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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일 갑인 3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임금이 근정문에 나아가니, 한명회·임원준과 승지 등이 모시다

임금이 근정문(勤政門)에 나아가니, 한명회(韓明澮)·임원준(任元濬)과 승지 등이 모시었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표신(標信)609) 을 가지고 대종(大鍾)을 거듭 치게 하였는데, 그 절차는 한결같이 병정(兵政)과 같았으나, 오직 시신(侍臣)들이 영추문(迎秋門) 밖에서 모였으니, 영창전(永昌殿)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도총관(都摠管) 한계미(韓繼美)와 위장(衛將) 유자광(柳子光)·진례군(進禮君) 이형(李衡)·이철견(李鐵堅)·선전관(宣傳官) 김계정(金繼貞) 등에게 명하여 표신(標信)과 표기(標旗) 각각 1개씩을 가지고, 종사관(從事官)은 각각 3개씩을 가지고, 오위(五衛)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조금 있다가 대내(大內)로 돌아와서 선전관 각 3인을 1위(衛)에 보내어 그 군사의 수와 군장(軍裝)을 점고하게 하고, 또 도총부 낭관(都摠府郞官) 4인을 나누어 보내어 표신을 가지고 가서 궐내(闕內)의 제사(諸司)와 시신(侍臣)으로서 영추문 밖에 있는 자, 제사(諸司)의 동서(東西) 조방(朝房)에 모인 자, 그리고 도성 밖의 제사에게 미처 성문에 들어오지 못한 자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날 내금위(內禁衛)가 1백 20인, 제색 군사(諸色軍士)가 5천 9백 70인, 방리인(坊里人)이 3천 7백 86인, 오위(五衛)의 오원(五員)이 1백 72인, 궐내에 입직(入直)한 군사가 2천 1백 63인, 제사의 관원이 68인, 궐외(闕外)의 제사의 관원이 4백 46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즉위한 후로 이제서야 비로소 첩종(疊鍾)610) 하였는데, 군사의 수가 많지 아니하고, 백관(百官)도 또한 적다. 군사로서 점고에 빠진 자는 지금은 우선 용서하나, 백관으로서 점고를 받지 않은 자는 만약에 그 이름을 알게 되면 곧 파직하여 쓰지 않고자 한다."

하고, 선전관에게 명하여 오위의 진(陣)을 파하게 하였다. 이어서 군사들에게 전교하기를,

"오늘 점고에 빠진 군사는 우선 그대로 두겠으나, 후일에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마땅히 군법(軍法)으로 쓰겠다."

하고, 한명회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첩종(疊鍾)하여 군사의 수효를 알고자 하였는데, 이와 같이 적으니, 이는 오부(五部)의 관리(官吏)와 이수(里帥)들이 능히 검거(檢擧)하지 못하고, 또 널리 알리지 않은 소치이다. 그들을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이 앞서 대종(大鍾)을 거듭 쳐서, 문무 백관과 도성 사람으로서 이름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는 자가 모두 병장(兵杖)을 가지고 진(陣)을 베풀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방리(坊里)의 군사들이 창졸간에 궁시(弓矢)와 갑주(甲胄)를 갖추지 못하여, 혹은 남편이 나가고 부인만 〈집에〉 있다가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하려고 하여서, 그 값이 평시의 10배나 되어 여자가 혹은 노구[鍋]를 쓰고 병장(兵杖)을 가지고 항오(行伍)를 갖추었는데, 군사를 점고하는 자가 이를 숨기어 계문하지 아니하고, 다만 군사가 적다고만 아뢰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註 609]
    표신(標信) : 궁중에 급변(急變)을 전할 때나 궁궐문을 드나들 때에 표를 가지던 문표(門標).
  • [註 610]
    첩종(疊鍾) : 열무(閱武)할 때에 군대를 모으기 위하여 대궐 안에서 치던 큰 종.

○上御勤政門, 韓明澮任元濬及承旨等侍。 命宣傳官, 持標信疊擊大鍾, 其節次一如兵政, 唯侍臣會于迎秋門外, 以永昌殿在東故也。 命都摠管韓繼美、衛將柳子光進禮君 李鐵堅、宣傳官金繼貞等, 齎標信標旗各一, 從事官各三, 分領五衛, 俄而還內, 遣宣傳官各三人于一衛, 點其軍數及軍裝。 又分遣都摠府郞官四人, 齎標信往點闕內諸司及侍臣之在迎秋門外者, 諸司之會東西朝房者, 都城外諸司未及入門者。 是日, 內禁衛一百二十, 諸色軍士五千九百七十, 坊里人三千七百八十六, 五衛五員一百七十二, 闕內入直軍士二千一百六十三, 諸司官員六十八, 闕外諸司官員四百四十六。 上曰: "予卽位後, 今始疊鍾, 軍數不多, 百官亦少。 軍士之闕點者, 今姑赦之, 百官不被點者, 若知其名, 則卽欲罷之而不果也。" 命宣傳官, 罷五衛陣。 仍敎軍士等曰: "今日闕點軍士, 姑置之, 後有如是者, 當用軍法。" 謂明澮等曰: "予今疊鍾, 欲知兵數, 而尠少若此, 是則五部官吏及里帥等, 不能檢擧, 亦不廣諭之致然也。 其令義禁府鞫之。" 前此疊擊大鍾, 文武百官及都人名係軍籍者, 悉帶兵仗作陣待命。 至是坊里軍, 倉卒不得具弓矢甲胄, 或夫出婦在, 欲雇人代之, 則其直十倍平時。 女或冠鍋持杖而備行伍, 點兵者匿不聞, 但以軍少啓之。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