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전에서 친히 연제를 지내고, 광릉에 가서 제사를 지내다
임금이 영창전(永昌殿)에서 친히 연제(練祭)를 지내고, 드디어 광릉(光陵)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서 수릉관(守陵官)·시릉 환관(侍陵宦官)에게 겨울옷을 내렸으며, 드디어 봉선사(奉先寺)에 거둥하여 숭은전(崇恩殿)에 제사하고서 봉선사에 쌀 1백 석(石)을 내렸다. 이때 봉선사의 조성(造成)이 끝나자 세조(世祖)의 기신(忌晨)을 위하여 칠일불사(七日佛事)를 베풀었다. 처음 이 절을 세울 때에 중[僧] 학조(學祖)·학열(學悅)이 낙산사(洛山寺)로부터 와서 부엌 10여 간을 고쳐 세웠는데, 제조(提調)·낭관(郞官)은 감히 한 마디 말도 끼어들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점사(楡岾寺)에서 왔을 때에 간경 도감(刊經都監)에서 병과(餠果)를 장만하여 위로하였는데, 제조 김수온(金守溫)이 낭관에게 말하기를,
"학조를 위로하고자 누가 앞장서서 말하였느냐?"
하니, 낭관이 말하기를,
"정승(政丞) 구치관(具致寬)이 명하였습니다."
하니, 김수온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공(具公)이 젊어서는 정대(正大)한 것으로 자부[自許]하더니, 만년(晩年)에는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느냐?"
하였었다. 구치관은 기국(器局)이 엄숙하고 사사로운 청탁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문에서 받지 않으므로 세상에는 그 청렴을 일컬었으나, 행실이 경박한 유양춘(柳陽春)과 무뢰(無賴)한 김칭(金稱)을 구치관이 다 엄호하였고, 김칭을 쓸만하다고 조정에서 자주 칭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의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8책 415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戊子/上親行練祭于永昌殿, 遂詣光陵行祭, 賜守陵官、侍陵宦官冬衣, 遂幸奉先寺, 祭于崇恩殿, 賜奉先寺米百石。 是時奉先寺告成, 爲世祖(忌晨)〔忌辰〕 , 設七日佛事。 初營是寺, 僧學祖、學悅, 自洛山寺來, 改創廚舍十餘間, 提調、郞官, 不敢措一言。 先是來自楡岾, 刊經都監辦餠果慰之, 提調金守溫謂郞官曰: "慰學祖, 誰先唱之?" 郞官曰: "具政丞致寬命之。" 守溫笑曰: "具公少以正大自許, 到晩年何至是耶?" 致寬器局峻整, 門不受私謁, 世稱其淸, 然柳陽春薄行, 金偁無賴, 致寬皆掩護之, 至以偁爲可用, 數數延譽於朝, 人以是疑之。
-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8책 415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