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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5월 20일 계묘 1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임금이 경회루에 나아가 익대 공신에게 교서를 내리고, 술을 내려 주다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익대 공신(翊戴功臣)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고, 이어서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돌아와 환관(宦官) 전균(田畇)으로 하여금 궁온(宮醞)을 가지고 가서 이들을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또 자을산군(者乙山君) 【금상(今上)의 휘(諱)이다.】 에게 명하여 이화주(梨花酒) 1담(壜)을 가지고 가서 내려 주게 하였다.

수충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이 길이 끝없는 기업(基業)을 보전하고 의사(誼士)가 도와서 부지(扶持)하니 능히 불세(不世)의 공적을 세웠도다. 해가 추우면 송백(松柏)의 지조(志操)를 알고, 때가 위태하면 영웅(英雄)의 재주를 아는데, 공(功)을 능히 잊을 수가 없으니, 상(賞)을 어찌 감히 늦추겠는가? 경은 태산(泰山)과 하수(河水)같이 기운이 장(壯)하고 문(文)과 무(武)의 재주를 겸전하였도다. 일찍이 호탕(豪宕)한 자품(資品)을 지니고, 항상 뇌락(磊落)한 행동을 흠모하였다. 비록 경략(景略)489)문슬(捫蝨)490) 에 오히려 굴하고 영척(寗戚)의 반우(飯牛)491) 에 마침내 폈도다. 황고(皇考)의 말년(末年)을 당하여 북문(北門)의 큰 적(賊)이 있어, 병정(兵丁)을 여러 도(道)에서 징집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군사를 누순(累旬)에 수고롭게 하였다. 경(卿)이 비로소 변(變)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 드디어 채찍을 짚고 간담(肝膽)을 나타냈도다. 아침에는 글을 호관(虎關)에서 받들고, 저녁에는 봉전(鳳殿)에서 소대(召對)하니, 기묘한 모계(謀計)는 진실로 성산(聖算)에 맞았고, 효용(驍勇)은 과연 전장(戰場)에서 갚았도다. 돌아와서 예모(睿謀)를 받들고 또 적로(賊虜)의 지역으로 가서 바로 거추(巨酋)의 굴혈(窟穴)을 탐색하고 홀로 비장(飛將)의 이름을 드날렸도다. 조종(祖宗)의 수욕(羞辱)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朝廷)의 치욕(恥辱)을 씻었다. 불과 두어 달 안에 두 차례 만세(萬世)의 공(功)을 세우니, 예권(睿眷)이 특히 더하였고, 이름과 지위가 더욱 현달(顯達)하였다. 문득 정시(庭試)에서 으뜸으로 뽑혔고, 이에 하관(夏官)에 참정(參政)하였다. 온 조정이 절륜(絶倫)의 재주에 복종하였고, 황고(皇考)께서 명세(命世)의 어진이를 만난 것을 기뻐하셨다. 돌아보건대 묘말(眇末)의 몸으로서 집안의 민흉(愍凶)함을 만났는데, 문득 기도(基圖)를 이으니, 부하(負荷)된 책임을 견디지 못하겠다. 불의(不意)에 간흉(奸兇)한 무리들이 몰래 반측(反側)하는 마음을 품고 당원(黨援)이 뿌리박았으나 알지 못하였고, 화기(禍機)가 드리워 나타났으나 깨닫지 못하였다. 다행히 천지(天地)의 묵묵히 도와주시는 데 힘입고, 거듭 조종(祖宗)의 남몰래 보호하시는데 힘입었도다. 경(卿)이 이에 먼저 왕망(王莽)492)동탁(董卓)의 음모(陰謀)를 알아 나에게 달려와 고(告)하였고, 능히 왕돈(王敦)493)왕함(王含)494)반상(反狀)495) 을 밝혀 그 죄를 복주(伏誅)시키고, 과매(寡昧)를 간난(艱難)한 가운데 막아 주었고, 종사(宗社)를 위의(危疑)의 지경에서 보호하였다. 옛적에 경의 형 오성군(筽城君)이 이미 황고(皇考)를 도와서 능히 정난(靖難)의 공(功)을 이루었고, 경이 이제 또 과궁(寡躬)을 도와서 특히 익대(翊戴)의 공적을 세웠도다. 우리 부자(夫子)의 서로 계승(繼承)함을 생각건대, 오직 경의 형제를 이에 의빙(依憑)하였으니, 막대한 공(功)을 갚고자 하는데, 어찌 비상한 은전을 거행하지 않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였으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 유자광(柳子光)의 후손’ 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과 노비(奴婢) 13구(口)와 구사(丘史) 7명과 전지(田地) 1백 50결(結)과 은(銀) 50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고, 별도로 노비 7구(口)와 전지(田地) 50결(結)과 표리(表裏) 1투(套)를 주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밝게 펴져 있으니, 감히 성한 공훈을 잊겠는가? 산하 대려(山河帶礪)처럼 면면히 길도록 함께 후손을 보전할지어다."

하였다. 수충 협책 정난 동덕 좌익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고령군(高靈君) 겸춘추관 영사(兼春秋館領事) 예조 판서(禮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예로부터 대신이 국가의 한가할 때를 당하여 능히 찬양(贊襄)하여 조섭(調爕)하는 사람은 세상에 진실로 적지 아니하나, 위의(危疑)할 때에 이르러 주책(籌策)을 세워서 하고 결행하여 화란(禍亂)을 이기고 불세(不世)의 기공(奇功)을 세우는 사람은 대개 절대로 없거나 겨우 있을 뿐이다. 생각건대, 경(卿)이 기운을 광악(光岳)에서 나누어 세상에 드물게 낳았도다. 웅위(雄偉)하고 혼후(渾厚)한 도량과 문장(文章)과 경제(經濟)의 재주를 가지고 일찍이 우리 선왕(先王)을 만나서 관중부(管仲父)496) 에 비유하면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하면 따랐도다. 그대가 보필하여, 그대가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 되고, 나가면 장수(將帥)가 되어 14년의 태평한 정치를 찬성(贊成)하였고, 내가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되자, 쓸쓸해 상(喪) 중에 있었는데, 불의(不意)에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나의 어리고 미흡한 것을 기만하여 몰래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였다. 경(卿)이 두서너 원로(元老)와 더불어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잔제(剗除)할 것을 협모(協謀)하여 크게 간난(艱難)을 구제하였으니, 이는 비록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 주신 힘이었지만 또한 경 등이 충성을 다하여 협보(夾輔)하는 데에 힘입은 것이로다. 아아! 사직(社稷)의 신하(臣下)가 있어서, 위태하면 부호(扶護)하여 주고 엎어지면 부지(扶持)하여 주지 아니하면, 국가가 능히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경(卿)이 선왕(先王)을 좌우에서 돕고, 두 차례의 큰 난(亂)을 평정하였고, 또 나와 같이 어린 사람을 도와 지금의 휴상(休祥)을 보전하게 하여 그 공적을 이루었으니, 우리 왕실에 있어서 만세토록 길이 의뢰(依賴)하리로다. 이에 경(卿)을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으로 책훈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으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였으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 신숙주(申叔舟)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人)과 노비(奴婢) 13구(口)와 구사(丘史) 7명(名), 전지(田地) 1백 50결(結)과 은(銀) 50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하늘을 버티고 해를 꿰뚫는 충성은 이미 평탄하거나 험난하거나 변함이 없었으니, 여산 대하(礪山帶河)497) 의 맹세를 마땅히 종시(終始)토록 더욱 굳건히 할지로다."

하였다. 수충 위사 협책 정난 동덕 좌익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질풍(疾風)에도 시들지 아니하니 절개(節介)는 홀로 송백(松柏)과 같이 높고, 큰 내를 건너기가 이로우니 공(功)은 실로 주량(舟梁)에 이바지하도다. 만약 떳떳한 전장(典章)을 늦춘다면 어찌 포상(褒賞)하는 법(法)을 거행하겠는가? 경(卿)은 마음가지기를 충성하고 질박(質朴)하게 하고, 기운을 쌓기를 침잠(沈潛)하고 웅건(雄健)하게 하도다. 흉금(胸襟)에는 도략(鞱略)의 기묘함을 품고, 피복(被服)에는 시서(詩書)의 우아함을 지녔도다. 일찍이 중부(仲父)498) 의 천하를 일광(一匡)한 자취를 따랐고, 마침내 선왕(先王)의 세 번 돌아보신 영화(榮華)를 입었도다. 손으로 하늘의 은하수(銀河水)를 끌어당겨 간흉(奸兇)의 더러움을 씻었고, 친히 햇바퀴[日穀]를 부호(扶護)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의 때를 전환시켰도다. 생각건대, 우리 영왕(寧王)께서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서 맹세는 이미 정난(靖難)할 때에 함께 하였고, 공훈(功勳)은 다시 좌명(佐命)할 때 책정하였도다. 당당한 사직(社稷)의 양신(良臣)이요, 걸걸(揭揭)한 기상(旂常)499) 의 열사(烈士)로다. 나아가서 낭묘(廊廟)에 오르니, 구정(九鼎)을 조화(調化)하는 인망(人望)이 이미 높았고, 나가서 번유(藩維)에 임(臨)하니, 곤기(閫寄)를 나눈 위임(委任)이 더욱 무거웠도다. 무릇 경영(經營)하여 성공(成功)을 고(告)한 위업(偉業)이요, 모두 분주(奔走)하게 어모(禦侮)한 근로(勤勞)이었도다. 내가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오래 풍재(風裁)를 공경하였도다. 근래에 내가 상(喪) 중에 있음을 민망하게 여기고 요즈음 근심이 많았으니, 불궤(不軌)의 도당(徒黨)들이 준동(蠢動)하여 견디지 못할 기회를 다행히 여겨, 당(黨)이 연곡(輦轂)의 아래에 심고 화(禍)가 소장(蕭墻)500) 의 사이에 박두(迫頭)하였도다. 경(卿)이 초위(椒闈)501) 의 친척과 무릉(茂陵)의 고구(故舊)로서 변(變)을 듣고, 통탄(痛嘆)함이 지극하여 골수(骨髓)에 맺혔고, 의(義)를 떨쳐 간절(懇切)한 정성(精誠)으로 몸[軀]을 던졌도다. 조용히 능히 모유(謀猷)를 협찬(協贊)하여 앉아서 분개(憤愾)하는 적(敵)을 대적(對敵)하였고, 좌우(左右)에서 더욱 조호(調護)를 잘하여 족히 나의 간난(艱隹)을 막았다. 이미 일보다 앞서서 적을 평정하니, 아침이 다하지 못하는 사이에 편안케 구제하였다. 옛날 보형(保衡)502)탕(湯)임금이 덕(德)을 한가지로 하였고, 과연 유씨(劉氏)503)주발(周勃)504) 을 기필(期必)하여, 이에 편안하여졌는데, 어찌 거듭 명하는 은전(恩典)을 반포(頒布)하여, 대대로 돈독한 의(義)를 보답하지 않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으로 책훈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 한명회(韓明澮)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人)과 노비(奴婢) 13명, 구사(丘史) 7명(名)과, 전지(田地) 1백 50결(結)과 은(銀) 50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금석(金石)의 굳기가 한결같음을 생각하여, 길이 나라와 더불어 함께 휴상(休祥)을 누리고, 철권(鐵券)의 내려 줌이 세 차례나 이른 것을 생각하여 밝게 나를 보전하여서 아름다움을 오로지할지로다."

하였다. 수충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흥양군(興陽君) 신운(申雲)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충의(忠義)는 진실로 신자(臣子)의 아름다운 절개(節介)이지만 더욱 난(難)을 평정하고, 위태(危殆)함을 부호(扶護)하는 것보다 귀(貴)한 것이 없고, 벼슬과 상(賞)은 오직 인주(人主)의 큰 권한이지만 가장 먼저할 것은 공(功)과 덕(德)을 갚는 것이로다. 하물며 내정(內政)에 근시(近侍)의 신하(臣下)로서 능히 큰 공훈을 세웠으니,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어찌 사사로운 은혜라고 하겠는가? 생각건대, 그대가 뜻을 세우기를 충성하고 순수하게 하고, 몸가짐을 겸손하고 근신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세종(世宗)을 섬겼으나 우리 황고(皇考) 때에 미치자 궁중(宮中)에 거(居)하면서 반들고 모시는 데 숙야(夙夜)로 마음을 조심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행하는 일이 정(精)하고 민첩하여 하나도 어그러짐이 없었도다. 이로 말미암아 특별히 권련(眷憐)을 입었다. 내가 저궁(儲宮)에 있을 때 황고(皇考)께서 그대의 현명함을 간택(簡擇)하고 그대의 능(能)함을 기중(器重)히 여겨, 그대에게 명하여 나를 수종(隨從)하게 하였는데, 항상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출입하고 기거(起居)하는 데 움직이면 반드시 돕고 수행하여 허물이 있지 아니하였다. 그대로 하여금 나의 명(命)을 출납(出納)하게 하니, 또한 진실하게 하였으므로, 그대의 충성과 근면은 실로 배류(輩流)에서 뛰어났도다. 이제 호천(昊天)이 조위(弔慰)하지 아니하여 쓸쓸히 상(喪) 중에 있으니, 부하(負荷)한 책임이 어렵고 크므로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도다. 불의(不意)에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불령(不逞)한 자를 떼 지어 모아서 몰래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기미가 일어나서 흉악한 모계(謀計)가 저절로 누설되었다. 그대가 이에 겨우 상변(上變)을 듣자마자 충성과 의분(義憤)이 같이 격동(激動)하고, 분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두 장사(壯士)와 더불어 적도(賊徒)들의 소혈(巢穴)에 바로 들어가서 큰 괴수(魁首)를 묶어서 오니, 이에 여러 간사한 무리가 잇달아 묶여서 모두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으므로, 종사(宗社)가 다시 평안하여지고 나라의 운수가 길이 평안하여졌다. 그대의 분주하게 힘을 다한 공(功)을 생각하면 힘써 벼슬을 주고 힘써 상(賞)을 주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늦추겠는가? 이름을 종정(鍾鼎)에 새기고 얼굴을 단청(丹靑)에 그리는 것은 요행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에 그대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으로 책훈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 올리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말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 신운(申雲)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人)과 노비(奴婢) 13구(口)와 구사(丘史) 7명과 전지(田地) 1백 50결(結)과 은(銀) 50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그대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공훈(功勳)에 끼일 수 있게 하였으니, 나라와 더불어 함께 휴상(休祥)을 누리고 길이 종시(終始)에 믿음을 기약할지어다."

