) : 지저귀며 우는 소리.- [註 291]
상담(祥禫) : 대상(大祥)과 담제(禫祭).- [註 292]
시마친(緦麻親) : 종증조(從曾祖)·삼종형제(三從兄弟)·중증손(衆曾孫)·중현손(衆玄孫)으로, 시마(緦麻)의 복(服)을 입는 친족.- [註 293]
대부(大父) : 조부와 한 항렬이 되는 유복친(有服親) 밖의 남자.- [註 294]
판자(板子) : 죄인을 치는 널쪽.○司諫院大司諫金壽寧等上疏曰:
臣等俱以不才, 職忝言責, 未嘗有所獻替, 上裨聖德, 惟尸素是懼。 謹條時事, 冒昧以聞, 伏惟殿下財幸。 一。 夫父生母鞠, 如天之覆吾、地之載吾, 罔極之恩, 未始有間。 然父沒斬衰三年, 母沒則齊, 非輕重之也, 其分然也。 禮, 父在爲母期, 子於母, 雖爲父屈而期, 猶心喪三年, 曷爲屈而期也? 至尊在, 不敢伸其私恩也。 今按《經國大典》, 父在, 爲母齊衰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禫, 臣等竊以爲未然。 蓋禫而卽吉, 卽吉而哀盡, 衣服、飮食無異平昔, 則所謂心喪者, 果安在乎? 孔子讓宰予之短喪曰: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予也, 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故聖人, 以三年爲制, 使賢者俯就, 不肖者企及。 夫燕雀猶有啁噍之頃, 而況於人乎? 盡三年, 猶不足以報其親, 而況於期乎? 導以歸厚, 民猶趨薄; 導之以薄, 其將奈何? 伏望命有司, 祥、禫之制, 一依古典, 以尊禮厚俗, 幸甚。 一。 禮, 娶妻不娶同姓, 買妾不知其姓, 則卜之。 自緦親之外, 姓雖同而親已盡, 則猶他人也。 與他人而娶, 於義何傷, 而所以不敢娶者, 何也? 姓同則系未嘗不同, 系同而不娶, 所以厚別也。 本國之俗, 男歸女第, 異姓之親, 恩義之分, 與同姓無別。 大父在, 則從兄弟養於一家; 曾大父在, 則再從兄弟養於一家。 夫養於一家, 自幼至壯, 自相謂兄弟, 自相謂叔姪, 自相謂祖孫, 其恩愛果有異於同姓之親乎? 今有再從兄弟相與爲婚, 族伯叔、祖父與堂姪、孫女相婚, 雖於法無禁, 而於人情有大不安者, 此而不已, 將至於堂姑、堂姪、堂伯叔父、堂姪女, 亦相爲婚矣。 禮者, 所以順人情也, 人情不順, 禮於何依? 伏望命有司, 定異姓相婚之限, 以順人情, 以正禮典, 幸甚。 一。 禮, 婦人出則必擁蔽其面, 及日乎閨門之內, 不百里而奔喪, 雖父母在, 歲一歸寧, 所以謹出入之防, 遠男女之別也。 今婦人之出, 或有上捲面紗, 下不施襪、裙, 婦儀已遠於古, 每遇奇觀, 輒張帳幕, 悉集子婦, 露面不愧, 甚者爲隣黨、宗族親行將迎之禮, 或於江外, 或於山間, 出入無度, 習以成風, 往往醜聲流布, 至以在閫爲恥, 風俗鄙惡, 一至於此。 頃者, 士人尹光非之妻, 脫衰從人, 豈以此乎? 伏望命有司, 申嚴婦人出入之防, 以成禮俗, 幸甚。 一。 士不能自結於君, 君不能自知其士。 於是乎, 設科取士, 科擧者, 正爲無階而進者設爾。 今許宗親赴試, 夫以王室肺腑之屬, 官高地近, 苟有才行, 不患上之不知, 必欲與孤寒之士, 角藝而進, 使其得之不爲榮, 不得則祗自輕耳。 且其任用之際, 不幸而不稱, 治之則傷恩, 不治則廢法。 或有板援牽連, 爲國起羞, 則所以屬任之者, 豈所以保全之哉? 故古人有言曰: "親親之道, 全之爲右。" 《中庸》九經論親親, 只言尊位重祿, 而不言任之以事, 聖人之意可見矣。 伏望, 勿許宗親赴擧, 勿令任事, 以全親親之恩, 幸甚。
命院相議之。 第一喪制條, 鄭麟趾、鄭昌孫議: "父在, 爲母期, 解官, 心喪三年, 聖人法制, 不可更議。 高皇帝作《孝子錄》, 父、母皆斬衰三年, 非聖人之法也。" 申叔舟、韓明澮、崔恒、洪允成、曺錫文、尹子雲、金國光議: "令藝文館、春秋館, 詳考古制及《實錄》後, 擬議。" 第二娶妻條, 叔舟、明澮、恒、允成、錫文、子雲、國光議: "令詳考古制及《實錄》。" 第四科擧條, 麟趾、叔舟、明澮、恒、允成、錫文、子雲、國光議: "宜從上疏。" 昌孫議: "宰相之子, 不可與寒士爭進取。 宰相之子尙不可, 況宗親乎? 從上疏, 何如?"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7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풍속-예속(禮俗)
- [註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