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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7권, 성종 1년 8월 16일 신유 2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대사헌 한치형 등과 대사간 김수녕 등이 3년상의 예제를 준수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치형(韓致亨) 등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김수녕(金壽寧)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엎드려 의지(懿旨)를 보니, 예전 제도를 모방하고 편의를 따라서 예종(睿宗) 소상 뒤부터는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3년상은 편의적 제도에 의하여 짧게 하거나 길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 번이나 청을 올렸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여 분격(憤激)하고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천하의 일은 원칙[經]이 있고 편의[權]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것을 직접으로 하지 않는 것은 원칙이고, 형수(兄嫂)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구원하는 것은 편의입니다. 편의는 부득이한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형수가 빠지지 아니하였으면 마침내 구원하지 않았을 것이니, 편의를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면 3년을 거상(居喪)하고 임금이 돌아가면 부모의 상에 준하여 3년을 거상하였으니, 그 법은 하늘에 근본하고 그 의(義)는 땅에 근본하여 삼대(三代)653) 가 함께 한 바로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역월제(易月制)는 대개 일체의 법이 되었으나, 백세(百世)654) 를 기다려도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때가 다르고 세상이 다르다 하여, 양음(諒陰)의 예(禮)를 지금에 시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역월의 제도도 차마 할 바가 아닙니다. 이미 역월의 제도가 예법에 미안하다면 1년 만에 길복(吉服)을 입는 것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 때부터 적당히 가감하여, 장사를 지내면 곡(哭)을 마치고, 졸곡(卒哭)하면 흰옷을 입고, 제사 때에는 최복(衰服)을 입고서 3년상(三年喪)을 마치는 것을 일대(一代)의 정한 제도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중국(中國) 사람 중에서 보고 들은 자는 다 우리 나라의 집상(執喪)이 예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크게 부득이한 일도 없는데 반드시 편의적 제도를 사용하려고 하니, 신들의 미혹(迷惑)함이 더 심합니다.

전하의 예종에 대한 정분의 친소(親疎)는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계자가 된 의리가 중대하여 은혜는 〈부모와 같이〉 망극(罔極)하므로 편의적 방법을 쓸 수 없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한나라의 신자(臣子)로서 의리상 마땅히 3년 복(服)을 입어야 하므로 세조의 상(喪)과 더불어 경중(輕重)이 없으니, 편의적 방법을 쓸 수 없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만일 모후(母后)가 서정을 청단(聽斷)하는 이유로 편의적 제도를 취한다면, 《예기(禮記)》에,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의 상은 1주년으로 탈상(脫喪)하고, 그 후부터는 흰옷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친다.’ 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보다 더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곧 길복을 입는 것이니, 편의적 방법을 쓸 수 없는 것의 세째 이유입니다.

예문을 상고하여 보면 ‘70에도 오직 상복이 몸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늙어서 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상을 이룰 수 없으면 상복을 벗어야 하는데, 벗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상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늙었다고 하여 상복을 벗으면 소장자(少壯者)도 또한 벗을 것이고, 병이 있다고 해서 상복을 벗으면 건강한 자도 또한 벗을 것이니, 그러한 조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기미(幾微)를 삼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성인(聖人)이 백성의 잘못을 예방하려는 것입니다.

예전에 부자(夫子)655) 가 예법을 좋아하여 양(羊) 바치는 제도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무릇 3년상에 있어서 어찌 다만 초하루에 희생으로 바치는 양뿐이겠습니까? 영구히 취할 법과 백성들의 본받음이 모두 여기서 결정되는 것이니, 구구한 소절(小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금 깊이 생각하시고 속히 용단을 내리시어 한결같이 3년의 예제(禮制)를 준수하게 하여 조선 만세의 법이 되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전지하기를,

"이미 상소의 뜻을 알았다. 지금과 같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는 것이 과연 순수한 상(喪)이겠느냐? 부득이할 뿐이다. 주상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나는 이것을 염려하였다. 이미 세조의 3년상을 지냈는데 또 다시 예종의 3년상이 있고 나의 유고(有故)도 또한 알지 못하니, 내가 부득이하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주상이야 어찌 이 뜻을 알겠느냐? 다만 내가 억지로 하였으니 경들은 그렇게 알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8장 B면【국편영인본】 8책 52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註 653]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654]
    백세(百世) : 오랜 세대.
  • [註 655]
    부자(夫子) : 공자(孔子)를 말함.

○司憲府大司憲韓致亨等、司諫院大司諫金壽寧等上疏曰:

臣等伏覩懿旨, 倣古從權, 自睿宗小祥後, 釋衰從吉。 臣等意以爲, 三年之喪, 不可以權制, 有所短長, 上請至再, 未得蒙允, 不勝憤激懃懇之至。 竊惟天下之事, 有經有權。 男女授受不親者也: 經也, 嫂溺援之以手者, 權也。 權出於不得已, 故嫂非溺, 終不援, 權可容易用之乎? 古者, 親死, 致喪三年; 君薨, 方喪三年。 其經則本乎天, 其義則本乎地, 三代所共, 不可以易之者也。 易月之制, 蓋爲一切之法, 非百世以俟而不惑者也。 縱時異、世殊, 諒陰之禮, 不可行於今, 而易月之制, 非所忍也。 旣易月之制, 於禮未安, 則周朞從吉, 恐亦未可也。 自我祖宗, 斟酌損益, 旣葬而卒哭, 卒哭而素服, 祭則用衰, 以終三年, 以爲一代之定制。 中國見聞者, 皆以爲東國執喪有禮。 今非有大不得已之事, 而必用權制, 臣等之惑滋甚。 殿下之於睿宗, 親疏情分, 不能無少間, 而義重爲後, 恩同罔極, 可用權者一也; 一國臣子, 義當服三年, 與世祖之喪, 無重輕, 其不可用權者二也; 若以慈聖殿下聽斷之故, 合從權制, 則《禮》: "父在爲母朞, 自後用白衣終制。" 不以壓於父, 故便卽吉服, 其不可用權者三也。 按禮: "七十唯衰麻在身。" 以老不成喪也。 老不成喪, 衰若可釋, 而不釋者何也? 重之也。 以老而可釋, 則少壯者亦釋; 以病而可釋, 則康强者亦釋。 漸不可不慮, 微不可不謹, 此聖人所以防民者也。 昔夫子愛禮而存羊, 夫三年之喪, 豈直告朔之餼羊而已哉? 萬世之所取法, 群下之所儀刑, 皆決於此, 非區區小節之可以推移者也。 伏望少留三思, 亟賜剛斷, 一遵三年禮制, 以爲朝鮮萬世法, 不勝幸甚。

大王大妃傳曰: "已悉疏意。 如今衣帛、食肉, 是果純喪乎? 不得已耳。 主上無嗣, 予心是慮。 旣經世祖三年, 又更睿宗三年之喪, 予之有故, 亦未可知, 吾所以不得已者, 以是也。 主上安知此意? 但予强之耳。 卿等其知之。"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8장 B면【국편영인본】 8책 52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