하였다. 수충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가정 대부(嘉靖大夫) 행 승정원 우부승지(行承政院右副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청평군(淸平君) 한계순(韓繼純)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천지를 바탕으로 하여 강하(江河)가 되니, 그 근원(根源)의 일어남이 반드시 멀 것이요, 명당(明堂)에 의지하여 동량(棟梁)을 지으니 오직 근원의 뿌리박음이 오로지 깊을 것이로다. 과연 심려(心膂)의 영특함을 믿겠고 진실로 기구(箕裘)505) 의 업(業)을 이으매, 그대의 할아버지가 숭상하고 공경하여 일찍이 태조(太祖)께 운수(運數)를 도와서 원훈(元勳)에 그 이름을 책정(策定)하였으니, 경복(慶福)을 쌓은 나머지 그 후손이 더욱 창성하도다. 경(卿)은 또한 나이가 젊었지만 덕기(德器)가 이미 이루어졌고, 재예(才藝)가 많아서 성화(聲華)가 크게 떨치니, 드디어 황고(皇考)께 지우(知遇)를 만나 일찍이 무예(武藝)를 형권(亨權)506) 에 폈도다. 후설(喉舌)의 직(職)에 뽑혀서 자리하여 출납(出納)하기를 오직 공경하게 하니, 매양 고굉(股肱)과 같은 양신(良臣)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기를 더욱 중(重)하게 하였도다. 내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업업 긍긍(業業兢兢)하고, 집안의 불행한 일을 만나 걱정 근심하는데 간흉(奸兇)의 무리들이 문득 종사를 엿보는 계획을 품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변(變)을 들은 저녁이 마침 경이 숙직(宿直)하던 때였다. 진실로 경이 완급(緩急)의 재주가 있는 줄 알았으므로, 문득 경(卿)에게 조치(措置)할 방략(方略)을 명하였던 것인데, 경이 능히 분주하여 적의 괴수(魁首)를 사로잡아 목을 묶어서 곧 왔고, 추국(推鞫)하여 역적(逆賊)의 간담(肝膽)을 꿰뚫어 보니, 실정(實情)을 자복(自服)하여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여러 흉악한 무리를 호흡(呼吸)하는 짧은 사이에 소탕하였고, 원기(元氣)와 조화(造化)를 지휘하는 나머지 주선하였도다. 어찌 왕가(王家)만이 길이 힘입었을 뿐이겠는가? 또한 조열(祖烈)에 빛을 더하였도다. 어찌 비상한 은전(恩典)을 거행하여 막대한 공(功)을 갚지 않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으로 책훈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1등 공신(翊戴一等功臣) 한계순(韓繼純)의 후손(後孫)’ 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10인(人)과 노비(奴婢) 13구(口)와 구사(丘史) 7명과 전지(田地) 1백 50결(結)과 은(銀) 50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나라와 더불어 같이 휴상(休祥)을 누렸으니, 충정(忠貞)을 길이 돈독할 것을 바라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어 대려(帶礪)의 맹세가 더욱 굳기를 기약(期約)할지어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친애(親愛)가 지극하니, 아망(雅望)507) 이 진실로 유성(維城)을 믿었고, 어려운 때를 막아서 호위(護衛)하여 비도(丕圖)508) 가 두 번씩이나 반석(盤石) 위에 안정(安定)되었다. 이에 성대한 상(賞)을 반포(頒布)하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를 따름이 아니로다. 내가 생각건대, 숙부(叔父)는 품성(稟性)이 단아(端雅)하고, 마음가짐이 청근(淸謹)하였고, 효도하고 순종함은 초왕(楚王)과 같은데, 스스로 자질(資質)의 아름다움에 말미암은 것이요, 선(善)을 즐김은 동평왕(東平王)509) 과 같은데, 더욱 학문(學文)의 공(功)을 가(加)하였도다. 항상 공경하고 검약(儉約)한 마음을 품었고, 절대로 교만하거나 가득찬 마음이 없었다. 무릇 동정(動靜)하는 바가 한결같이 의방(義方)을 따랐도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우애(友愛)가 깊고 지극하여, 항상 좌우(左右)에 있게 하니, 조용히 헌체(獻替)510) 하여 도움이 진실로 많았도다. 황고께서 더욱 사랑하기를 더하여 의지하고 맡기기를 더욱 오로지하여, 도총부(都摠府)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여 군정(軍政)을 맡게 하였고, 또 문소전(文昭殿)과 사옹원(司饔院)과 종부시(宗簿寺) 등의 관사에 제조(提調)가 되어 감독하여 임(臨)하는 것이 오직 밝았고 하나라도 부족한 바가 없었도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하고, 종척(宗戚)의 무거운 인망(人望)이 실로 우리 숙부(叔父)에게 있었도다. 내가 어리고 부족한 몸으로서 집안의 불행한 때를 당하여, 어렵고 큰 일을 외람되게 승습(承襲)하고 쓸쓸히 상(喪) 중에 있으니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숙부께서 정성을 다하여 좌우에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 주는 데 의뢰(依賴)하고 있다. 도모한 공(功)에 따라서 끝없는 휴상(休祥)을 보전하기를 바랐는데,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몰래 불령(不逞)한 무리를 모아서 주액(肘腋)의 사이에서 사직을 엿보니, 위태하기가 급급(岌岌)하였는데, 하늘과 조종(祖宗) 및 우리 황고(皇考)께서 명명(冥冥)한 가운데 묵묵히 도와주시는 데 힘입어 그 흉악한 기미(幾微)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고, 역적(逆賊)의 모계(謀計)가 스스로 발각되게 하였다. 그때에 우리 숙부께서 변(變)을 듣고 분격(憤激)하여 성난 머리털이 관(冠)에 닿았는데, 중병(重病)을 데리고 숙위(宿衛)하여 과궁(寡躬)을 막아서, 만리 장성(萬里長城) 같은 형세를 우뚝하게 이루었도다. 내가 조용히 지수(指授)할 수가 있어서 역수(逆竪)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드디어 여러 간사한 무리를 옥(獄)에 가두고, 내가 숙부에게 맡겨서 국문(鞫問)하여 다스리게 하니, 숙부께서 능히 간사함을 꿰뚫어 밝혀서, 큰 괴수(魁首)와 지당(支黨)들이 스스로 실정을 자복(自服)하고 죄에 굴복하여 모두 천토(天討)에 복주(伏誅)되었도다. 아아! 숙부(叔父)는 나 소자(小子)와 더불어 스스로 한 집안이니,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을 같이 하지 아니할 수가 없도다. 이제 숙부가 능히 큰 변(變)을 평정하고 큰 공훈(功勳)을 세웠으니, 영회(榮懷)의 경사(慶事)를 성하게 하는 것이 어찌 오직 나 소자(小子)만이 은덕(恩德)을 끼치는 것이겠습니까? 조고(祖考)께서도 반드시 내려다 보시고 이르기를, ‘그대가 능히 우리 유자(孺子)와 짝하여 목숨을 바치고 절개(節介)를 한결같이하여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였도다.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그대에게 큰 복을 주리라.’고 하시리니, 숙부는 진실로 마땅히 임금의 은혜로 받아야 한다. 이에 나 소자(小子)가 공경스레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서 숙부(叔父)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 노비(奴婢) 10구(口), 구사(丘史) 5명, 전지(田地) 1백 결(結),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햇바퀴를 부호(扶護)하고 하늘의 기강(紀綱)을 정돈하였으니, 함께 종영(宗英)의 병한(屛翰)을 우러러 보겠고, 황하(黃河)가 띠[帶]가 되도록 짝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이 되도록 가지런히 하여, 길이 빛나는 공적(功績)을 기린각(麒麟閣)에 기록되리로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형제(兄弟)는 지극한 친척이니 어려움을 구급(救急)하는 데 있어서 더욱 중(重)하고, 군신(君臣)은 대의(大義)이니 공훈(功勳)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이다. 이에 포장(褒章)하는 법을 거행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따르는 것이겠는가? 오직 경(卿)은 나의 동기(同氣)로서 나라의 유성(維城)이었는데, 일찍이 의방(義方)을 받들어 정직(正直)을 지니고 충효(忠孝)를 다하였고, 일찍이 선(善)을 즐길 줄을 알아 예악(禮樂)을 이야기하고 시서(詩書)를 돈독히 하였도다. 재주는 불기(不器)511) 하여 넓디 넓었으며, 절개(節介)는 비궁(匪躬)512) 하여 충성을 다하였도다. 항상 우애(友愛)와 공손을 돈독히 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스스로 천성(天性)의 참됨에서 기인(基因)한 것이었다. 즐기고 또 사모하며 화락하고 또 맑으니, 넉넉하게 여유가 있고, 즐겁게 서로 사랑하며 웃고 서로 접(接)하여 참으로 다른 마음이 없었다. 과궁(寡躬)이 아름다움을 잇게 되자 우리 집안의 불행을 만나서 쓸쓸히 상(喪) 중에 있으니, 외롭디 외로와 그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개연(慨然)히 죽음과 상(喪)을 깊이 생각하는 때 실로 휴척(休戚)을 더불어 함께 할 것인데 생각지도 않게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내가 초복(初服)하는 때를 타서 나의 유충(幼沖)함을 멸시(蔑視)하고 문득 다른 꾀를 품고 가만히 불령(不逞)한 무리를 모으니, 주액(肘腋)의 화(禍)가 무르익어 위급(危急)함이 호흡(呼吸)하는 짧은 사이에 박두(迫頭)하였다. 내가 이에 변(變)을 듣고 놀랐는데, 경(卿)이 능히 모책(謀策)을 협의하여 주선(周旋)하였고, 과궁(寡躬)을 막아서 호위(護衛)하기를 수족(手足)이 그 몸을 막는 것 같이 하였고, 큰 난(難)을 평정하고 국가와 더불어 휴상(休祥)을 누리니, 큰 공적(功績)을 말하고 생각하여 마땅히 성한 상(賞)을 주어야 하는데, 어찌 오로지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는 것뿐이겠는가? 또한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은혜라고 하겠다.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적(功績)을 기록하고,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 노비(奴婢) 10구(口), 구사(丘史) 5명, 전지(田地) 1백 결(結), 은(銀) 25냥(兩), 표리(表裏) 1투(套),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종(鍾)에 새기고 죽백(竹帛)에 기록하여 화악(華萼)513) 을 바야흐로 후래(後來)에 빛낼 것이니, 태산(泰山)황하(黃河)를 가리켜 맹세하여, 종사(宗社)의 기반(基盤)을 영세(永世)에 보전할지어다."

하였다. 정충 적개 정난 익대 공신(精忠敵愾定難翊戴功臣) 현록 대부(顯祿大夫)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떳떳한 법전(法典)을 상고하여 선(善)한 의리를 권장하는 데 마땅히 그 훈공(勳功)을 정표(旌表)해야 하고, 특수한 공로를 책훈(策勳)하고 은혜를 포숭(褒崇)하는 데 반드시 귀척(貴戚)에게 먼저 베풀어야 한다. 이것은 제왕(帝王)의 공도(公道)이요, 종척(宗戚)만을 보호(保護)하려는 사심(私心)인 것이 아니로다. 생각건대, 경(卿)은 산하(山河)처럼 뛰어난 기운을 지니고 종실(宗室)의 영특한 의표(儀標)였도다. 어려서는 고아(孤兒)로 외로우니, 세종(世宗)께서 강보(襁褓)에 싸서 황고(皇考)에게 부탁(付托)하였고, 장성(長成)하여서는 영오(穎悟)하고 남보다 뛰어나니, 황고(皇考)께서 회포(懷抱)에 두고 세종의 뜻을 몸받아, 경(卿)의 몸을 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같이 하였다. 친히 촌사[村]에서 병(病)을 보살폈고, 손수 저궁(邸宮)에서 혼인을 초례(醮禮)하였으니, 무육(撫育)하는 은혜는 그 지극함을 다하였고, 가르치는 도리는 그 방법을 다하였도다. 황고(皇考)께서 즉위(卽位)하시던 날이 국가(國家)의 중흥(中興)의 시초였는데, 궁중(宮中)에 불러 두고 연곡(輦轂) 아래에 배종(陪從)하여 모시게 하였다. 덕업(德業)이 날마다 높고 넓은 데로 나아갔고, 문견(聞見)이 더욱 넓고 깊은 데로 나아갔다. 예악(禮樂)을 이야기하고 시서(詩書)를 돈독히 하니, 그 연원(淵源)은 성학(聖學)에 엿볼 수가 있었고, 문사(文辭)에 풍부하고 채조(彩藻)514) 에 나타나서 그 광화(光華)를 문장(文章)에 점차 적용하였고, 음양(陰陽)·율려(律呂)의 지류(支流)와 전서(篆書)·예서(隷書)·산수(算數)의 곡예(曲藝)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어 모두 우유(優遊)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고(皇考)께서 특별히 그 기특한 재주를 사랑하셨고, 척리(戚里)가 모두 큰 그릇으로 추대(推戴)하였다. 일에는 경(輕)하고 중(重)한 것이 없이 아울러 참여하였고, 정사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이 모두 맡았는데 매양 가장 첫째로 정통(精通)하다고 칭찬하였고, 우악(優渥)의 융숭함을 치우쳐 받았도다. 기예(技藝)를 문형(文衡)에 시험(試驗)할 만하다고 이르고, 사류(士類)와 더불어 과거(科擧)의 장소에서 다시 겨루었도다. 처음에 문유(文囿)에서 무술(武術)을 익히니, 모두 기북(冀北)515) 의 들에 말떼가 텅 비었다고 탄식하고, 두 번이나 꽃다운 명성을 계림(桂林)에 전(傳)하니, 돌이켜 해동(海東)의 제일이 되었도다. 다시 선비를 가리는 시험을 맡으니, 모두 인재(人材)를 얻는 데 능하다고 일컬었다. 어찌 다만 종영(宗英)에서 일시(一時)에 놀라서 바라볼 뿐이겠는가? 실로 사문(斯文)에서 천고(千古)에 드물게 보는 바이다. 지난번에 역신(逆臣)이 삭방(朔方)에 난(亂)을 선동하였는데, 황고(皇考)께서 가서 정벌하라고 군사에게 명하니, 가서 흉악하고 완악(頑惡)한 자들의 소혈(巢穴)을 쳐부수었다. 이때에 군려(軍旅)의 절제(節制)가 한 가지 방법이 아니고 병모(兵謀)의 기요함과 정당(正當)함이 무궁(無窮)하여, 예산(睿算)516) 이 더욱 깊으므로, 범용(凡庸)한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였으나, 경(卿)은 곧 유악(帷幄)에 모시고 주선(周旋)하였으며, 기요(機要)에 참여하여 맡아, 윤명(綸命)을 받들고 출납(出納)하여 모유(謀猷)를 인도(引導)하여 전(傳)하니, 군사는 만전(萬全)한 가운데 나가고 공(功)은 한번 휩쓸자 이루어졌도다. 황고(皇考)께서 경(卿)의 찬주(贊籌)517) 한 지혜를 생각하시어, 경(卿)의 적개(敵愾)의 공훈(功勳)을 기록하시었다. 무자년518) 가을에 성궁(聖躬)이 편찮으시어 의약(醫藥)이 효렴이 없자, 경이 능히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옷의 띠를 풀지 아니하고 몸을 침상(寢牀)에 붙이지 아니하였도다. 그 근려(勤勵)하는 정성과 충의(忠義)의 아름다움을 오로지 내가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불행하게 황고께서 승하하시니, 과궁(寡躬)이 왕위(王位)를 이었다. 민엄(民嚴)의 두려움을 생각하고 천위(天位)의 어려움을 생각하는데, 생각지도 않게 간흉(奸兇)한 무리가 음모를 꾸며 음휼(陰譎)하게 화란(禍亂)을 빚으니, 여우가 우는 듯이 복조(鵩鳥)가 짖듯이 몰래 동류(同類)를 모아서 떼를 이루었고, 원숭이가 속이듯이 쥐가 엿보듯이 기회를 타서 난(亂)을 북돋우었도다. 천신(神人)이 함께 분개하고 천지(天地)에서 용납하지 아니하니, 드디어 흉악(凶惡)한 음모로 하여금 스스로 패로(敗露)하는 데 이르게 하였다. 마침 내가 변(變)을 듣던 날 저녁은 진실로 경(卿)이 직숙(直宿)하던 때였다. 과궁(寡躬)을 막아서 보위(保衛)하고 충분(忠憤)과 의용(義勇)을 빨리 나타내어 적류(賊類)를 사로잡았도다. 웅장(雄壯)한 모계(謀計)와 비밀스런 방략(方略)을 마음껏 발휘하여 큰 괴수(魁首)를 직접 묶어서 사로잡으니, 나머지 무리들이 무릎으로 기어서 감옥에 갇히었다. 이에 경(卿)과 숙부(叔父)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에게 명하여 가서 옥사(獄事)에 임(臨)하게 하였더니, 경이 곧 상세하게 외람(猥濫)된 것을 분변하여 간사한 것을 비추어서 밝히고, 나의 명을 받들어 천주(天誅)를 행(行)하였도다. 역당(逆黨)들이 가꺼이 부질(鈇鑕)의 형에 나아갔고, 어진 마음을 몸받아 왕법(王法)을 쓰니, 협종(脅從)한 무리들이 옥석(玉石)을 함께 불태우는 화(禍)를 면하였도다. 나도 또한 경(卿)의 조치가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경(卿)의 익대(翊戴)한 노력을 위대하게 여긴다. 이에 경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인하여 반인(伴人) 8명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丘史) 5명과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황고(皇考)께서 이미 경(卿)을 부자(父子)와 같이 보시고 적개(敵愾)의 맹세에 참여하게 하였고, 과인(寡人)에게 이르러서는 경을 형제(兄弟)로서 다시 자리하게 하고 마땅히 익대 공신(翊戴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게 하여, 그 골육(骨肉)의 아름다움을 크게 보아 두 번이나 맹세를 기재(記載)한 글에 올리는 바이다. 내 아들과 내 손자들이 감히 경(卿)의 공적(功績)을 양대(兩代)에 높이기를 잊겠는가? 경의 후예(後裔)들도 마땅히 나의 권애(眷愛)가 한 때에 드높았음을 몸받아 아름다움을 왕가(王家)에 짝하여 마침내 능히 아름다움을 후세(後世)에 전하기를 바란다.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같이 되도록 맹세한 말을 생각하여 더욱 공경하고, 녹권(祿券)을 철권(鐵卷)으로 하고 기록을 단서(丹書)로 하니, 신명(神明)에 질정(質正)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할지로다."

하였다.

