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하다
원상(院相)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영의정(領議政)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曺錫文)·좌의정(左議政) 윤자운(尹子雲)·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 등이 승정원(承政院)에 모이니, 사알(司謁)이 고하기를,
"승지(承旨) 등은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시오."
하므로, 승지와 원상 등이 모두 사정전의 문내(門內)로 나아갔다.
진시(辰時)에 임금이 자미당(紫薇堂)에서 훙(薨)하였다. 승전 환관(承傳宦官) 안중경(安仲敬)이 대궐 안으로부터 곡읍(哭泣)하며 나와서 모든 재상에게 훙(薨)하였음을 고하니, 모든 재상들도 실성(失聲)하며 통곡하였다. 안중경이 태비(太妃)의 명을 선포(宣布)하여 이르기를,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와서 봉시(奉視)하라."
하였다. 겸 판서 신숙주가 도승지 권감과 함께 자미당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입직한 도총관(都摠管) 노사신(盧思愼)이 또한 대궐문 안으로 들어오니, 모든 재상들이 노사신과 함께 의논하여, 위사(衛士)로 하여금 궁성의 모든 문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신숙주가 권감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큰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하여야 한다."
하니, 권감이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를 인하여 태비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주상자(主喪者)를 정하여서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소서. 이것은 큰 일이므로 중사(中使)를 시켜 전달(轉達)할 수 없으니, 청컨대 친히 아뢰게 하소서."
하고는 정현조가 들어가 친히 계달하고, 왕복하면서 출납(出納)하기를 서너 번 하자, 이윽고 태비가 강녕전(康寧殿) 동북쪽 편방(便房)에 나와서 원상과 도승지를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권감 등이 들어오고, 한계희·임원준 등이 또한 자미당으로부터 들어오니, 태비가 슬피 울었다. 조금 지나서 신숙주가 아뢰기를,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하니, 태비가 이르기를,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하였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 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 정현조와 권감을 시켜 여러 재상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신 등이 감히 의의(議擬)할 바가 아니니, 원컨대 전교를 듣고자 합니다."
하므로, 정현조에게 명하여 전교하기를,
"이제 원자(元子)998) 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999) 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홀로 자을산군(者乙山君)1000) 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太祖)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슬피 울며 목이 메어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신숙주가 아뢰기를,
"국가의 액운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종묘와 사직을 염려하여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사군(嗣君)을 잘 조호(調護)하여 비기(丕基)1001) 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외간(外間)은 시청(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뒷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
하고, 드디어 태비에게 하직하고 사정전 뒤 서쪽 뜰로 나갔다.
신숙주가 최항과 더불어 의논하여 교서(敎書)를 초(草)하였다. 신숙주 등이 의논하여 장차 한명회와 권감 등을 시켜 위사(衛士) 20여 인을 거느리고 자을산군 본저(本邸)에 가서 맞아오려고 하였는데, 미처 계달하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예궐하였다가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병방 승지(兵房承旨) 한계순(韓繼純)을 보내어서 환관 3인, 겸사복(兼司僕) 10인, 오장 차비(烏杖差備)를 거느리고 자을산군의 부인을 본저에서 맞아 들이게 하소서."
하였다. 신숙주 등이 태비의 청정(聽政)을 계청하였다. 태비가 전교하기를,
"나는 이미 박복하여 일이 이와 같으니, 심신을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양하려고 한다. 또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粹嬪)1002) 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
하니, 신숙주 등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고사(故事)가 있고, 또 온 나라 신민의 여망(輿望)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태비가 두번 세번 사양하므로, 원상과 승지 등이 굳이 청하고 인하여 글을 올려서 이르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가 성상의 슬픔을 만나 재앙과 근심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는데, 또 이제 대행 대왕(大行大王)도 갑자기 만기(萬機)를 버리시었고, 계사(繼嗣)가 유충(幼沖)하여 온나라의 신민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니, 자성 왕대비 전하(慈聖王大妃殿下)께서는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 전례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여정(輿情)에 따라 무릇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함께 듣고 재단(裁斷)하다가, 사군(嗣君)이 능히 스스로 총람(摠攬)할 때를 기다려서 정사를 돌려주시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3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註 998]원자(元子) : 제안 대군(齊安大君).
