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 부원군 구치관의 졸기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치관(具致寬)이 졸(卒)하였다. 조회를 정지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하기를 관례와 같이 하였다.
구치관의 자(字)는 이율(而栗)이고, 능성(綾城) 사람으로, 증(贈) 좌의정(左議政) 구양(具楊)의 아들이다. 선덕(宣德)기유년729) 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갑인년730) 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제수받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다가, 곧 대교(待敎)로 승진하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겼으며, 여러 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 전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사복시 윤(司僕寺尹)을 역임하였다.
경태(景泰)계유년731) 세조의 정난(靖難) 때에 구치관을 함길도(咸吉道)에 보내어 역적의 무리를 제거하였으므로, 보공 대호군(保功大護軍)으로 뛰어 올랐다. 세조가 정사를 보필하게 되자, 그를 불러들여 모의하고, 깊이 그 인물을 칭찬하여 ‘경을 안 것이 늦었음을 한탄한다.’고 말하고, 갑자기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하자, 책훈(策勳)하여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되어 능성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 병조로 옮겼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능성은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였으니, 내가 어찌 장수와 정승에 사람이 없다고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천순(天順)정축년732) 에 예종(睿宗)을 세자(世子)로 봉할 것을 청하기 위하여 치관이 부사(副使)로서 북경에 갔는데, 돌아와 세조의 뜻에 맞아 품계가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올라갔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겼다가, 특별히 평안도 절도사로 제수하고, 전교하기를, ‘내가 경을 좌우에서 떠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방의 임무가 중대하여 부득이 경을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경이 부임한 뒤에는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구치관이 평안도에 이르러서, 본도의 전세(田稅)를 연변 주군(州郡)에 수송하여 군수에 충당하도록 요청하고, 또 공물(貢物)을 면제하여 변방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요청하니, 세조가 다 그대로 따랐다. 불러서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고, 품계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제수하였다. 사대부(士大夫)가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바른 사람이 전형하여서 선발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공도(公道)가 시행될 것이다.’ 하였다. 함길도는 낭보아한(浪甫兒罕)이 반역한 뒤로부터 변방의 소요로 여러 번 놀랐는데, 구치관을 본도 도체찰사(都體察司)로 삼아 가서 진무하게 하였으며, 품계는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올랐다.
임오년733) 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제수받고, 얼마 있다가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으로 올라갔으며, 우의정으로 제수받았다가,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병술년734) 에 성만(盛滿)으로 사임하고, 도로 부원군에 봉해졌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 황제의 명에 의하여 건주위(建州衛)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패배시켰는데, 그 잔당이 변경을 엿보므로, 국가에서 근심하여 구치관을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삼아서 보냈다. 세조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능성은 나의 만리 장성이다.’ 하였다.
무자년735) 에 예종이 즉위하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겸하게 하였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겨 겸 이조 판서(兼吏曹判書)를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졸하였으니 나이가 65세이다.
졸한 다음 해에 순성 붕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朋亮經濟佐理功臣)의 호를 추증하였다. 봉상시(奉商寺)에서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질(貞質)·정간(貞簡)·정소(貞昭)를 써서 아뢰니, 전지하기를, ‘능성은 평생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청백하게 조심하여 살았다. 지금 아뢴 바 시호는 실제에 부응하지 아니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봉상시에서 다시 의논하여 충렬(忠烈)로 하여서, 청렴하고 방정하고 공평하고 정직한 것이 충(忠)이고, 공훈이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이 열(烈)이라고 하였더니, 그대로 따랐다. 아들 구경(具慶)은 일찍 죽고 손자 구장손(具長孫)이 있다.
구치관은 용모와 행동이 엄숙하고 확연하게 지키는 것이 있어서 이익과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전형 선발의 임무를 맡았으나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다. 혹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응당 옮길 사람이라도 끝내 옮겨 주지 아니하였다.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3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729]기유년 : 1429 세종 11년.
- [註 730]
갑인년 : 1434 세종 16년.- [註 731]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732]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733]
○綾城府院君 具致寬卒。 輟朝, 弔祭、禮葬如例。 致寬字而栗, 綾城人, 贈左議政楊之子。 宣德己酉中生員, 甲寅中文科, 授承文院正字, 遷藝文館檢閱, 尋陞待敎, 遷承政院注書。 累轉司憲監察、黃海道都事, 歷兵(書)〔曹〕 佐郞ㆍ正郞、成均司藝、議政府檢詳、司僕寺尹。 景泰癸酉, 世祖靖難, 遣致寬于咸吉道, 誅除逆黨, 超授保功大護軍。 世祖輔政, 召與謀議, 深器之曰: "恨知卿晩也。" 俄擢承政院同副承旨, 轉至左承旨。 世祖卽位, 策勳賜推忠佐翼功臣號, 陞吏曹參判, 封綾城君, 尋移兵曹。 世祖嘗曰: "綾城, 文武全才, 吾何患將相無人乎?" 天順丁丑, 請封睿宗爲世子, 致寬以副使如京, 使還稱旨, 進階嘉靖, 移戶曹參判, 特拜平安道節度使。 敎曰: "吾不欲卿離左右。 但分閫任重, 不得已煩卿。 卿行之後, 吾不復西顧矣。" 致寬至平安道, 請輸本道田稅于沿邊州郡, 以備軍需, 又請罷貢物, 以安邊氓, 皆從之。 召還, 拜吏曹判書, 階正憲。 士大夫相慶曰: "正人掌銓選, 公道行矣。" 咸吉道, 自浪甫兒罕構逆之後, 邊塵屢驚, 以致寬爲本道都體察使, 往鎭撫之, 階崇政。 壬午拜議政府右贊成, 尋陞輔國崇祿綾城府院君, 進拜右議政, 轉領議政。 丙戌, 以盛滿辭, 還封府院君。 國家奉帝命, 討建州 野人 李滿住, 敗之, 其餘孼窺覦邊境, 國家憂之, 以致寬爲鎭西大將軍遣之, 世祖語左右曰: "綾城, 吾之萬里長城也。" 戊子, 睿宗卽位, 令兼戶曹判書。 及上卽位, 甚敬重之, 命爲兼吏曹判書。 至是卒, 年六十五。 卒之明年, 追贈純誠(朋)〔明〕 亮經濟佐理功臣號。 奉常議諡, 以貞質、貞簡、貞昭議啓。 傳曰: "綾城, 平生爲國盡忠, 淸白自守, 今所啓之諡, 未副於實。 其更擬以啓。" 奉常更議以忠烈: 廉方公正, 忠; 有功安民, 烈。 從之。 子慶早歿, 有孫長孫。 致寬容儀嚴肅, 確然有守, 不爲利勢所搖, 律身淸儉, 疾惡如讎。 前後掌選, 門無私謁, 選用皆公。 有或干請者, 例雖應遷, 終不遷。 不治産業, 死之日, 家無餘財。 然以好惡之偏, 人頗短之, 至有以行詐釣名譏之者。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53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