정충 출기 포의 적개 보사 정난 익대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保社定難翊戴功臣) 현록 대부(顯祿大夫)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평탄하거나 험난(險難)할 때를 당하여 절개(節介)를 한결같이 기키는 것은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으면 진실로 그렇게 해야 하고, 휴척(休戚)을 함께 하여 서로 부호(扶護)하는 것은 동성(同性)이 된 자는 더욱 간절히 해야 한다. 예로부터 난(難)을 평정하는 때에 반드시 의친(懿親)의 공(功)에 힘입었으니, 주(周)나라에서 삼감(三監)519) 을 없애는 데 희공(姬公)520) 이 가서 정벌(征伐)하는 일을 친히 하였고, 한(漢)나라에서 여러 여씨(呂氏)521) 를 정평(征平)하는데 유장(劉章)522) 이 삼제(芟除)하는 꾀를 힘썼다. 의(義)는 스스로 고금(古今)에 합하였으니, 공적(功績)이 어찌 전후(前後)에 다를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경(卿)은 명세(命世)의 지혜(智慧)를 지니고 절륜(絶倫)의 재주를 가지니 재예(才藝)가 양유기(養由基)523) 의 교묘한 것과 같아 1백 보(步) 앞의 버들잎을 쏘아 꿰뚫고, 학문(學問)은 손복(孫復)524) 의 기특함보다 높으니 용(龍)과 같은 도략(韜略)을 일심(一心)에 품었도다. 이에 황고(皇考)께서 특별히 권련(眷憐)을 더하여 여러 조카[姪]에 비하여 실로 은수(恩數)가 특별하였고, 항상 좌우(左右)에 두어 모유(謀猷)에 참여하여 받들게 하였다. 출납(出納)을 하는 데 오직 유윤(兪允)의 능(能)한 것을 본받았고 대양(對揚)하는 데 순종(順從)하는 아름다움이 많았다. 문(文)이 훌륭하고 무(武)가 귀감(龜鑑)이 되는 명예가 안으로 종친(宗親)과 밖으로 조정(朝廷)에 족히 들이었도다. 준재(俊才)를 뽑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무릎을 꿇었고, 남의 배(倍)나 되는 무력(武力)을 과감하게 드날리니 노장(老將)들이 또한 모두 예봉(銳鋒)을 감추었다. 주의(注倚)525) 가 더욱 융성하고 빛나는 소문이 크게 전파되었다. 지난 정해년526) 여름에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몰래 북쪽 지경(地境)에 의거하여 어리석은 백성(百姓)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그 심복(心腹)들을 부추켜서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를 죽였고, 친당(親黨)을 망라하고 연락하여 한 길의 관방(關防)을 막아서 끓고, 순(順)한 사람을 도와 준다는 말을 빌려서 명분(名分)으로 삼고, 몰래 화(禍)를 꾸며 난(亂)을 선동하였다. 군중(群衆)이 모두 거취(去就)에 현혹되어, 형세가 이미 창황(蒼黃)한 지경에 이르니, 이에 임금이 북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많아서 바야흐로 삼략(三略)의 계획을 자문(咨文)하였는데, 그 순역(順逆)을 보이려고 일개 왕실(王室)의 영특한 자를 파견할 때 우리 종친(宗親) 중에서 뽑아서 곧 4도 도총사(四道都摠使)를 제수(除授)하여, 제단(祭壇)에 오르는 예(禮)로써 높이고, 장월(杖鉞)의 권한을 위임하였다. 경(卿)이 곧 명(命)을 듣고 집안을 잊은 채 손가락을 깨물고 길을 떠났는데, 적(賊)의 소혈(巢穴)을 빨리 칠 것을 생각하여 북방(北方)으로 향하여 재빨리 정복(征服)하였고, 바야흐로 함흥성(咸興城)에서 군사를 과시하니, 협종(脅從)하던 사람들이 미혹(迷惑)한 마음에서 비로소 깨어났고, 거산책(居山柵)에서 결전(決戰)하자 역수(逆竪)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고,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문득 이루니 의심하여 주저하던 무리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마침내 큰 괴수(魁首)를 휘하(麾下)에 이르게 하였고, 이에 원흉(元兇)의 시체(屍體)를 원문(轅門)에서 찢어 발기니, 삼군(三軍)의 쌓였던 분개(憤慨)를 통쾌하게 씻었고 백리(百里)의 요망(妖妄)한 분위기가 돈연(頓然)히 지식(止息)되었다. 이것은 비록 예산(睿算)이 독단(獨斷)하신 것이나 또한 경(卿)의 계책(計策)이 더불어 능(能)하게 응하였기 때문이로다. 승전(勝戰)하였다는 첩보(捷報)가 뒤섞여 오르니, 신심(宸心)이 크게 기뻐하여 친히 수찰(手札)을 내리시어 군문(軍門)에 선포하여 보이셨도다. 총자(寵子)의 영화(榮華)로 논하였고, 계주(髻珠)527) 의 보배에 비유하였고, 개선(凱旋)하고 돌아오는 즉일(卽日)에 원훈(元勳)으로 크게 책정(策定)하여, 맹부(盟府)의 으뜸이 되고 암랑(巖廊)의 우두머리가 되니, 명성과 반열(班列)이 서심(庶宷)에 다르고 총재(冢宰)에 자리하면서 총관(摠管)을 겸하니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이 지위를 한 몸에 모았도다. 황고(皇考)께서 경을 총애(寵愛)함이 이미 깊었으니, 과인(寡人)이 경을 사랑함을 어찌 그치겠는가? 지난 무자년528) 가을에 하늘이 불행을 내려 성상께서 승하하시니, 국가의 간난(艱難)이 많음을 돌아보건대, 나루를 건너듯이 구제할 바가 없었다.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문득 액운(厄運)의 기회(機會)를 타서 천문(天文)을 망령스럽게 이야기하여 우리 집을 넘겨다보고 신기(神器)를 엿보았다. 당원(黨援)이 몰래 결탁하여 죄악이 이미 가득찼는데 호천(昊天)과 상제(上帝)께서 매우 밝으시니, 어찌 적수(賊竪)를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하겠는가? 칠묘(七廟)의 열성(列聖)께서 몰래 도와주시어 마침내 흉모(兇謀)로 하여금 패망(敗亡)하게 하였다. 마침 변(變)을 고(告)하는 것을 겨우 듣고, 명하여 경(卿)을 불러 막아서 보위(保衛)하게 하였는데, 경이 능히 칼을 짚고 꾸짖으니 범과 같은 군려(軍旅)가 금중(禁中)에서 엄숙하였고, 군사를 데리고 지휘(指揮)하여 역적(逆賊)을 대궐(大闕) 밖에서 체포하였도다. 이때를 당하여 내가 경을 의뢰하기를 유성(維城)의 견고함과 같이 하였고, 경이 나를 도와서 부일(扶日)529) 의 공(功)을 나타내니, 문득 여러 간신(奸臣)으로 하여금 모두 현륙(顯戮)에 나아가게 하였도다. 다시 익대(翊戴)의 공을 생각하니, 어찌 아름다움을 포장(褒奬)하는 은총을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고,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丘史) 5명과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백중(伯仲)530) 의 친척이요 군신(君臣)의 의리인데, 이미 충정(忠貞)을 대대로 돈독하게 하였고, 황고(皇考)를 도우고 나를 도왔으니 하물며 훈업(勳業)이 두 번이나 융성(隆盛)하지 아니하였는가? 양대(兩代)에 잇달아 공(功)을 세웠으니, 천고(千古)를 돌아보더라도 짝할 자가 드물도다. 나라를 영구히 보존하여 후대에 미치게 하고, 옛 전장(典章)을 강(講)하여 맹세를 거듭하고 이름이 썩지 않도록 능연각(凌煙閣)531) 에 올랐으니 후세(後世)가 다하도록 공적(功績)이 빛나리도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청송군(靑松君) 심회(沈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간난(艱難)을 막아서 보위(保衛)하니 주(周)나라에서는 창유(鬯卣)532) 의 명(命)을 내려 주었고, 초매(草昧)533) 를 경륜(經綸)하니 한(漢)나라에서는 모토(茅土)534) 의 봉(封)함을 더하였던 것은 훈로(勳勞)를 당일(當日)에 보답하여 같이 후손에게까지 편안함을 누리려는 까닭이었다. 내가 어리고 어리석은 몸으로 집안의 불행을 만나 영도(靈圖)를 외람되게 승습(承襲)하니, 쓸쓸하여 견디지 못하겠도다. 경(卿)은 선왕(先王)의 원구(元舅)535) 의 높은 몸으로서 백성들이 함께 쳐다보는 지위(地位)에 거(居)하여, 몸에 편안함과 위태함을 지니었고 더불어 휴척(休戚)을 함께 하였도다. 내가 경(卿)을 의지함이 이미 주석(柱石)에 비교하였고, 경이 나를 도움이 한갓 복심(腹心)과 같은 관계뿐만이 아니었다. 근래 역신(逆臣)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나의 어린 나이를 멸시하여 나의 초복(初服)을 틈타서 몰래 불궤(不軌)한 마을 품고 화(禍)의 기미(幾微)를 나타내니, 경이 능히 충의(忠義)를 분격(憤激)하여 주획(籌畫)536) 하고 주선(周旋)하여 도로 곧 이기고 평정하였도다. 아아! 사직(社稷)의 신하가 위태(危殆)할 때 부호(扶護)하고 엎어질 때 부지(扶持)하여 주지 아니하면, 국가가 능히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경이 능히 일심 일덕(一心一德)으로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救濟)하여 금일에 아름다움을 보전하였으니, 그 큰 공훈(功勳)과 위대한 업적(業績)은 족히 옛 사람과 추배(追配)한 만한데,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내가 감히 늦추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여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2계급을 뛰어 올리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子孫)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심회(沈澮)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丘史) 5명과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려주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공훈(功勳)을 기록하고 상을 행하는 것은 내가 실로 지난 법규(法規)를 따랐으니, 아들에게 전(傳)하고 손자(孫子)에게 미치게 하여 경(卿)은 마땅히 영세(永世)에 누릴지로다."

하였다. 추충 좌익 정난 익대 공신(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예조 판서(兼禮曹判書) 연성군(延城君) 박원형(朴元亨)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희공(姬公)537) 이 주(周)나라를 평안히 하니 성왕(成王)이 집안을 열어 주는 은총(恩寵)을 반포(頒布)하였고, 장자방(張子房)538) 이 한(漢)나라의 왕실(王室)을 도우니 고제(高帝)539)유후(留侯)로 봉(封)하시는 영광을 내려 주어서, 공(功)이 있으면 반드시 상(賞)을 주고 갚지 아니한 덕(德)이 없었다. 생각건대, 경(卿)은 침웅(沈雄)하며 관후(寬厚)하였고, 충직(忠直)하고 통명(通明)하였다. 일찍 세종(世宗)께서 친히 책문(策問)하신 과거(科擧)에 뽑혀 비로소 붕로(鵬路)540) 에 마음대로 올랐고, 황고(皇考)의 재조(再造)하던 운(運)을 도와서 더욱 깊이 용광(龍光)을 받았다. 후설(喉舌)541) 의 직을 대신하여 출납(出納)하기를 상세히 하였고, 전형(銓衡)을 맡아서 인재를 기용하고 버리는 것을 마땅하게 하였다. 항상 종백(宗伯)의 책임을 겸하니 일대(一代)의 삼례(三禮)542) 를 능히 밝혔으며, 여러 차례 체찰사(體察使)의 근심을 나누니 구중(九重)543) 의 사청(四聽)이 바야흐로 통달(通達)되었도다. 사신(使臣)으로 가서 그가 전대(專對)한 것을 다투어 칭찬하였고, 나라의 일에는 모두 그가 홀로 현로(賢勞)하다고 감탄하였다. 시험하여 염매(鹽梅)544) 의 두 가지를 조화시키니, 여러 사람들이 진실로 태정(台鼎)545) 에 합당(合當)함을 즐거워 하였고, 괴극(槐棘)546) 에서 함께 바라보는 자를 영솔(領率)하니 모두 함께 경륜(經綸)을 오랫동안 협찬(協贊)하기를 원(願)하였다. 외람되게 과매(寡昧)한 자질(資質)로서 문득 어렵고 큰 서통(緖統)을 승습(承襲)하였는데, 불궤(不軌)한 무리들이 이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기회를 틈탈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화(禍)가 이미 마아(磨牙)547) 에 박두(迫頭)하였고, 형세는 진실로 누란(累卵)과 같이 위태하였다. 하늘이 오직 순수(純粹)하게 도와 주시니, 적(賊)이 스스로 모계(謀計)를 누설하였고, 신(神)이 또한 유능(有能)한 이와 함께 하니, 경이 곧 부름에 나아왔도다. 몸을 잊고 목숨을 내놓고, 충성과 의분(義憤)을 가슴 가운데 뒤섞어 일으켜 획책(畫策)하기를 조용히 하였으니, 간흉(姦兇)들을 모조리 수하(手下)에서 제어하였다. 죄악이 이미 하늘에 넘치니 스스로 진멸(殄滅)되었고, 간특함이 아침을 다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로 소멸(消滅)되었다. 나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보전한 것을 생각하니 경(卿)이 비상한 공적을 세운 때문이로다. 진감(震撼)548) 한 때를 만나서 진정(鎭定)한 것이 은연히 장성(長城)과 같았고, 반착(盤錯)549) 한 때를 만나서 어려움을 풀어 낸 것이 유인(游刃)550) 의 여지(餘地)가 있음과 같이 넓었다. 그 공(功)과 그 덕(德)은 경(卿)이 진실로 희공(姬公)과 장자방(張子房)에게 양보할 것이 없고, 그 은혜를 갚는 데 내가 어찌 감히 성왕(成王)고제(高帝)에게 뒤지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였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2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에게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며,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박원형(朴元亨)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 5구와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려 주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여러 대를 지내도록 구훈(舊勳)이 되어서 이미 커다란 아름다움을 종팽(宗祊)551) 에 짝하였으니, 후대에 이르도록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여 신명(申命)을 대려(帶礪)와 같이 함께 누릴지로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수록 대부(綬祿大夫)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하늘이 영특(英特)한 재주를 내는 것은 진실로 중대한 사직(社稷)을 부탁하고자 함이요, 나라에 상을 주는 은전(恩典)이 있는 것은 장차 융성한 훈업(勳業)을 대접하고자 함이니, 재주가 허망하게 나지 아니하는데, 상을 어찌 망령스럽게 주겠는가? 만약 사직(社稷)을 즐겁게 하면 훈업(勳業)은 이보다 높은 것이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경(卿)은 영특한 의표(儀標)가 난조(鸞鳥)처럼 우뚝하였고, 빛난 후손으로 선익(蟬翼)552) 같이 연(聯)하였도다. 총명(聰明)함이 특달(特達)하여 어려서부터 시례(詩禮)의 전(傳)함을 익히었고, 겸공(謙恭)함을 스스로 지니고 기환 자제(綺紈子弟)553) 의 습성(習性)이 절대로 없었다. 특히 이실(貳室)554) 로 뽑히게 되었고, 육예(六藝)에 친자(親炙)하여 통(通)하였고, 학문(學問)은 이미 그 엄해(淹該)함을 지극히 하였고, 지식(知識)은 더욱 정밀(精密)한 데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능히 체(體)를 밝혀 적용(適用)하고 문득 임금을 높이고 백성들을 비호(庇護)할 수 있었도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다능(多能)함을 기중(器重)하게 여기고 전예(戰藝)를 시험하였다. 경(卿)이 과연 용맹을 날리고 웅한(雄翰)을 달려서 먼저 과거에 올라 대과(大科)에 뽑혔다. 기북(冀北)에 양마(良馬) 떼가 텅비니 능히 기구(箕裘)의 업(業)을 이었고, 북두(北斗) 이남에 이름이 높으니 다시 규벽(奎璧)의 빛을 드날렸도다. 황고(皇考)께서 권애(眷愛)하기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고, 의지하여 일을 맡기기를 더욱 오로지하여, 좌우(左右)에 거(居)하게 하여 사륜(絲綸)을 받들게 하니, 출납(出納)하는 것이 오직 진실하였고, 내외(內外)를 통(通)하여 밝게 헌체(獻替)하고 밤낮으로 공경하였다.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으로서 후설(喉舌)의 직임을 겸하였으니, 옛날에도 그 짝할 자가 드물었고 지금 경(卿)에게서 보겠도다. 옛날에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우연히 조금만 병에 걸렸더니, 경이 곧 명(命)을 받들어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거(居)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시종(始終) 조호(調護)하였도다. 경의 본래 뜻을 내가 진실로 가상히 여겼는데, 지난번에 호천(昊天)이 불행을 내려서 천연(遷延)하지 아니하매, 과궁(寡躬)이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몸둘 바가 없어 쓸쓸히 상(喪) 중에 있으면서 전전 긍긍(戰戰兢兢)하여 깊은 곳은 곳에 임(臨)한 듯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불령(不逞)한 무리를 교결(交結)하고, 왕실(王室)을 엿보면서 주액(肘腋)의 아래에서 이미 떼를 이루었으나, 부지(扶持)하여 보우(保佑)함은 실로 조종(祖宗)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화기(禍機)에 임하여도 동요하지 아니하니, 반역한 정상을 나타내어 스스로 폭로되었다. 경이 이때에 충간(忠肝)을 윤균(輪囷)555) 하여 목숨을 버리기를 걱정하지 아니하였고 의논을 계획하는 것이 밀물(密勿)하니, 일에 기회를 잃음이 없었다. 창졸(倉卒)한 가운데에서 주선(周旋)하였고, 위태한 즈음에 막아서 보위하였다. 지금의 아름다움을 보전하는 것은 실로 경의 힘에 의지하였도다. 내가 생각하건대, 경의 아버지 하동군(河東君)556) 께서 이미 세종(世宗)을 보좌(補佐)하여 태평(太平)을 보불(黼黻)하였고, 또 황고(皇考)를 협찬(協贊)하여 나라의 재조(再造)를 경륜(經綸)하였다. 또 금일에 이르러 경(卿)과 그대의 아버지께서 모유(謀猷)를 협찬하여 종석(宗祏)557) 을 두 차례나 편안하게 하였다. 아아! 군신(君臣)은 동체(同體)이나 서로 만나기가 어렵고, 부자(夫子)는 일심(一心)하기가 더욱 드물도다. 용어(龍馭)를 위태한 길에서 보호하니 재주가 대(代)를 잇지 못하는 것에서 대를 잇게 하였고, 큰 터전을 반석(磐石) 위에 안정하니, 명을 미상(靡常)한 데에서 유상(有常)하게 하였다. 은혜는 어찌 포장(褒奬)하는 데 사사롭게 하겠는가? 의(義)는 마땅히 그 포숭(褒崇)하여 보답하는 데 특수하게 해야 하리로다. 이에 경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父母)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2계급을 뛰어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로 세습하게 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며,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정현조(鄭顯祖)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丘史) 5구와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하수(河水)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되도록 휴척(休戚)을 자손(子孫)과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으니, 가뭄 때에는 장마를 만들고 내를 건널 때에는 배를 만들어 가국(家國)에 종시(終始)토록 선(善)하기를 기약(期約)할지어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중의 대부(中義大夫) 거평군(居平君) 겸 사복장(兼司僕將) 이복(李復)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위태(危殆)할 때 절개를 다하여 이미 비상(非常)한 공(功)을 세웠으니, 상(賞)을 주는 데 때를 넘기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포숭(褒崇)의 은전(恩典)을 거행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경(卿)은 풍유(風猷)가 응준(凝俊)하고 기우(器宇)가 굉심(宏深)하였다. 이에 종실(宗室)의 친척으로서 일찍이 유성(維城)의 인망(人望)이 있고 일을 처리하는 데 명민(明敏)하니, 재주는 크게 쓰임을 감당할 만하였도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기중(器重)히 여기어 은우(恩遇)가 더하여 혹은 금병(禁兵)을 맡기기도 하고 혹은 변방의 곤기(閫寄)를 위임(委任)하기도 하였는데 거(居)하는 곳마다 직책을 알맞게 수행하여 울연(蔚然)히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다. 나 소자(小子)에 이르러 집안의 불행을 만나서 쓸쓸히 상(喪) 중에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간사한 신하(臣下)가 불령(不逞)한 무리를 모아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주액(肘腋)의 사이에 왕실을 엿보았으나, 다행히 의사(義士)들이 먼저 알게 됨에 힘입어 음모(陰謀)가 모두 드러났다. 경(卿)이 이때에 중병(重兵)을 데리고 내 곁에 있다가, 변(變)을 듣고 격렬(激烈)하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두 충의(忠義)의 선비들과 더불어 간사한 도당을 사로잡아 와서 모두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도다. 이것은 비록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운 때문이지만, 또한 경(卿)이 처치(處置)하기를 적당하게 하여서 기사(機事)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이미 경을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으로 생각하고, 경의 고굉(股肱)과 같은 어짐을 가상히 여겨서, 의지하고 맡김이 전일(專一)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권우(眷遇)가 깊지 아니함이 없었도다. 이에 창졸(倉卒)한 즈음을 만나서 경(卿)이 과연 능히 일덕일심(一德一心)으로 나의 간난(艱難)을 널리 구제하여 지금의 아름다움을 보전하였으니,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내가 감히 뒤로 미룰 수가 있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2계급을 뛰어 올리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며, 자손(子孫)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이복(李復)의 후손(後孫)’ 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과 노비(奴婢) 10구(口)와 구사(丘史) 5구(口)와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희생(犧牲)을 죽여서 서로 맹세하였으니 천일(天日)이 임하는 것이 엄연(儼然)하고, 나라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함께 하여 황하(黃河)태산(泰山)을 짝하여 길이 누릴지어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좌승지(行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예로부터 화란(禍亂)을 감정(戡定)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무부(武夫)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의 유후(留侯)558) 가 유자(儒者)의 기상(氣象)이 있으니, 한(漢)나라의 고제(高帝)가 일컫기를, ‘주책(籌策)을 수립하는 데 내가 그대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내가 오늘 경(卿)에게서 이를 보겠도다. 경(卿)은 문벌(門閥)이 청류(淸流)이며, 국사(國士)의 열풍(烈風)이 있었으니, 형제(兄弟) 다섯 사람이 모두 학문(學問)을 닦아서 문장(文章)을 이루어 과제(科第)를 취(取)하여 규조(珪組)559) 가 선익(蟬翼)처럼 연(聯)하였도다. 형 두 사람은 우리 황고(皇考)를 도와서 울연(蔚然)히 훈신(勳臣)이 되었고, 경(卿)도 또한 황고(皇考)의 지우(知遇)를 받아 은대(銀臺)에 들어가서 후설(喉舌)이 되어, 밝은 명(命)을 출납(出納)하기를 진실하게 하였도다. 하늘이 불행을 내리게 되자, 우리 집안에 어려움이 많음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문득 그 사이에 얼아(孼牙)가 있어 역신(逆臣) 강순(康純) 등이 가만히 도당(徒黨)을 모으자, 많은 악(惡)이 하늘에 가득 찼더니, 흉모(兇謀)가 마침내 스스로 누설되었다. 내가 쓸쓸히 외롭게 서니, 위태(危殆)하기가 누란(累卵)보다도 심하였다. 경이 그때 금내(禁內)에서 숙직(宿直)하다가 그대의 동료(同僚)들과 더불어 마음과 힘을 함께 하여, 나의 좌우(左右)를 막아서 호위(護衛)하고 처치(處置)하기를 마땅하게 하였다. 여러 흉악한 무리를 모두 체포하여 오므로, 내가 경과 제경(諸卿) 등에게 위임하여 잡치(雜治)560) 하여 국문(鞫問)하게 하니, 경이 밝게 변명(辨明)하여 발적(發摘)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기 때문에 적도(賊徒)들이 실정을 숨지기 못하고 모두 그의 죄를 자복(自服)하였도다. 이렇듯 적을 감정(戡定)한 공적(功績)을 생각하니 홀로 능히 간난(艱難)을 막아서 호위(護衛)하였고, 위태(危殆)할 때 부호(扶護)하고 엎어질 때 부지(扶持)하여 실로 머리와 눈에 손과 발과 같았고, 지혜로와서 현혹(眩惑)되지 않고 용맹스러워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장씨(張氏)·정씨(鄭氏)에 대하여 위청(衛靑)·곽광(霍光)과 같을 뿐이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적(功績)을 기록하며, 그 부모(父母)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2계급을 뛰어 올리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였으며,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이극증(李克增)의 후손(後孫)’ 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과 노비(奴婢) 10구(口) 구사(丘史) 5명과 전지(田地) 1백 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기든 영수하라. 아아! 고제(高帝)유후(留侯)를 유악(帷幄)의 모신(謀臣)으로 삼아 이미 여러 영웅을 평정하여 천하를 안정시키니, 그 부절(符節)에 새겨서 맹세를 하기를,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아지도록 이에 후손(後孫)에게 미친다.’고 하였도다. 경(卿)이 나의 내신(內臣)이 되어 여러 흉악한 무리를 전제(翦除)하고 사직(社稷)을 부호(扶護)하였기 때문에, 내가 고제(高帝)유후(留侯)에게 맹세한 바로써 경(卿)에게 맹세하니, 경(卿)은 이것을 경홀(輕忽)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수충 보사 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난(難)을 평정하고 충성(忠誠)을 바치는 것은 오직 신자(臣子)의 지극한 절개이요, 공적(功績)을 기록하고 상(賞)을 행(行)하는 것이 곧 국가의 어진 법규(法規)이니,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써 하겠는가? 실로 오로지 공의(公義)일 뿐이다. 경(卿)은 품성(稟性)이 달통(達通)하고 굳세며, 마음가짐이 충량(忠良)하도다. 지혜(知慧)는 능히 변(變)에 통달(通達)하고 재주는 어모(禦侮)를 감당할 만하도다. 일찍이 무과(武科)에 뽑혀서 항상 군사의 정벌에 나아가 뒤따라 관서(關西) 지방을 진정(鎭定)하고, 영주(嶺州)를 적개(敵愾)하여, 울연(蔚然)히 성명(聲名)이 있어 우림(羽林)에 으뜸이었으니, 가위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공후(公侯)의 복심(腹心)이라 이를 만하도다. 근래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는데, 화기(禍機)가 발(發)하자 역모(逆謀)가 스스로 누설되었다. 경이 변(變)을 듣고 분격(奮激)하여 의기(義氣)가 마구 일어나니, 곧 범의 굴혈(窟穴)에 들어가서 손수 원흉(元兇)을 쳤도다. 이리하여 여당(餘黨)의 손을 묶으니, 모두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다. 종팽(宗祊)561) 이 다시 안정(安定)되고 국보(國步)가 길이 편안해졌으니, 내가 그대의 공훈을 가상히 여겨 ‘돈독(敦篤)하여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이에 경(卿)을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2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였으며, 자손(子孫)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2등 공신(翊戴二等功臣) 박지번(朴之蕃)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8인(人), 노비(奴婢) 10구(口), 구사(丘史) 5명(名)과 전지(田地) 1백 결(結), 은(銀) 25냥(兩), 표리(表裏) 1투(套),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미 그 군공(軍功)을 크게 보아서 여산 대하(礪山帶河)로 후손(後孫)까지 길이 보전하기를 기약할지로다."

