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현 망일암의 중 축일이 전라도에 군도가 없는데도 징병이 많음을 아뢰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 망일암(望日庵)의 중 축일(竺日)이 아뢰기를,
"신은 10월 초1일에 제자승(弟子僧) 백운(白雲)과 운수(雲水)를 거느리고 김제(金堤)로부터 경상도(慶尙道)로 향하였는데, 운봉현(雲峰縣) 해현(海峴)과 지리산(智異山) 등지에 군사가 진을 치고 있으므로, 신이 넘어가지 못하고 남원부(南原府) 율곡(栗谷)으로 돌아왔더니, 초막(草幕)의 중이 이르기를, ‘적성진(積城津) 양변에 군사가 진을 치고 있다.’ 하므로, 신이 순창군(淳昌郡) 사월현(沙月峴) 등지로 향하였으나, 그곳에도 군사가 진을 치고 있으므로 넘어가지 못하고 담양부(潭陽府) 용천동(龍川洞)으로 향하였더니, 또 군사가 진을 치고 있으므로, 신은 김제의 매부(妹夫) 박지무(朴枝茂)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제의 군사들이 이달 15일에 전주(全州) 장신원(長信院)에 모이려고 하다가, 장수가 이르기를, ‘사사로운 군사를 모으는 것을 불가하다.’ 하고, 드디어 해산해 버렸는데, 신이 24일 서울에 올라올 때에 또 김제군에서 다시 징병(徵兵)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이 전라도를 두루 다녔으나 군도(群盜)가 조금도 없었는데, 금년 6월로부터 도둑을 잡는다는 이름 아래 모든 곳에 군사가 둔치니, 신은 금강(錦江)과 한강(漢江)에 얼음이 언 후에 저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서울로 올라 오지나 않을까 저으기 의심스럽습니다. 신이 가진 노인(路引)969) 은 부안현 문수사(文殊寺)의 중 의혜(義惠)와 신응(信應)이 만든 것입니다. 옛적에 중 율사(律師)가 문수사에 모가 나고 둥근[方圓] 나무 도장 각각 한 건(件)을 두어 지금까지 통용함으로써 무릇 노인을 받는 중은 모두 이 절에서 받습니다."
하니, 승정원(承政院)에서 이것을 임금에게 올리고, 또 이르기를,
"전라도와 경상도에 도둑이 바야흐로 치열한데, 축일(竺日)은 도둑이 없다고 이르고, 그가 가진 노인(路引)의 인적(印跡)이 또한 위조(僞造)이니, 청컨대 사람을 보내어서 그의 인신(印信)을 수색하고, 승도(僧徒)를 잡아 오게 하소서."
하니, 축일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진무(鎭撫) 송숙기(宋叔琪)를 부안에 보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427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군사-지방군(地方軍) / 변란(變亂)
- [註 969]노인(路引) : 육지로 먼 길을 여행하던 사람에게 발급하여 주던 여행 증명서.
○庚辰/全羅道 扶安縣 望日庵僧竺日啓: "臣十月初一日, 率子第僧白雲、雲水, 自金堤, 向慶尙道, 雲峯縣 海峴及智異山等處, 軍士結陣, 臣不得過行, 還到南原府 栗谷。 草幕僧云: ‘積城津兩邊, 軍士結陣。’ 臣向淳昌郡 沙月峴等處, 軍士結陣, 臣不得過行, 向潭陽府 龍川洞, 軍士結陣, 臣還到金堤妹夫朴枝茂家。 金堤軍士等, 本月十五日, 聚全州 長信院, 將帥云: ‘不可私聚軍士。’ 遂放之, 臣於二十四日來京時, 又聞金堤郡更徵兵。 臣遍行全羅道, 略無群盜, 自今年六月, 以捕賊爲名, 屯軍諸處, 臣竊疑錦江、漢江氷合後, 擧兵上來。 臣所持路引, 則扶安縣 文殊寺僧義惠、信應所爲也。 昔者僧律師於文殊寺, 置木印方圓各一樣, 至今行用, 凡受路引僧, 竝於是寺受之。" 承政院以啓, 且曰: "全羅、慶尙道, 盜賊方熾, 而竺日云無, 其所持路引, 印跡亦僞, 請遣人搜其印信, 拿僧徒以來。" 命囚竺日于義禁府, 遣鎭撫宋叔琪于扶安。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8책 427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군사-지방군(地方軍)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