- [註 999]
월산군(月山君) : 덕종(德宗)의 장남. 성종(成宗)의 친형.- [註 1000]
○院相高靈君 申叔舟、上黨君 韓明澮、綾城君 具致寬、寧城君 崔恒、領議政洪允成、昌寧君 曺錫文、左議政尹子雲、右議政金國光等, 會承政院。 司謁告曰: "承旨等, 可詣思政殿。" 承旨及院相等, 皆詣思政殿門內。 辰時, 上薨于紫薇堂。 承傳宦官安仲敬, 自內哭泣而出, 告諸宰, 諸宰失聲痛哭。 仲敬宣太妃命曰: "禮曹判書可奉視。" 兼判書申叔舟與都承旨權瑊, 入紫薇堂還出, 入直都摠管盧思愼, 亦詣門內, 諸宰與思愼共議, 令衛士堅守宮城諸門。 叔舟謂瑊曰: "國家大事至此, 主喪不可不早定。" 瑊因河城君 鄭顯祖, 啓太妃曰: "請定主喪者, 以固邦本。 此大事, 不可因中使轉達, 請親啓。" 稟顯祖以啓, 往復出納者數四。 久之, 太妃御康寧殿東北便室, 命召院相及都承旨入來。 叔舟、明澮、致寬、恒、允成、錫文、子雲、國光、瑊等入, 繼禧、元濬, 亦自紫薇堂而至, 太妃悲泣。 良久, 叔舟啓曰: "臣等在外, 但聞上體未寧, 不謂至此。" 太妃曰: "得疾之時, 每日朝予, 故予以爲: ‘病重則豈敢如此?’ 不甚爲慮, 今乃至此, 計將安出?" 命顯祖及瑊, 遍問諸宰曰: "誰可主喪者?" 僉曰: "非臣等所敢議擬, 願聞傳敎。" 命顯祖傳曰: "今元子方幼, 且月山君, 自幼嬰疾, 獨者乙山君雖幼, 世祖嘗許其器度, 至比太祖, 令主喪何如?" 僉曰: "允當。" 從之。 因哀泣嗚咽不自勝。 叔舟啓曰: "國家厄運至此, 奈之何哉?伏願以宗社爲念, 少抑哀情, 善調護嗣君, 以保丕基。" 仍啓曰: "外間則視聽煩, 請出思政殿後庭議事。" 遂辭, 出於殿後西庭。 叔舟與恒, 議草敎書。 叔舟等議, 將遣明澮、瑊等, 率衛士二十餘人, 欲迎者乙山君于本邸, 未及啓, 而者乙山君已詣闕, 承召入內。 僉議啓達: "遣兵房承旨韓繼純, 率宦官三人、兼司僕十人及烏杖差備, 迎者乙山君夫人于本邸入內。" 叔舟等啓請太妃聽政。 傳曰: "予旣薄祐, 事已如此, 欲怡神自養。 且予不解文字, 粹嬪解文達理, 可治事。" 叔舟等啓曰: "自有故事, 且一國臣民之望如此。" 太妃讓之至再, 院相承旨等固請, 因進狀曰: "臣等竊惟, 國家逢天之戚, 禍患相仍。 世祖大王不永享年, 又令大行大王遽捐萬機, 繼嗣幼沖, 一國臣民, 遑遑莫知攸濟。 慈聖王大妃殿下, 少抑哀情。 永惟宗社之重, 上念故典, 下循輿情, 凡軍國機務, 同聽裁斷, 以俟嗣君能自摠攬還政, 不勝幸甚。" 從之。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8책 43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註 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