하였다. 수충 위사 협찬 정난 동덕 좌익 정난 익대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위태(危殆)할 때 부호(扶護)하고 엎어질 때 부지(扶持)하는 것은 실로 사직(社稷)의 양필(良弼)에 힙입고, 덕(德)이 성하면 벼슬을 주고 공(功)이 성하면 상(賞)을 주어 국가의 원훈(元勳)에 보답(報答)하는 것이다. 떳떳한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이에 포장(褒奬)하는 법을 선양(宣揚)하노라. 생각건대, 경(卿)은 건곤(乾坤)의 간기(間氣)562) 이요, 광악(光岳)의 영령(英靈)이다. 학문은 천인(天人)을 구명(究明)하여 두 차례 명정(明庭)의 시험에 으뜸이었고, 재주는 경술(經術)에 넉넉하여 크게 평생의 생각을 폈도다. 여러 조정을 두루 섬겨 특히 수권(殊眷)을 입었다. 띠[帶]를 드리우고 홀(笏)을 바로잡고 조정(朝廷)에 선 지 장차 60년이 되려하는데, 곧은 말과 곧은 의논으로 곤직(袞職)563) 을 도운 것이 하나둘로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암랑(巖廊)의 운수를 함께 쳐다보고 두 차례나 기린각(麒麟閣)의 공훈을 책정(策定)하였도다. 도덕(道德)은 옛사람에게 비방(比方)할 만하고 사업(事業)은 그 위에 나을 자가 없도다. 묘궁(眇躬)의 유충(幼沖)한 자질(資質)로써 외람되게 큰 기업(基業)을 승습(承襲)하니, 도임(圖任)이 오직 옛사람에게 있고, 전형(典刑)이 실로 수준(壽俊)564) 에 있도다. 근래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신기(神器)를 위태하기 하기를 꾀하여 화(禍)가 견빙(堅氷)에 박두하였도다. 내가 바야흐로 변(變)을 듣고 마음을 경계하고, 경은 능히 계책을 결정하여 난(難)을 진정(鎭定)하여, 국보(國步)를 반석(盤石) 위에 편안하게 하였고, 인심(人心)을 태산(泰山)과 같이 진정시켰도다. 덕(德)이 있고 공(功)이 있고 재능이 있어, 우리집의 원기(元氣)를 장(壯)하게 한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아름다운 명예와 아름다운 소문(所聞)과 아름다운 인망(人望)으로 당시의 기구에 으뜸이 된 사람은 오직 공(公)이라 하겠도다. 이리하여 깊이 가상히 여겨 드디어 공훈을 크게 보는 은전(恩典)을 거행한다.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정인지(鄭麟趾)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4대(代)를 도왔으니 경은 능히 필공 고(畢公高)565) 의 충성(忠誠)보다 뛰어났도다. 천추(千秋)의 대려(帶礪)로 내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맹세를 잊겠는가?"

하였다.

수충 경절 좌익 정난 익대 공신(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계책(計策)을 협찬(協贊)하여 난(難)을 평정하는 데 반드시 명세(命世)의 원훈(元勳)에 힘입으니, 은혜를 미루어 공(功)을 상(賞)을 주는 것은 실로 나라를 가진 자의 공의(公義)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제왕(帝王)의 아름다운 법전(法典)이요, 고금(古今)에 공통된 법규(法規)로다. 생각건대, 경(卿)은 맑은 절개(節介)가 꾸밈이 없고 단아(端雅)하고 방정(方正)하여 지킴이 있다. 학문은 성현(聖賢)의 심오(深奧)함이 투철하고, 인망(人望)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큰 재주로 중하게 여기도다. 전후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여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를 변치 아니하였도다. 뇌락(磊落)한 대장부의 사업을 이루고 건악(謇諤)한 대신(大臣)의 풍유(風猷)를 지니어 일찍이 소고(昭考)에게 복구(覆甌)하여 떨쳐 쓰니, 공(功)은 좌익(佐翼)에 높았고, 두 차례나 황비(黃扉)566) 를 영수(領袖)하여 도(道)를 논(論)하고 사업에 경륜(經綸)이 많았도다. 위대한 공적은 단서(丹書)에 빛났고 꽃다운 이름은 청사(靑史)에 으뜸이로다. 돌아보건대, 내가 미소(微少)한 자질(資質)로서 외람스럽게 큰 기업(基業)을 승습(承襲)하여, 쓸쓸히 상(喪) 중에 있으면서 업업 긍긍(業業兢兢)하고 두려워하여 삼가는 즈음인데, 적신(賊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몰래 불령(不逞)한 무리와 결탁하여 원숭이처럼 추악하고 망령스레 분수아닌 것을 도모하여 쥐처럼 엿보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신감(神鑑)의 협부(協扶)하는 데 힘입어서 흉악한 모유(謀猷)가 도리어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오직 명공(明公)이 홀로 능히 그 금석(金石)같은 계획을 결정하니, 역수(逆竪)들이 모두 천주(天誅)에 벗어나지 못하였도다. 어찌 능연각(凌煙閣)의 특수한 공훈을 책정(策定)하여 운대(雲臺)의 양상(良相)을 정표(旌表)하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정창손(鄭昌孫)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충성(忠誠)이 사직(社稷)에 있어 이미 안위(安危)를 한몸에 지녔으니, 산하(山河)를 가리켜 맹세하고 더욱 휴척(休戚)을 만세(萬世)에 함께 할지로다."

하였다. 추충 좌익 출기 포의 적개 정난 익대 공신(推忠佐翼出氣布義敵愾定難翊戴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창녕군(昌寧君) 겸 호조 판서(兼戶曹判事) 조석문(曹錫文)에게 하교(下敎)하기를,

"하늘이 큰 운(運)을 부호(扶護)하는 데 반드시 호걸(豪傑)의 재주에 힘입고, 나라에 원훈(元勳)이 있으면 마땅히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거행해야 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情)에 따르는 것이겠는가? 공적(公的)으로 하더라도 곧 그러한 것이다. 생각건대, 경(卿)은 천지 사이에서 빼어난 기운을 기르고 광악(光岳)에서 영기(英氣)를 모았도다. 기운(氣運)과 도량(度量)이 호매(豪邁)하고 재주와 지식이 정통(精通)하였도다. 일찍이 현관(賢關)에서 노닐면서, 본래 경륜(經綸)의 뜻을 품었고, 문득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과연 진신(縉紳)의 이름을 드날렸도다. 드디어 영릉(英陵)567) 의 지우(知遇)를 받고 현묘(顯廟)568) 를 두루 섬기었다. 소고(昭考)께서 즉위하자 사랑하심이 특히 용후(龍喉)에 지나쳤고 좌익(左翼)의 공훈을 책정(策定)하는 데 끼이니, 이름이 전(轉)하여 기린각(麒麟閣)에 높았도다. 탁지(度支)569) 를 맡으니 경비(經費)가 넉넉하였고, 낭묘(廊廟)에 들어가니 우모(訏謀)를 베풀었도다. 혹은 절월(節鉞)을 짚고 힘을 사방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제단(祭壇)에 올라서 천리(千里)의 땅을 적개(敵愾)하기도 하였다. 인망(人望)은 장상(將相)으로 높았고, 몸에는 안위(安危)를 지녔도다. 내가 즉위하자, 집안에 불행을 만났는데,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문득 분수(分數) 아닌 마음을 품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조용히 주책(籌策)을 계획하니, 한(漢)나라의 군사를 수고롭게 아니하고도 왕망(王莽)을 사로잡았고, 협력(協力)하여 익대(翊戴)하니 어찌 강후(絳侯)570)유씨(劉氏)571) 를 편안하게 했을 뿐이었겠는가? 간흉(奸兇)들이 도리어 제거되었고, 종사(宗社)가 안정되기에 이르렀도다. 공덕(功德)의 성한 것을 생각하니, 어찌 보답하는 융성함을 보이지 아니하겠는가? 금세(今世)만이 이러한 것이 아니니, 덕(德)으로써 덕을 갚았도다.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조석문(曹錫文)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내가 경(卿)이 고굉(股肱)과 이목(耳目)이 되어 준 것을 가상히 여겨 아름다움을 끝없이 짝하리라 기약하니, 경은 나를 몸받아 심복(心腹)과 신장(腎腸)을 펴서 더욱 충성을 영세(永世)에 바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청천군(淸川君)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한백륜(韓伯倫)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유덕(有德)한 사람을 포장(褒奬)하고 유공(有功)한 사람을 상(賞)주는 것은 곧 고금(古今)에 공통된 의리이다. 내가 유충(幼沖)한 몸으로 집안의 불행을 만나 쓸쓸히 상(喪) 중에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화기(禍機)가 호흡(呼吸)하는 급한 사이에 있었으나,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묵묵히 도와 주시는 데 힙입어서 흉악한 음모(陰謀)가 스스로 누설 되었도다. 경(卿)이 이때에 금병(禁兵)을 총관(摠管)하여, 변(變)을 듣고 일어나서 분주하게 힘을 펴서 능히 흉도(兇徒)의 괴수(魁首)를 전제(翦除)하였도다. 아아! 내가 경(卿)을 의지함이 더욱 깊고 경(卿)이 나를 호위(護衛)함이 더욱 삼가므로, 진실로 이미 가상히 여겼는데, 하물며 위박(危迫)한 때를 당하여 능히 충정(忠貞)한 절개(節介)를 일으켜 생명을 내놓고 변하지 아니하며, 과궁(寡躬)을 막아서 보위(保衛)하여 지금은 아름다움을 보전하였으니, 경의 노고를 생각하여 경의 공훈(功勳)을 기록하는데,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은 실로 공의(公義)에서 나오니, 내가 그것을 감히 늦출 수가 있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子孫)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한백륜(韓伯倫)의 후손(後孫)’ 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고굉(股肱)과 심려(心膂)의 자품(資品)이 이미 더불어 휴척(休戚)을 함께 하였으니, 산하 대려(山河帶礪)의 맹세를 마땅히 더욱 시종(始終) 굳게 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겸 경연 춘추관 지사(兼經筵春秋館知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선성군(宣城君) 노사신(盧思愼)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충신(忠臣)이 특히 서면 은연(隱然)하기가 범이 산(山)에 있는 것과 같고, 큰 원수를 확청(廓淸)하면 응전(鷹鸇)이 참새를 쫓는 것보다 상쾌하도다. 이에 공훈을 책정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고, 노고를 가리는 은혜를 보이노라. 경은 재상(宰相)의 가문(家門)에서 생장(生長)하였고. 척리(戚里)에서 수발(秀拔)572) 하였다. 사책(射策)573) 에서 세 차례 장원을 아뢰었고, 옛것에 박식(博識)하여 ‘오총(五摠)의 신(神)574) 이라 일컬었다. 특히 소고(昭考)의 지우(知遇)를 입어 매양 강후(康侯)575) 의 응접(應接)을 하사(下賜)하였다. 향기(香氣)를 머금고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니 단정(端正)하여 후설(喉舌)의 신하(臣下)에 합당하였고, 전석(前席)에서 생각을 논(論)하니 진실로 심복(心腹)의 보좌(輔佐)라고 이르겠다. 맡긴 것이 이미 도총관(都摠管)으로 높았고 책임이 또한 탁지(度支)576) 에 무거웠도다. 청궁(靑宮)577) 에 있을 당초부터 본래 명당(明堂)의 그릇임을 알았다. 지난번에 하늘이 불행을 내리시어 성상(聖上)의 몸이 편찮았을 때, 경(卿)이 이에 새벽에 이르도록 잠을 자지 않고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부호(扶護)하였다. 여러 달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사수(斯須)라도 어겼겠는가? 외람스럽게 유충(幼沖)한 자질(資質)로서 문득 왕업(王業)을 이으니, 이에 집안의 불행을 만나서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역신(逆臣)들이 서로 소장(蕭墻)의 안에서 선동하여 화기(禍機)가 자못 조석(朝夕)에 박두(迫頭)하였으나, 다행히 조종(祖宗)께서 묵묵히 도와서 충의(忠義)의 신하(臣下)들이 먼저 알게 되었도다. 경(卿)이 직려(直廬)578) 에 있다가 일찍 급변(急變)을 듣고서 몇 가지 일을 구획(區畫)하고 묘모(廟謨)를 조용히 협찬(協贊)하였고, 금병(禁兵)을 나누어 맡아, 흉도(兇徒)의 괴수(魁首)를 지고(指顧)의 사이에 잡았도다. 건곤(乾坤)이 이 때문에 정돈(整頓)되었고, 묘사(廟社)가 어언간에 안정(安定)되었다. 곧 큰 공(功)을 생각하니, 어찌 아름다운 하사(下賜)를 쓰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子孫)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노사신(盧思愼)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황천(皇天)과 후토(后土)가 실로 대려(帶礪)의 맹세를 보았을 것이니, 큰 가뭄과 큰 내에서 다시 금석(金石)과 같은 지조(志操)를 굳게 할지어다."

하였다. 정충 출기 포의 적개 정난 익대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定難翊戴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중선(朴仲善)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대개 듣건대, 급거히 창졸(倉卒)한 변(變)을 만나 크게 구제할 때에는 모름지기 웅장한 재주에 의지하는 것이요, 광명(光明) 준위(雋偉)한 공(功)을 세우면 성한 상(賞)이 반드시 특이한 등급으로 더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생각건대, 경은 척리(戚里)의 뛰어난 영걸(英傑)이요, 의관(衣冠)의 후손(後孫)이로다. 품성(稟性)은 온량(溫良)하고 몸가짐은 단근(端謹)하며, 또 활을 쏘는 재주가 정(精)하여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여 울연(蔚然)한 명칭(名稱)이 있었다. 정해년579) 에 흉도(兇徒)의 괴수(魁首)가 삭방(朔方)에서 범순(犯順)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진멸(殄滅)하여 남김이 없게 하였는데, 경의 공로(功勞)가 참여하여 많이 있었다. 선왕(先王)께서 그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병부(兵部)의 우두머리로 뽑아 적개 공신(敵愾功臣)으로서 공훈을 하사(下賜)하여 포장(褒奬)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지난번에 내가 집안의 불행을 만나니 적신(賊臣) 남이(南怡) 등이 나의 유충(幼沖)함을 멸시하고 몰래 불궤(不軌)한 마음을 품어 화기(禍機)가 발(發)하려 할 때에, 경(卿)이 금병(禁兵)을 맡아 변(變)을 듣고 달려가서 좌우로 힘을 펼쳐, 능히 큰 난(難)을 다스려 종사(宗社)로 하여금 다시 편안하게 하였다. 수년(數年) 사이에 두 차례나 큰 공을 세웠으니, 이것은 하늘이 경(卿)의 힘을 빌려서 우리 집안을 부익(扶翼)함이로다. 아! 경의 쌓은 바 충성(忠誠)과 품은 바 방략(方略)이 아니었으면 나 같은 미말(尾末)의 소자(小子)가 어찌 능히 크게 간난(艱難)을 구제하여 지금의 아름다움을 보전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전고(典故)를 상고하여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였으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박중선(朴仲善)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명(名)과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단서(丹書)와 백마(白馬)로 한 마음을 길이 보전하기로 기약하고, 황하(黃河)태산(泰山)에 맹세하고 만세(萬世)토록 잊지 아니하리로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겸 오위 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경연 춘추관 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 익성군(益城君) 홍응(洪應)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바람과 범이 서로 따르니, 진실로 비상한 도움을 알겠고, 천구(天狗)580) 를 빨리 쓸어 버리고 하물며 불세(不世)의 공훈(功勳)을 세운 것이겠는가? 진실로 정표(旌表)하고 보답(報答)하는 데 인색하면 어찌 영준(英雋)을 표창(表彰)하겠는가? 생각건대, 경은 마음가짐이 명민(明敏)하였고 몸가짐이 단정(端正)하였도다. 학문(學問)은 《오경(五經)》을 궁구(窮究)하여 깊이 연원(淵源)의 정당(正當)함을 얻었고, 지식(知識)은 온갖 사무(事務)에 통달(通達)하여 원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생각을 품었도다. 일찍이 현량과(賢良科)에 장원 급제(及第)하여 크게 빛난 소문(所聞)이 펴졌도다. 원로(鴛鷺)581) 에 영특(英特)함을 드러내고, 근시(近侍)의 줄에서 고상(翺翔)하였고, 사륜(絲綸)582) 을 연역(演繹)하기를 맡으니, 노성(老成)한 무리를 압도하였도다. 특히 소고(昭考)의 권우(眷遇)를 만나 항상 연한(燕閑)에서 고문(顧問)으로 대(對)하였도다. 헌체(獻替)하기를 간절히 하니 도와서 유익(有益)함이 많았도다. 은대(銀臺)에 뽑혀서 후설(喉舌)의 직을 대신하니, 출납(出納)하기를 능히 밝게 하였고, 농리(穠李)에 의탁(依托)하여 심복(心腹)이 되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더욱 삼가하였도다. 천관(天官)의 버금이 되니 선비들은 맑은 향기를 사모하고. 추부(秋部)583) 에 어른이 되니 사람들이 평반(平反)584) 에 복종하였도다. 바야흐로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오직 보도(輔導)하기를 책임지니, 거양(居養)하여 견문(見聞)의 이익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좌우(左右)에 조호(調護)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도다. 그대의 덕을 가상히 여겨 오랫동안 이미 마음을 기울였는데, 진실로 일이 있으면 장차 누구에게 뜻을 기울이겠는가? 지난번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나의 초복(初服)을 틈타 그 흉모(兇謀)를 무르익혀 화(禍)의 매개(妹介)가 이미 조아(爪牙)에 두루 펴졌고, 위태한 기틀이 거의 호발(毫髮)의 사이에 있었다. 신(神)의 부호(扶護)가 몰래 도와주는 데 힘입어 간사한 정상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도다. 경(卿)이 이에 조용히 협찬(協贊)하니 주책(籌策)을 계획함이 신(神)과 같았고 명(命)을 받고 신국(訊鞫)하니 실정을 자복하고 죄에 복주(伏誅)하기에 겨를이 없었도다. 요망(妖妄)한 분위기를 잠깐 사이에 소탕(掃蕩)하였고, 황도(皇圖)를 영구히 공고(恐固)하게 하였다. 이에 공적(功績)의 높음을 생각하니 감히 포상(褒賞)의 아름다움을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내려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홍응(洪應)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땅에는 벼리[維]가 있고 하늘에는 기둥이 있어 이미 사직(社稷)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지녔으니, 내에는 배를 만들고 가뭄에는 장마를 내려서 더욱 국가의 휴척(休戚)을 만세(萬世)토록 생각하고, 이에 후손(後孫)에 미치도록 기구(箕裘)를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정충 정난 정난 익대 공신(精忠靖難定難翊戴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신천군(信川君) 겸 오위 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강곤(康袞)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공(功)이 있고 덕(德)이 있어 능히 사직(社稷)의 중신(重臣)이 되니, 힘써 상(賞)을 주고 힘써 벼슬을 주어 마땅히 국가의 떳떳한 법전(法典)을 거행해야 하는데, 이는 공의(公義)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사로운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로다. 생각건대, 경(卿)은 성품이 본래 단아(端雅)하고, 뜻이 충직(忠直)함을 숭상(崇尙)하였도다. 지혜가 족히 원대한 것을 경영(經營)할 만하고, 재주가 족히 어모(禦侮)할 만하였고, 덕기(德器)가 노성(老成)하여 옛 어진 양장(良將)의 풍모(風貌)가 있었도다. 일찍이 우리 황고(皇考)의 지우(知遇)를 입어, 사신(使臣)의 행차를 따라서 북경[京]에 조회(朝會)하는 데 짐바리를 만리(萬里)의 길에 짊어지고 수고롭게 부지런함을 꺼리지 아니하였도다. 큰 난(難)을 다스리고 평정(平定)하는 날에 미쳐, 또 능히 충의(忠義)를 분발(奮發)하여 모계(謀計)를 협찬(協贊)하고 힘을 베풀어 큰 업(業)을 도와서 세웠도다. 황고(皇考)께서 깊이 기중(器重)하시기를 더하시고, 의지하여 간성(干城)으로 삼아 군정(軍政)을 도총(都摠)하게 하였고, 항상 좌우(左右)에 거(居)하게 하였다. 나 소자(小子)가 큰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집안의 불행을 만나 오히려 우리 훈구(勳舊)한 신하들이 도와서 지탱하는 데 힘입었는데, 지난번에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몰래 다른 마음를 품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도모하여 화기(禍機)가 이에 박두(迫頭)하였도다. 경이 이때에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숙위(宿衛)하면서 인심(人心)을 진정(鎭定)하고, 도리어 간흉(姦兇)을 제거하고 종사(宗社)가 힘입어서 편안하여졌다. 내가 그대의 덕(德)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사랑하고 돌보아, ‘돈독히 잊지 아니하겠다.’고 한다. 이에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을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강곤(康袞)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罪)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 백마(白馬)를 죽여서 함께 맹세하였으니 이미 위에 있거나 곁에 있거나 함께 볼 것이니, 황하(黃河)가 띠[帶]가 되도록 서로 비색(否塞)을 도와서 거의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아름다움을 짝하도록 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좌익 정난 익대 공신(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 정헌 대부(正憲大夫) 파산군(巴山君) 겸 내금위 장(兼內禁衛將) 조득림(趙得琳)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대개 듣건대, 왕(王)이 되는 자는 천도(天圖)에 응(膺)하여 권강(權綱)을 총람(總攬)하며 호웅(豪雄)을 어거하는 데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정표(放表)하여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賞)주는 것이니, 이것은 고금(古今)에 변치 않는 법전(法典)이다. 생각건대, 경(卿)은 품성(稟性)이 단정(端正)하고 곧으며, 마음가짐이 공손하고 삼갔도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온갖 일이 바야흐로 많았으므로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겨를이 없었는데, 경(卿)이 이때에 항상 좌우(左右)에 있으면서 분주히 복로(服勞)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였도다.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재기(材器)는 노성(老成)하여 영매(英邁)하기가 남보다 뛰어나 움직이면 차실(差失)이 없었다. 황고(皇考)께서 깊이 기중(器重)히 여기고, 항상 고굉(股肱)과 이목(耳目)에 비유하여, 혹은 중국의 간관(間關)한 행차에 시종(侍從)하였으며, 혹은 큰 난(難)을 다스려 평정하는 데에 협찬(協贊)하여 능히 평탄하거나 험난한 때에 절개를 한결같이하여 생명을 내놓고 변치 아니하였으니, 공훈(功勳)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이미 왕위(王位)에 즉시하여 집을 화(化)하여 나라를 만드는 데 미쳐서 좌익(左翼)의 공훈(功勳)을 기록하여 이름과 벼슬이 함께 나타났도다. 경이 더욱 겸손하여 낮추어 소심(小心)하고 일을 집행(執行)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도다. 그가 무예(武藝)를 날려 무과(武科)에 급제하게 되자, 황고(皇考)께서 더욱 권주(眷注)를 더하시고 내승(內乘)을 겸(兼)하게 하여 항상 금달(禁闥)에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출입하여 서로 따르니, 경의 충성과 부지런함을 내가 진실로 가상(嘉尙)히 여기었다. 황고(皇考)께서 편찮으시어 수순(數旬)을 미류(彌留)하게 되자, 경(卿)이 밤낮으로 곁에서 시종(侍從)하여 호위(護衛)하기를 오직 삼가고, 일찍이 띠[帶]를 풀지 아니하였다. 부조(不弔)한 황천(皇天)이 죽음을 내려서 집안이 불행을 만나, 내가 바야흐로 쓸쓸하게 부하(負荷)한 책임을 이기지 못하는데,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나의 초복(初服)을 틈타고, 나의 충묘(沖眇)함을 이롭게 여기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여 변(變)이 조석(朝夕) 사이에 있게 되었다. 다행히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움을 힘입어 흉악한 음모가 문득 드러났을 때, 경이 능히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과궁(寡躬)을 막아서 호위(護衛)하여 좌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도리어 역도(逆徒)를 진멸(殄滅)시키고 다시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였도다. 경의 노고와 공적의 성함을 생각하니 정표(旌表)하며 상(賞)주기를 늦출 수가 있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조득림(趙得琳)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 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신하(臣下)이고 친린(親隣)이니, 내가 감히 관일(貫日)의 정성을 잊겠는가? 나라이고 공(功)이니, 경(卿)은 더욱 여산 대하(礪山帶河)의 맹세를 몸받을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거창군(居昌君) 신승선(愼承善)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마음을 같이 하고 덕(德)을 같이하여 이미 훈업(勳業)이 홀로 높으니, 힘써 상(賞)주고 힘써 벼슬을 주어 총은(寵恩)을 특이(特異)하게 함이 마땅한데, 어찌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은혜이겠는가? 실로 만세(萬世)에 공통된 법규(法規)로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단방(端方)하고 몸가짐이 순근(醇謹)하며, 학문은 이에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적응하고, 재예(才藝)는 스스로 꽃부리를 머금고 꽃을 저작(咀嚼)하였도다. 과거(科擧)를 치루니 드디어 대정(大庭)에서 으뜸이었고, 벼슬을 하니 이미 밝은 시대에 울렸으며, 벼슬을 많이 양력(揚歷)하니 성명(聲名)이 울연(蔚然)하였고, 또 종인(宗姻)을 연(聯)하니 더욱 권주(眷注)를 입었도다. 병부(兵部)에 버금하여 군정(軍政)을 동독(董督)하고 예원(藝苑)을 겸하여 문형(文衡)을 도왔도다. 내가 즉위하자, 경에게 의지하기를 더욱 돈독(敦篤)히 하였는데, 바야흐로 집안의 불행을 만나 누가 도와서 지탱하여 주겠는가? 생각지도 않게 간신(姦臣) 남이(南怡) 등이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장차 신기(神器)를 위태롭게 하려 하니, 계획이 이미 주액(肘腋)에서 이루어지고 화(禍)가 소장(蕭墻)에 발(發)하게 되었는데, 상제(上帝)께서 가만히 그 혼(魂)에 복을 주시는 데 힘입어 여러 흉악한 무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취를 드러내게 하였다. 겨우 상변(上變)을 듣자마자 먼저 근신(近臣)을 부르니, 경이 이때에 금내(禁內)에서 숙직(宿直)하다가 충성을 분발하여 능히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격려하였고, 주책(籌策)을 계획하기를 조용히 하여 효광(梟獷)585) 의 무리를 모조리 사로잡으니, 호흡하는 짧은 사이에 흉악한 분위기가 사라졌도다. 이미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어찌 그 공재(功載)를 크게 보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신승선(愼承善)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질풍(疾風)에 경초(勁草)이니, 그대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돈독히 잊지 않으니, 철권(鐵券)과 단서(丹書)로 내 마음을 몸받아 길이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홍문관 직제학(洪文館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正)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그대에게 명하여 말[言]을 출납(出納)하게 하니 진실로 기회(期會)에 응하는 양필(良弼)이었으므로 의지하였고, 나를 막아주어 난(難)을 평정하는데 하물며 세상을 덮을 만한 수훈(殊勳)을 세우지 아니하였는가? 어찌 정포(旌褒)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여 힘써 보답(報答)하지 아니하겠는가? 생각건대, 경은 성품가짐이 충직(忠直)하고 마음가짐이 온순(溫純)하도다. 식견(識見)이 해박(該博)하고 통달(通達)하여 일찍이 시서(詩書)의 교훈(敎訓)에 따랐고 지기(志氣)가 원대(遠大)하여 본래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쌓았도다. 벼슬길에 오르니 동료(同僚)들이 그 능함을 양보하였고, 경조(京兆)586) 에 참여하니, 송사(訟事)하는 무리들이 그 손을 빌리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소고(昭考)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이에 특별히 권련(眷憐)을 받아, 문득 은대(銀臺)의 우두머리로 뽑혀서 출납(出納)하기를 오로지 진실하게 하였고, 매양 윤음(綸音)을 가까이에서 받들고 계옥(啓沃)함이 널리 많았도다. 간주(簡注)587) 하기를 더욱 깊이 하고, 의지하여 맡기기를 더욱 돈독히 하였도다. 내가 상(喪) 중에 있게 되자 경(卿)을 그대로 대언(代言)으로 삼으니, 가모(嘉謀)와 가유(嘉猷)가 있으면 반드시 진술(陳述)하니 약석(藥石)에 비(比)하겠고, 오직 일덕 일절(一德一節)로 서로 도우니 복심(腹心)에 비기겠도다. 생각지도 않게 조아(爪牙)와 같은 신하(臣下)가 몰래 주액(肘腋)의 변(變)을 꾸미니 이미 누란(累卵)의 형세를 이루어서 화(禍)가 박부(剝膚)588) 에 미쳤을 뿐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천의(天意)가 마음을 달래고 성문(星文)으로 경계(警戒)를 보이는 데 힙입어 역적(逆賊) 왕망(王莽)이 비록 그의 궤휼(詭譎)한 자취를 감추었으나, 역적 동탁(董卓)이 스스로 그 흉모(兇謀)를 누설하였도다. 내가 바야흐로 변(變)을 듣고 마음을 경계하고, 경(卿)은 오직 충성을 일으켜 계책을 협찬(協贊)하매, 급히 체포하여 그 당(黨)을 모조리 묶었고, 국문(鞫問)하기를 밝게 하니 모두 그 정상을 자백하였도다. 효경(梟獍)과 같은 무리를 조용히 진멸(殄滅)하니 하늘에 넘치던 분침(氛祲)을 쓸어 없애고, 큰 복조(福祚)를 위태한 데에서 부지(扶持)하여 세일(洗日)의 공(功)을 이룩하였도다. 상(賞)의 은전(恩典)을 논하는 데 누구를 먼저 할 것인가? 떳떳한 전장(典章)을 거행하기를 감히 뒤로 미루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子孫)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권감(權瑊)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손과 발이 되어 머리와 눈을 호위(護衛)하였으니 내가 이미 이정(彝鼎)에 새겨서 잊지 아니하고, 고굉(股肱)의 신하로 삼아 국가에 기둥이 되게 하니, 경은 더욱 대려(帶礪)로 기약하여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우승지(行承政院右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출납(出納)하기를 오직 진실하게 하니 오랫동안 숙야(夙夜)의 어진이에게 의지하였고, 난(難)을 막아서 호위(護衛)하여 더욱 고굉(股肱)의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이에 상전(賞典)을 성하게 하여 종공(宗功)을 밝히노라. 생각건대, 경은 기우(器宇)가 굉심(宏深)하고 마음가짐이 뇌락(磊落)하도다. 일찍 시례(詩禮)의 교훈(敎訓)을 듣고 충효(忠孝)로 꽃다운 이름을 전하였고, 원래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품으니, 문장(文章)은 여가(餘暇)의 일이었다. 드디어 황고(皇考)께 지우(知遇)를 받아 이에 높은 벼슬길에 이름을 드날렸고, 두루 재능(才能)을 시험하니, 진실로 간주(簡注)하기를 깊이 하였도다. 그대의 아우에 이어서 우익(羽翼)의 양상(良相)이 되자 다투어 약석(藥石)을 바치었도다. 내가 즉위하자, 경에게 그대로 납언(納言)을 맡기니, ‘인의(仁義)가 아니면 아뢰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일찍이 들었으나, ‘모유(謀猷)가 있으면 반드시 고(告)한다.’고 하는 것은 이제 이 사람에게서 보겠도다. 거의 협보(夾輔)하는 정성에 힘입어서 함께 어렵고 큰 왕업(王業)을 보전하겠도다. 지난번에 적신(賊臣) 남이(南怡) 등이 오랫동안 다른 마음을 품고서 널리 여러 흉도(兇徒)들을 심어서 화(禍)의 위태함이 어찌 병봉(荓蜂)589) 에서 말미암았겠는가? 위기(危機)가 오직 범을 타는 것뿐만이 아니었도다. 간사한 흉모(兇謀)가 스스로 누설된 것은 신명(神明)이 가만히 도와주는 데 힘입었고, 역수(逆竪)가 문득 섬멸된 것은 충의(忠義)의 사람들이 협찬(協贊)하는 데 의지하였다. 경(卿)은 능히 완급(緩急)에 현혹(眩惑)되지 아니하고, 처치(處置)함이 적당하였도다. 큰 원수를 잠깐 사이에 숙청하였고, 큰 기업(基業)을 위태한 데에서 공고(鞏固)하게 하였도다. 평탄하거나 험난할 때 절개를 한결같이하니 참으로 공후(公侯)의 심복(心腹)이라 이를 만하고, 휴척(休戚)을 더불어 함께하니 어찌 주석(柱石)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대의 덕(德)을 가상히 여겨 ‘돈독하여 잊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려주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어세겸(魚世謙)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단서(丹書) 철권(鐵券)을 길이 자손(子孫)에게 전하기를 기약하고, 대하 여산(帶河礪山)으로 거의 종시(終始)토록 변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좌부승지(行承政院左副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영평군(鈴平君) 윤계겸(尹繼謙)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인신(人臣)이 충성을 다하여 절개를 바치고 험난하거나 평탄할 때에 있어서도 변하지 아니하니, 인군(人君)이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데 어찌 친소(親疏)에 간격이 있겠는가? 이에 아름다운 법전(法典)을 거행하여 특수한 공훈에 보답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단정(端正)하고 순수하며, 지기(志氣)가 통달(通達)하고 민첩(敏捷)하였다. 일찍이 가정(家庭)의 훈계(訓戒)에 따라서 직업은 능히 기구(箕裘)를 계승하였고, 일찍 조정[朝著]에 이름을 드날려서 기국(器局)이 반착(盤錯)에 스스로 특별하였도다. 특별히 황고(皇考)의 사랑을 받아 근시(近侍)의 벼슬에 가까이 있었으니, 어찌 오직 폐부(肺腑)의 친(親)함뿐이겠는가? 온화한 덕(德)이 있었고, 진실로 후설(喉舌)의 직임에 알맞아 건건(謇謇)590) 히 한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즉위하자, 경에게 의지하기를 더욱 돈독하게 하니, 출납(出納)하기를 오직 진실하게 하였고, 다시 숙야(夙夜)의 부지런함을 다하고 모유(謀猷)를 반드시 진술(陳述)하여 더욱 인도(引導)하여 돕는 데 힘을 다하였다. 지난번에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몰래 불령(不逞)한 사람들과 결탁하여 몰래 다른 기도(企圖)를 품으니, 화(禍)가 장차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에 박두하였고, 형세가 이미 누란(累卵)과 같이 위태하였으나,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와 주는 데 힘입고 충의(忠義)의 사람들이 알아낸 데 의지하여, 흉악한 기회가 이루지 못하고 역적의 음모가 스스로 누설되었도다. 내가 변(變)을 듣고 놀라서 근심하였는데, 경이 계책을 협찬(協贊)하고 주선하여 일을 조치함이 문득 그 기미에 맞았고, 체포하여 국문(鞫問)하여 모조리 법(法)에 저촉시켰다. 헤아리지 못할 큰 변(變)을 만나, 경(卿)이 홀로 막아서 호위(護衛)하는 공로(功勞)가 많아 끝없는 큰 아름다움을 보전하였으니, 내가 감히 감정(戡定)한 공적(功績)을 잊겠는가? 그러므로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윤계겸(尹繼謙)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어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수훈(殊勳)을 창졸(倉卒)간에 세웠으니 이미 질풍(疾風)에 경초(勁草)와 같았고, 아름다움을 영장(靈長)에 짝하기를 기약하였으니 거의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정 대부(嘉靖大夫) 행 승정원 우부승지(行承政院右副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계림군(雞林君) 정효상(鄭孝常)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비상한 그릇을 자부(自負)하면 반드시 불세(不世)의 공(功)을 세울 것이요, 불세의 공을 세우면 마땅히 비상한 은총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어 성한 상(賞)을 베풀어 거의 수훈(殊勳)을 갚는도다. 생각건대, 경은 돈박(敦撲)하고 준위(俊偉)한 자품(資品)으로서 정심(精深)하고 박흡(博洽)한 학문(學問)을 더하였도다. 절묘한 재예(才藝)와 웅장한 문사(文詞)가 홀로 높아서 일찍이 천전(千錢)의 뽑음에 으뜸이었고, 영성(英聲)과 무실(茂實)이 서로 맞으니 한 시대에 울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시종(侍從)의 벼슬을 역양(歷敭)하니 자못 공보(公輔)의 인망(人望)이 높았다. 내가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바야흐로 배울 때 경이 요우(僚友)가 되어 비로소 친(親)하였는데, 보도(輔道)하여 광명(光明)에 집희(緝熙)하기를 힘쓰고 기필코 성현(聖賢)의 곤오(閫奧)를 열어서, 거양(居養)하는 데 원대(遠大)하게 기약하기를 요구하고 항상 황왕(皇王)의 경륜(經綸)을 강(講)하였도다, 마침 즉위한 처음을 당하여 후설(喉舌)의 직임을 제수(除授)하니 출납(出納)하기를 진실하게 하는 것을 가상히 여겼고, 유모(猷謀)의 생각을 나누어 서로 따랐도다,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나의 창황(倉怳)히 상(喪)중에 있는 틈을 타서 내가 유충(幼沖)한 몸으로 즉위한 것을 멸시하고, 몰래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 감히 분수가 아닌 모계(謀計)를 꾸며 흉수(兇竪)가 반거(盤據)하였으나 알지 못하고, 화기(禍機)가 발(發)함에 미쳐서도 깨닫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열성(列聖)의 몰래 도와주는 데 힘입어, 내가 의사(義士)들의 발로(發露)하는 말을 들었도다. 간사한 무리를 모두 잡아서 마침내 밝은 법전(法典)에 복주(伏誅)하였다. 경(卿)이 이때에 주선(周旋)하고 힘을 다하여 기의(機宜)의 꾀를 밀찬(密贊)하였고 좌우에서 충성을 협찬(協贊)하여 능히 막아서 보위(保衛)한 공적을 나타냈도다. 진실로 비상한 그릇이 아니었으면 어찌 불세(不世)의 공(功)을 이루겠는가? 공훈이 이미 특수하니 상(賞)을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며,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정효상(鄭孝常)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태산(泰山)황하(黃河)에 맹세하여 나는 국가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기약하고, 기린각(麒麟閣)에 새기니, 경은 더욱 시종토록 한결같은 절개(節介)를 힘쓸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원성군(原城君) 안중경(安仲敬)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오직 신자(臣子)의 대의(大義)요, 공(功)을 정표(旌表)하고 상(賞)을 행(行)하는 것은 곧 국가의 항규(恒規)이니, 떳떳한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높이노라. 생각건대, 그대는 조행(操行)이 단정(端正)하고 근신(謹愼)하며 처사(處事)를 안상(安詳)하게 하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궁중(宮中)에 거(居)하면서 받들어 모시니, 소심(小心)으로 공경하여 숙야(夙夜)에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사랑을 더하시고 항상 좌우에 두었고, 밝은 명(命)을 출납(出納)하니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근신하였다. 그대의 충근(忠勤)은 진실로 가상(嘉尙)하게 여길 만하다. 내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집의 불행을 만나 쓸쓸히 상(喪) 중에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떼 지어 모아 신기(神器)를 위태하게 하기를 도모하였다. 화기(禍機)가 발(發)하기에 미쳐서 흉모(兇謀)가 스스로 드러났다. 그대가 이때에 나의 좌우에 있다가, 겨우 변(變)의 고(告)함을 듣자마자, 충성을 분격하여 나의 주획(籌畫)을 받들어 출입(出入)하고 응대(應對)하였도다. 비록 일이 급거(急據)히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있었을지라도 능히 기미를 잃지 아니하고, 이윽고 흉악한 도당을 잡아서 모두 부질(鈇鑕)에 복주(伏誅)하였다. 천지의 큰 원수를 숙청하여 신인(神人)의 공분(共憤)을 통쾌하게 하였다. 이는 비록 조종(祖宗)들의 묵묵히 도와주신 힘이요, 종척(宗戚) 대신(大臣)들의 협조하여 도와준 공(功)이지만, 또한 오직 그대들 내시(內侍)의 신하들이 분주히 막아서 보위(保衛)한 근로(勤勞)에 힘입은 것이로다. 그대의 노고를 생각하니, 그대의 공훈을 기록하여 포상(褒賞)하기를 성하게 하는 것이 어찌 사사로운 은혜라 하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안중경(安仲敬)의 후손(後孫)’이라 하고,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공(功)을 솥[鼎]에 새기고 종(鍾)에 새기니, 그대는 길이 금일의 뜻을 굳게 할지어다. 태산(泰山)이 숫돌이 되고 황하(黃河)가 띠가 되도록 내가 감히 이때의 마음을 잊겠는가?"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현복군(玄福君) 권찬(權攢)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절개를 다하고 충성을 바쳐서 이미 막대한 아름다운 공적(功績)을 세웠으니, 재능(才能)을 정표(旌表)하고, 상(賞)을 행(行)하여 마땅히 적지 않은 특수한 은총(恩寵)을 더해야 하는데, 이것은 만세(萬世)의 항규(恒規)이요. 한때의 사사로운 거조(擧措)가 아니로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자품(資稟)이 영민(英敏)하고 처사(處事)가 정상(精詳)하도다. 일찍이 현관(賢關)에서 노닐다가 사마(司馬)의 시험(試驗)에 뽑혀서 올랐고, 널리 여러 책에 박통(博通)하고 깊이 편작(扁鵲)의 방문(方文)을 연구하였다. 드디어 영왕(寧王)591) 의 지우(知遇)를 만나 항상 금액(禁掖)에 가까이 모시니, 더욱 근근(勤謹)하기에 힘써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항상 고문(顧問)을 받들어 어기지 아니하였다. 절선(節宣)이 혹 어그러지면 문득 십전(十全)592) 의 의술(醫術)을 바쳤고, 완급(緩急)할 때 가히 의지한 것이 어찌 다만 삼절(三折)의 양의(良醫)593) 에 비할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예권(睿眷)이 특히 많았고 화반(華班)을 두루 역임하다가 갑자기 발탁(拔擢)되었고, 마침내 대점(大漸)을 모신 것이 여러 달이었으나, 홀로 조호(調護)하는 데 고심(苦心)하면서 어찌 일찍이 잠시 사이라도 그 옆을 떠났겠는가? 매양 몸을 진찰하고 걱정을 하였도다. 이에 집안의 불행을 만나 문득 상려(喪廬)에 의지하여 평안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어렵고 큰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생각하여 출척(怵惕)하고 격려하였도다. 그대에게 명하여 좌우에서 받들어 보필(補弼)하게 하니 비익(裨益)함이 널리 많았다. 생각지도 않게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분수 아닌 것을 바라고 왕실을 엿보았으며, 몰래 박부(剝膚)의 독(毒)한 주둥아리를 놀리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모아서 결탁하니, 이미 누란(累卵)의 위기가 박두하였도다. 상제(上帝)께서 가만히 그 마음을 달래주는 데 힘입어 여러 간사한 무리가 스스로 그 정상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도다. 그대가 능히 분주하여 모획(謀畫)을 밀찬(密贊)하니, 저들이 모두 낭발(狼跋)하다가 도리어 사로잡혀 죽음에 나아갔다. 이에 큰 공(功)을 생각하니, 감히 아름다운 상(賞)을 늦출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였으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권찬(權攢)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태산(泰山)황하(黃河)를 가리켜 종시(終始)할 것을 맹세하고 이미 영세(永世)에 이르도록 기약하였으니, 국가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데 한 가지 마음을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봉직랑(奉直郞) 행 승정원 주서(行承政院注書) 겸 춘추관 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조익정(趙益貞)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가련한 내가 상중(喪中)에 있다가 갑자기 불칙(不測)한 근심을 만났는데, 나를 어려움에서 막아서 능히 비궁(匪躬)594) 의 절개(節介)를 바쳤도다. 어찌 성한 은전(恩典)을 거행하여 난(難)을 평정한 공(功)을 보답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그대는 성도(性度)가 연순(淵純)하며 몸가짐이 근검(勤儉)하였도다. 일찍이 척당(倜儻)한 큰 뜻이 있었고, 일찍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을 역양(歷揚)하였도다. 한원(翰垣)595) 의 기사(記事)가 되어 춘추(春秋)의 직필(直筆)을 잡았고, 정원(政院)의 주서(注書)가 되어 출납(出納)을 돕고 사륜(絲綸)을 연역(演繹)하였는데, 나라의 활보(闊步)를 형구(亨衢)596) 에 펴게 하여, 진실로 이미 이기(利器)를 착절(錯節)에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지난번에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크게 흉모(兇謀)가 무르익어 화(禍)가 자못 급급(岌岌)597) 하고 변란(變亂)을 선동하기에 이르렀으나, 열성(列聖)께서 묵묵히 도와주는 데 힘입고 상천(上天)께서 몰래 부호(扶護)하는 데 힘입어 간사한 정상이 스스로 밝혀졌도다. 의(義)로운 선비들이 변(變)을 상고(上告)하니, 그대가 능히 주선(周旋)하여 그 기회(機會)를 잃지 아니하고, 분주(奔走)하여 주책(籌策)을 잘 받들어 흉도(兇徒)가 도리어 천주(天誅)에 엎드리었고, 반역의 요망한 기운이 곧 정격(霆擊)598) 사이에 소탕되었다. 화환(禍患)이 이미 쉽게 평정되었으니, 공훈(功勳)을 마땅히 빨리 상(賞)주어야겠다. 이것은 오직 공의(公義)일 뿐이요, 어찌 사사로운 은혜라고 하겠는가? 이에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조익정(趙益貞)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큰 공(功)을 길이 생각하여, 내가 감히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백수(白水)의 맹세를 변하겠는가? 더욱 소절(素節)을 굳게 하여, 그대는 한(漢)나라 고제(高帝)의 단서(丹書)를 잊지 말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봉성군(峯城君) 서경생(徐敬生)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왕자(王者)가 천도(天圖)에 응(膺)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권세(權勢)와 기강(紀綱)을 총람(總攬)하되, 덕이 성하면 힘써 벼슬을 주고, 공(功)이 성하면 힘써 상(賞)을 주는 것인데, 이것은 국가의 떳떳한 법전(法典)이요, 고금(古今)에 공통된 의리이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성품(性稟)이 영민(穎敏)하고 마음가짐이 순직(純直)하였도다. 내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그대가 좌우(左右)에 있으면서 소심(小心)으로 추주(趨走)하였고, 일을 하는 데 오직 근신(謹愼)하였도다. 그대의 충근(忠勤)을 내가 진실로 가상하게 여겼다. 지난번에 내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는데,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였으나, 하늘의 도와 주는 데 힘입어 흉모(兇謀)가 스스로 드러났도다. 그대가 능히 분격(奮激)하여 분주(奔走)하고 나를 막아서 호위하고 협찬(協贊)하여, 문득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모두 그 죄에 복주(伏誅)시켰다. 그대의 공로(功勞)는 깊이 가상(嘉尙)하기에 족하다. 이에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였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서경생(徐敬生)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질풍(疾風) 속의 경초(勁草)로서 이미 불후(不朽)의 공(功)을 이루었으니, 대하 여산(帶河礪山)으로 더욱 이즈러지지 아니할 절개(節介)를 다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장천군(長川君) 김효강(金孝江)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그대가 간난(艱難)을 막아서 능히 충의(忠義)의 돈독(敦篤)함을 나타냈으니, 내가 그대의 공적(功績)을 아름답게 여겨 어찌 포상(褒賞)하는 융전(隆典)을 베풀지 않겠는가? 이것이 어찌 사사로운 것이겠는가? 스스로 공의(公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품성(稟性)이 성근(誠謹)하고 몸가짐이 공근(恭謹)하였도다. 소심(小心)으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일을 하는데 좌우에서 어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깊이 권련(眷憐)을 더하여 항상 궁중(宮中)에 거(居)하여 받들어 모시게 하였다. 지난번에 역신(逆臣)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장차 신기(神器)를 엿보려고 오랫동안 다른 마음이 무르익었으나 내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어 알지 못하였다. 저들이 장차 불측(不測)한 가운데 변(變)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하늘의 도움이 비밀히 내리는 데 힘입어 흉모(兇謀)가 스스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내가 상변(上變)을 겨우 들었을 때를 당하여 오직 그대가 성심(誠心)으로 분격(憤激)하여 창황(倉皇)한 사이에 분주(奔走)하였고 운확(隕穫)599) 한 사이에 익위(翊衛)하였다. 위태한 때를 만나서 명령을 주었으니, 어찌 유무(有無)간에 능히 한 것이 아니겠는가? 엎어질 때 부호(扶護)하고 위태할 때 부지(扶持)하여 실로 이러한 완급(緩急)한 때에 의지할 만하였도다. 이에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게 하였으며,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김효강(金孝江)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그 공(功)을 크게 보아 기재(記載)하여 이미 아름다운 이름을 정종(鼎鍾)에 새겼으니, 뒤에 세한(歲寒)에 시들지 아니하고 더욱 소절(素節)을 대려(帶礪)가 되도록 굳게 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합천군(陜川君) 이존명(李存命)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절개(節介)를 다하여 곧 충성을 바치고 이미 비상한 공적을 세웠으니, 공(功)을 갚는 데 힘써 상(賞)을 주고, 마땅히 적지 아니한 은혜를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를 깊이 가상히 여겨, 잊지 아니하고 ‘돈독하다.’고 한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성품 갖음이 충직(忠直)하고 마음가짐이 단량(端良)하였도다. 비단 행동이 겸공(謙恭)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처사(處事)하는 것이 명민(明敏)하였도다. 일찍 황문(黃門)600) 에 뽑히어서 특별히 소고(昭考)의 권련(眷憐)을 받았고, 매양 그대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기중(器重)하게 여겨서 동궁(東宮)에서 나를 따르게 하였다. 마음을 삼가고 조심하여 항상 좌우에서 서로 따르고, 명을 전하는 데 변변(便便)히 하여 오직 출납하기를 진실하게 하였다. 간난(艱難)한 왕업(王業)을 승습(承襲)하게 되자, 그대로 선전(宣傳)을 맡기니, 한결같은 절개를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더욱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궁중(宮中)에 거(居)하였으며, 만기(萬機)가 끝이 없으니, 어찌 경각(頃刻)인들 물러가서 있을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역신(逆臣)이 감히 국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가만히 붕도(朋徒)를 결탁하여 몰래 화난(禍難)을 꾀하니, 불꽃을 박멸(撲滅)하지 아니하고 장차 부채질하려 하였고 덩쿨을 도모(圖謀)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번성하게 하였다. 종사(宗社)의 묵묵히 도와주는 데 힘입어 흉간(兇姦)이 패로(敗露)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바야흐로 변(變)을 듣고 조치(措置)할 때 그대가 이에 계책(計策)을 협찬(協贊)하여 주선(周旋)하였다. 비록 창황(倉皇)하고 급거(急遽)한 중을 당하여서도 능히 분주(奔走)하고 호위(護衛)하는 힘을 바치니, 원흉(元兇)이 곧 스스로 머리를 바쳤고, 남은 도당(徒黨)들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어찌 그대의 노고(勞苦)를 뽑아서 나의 상사(賞賜)를 후하게 아니하겠는가? 이에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며,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이존명(李存命)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내가 그대의 공적(功績)을 가상히 여기어 황하(黃河)가 띠[帶]가 되는 맹세를 찾았으니, 그대는 내 마음을 몸받아 더욱 경초(勁草)의 지조(志操)를 굳게 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내시부 상탕(行內侍府尙帑) 유한(柳漢)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난(難)을 평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것은 오직 신자(臣子)의 아름다운 공적(功績)이요, 논공 행상(論功行賞)하는 것은 국가의 항규(恒規)이로다. 생각건대, 그대는 품성(稟性)이 충순(忠純)하고 마음가짐이 단근(端謹)하도다. 일찍이 황문(黃門)의 뽑힘에 충당되어 우리 소고(昭考)를 섬겼는데 소심(小心)으로 직분을 봉행(奉行)하였고, 내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자 항상 좌우에 있었고, 일을 하는 데 삼감이 있어 차실(差失)이 없었다. 지난번에 역신(逆臣) 남이(南怡) 등이 음으로 몰래 다른 뜻을 품어 화(禍)가 불측(不測)한 가운데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와 주는 데 힘입어 간사한 음모(陰謀)가 스스로 누설되었고, 흉당(兇黨)들이 곧 모두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다. 그대가 이때에 과궁(寡躬)을 막아서 호위(護衛)하고, 선후(先後)하여 분주한 공(功)이 더불어 많이 있었다. 이에 그대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유한(柳漢)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금일(今日)을 잊지 아니하여 감히 태산(泰山)·황하(黃河)의 맹세를 변하겠는가? 세한(歲寒)에 시들지 아니하고 더욱 송백(松柏)의 지조(志操)를 굳게 할지어다."

하였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행 중추부 지사(行中樞府知事)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국가가 일어날 적에는 반드시 어질고 지혜 있는 신하(臣下)가 부익(扶翊)하고 찬좌(贊佐)하여서 대업(大業)을 보위(保衛)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일(同一)한 법이로다. 생각건대, 경은 삼한(三韓)의 세주(世胄)이요, 일대(一代)의 영재(英材)로다. 품기(稟氣)601) 는 청량(淸亮)하고, 행동은 단방(端方)하였도다. 이치(理致)를 밝히는 데 호홀(毫忽)의 지경에 들어가고 학문(學問)을 강(講)하면 그의 정미(精微)함을 다하였다. 범백(凡百)들이 이르기를, ‘등이(等夷)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우리 선왕(先王)께서 경(卿)을 지우(知遇)한 것이 이미 깊었고, 권주(眷注)함이 날로 돈독하여, 다만 심복(心腹)과 같았을 뿐만 아니었는데, 경도 또한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만 힘쓰고 집을 잊었고, 알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므로, 그 국가에 비익(裨益)함이 널리 많았다. 선왕(先王)께서 대점(大漸)에 이르렀을 때에는 좌우에서 호위(護衛)하여 조석(朝夕) 사이가 없었고, 친히 안석[几]에 기대어 부탁하신 말씀을 받들고 마침내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배나 더하였다. 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경이 더욱 정성을 다하여 도우고 지탱하여 주었도다. 흉수(兇竪)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자, 또 능히 기의(機宜)를 밀찬(密贊)하니 그들이 곧 천주(天誅)에 엎드리었다. 내가 능히 전대(前代)의 열성(烈聖)을 계승하여 지금의 아름다움을 보유(保有)하는데 경(卿)의 공(功)이 컸으니, 내가 감히 잊겠는가? 이에 경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한계희(韓繼禧)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경이 이미 충성을 선조(先朝)에 바쳐서 능히 영문(令聞)602) 이 있었고, 또 과궁(寡躬)을 금일(今日)에 협찬(協贊)하여서 종예(終譽)603) 를 길게 하였다. 태산(泰山)황하(黃河)가 오히려 있는한 경은 그 나의 총명(寵命)에 응(膺)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움을 누려 다시 유구(悠久)할 것을 기약하고, 후세의 공효(功効)에 힘쓸지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70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농업-전제(田制) / 신분-천인(賤人)

  • [註 489]
    경략(景略) : 왕맹(王猛)의 자(字).
  • [註 490]
    문슬(捫蝨) :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것을 말함. 옛날 진(晉)나라 왕맹(王猛)이 남의 앞에서 꺼리지 않고 옷에 붙은 이를 문지르며 이야기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 [註 491]
    반우(飯牛) : 영척(寗戚)이 우각(牛角)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이를 등용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영척 우각(寗戚牛角).
  • [註 492]
    왕망(王莽) : 신(新)나라의 시조.
  • [註 493]
    왕돈(王敦) : 진(晉)나라의 반역자.
  • [註 494]
    왕함(王含) : 왕돈(王敦)의 형.
  • [註 495]
    반상(反狀) : 모반하는 형상.
  • [註 496]
    관중부(管仲父) :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관중(管仲)을 중부(仲父)라고 부르고 재상을 존경한 것.
  • [註 497]
    여산 대하(礪山帶河) : 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봉작(封爵)한 서사(誓辭)에,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한 데에서 나온 말.
  • [註 498]
    중부(仲父) : 관중(管仲).
  • [註 499]
    기상(旂常) : 주(周)나라 때 사용하던 깃발. 기(旂)에는 교롱(交籠)을 그리고 상(常)에는 월일(月日)을 그렸는데, 여기에 공신(功臣)의 이름을 새겼음.
  • [註 500]
    소장(蕭墻) : 궁중(宮中)의 내부. 원래 소장(蕭墻)은 임금과 신하들이 조회하는 곳에 새운 병풍을 말함.
  • [註 501]
    초위(椒闈) : 궁중의 규문(閨門).
  • [註 502]
    보형(保衡) : 은(殷)나라 이윤(伊尹)의 이칭(異稱).
  • [註 503]
    유씨(劉氏) : 한(漢)나라 왕실(王室).
  • [註 504]
    주발(周勃) : 한(漢)나라를 여씨(呂氏)의 화(禍)에서 구원한 무신.
  • [註 505]
    기구(箕裘) : 가업(家業). 가업을 이어받음을 이르는 말임.
  • [註 506]
    형권(亨權) : 국운(國運)을 여는 것.
  • [註 507]
    아망(雅望) : 훌륭한 명망. 청망(淸望).
  • [註 508]
    비도(丕圖) : 나라의 큰 운수.
  • [註 509]
    동평왕(東平王)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제 8자(子). 동평 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 선(善)을 좋아하여 집에 있을 때 선(善)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하였음.
  • [註 510]
    헌체(獻替) : 선(善)을 취하고 악(惡)을 버림. 곧 임금을 돕는 것을 말함.
  • [註 511]
    불기(不器) : 인격·재주가 갖추어져 어떠한 방면에도 능함.
  • [註 512]
    비궁(匪躬) :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함.
  • [註 513]
    화악(華萼) : 꽃과 꽃바침, 곧 형제.
  • [註 514]
    채조(彩藻) : 빛나는 문체(文體).
  • [註 515]
    기북(冀北) : 기주(冀州)의 북쪽, 양마(良馬)의 산지로 유명함. 한유(韓愈)의 시(詩)에, "백락(伯樂)이 기북(冀北)의 들을 지나자 말떼가 마침내 텅 비었네."에서 따온 문귀임.
  • [註 516]
    예산(睿算) : 임금의 계획.
  • [註 517]
    찬주(贊籌) : 계책을 돕는 것.
  • [註 518]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19]
    삼감(三監) : 주(周)나라 때 은(殷)나라 세력의 후예인 무경(武庚)과 주공(周公)의 동생 관숙(管叔)·채숙(蔡叔)을 말함. 이들이 일으킨 난(亂)을 ‘삼감의 난’이라 함.
  • [註 520]
    희공(姬公) : 주공(周公) 단(旦).
  • [註 521]
    여씨(呂氏) : 여태후(呂太后)의 족친.
  • [註 522]
    유장(劉章) : 한(漢)나라 종친. 주발(周勃)·진평(陳平)과 여씨(呂氏)의 화(禍)를 막음.
  • [註 523]
    양유기(養由基) : 중국 초(楚)나라 명궁(名弓).
  • [註 524]
    손복(孫復) : 송(宋)나라 학자, 태산학파(泰山學派)를 이루어 송학(宋學)의 선구자가 됨.
  • [註 525]
    주의(注倚) : 뜻을 두어 의지함.
  • [註 526]
    정해년 : 1467 세조 3년.
  • [註 527]
    계주(髻珠) : 남녀의 머리나 관(冠)에 장식으로 다는 보물(寶物) 구슬.
  • [註 528]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29]
    부일(扶日) : 해를 도움. 곧 임금을 도움.
  • [註 530]
    백중(伯仲) : 형제.
  • [註 531]
    능연각(凌煙閣) :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 공신들의 초상(肖像)을 그려 걸어 두었던 누각(樓閣).
  • [註 532]
    창유(鬯卣) : 울창(鬱鬯)의 술잔.
  • [註 533]
    초매(草昧) : 나라를 창조(創造)하는 것.
  • [註 534]
    모토(茅土) : 옛날 제왕(帝王)으로부터 받는 영지(領地). 곧 봉역(封域)을 일컬음. 한대(漢代)에 임금이 제후(諸侯)를 봉할 때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그 방면의 색깔의 흙을 띠풀[白茅]에 싸서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 [註 535]
    원구(元舅) : 처가집.
  • [註 536]
    주획(籌畫) : 계획을 세우는 것.
  • [註 537]
    희공(姬公) : 주공(周公).
  • [註 538]
    장자방(張子房) : 장량(張良).
  • [註 539]
    고제(高帝) :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
  • [註 540]
    붕로(鵬路) : 대붕(大鵬)의 날아가는 길. 곧 벼슬길.
  • [註 541]
    후설(喉舌) : 승지(承旨).
  • [註 542]
    삼례(三禮) : 천신(天神)·지기(地祇)·인귀(人鬼)에 대한 예.
  • [註 543]
    구중(九重) : 임금의 궁궐.
  • [註 544]
    염매(鹽梅) : 소금과 매실의 신맛. 신하가 임금을 도움.
  • [註 545]
    태정(台鼎) : 삼공(三公)의 자리.
  • [註 546]
    괴극(槐棘) : 삼공(三公) 구경(九卿)의 자리. 주대(周代)의 조정(朝廷)에 3그루의 느티나무와 9그루의 가시나무를 심어, 삼공은 삼괴(三槐)를, 구경은 구극(九棘)을 대하여 앉았던 고사에서 나온 말.
  • [註 547]
    마아(磨牙) : 이를 가는 것.
  • [註 548]
    진감(震撼) : 흔들리고 움직임. 위험한 것.
  • [註 549]
    반착(盤錯) : 도사리고 뒤틀림. 어지러운 것.
  • [註 550]
    유인(游刃) : 고기를 자를 때 고기 토막과 토막 사이의 틈바구니에 칼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 곧 일을 처리하는 데 조용히 여유가 있는 모양.
  • [註 551]
    종팽(宗祊) : 종묘(宗廟).
  • [註 552]
    선익(蟬翼) : 매미 날개. 아름다움.
  • [註 553]
    기환 자제(綺紈子弟) : 부귀한 집 자손.
  • [註 554]
    이실(貳室) : 왕의 부마(駙馬).
  • [註 555]
    윤균(輪囷) : 높고 큰 것.
  • [註 556]
    하동군(河東君) : 정인지(鄭麟趾).
  • [註 557]
    종석(宗祏) : 종묘(宗廟).
  • [註 558]
    유후(留侯) : 장양(張良).
  • [註 559]
    규조(珪組) : 벼슬자리에 있는 것.
  • [註 560]
    잡치(雜治) : 나라에서 중죄인(重罪人)을 심문할 때 대간(臺諫)의 관원과 육조(六曹)의 관원이 합동으로 심문하던 일.
  • [註 561]
    종팽(宗祊) : 종묘(宗廟).
  • [註 562]
    간기(間氣) : 뛰어난 기상.
  • [註 563]
    곤직(袞職) : 임금.
  • [註 564]
    수준(壽俊) : 나이먹은 준재(俊才).
  • [註 565]
    필공 고(畢公高) : 주(周)나라 문공(文公)의 제 15자(子).
  • [註 566]
    황비(黃扉) : 의정부.
  • [註 567]
    영릉(英陵) : 세종(世宗).
  • [註 568]
    현묘(顯廟) : 문종(文宗).
  • [註 569]
    탁지(度支) : 호조(戶曹).
  • [註 570]
    강후(絳侯) : 한(漢)나라 주발(周勃)의 봉호(封號).
  • [註 571]
    유씨(劉氏) : 한(漢)나라의 종실(宗室).
  • [註 572]
    수발(秀拔) : 무리 가운데 뛰어남.
  • [註 573]
    사책(射策) : 한(漢)나라의 과거의 하나. 경서(經書)나 대책(對策)을 응시자로 하여금 각자 능력에 따라 해석하게 하여 우열을 정하였음.
  • [註 574]
    오총(五摠)의 신(神) : 당(唐)나라 때 5인의 박식(博識)한 사람 안원손(顔元孫)·위술(韋述)·하지장(賀知章)·육상선(陸象先)·은천유(殷踐猷)의 죽은 귀신.
  • [註 575]
    강후(康侯) : 나라를 안정시킨 제후(諸侯).
  • [註 576]
    탁지(度支) : 호조(戶曹).
  • [註 577]
    청궁(靑宮) : 동궁(東宮).
  • [註 578]
    직려(直廬) : 숙직하는 방.
  • [註 579]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580]
    천구(天狗) : 하늘의 별. 유성(流星).
  • [註 581]
    원로(鴛鷺) : 벼슬길.
  • [註 582]
    사륜(絲綸) : 임금의 말씀.
  • [註 583]
    추부(秋部) : 형조(刑曹).
  • [註 584]
    평반(平反) : 소송 사건을 재조사하여 공평하게 하는 것.
  • [註 585]
    효광(梟獷) : 효경(梟獍).
  • [註 586]
    경조(京兆) : 한성부.
  • [註 587]
    간주(簡注) : 사람을 가리어 임명함.
  • [註 588]
    박부(剝膚) : 벗겨진 살갗, 재앙이 가까이 미침.
  • [註 589]
    병봉(荓蜂) : 악(惡)에 끌려 들어감.
  • [註 590]
    건건(謇謇) : 바른말 하는 모양.
  • [註 591]
    영왕(寧王) : 세조(世祖).
  • [註 592]
    십전(十全) : 병을 완전히 고침.
  • [註 593]
    삼절(三折)의 양의(良醫) : 세 번 다리를 부러뜨려 보아야 양의인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임.
  • [註 594]
    비궁(匪躬) :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음.
  • [註 595]
    한원(翰垣) : 홍문관(弘文館). 여기서는 춘추관(春秋館).
  • [註 596]
    형구(亨衢) : 국운이 형통함.
  • [註 597]
    급급(岌岌) : 몹시 위급한 형세.
  • [註 598]
    정격(霆擊) : 벼락이 침.
  • [註 599]
    운확(隕穫) : 마음대로 되지 않아 괴로움.
  • [註 600]
    황문(黃門) : 내시(內侍).
  • [註 601]
    품기(稟氣) : 타고난 기질.
  • [註 602]
    영문(令聞) : 아름다운 명예.
  • [註 603]
    종예(終譽) : 마지막 명예.

○癸卯/上御慶會樓下, 頒敎于翊戴功臣, 仍賜酒。 上還內, 令宦官田畇, 齎宮醞饋之。 又命者乙山君 【今上諱。】 齎梨花酒一壜賜之。 敎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資憲大夫武靈君 柳子光曰:

皇天眷命, 永保無疆之基; 誼士翊扶, 克建不世之績。 歲寒知松栢之操, 時危識英雄之才。 功不能忘, 賞豈敢後? 卿山河壯氣, 文武全才。 夙負豪宕之資, 常慕磊落之行。 雖景略尙屈於捫蝨, 而寗戚終伸於飯牛。 當皇考之季年, 有北門之巨賊, 至徵兵於諸道, 竟勞師於累旬。 卿始聞變而奮袂, 遂杖策而瀝肝。 朝拜書於虎關, 夕召對於鳳殿, 奇謀允協於聖算, 驍勇果售於戰場。 旋奉睿謀, 又指虜域, 直探巨酋之穴, 獨擅飛將之名。 非惟洗祖宗之羞, 抑亦雪朝廷之恥。 不出數月之內, 再立萬世之功, 睿眷特加, 名位愈顯。 俄擢魁於庭試, 乃參政於夏官。 傾朝服絶倫之材, 皇考喜命世之遇。 顧以眇末, 遭家愍凶, 奄襲基圖, 罔堪負荷。 不意奸兇之輩, 陰懷反側之心, 黨援根據而不知, 禍機垂發而不悟。 幸賴天地之默佑, 重荷祖宗之冥扶。 卿乃先識之陰謀, 奔告于我, 克明之反狀, 使伏其辜, 扞寡昧於艱難之中, 保宗社於危疑之際。 昔卿兄筽城君, 旣贊皇考, 能成靖難之功, 卿今又護寡躬, 特樹翊戴之績。 念我父子之相繼, 惟卿兄弟之是憑, 欲酬莫大之功, 盍擧非常之典! 肆策卿翊戴一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 超三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紀于政案曰; ‘翊戴一等功臣子光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十人、奴婢十三口、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五十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別賜奴婢七口、田五十結、表裏一套, 至可領也。 於戲! 日月星辰之昭布, 敢忘茂勳; 山河帶礪之綿長, 共保苗裔。

敎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高靈君兼春秋館領事禮曹判書申叔舟曰:

自古大臣, 當國家閑暇之時, 能賛襄調爕者, 世固不乏。 至於危疑之際, 運籌決策, 勘定禍亂, 立不世之奇功者, 蓋絶無而僅有焉。 惟卿氣分光岳, 間世而生。 以雄偉渾厚之量, 文章經濟之才, 早遇我先王, 譬之管仲父, 言聽計從。 汝翼汝爲, 入相出將, 贊成十四年太平之治。 逮予承緖, 煢煢在疚, 不意不逞之徒, 欺我沖藐, 潛謀不軌。 卿與二三元老, 奮發忠義, 協謀剗除, 弘濟于艱難。 是雖天地祖宗默佑之力, 亦惟卿等竭忠夾輔是賴。 嗚呼! 不有社稷之臣, 危而扶顚而持, 國家其能國家乎? 卿左右先王, 再靖大難, 又翊我沖人, 式保令休, 厥有成績, 在我王室, 萬世永賴。 肆策卿爲翊戴一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三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一等功臣叔舟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十人、奴婢十三口、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五十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撑天貫日之忠, 旣夷險而不變; 礪山帶河之誓, 宜終始之益堅。

敎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上黨君 韓明澮曰:

疾風不凋, 節獨高於松栢; 巨川利涉, 功實資於舟梁。 若稽彝章, 庸擧褒律? 卿秉心忠朴, 蘊氣沈雄。 胸襟韜略之奇, 被服詩書之雅。 夙擬仲父一匡之迹, 竟蒙先主三顧之榮。 手挽天河, 滌盪奸兇之穢; 親扶日轂, 旋轉光霽之辰。 念我寧王, 嘉乃丕績, 盟旣共於靖難, 勳更策於佐時。 堂堂社稷之良, 揭揭旂常之烈。 進登廊廟, 調鼎之望已隆; 出臨藩維, 分閫之委益重。 凡經營告成之業, 皆奔走禦侮之勤。 自在春宮, 舊欽風裁。 乃者閔予在疚, 屬時多虞。 蠢爾不軌之徒, 幸玆靡堪之會, 黨比輦轂之下, 禍迫蕭墻之間。 卿以椒闈之親, 茂陵之舊, 聞變而痛極入髓, 奮義而誠切捐軀。 從容克贊於謀猷, 坐敵所愾; 左右尤善於調護, 是捍我艱。 旣先事而芟夷, 不崇朝而寧濟。 昔保衡而同德, 果劉氏而乃安。 盍頒申命之恩, 用答世篤之義? 肆策卿爲翊戴一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三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一等功臣明澮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十人、奴婢十三名、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五十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想金石之堅如一, 永與國而咸休; 念鐵券之錫至三, 明保予以專美。

敎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資憲大夫興陽君 申雲曰:

忠義固臣子美節, 尤莫貴乎戡難扶危。 爵賞惟人主大權, 最宜先者酬功報德。 況以內庭近侍之臣, 而能立大勳, 則褒賞之典, 夫豈私恩? 惟爾立志忠純, 持身謙謹。 始事世廟及我皇考, 居中奉侍, 夙夜小心, 未嘗少懈, 履事精敏, 一無所虧, 由是特蒙眷憐。 予在儲宮, 皇考簡爾之賢, 器爾之能, 命爾從予, 常在予左右, 出入起居, 動必相隨, 罔有過愆。 使將予命出納亦允, 爾之忠勤, 實出輩流。 乃今不弔昊天, 煢煢在疚, 負荷艱大, 罔知攸濟。 不意逆臣南怡等, 群聚不逞, 潛圖不軌, 禍機垂發, 兇謀自洩。 爾乃纔聞上變, 忠憤交激, 憤不顧身, 與一二將士, 直入賊穴, 縛渠魁而來。 於是群姦連繫, 悉伏其辜, 宗社復安, 國步永康。 念爾奔走宣力之功, 懋官懋賞, 予豈敢後? 名鍾鼎而貌丹靑, 非幸也宜也。 肆策爾爲翊戴一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三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一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十人、奴婢十三口、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五十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嘉乃丕績, 使得列於勳庸; 與國咸休, 期永孚於終始。

敎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嘉靖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淸平君 韓繼純曰:

"紀天地而爲江河, 其發源也必遠; 扶明堂而作棟樑, 惟植根之獨深。 果信心膂之英, 允紹箕裘之業。 乃祖尙敬, 嘗翊運乎太祖, 策名元勳, 積慶之餘, 益昌厥後。 卿亦年齡少, 而德器已成, 才藝多而聲華大播, 遂知遇於皇考, 早展武於亨權。 擢處喉舌之職, 出納惟虔, 每擬股肱之良, 眷倚冞重。 逮予承緖而業業, 遭家不造而惸惸。 豈意奸兇之徒, 輒懷窺覦之計? 及予聞變之夕, 適卿寓直之辰。 固知卿有緩急之才, 便命卿爲措置之略, 卿能奔走, 而擒賊首繫頸卽來, 推鞫而洞逆肝, 輸情悉伏。 掃群兇於呼吸之頃, 斡元造於指揮之餘。 奚啻永賴于王室, 抑亦增光於祖烈。 盍擧非常之典, 用酬莫大之功? 肆策卿爲翊戴一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三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一等功臣繼純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十人、奴婢十三口、丘史七名、田一百五十結、銀五十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國與同休, 庶忠貞之永篤; 世濟其美, 期帶礪而益堅。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密城君 曰:

親愛之至, 雅望允孚於維城; 扞衛于艱, 丕圖再安於盤石。 玆頒懋賞, 匪徇私恩。 予惟叔父稟性端雅, 操心淸謹。 孝順似楚王, 自由資質之美; 樂善如東平, 益加學文之功。 恒懷恭儉之心, 絶無驕盈之色。 凡所動靜, 一遵義方。 我皇考愛深至, 常居左右, 從容獻替, 裨益良多。 皇考尤加眷注, 倚任益專, 俾長都摠府, 以典兵政。 又提調文昭殿、司饔院、宗簿寺等司, 監莅惟明, 一無所缺。 衆皆敬服, 宗戚重望, 實在我叔父。 予以沖眇, 遭家不造, 叨襲艱大, 煢煢在疚, 罔知攸濟。 尙賴我叔父竭誠左右, 以補不逮。 庶率惟圖功, 保無疆之休。 不意逆臣南怡康純等, 陰聚不逞, 睥睨肘腋之間, 岌岌乎殆。 賴惟天惟祖宗曁我皇考默佑冥冥, 使其兇機未發, 逆謀自覺。 時我叔父, 聞變憤激, 怒髮衝冠, 持重兵宿衛, 扞我寡躬, 屹然有萬里長城之勢。 予得從容指授, 悉擒逆竪, 遂下群奸于獄。 予委叔父鞫理, 叔父明能照奸, 梁魁支黨, 自輸情服辜, 咸伏天討。 嗚呼! 叔父與予小子, 自是一家, 禍福榮辱, 靡不同之。 今叔父, 乃能靖大變樹大勳, 以衍榮懷之慶, 豈惟予小子德之? 祖考其必降監曰: "爾能耦我孺子, 授命一節, 弘濟于艱難。 嘉乃丕績, 貽爾遐福。" 叔父固宜龍受之。 肆予小子祗率彝章, 肆策叔父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扶日穀頓天綱, 共仰宗英之屛翰; 配河帶齊山礪, 永煥功載於麒麟。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德源君 曰:

兄弟至親, 在急難而尤重; 君臣大義, 有勳庸者當酬。 肆擧褒章, 豈徇私惠? 維卿是我同氣, 爲國維城。 早承義方, 佩正直而服忠孝; 夙知樂善, 說禮樂而敦詩書。 才不器而恢恢, 節匪躬而蹇蹇。 常念友恭之篤, 自因天性之眞。 樂且孺和且湛, 綽綽有裕; 歡相愛粲相接, 斷斷無他。 逮寡躬之紹休, 値我家之降割, 煢煢在疚, 孑孑疇依? 慨死喪之孔懷, 實休戚之與共。 不意南怡康純等, 乘我初服, 蔑我幼沖, 輒懷異圖, 潛聚不逞, 稔成肘腋之禍, 危迫呼吸之間。 予乃聞變而駭愕, 卿能協策而周旋, 扞衛寡躬, 猶手足之載捍, 戡定大難, 與國家而咸休, 言念戎功, 宜加懋賞, 奚獨示賢賢之典? 亦以明親親之恩。 故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銘鍾紀帛, 輝萼華於方來; 指山誓河, 保宗盤於永世。

敎精忠敵愾定難翊戴功臣顯祿大夫永順君 曰:

稽彝典而勸善義, 當旌其勳庸; 策殊勞而褒崇恩, 必先於貴戚。 是古今帝王之公道, 匪保護宗戚之私心。 惟卿山河間氣, 宗室英標。 幼而孤惸, 世宗因襁褓而托皇考; 長而穎異, 皇考置懷抱而體世宗。 視卿之身, 猶己之出。 親護疾於材舍, 手醮婚於邸宮, 撫育之恩極其至, 訓迪之道盡其方。 逮皇考卽位之日, 是國家中興之初, 召置宮中, 陪侍輦下。 德業日進乎崇廣, 聞見益造乎洪深。 說禮樂敦詩書, 淵源得窺於聖學, 富文辭發彩藻, 光華稍分於文章。 以至陰陽、律呂之支流, 篆、隷、算數之曲藝, 靡不通究, 咸事優游。 由是皇考, 特愛其奇才, 戚里咸推其大器。 事無輕重而竝參, 政無大小而悉任, 每稱精通之首, 偏承優渥之隆。 謂技藝可試於文衡, 與士流復較於場屋。 初騁武於文囿, 皆驚冀北空群; 再傳芳於桂林, 旋爲海東第一。 復掌遴士之試, 皆稱得人之能。 豈但宗英一時之聳觀? 實爲斯文千古之罕見。 曩者逆賊煽亂朔方, 皇考命徂征之師, 往擣兇頑之穴。 于時軍旅節制之不一, 兵謀奇正之無窮, 睿算冞深, 凡庸莫測。 卿乃侍帷幄而周旋, 參掌機要, 奉綸命而出納, 導宣謀猷, 師出萬全, 功成一掃。 皇考念卿贊籌之智, 紀卿敵愾之勳。 越戊子秋, 聖躬愆和, 醫藥難效, 卿能夙夜衣不解帶, 脅不霑牀。 勤勵之誠, 忠義之美, 惟予所嘉。 不幸皇考賓天, 寡躬嗣服。 念民巖之可畏, 思天位之惟艱。 不意奸兇稔謀, 陰譎釀禍。 狐鳴鵩吠, 潛聚類而成群; 狙詐鼠窺, 欲乘機而鼓亂。 神人共憤, 天地不容, 遂使兇謀, 自底敗露。 適予聞變之夕, 寔卿直宿之時。 扞衛寡躬, 忠憤義勇之逸發; 擒捕賊類, 雄謀秘略之橫馳。 巨魁面縛而就擒, 餘黨膝行而繫獄。 乃命卿與叔父密城君 , 往莅獄事, 卿乃詳以卞濫, 明以照奸。 承寡命而行天誅, 逆黨甘鈇鑕之就; 體仁心而用王法, 脅從免玉石之焚。 予亦念卿措置之宜, 偉卿翊戴之力。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宥及永世。 仍賜伴人八、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皇考旣視卿如父子, 令參敵愾之盟, 逮至寡人, 復齒卿以弟兄, 宜預翊戴之列。 懿彼骨肉之美, 再登盟載之書。 予之子予之孫, 敢忘卿功高於兩世? 卿之後卿之裔, 當體予眷隆於一時, 庶幾匹休於王家, 終能傳美於後世。 河如帶山如礪, 念盟辭而益虔; 券以鐵書以丹, 質神明而無愧。

敎精忠出氣布義敵愾保社定難翊戴功臣顯祿大夫龜城君 曰:

當夷險而一節, 在大臣則固然; 共休戚而相扶, 爲同姓者益切。 自古定難之際, 必賴懿親之功。 剪三監, 姬公躬徂征之擧; 平諸, 劉章力芟除之謀。 義自協於古今, 績奚異於前後? 惟卿命世之智、出倫之才, 藝同妙, 穿楊葉於百步; 學邁奇, 蘊龍韜於一心。 肆皇考特紆眷憐, 比諸姪實殊恩數, 常置左右, 參奉謀猷。 出納效惟允之能, 對揚多將順之美。 龜之錫譽, 內宗外朝之足聞。 試參登俊之科, 諸彦皆自屈膝。 果揚兼人之武, 老將亦竝藏鋒。 注倚益隆, 華問大播。 越丁亥夏, 逆賊李施愛, 竊據北境, 誑誘愚民。 指嗾腹心, 獮薙列邑之守宰; 羅絡親黨, 阻絶一路之關防。 借助訓以爲名, 潛搆禍而煽亂。 衆悉眩於去就, 勢已至於蒼黃, 爰軫北顧之憂, 方咨三略之畫, 示彼順逆。 當遣一介王室之英, 選我宗親, 卽除四道都摠之使, 崇以登壇之禮, 委以杖鉞之權。 卿乃聞命, 忘家嚙指啓路, 擬賊穴之經擣, 向北方而迅征。 方耀兵於咸興城, 脅從之迷心始悟; 逮決戰於居山柵, 逆竪之驚魂已飛。 破竹之勢倐成, 首鼠之徒悉伏。 竟致渠魁於麾下, 迺磔兇屍於轅門。 三軍之宿憤快紓, 百里之妖氛頓息。 是雖睿算之獨斷, 亦應卿策之與能。 捷音交騰, 宸心大悅, 親賜手札, 宣示軍門。 諭以竉子之榮, 譬諸髻珠之寶。 凱還卽日, 大策元勳, 魁盟府而冠巖廊, 異名班於庶宷。 位冡宰而兼摠管, 萃將相於一身。 皇考之寵卿旣深, 寡人之愛卿曷已? 越戊子秋, 昊穹降割, 眞馭陟遐, 顧國家之多艱, 罔津涉之攸濟。 不意逆臣南怡康純等, 遽乘厄會, 妄談天文, 窺覦我家, 睥睨神器。 黨援潛結, 罪貫已盈, 昊天上帝之孔昭, 詎容賊竪於覆載? 七廟列聖之陰佑, 竟使兇謀之敗宣。 屬告變之纔聞, 命召卿而捍衛, 卿能杖劍叱咜, 肅虎旅於禁中, 提兵指揮, 捕逆賊於闕外。 當是時, 予倚卿如維城之固, 卿翊我効扶日之功, 俄使群奸, 盡就顯戮。 更念翊戴之力, 盍懋褒美之恩?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親伯仲而義君臣, 旣忠貞之世篤; 贊皇考而翊寡昧, 況勳業之再隆? 接兩世而樹功, 閱千古而罕儷。 國永存及苗裔, 講舊章而申盟; 名不朽上凌烟, 窮後世以耀績。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靑松君 沈澮曰:

捍衛艱難, 錫鬯卣之命; 經綸草昧, 加茅土之封。 所以答勳勞於當日, 同安享於後昆者也。 予以幼沖, 遭家不造, 叨襲靈圖, 惸惸未堪。 卿以先王元舅之尊, 居具瞻之地, 身佩安危, 與同休戚。 予之倚卿, 旣以比柱石, 卿之相予, 不啻如腹心。 乃者逆臣康純南怡等, 蔑我幼年, 乘我初服, 潛懷不軌, 禍機垂發。 卿能憤激忠義, 籌畫周旋, 旋卽戡定。 嗚呼! 不有社稷之臣, 危而扶顚而持, 國家其能爲國家乎? 卿能一心一德, 弘濟于艱, 式保今休, 其隆功偉績, 足以追配古人, 褒賞之典, 予其敢稽?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紀功行賞, 予實遵於往規; 傳子及孫, 卿宜享於永世。

敎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禮曹判書延城君 朴元亨曰:

"姬公家, 成王頒啓宇之寵; 子房室, 高帝錫封留之榮。 有功必賞, 無德不酬。 惟卿沈雄寬厚, 忠直通明。 早捷世宗親策之科, 始恣騰於鵬路; 佐翊皇考再造之運, 益深紆於龍光。 代喉舌而出納詳, 秉銓衡而用舍當。 常兼宗伯之任, 一代之三禮克明; 屢分體察之憂, 九重之四聽方達。 使乎爭稱其專對, 國耳咸嘆其獨賢。 試二調於鹽梅, 衆喜允合乎台鼎; 領具瞻於槐棘, 共願久贊乎經綸。 猥以寡昧之資, 奄承艱大之緖, 豈意不軌之輩, 乃乘靡堪之機? 禍已迫於磨牙, 勢誠危於累卵。 天惟純佑, 賊自洩謀, 神亦與能, 卿乃赴召。 忘身舍命, 忠憤交激於胸中; 畫策從容, 姦兇悉制於手下。 惡旣滔天而自殄, 慝不崇朝而旋消。 念予保無疆之休, 繄卿樹非常之績。 遭震撼而鎭定, 隱若長城; 遇盤錯而解紓, 恢乎游刃。 之功之德, 卿固無讓於姬公子房; 其報其酬, 予豈敢後於成王高帝?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元亨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口、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歷累世爲舊勳, 旣匹鴻休於宗祊; 及苗裔篤忠貞, 共享申命於帶礪。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綏祿大夫河成君 鄭顯祖曰:

天生英才, 固欲托社稷之重; 國有賞典, 將以待勳業之隆。 才不虛生, 賞豈妄與? 苟社稷之是悅, 則勳業之莫高。 惟卿鸞峙英標, 蟬聯華冑。 聰明特達, 幼慣詩禮之傳; 謙恭自持, 絶無紈綺之習。 特被貳室之選, 親炙六藝而通。 學旣極其淹該, 識彌造乎精密。 是能明體而適用, 便可尊主而庇民。 我皇考器其多能, 試之戰藝。 卿果賈勇而騁雄翰, 先登而捷巍科。 冀北群空, 克紹箕裘之業; 斗南名峻, 更揚奎壁之輝。 皇考眷愛尤篤, 倚任益專。 居左右而奉絲綸, 出納惟允; 通內外而明獻替, 夙夜乃虔。 以肺腑之親, 兼喉舌之任, 古罕其儷, 今見於卿。 昔在儲邸, 偶嬰微痾, 卿乃承命, 而朝夕與居, 盡心而始終調護。 卿之雅志, 予固深嘉。 頃者昊天降割而不延, 眇躬承緖而罔措, 煢煢在疚, 戰戰臨深。 不意逆臣康純南怡等, 潛懷異心, 交結不逞。 睥睨己群於肘腋之下, 扶佑實賴乎祖宗之靈。 乃禍機靡搖, 致逆狀自露。 卿於是時, 忠肝輪囷, 命不恤舍, 計議密勿, 事無失幾。 周旋倉卒之中, 捍衛臲卼之際。 式保今休, 寔仗卿力。 予念卿父河東君, 旣佐世宗, 黼黻太平, 又贊皇考, 經綸再造。 且至今日, 卿與乃翁, 協贊謀猷, 再安宗祏。 噫! 君臣同體而難遇, 父子一心之尤稀。 扶龍馭於危途, 才不世者繼世; 奠鴻基於盤石, 命有常于靡常。 恩豈私於褒嘉? 義當殊其崇報。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鄭顯祖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口、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河如帶山如礪, 誓同休共戚於子孫; 旱作霖川作舟, 期善始令終於家國。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中義大夫居平君兼司僕將曰:

危能盡節, 旣立非常之功; 賞不踰時, 盍擧褒崇之典? 惟卿風猷凝俊, 器宇宏深。 乃以宗室之親, 夙有維城之望, 處事明敏, 才堪大用。 我皇考深器之, 恩遇有加, 或典禁兵, 或委邊閫, 所居稱職, 蔚有令聞。 逮予小子, 遭家不造, 煢煢在疚。 不意奸臣, 聚不逞圖不軌, 睥睨肘腋之間, 幸賴義士先知, 陰謀盡露。 卿於是時, 持重兵在側, 聞變激烈, 奮不顧身, 與一二忠義之士, 擒致奸黨, 悉伏其辜。 是雖天地祖宗默佑, 亦賴卿處置得宜, 機事不失之致然也。 予固已念卿肺腑之親, 嘉卿股肱之良, 倚任不爲不專, 眷遇不爲不深。 玆値倉卒之際, 卿果能一德一心, 弘濟我艱難, 式保今休, 褒賞之典, 予其敢後?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口、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刑牲相誓, 儼天日之載臨; 與國咸休, 媲山河以永享。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行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廣川君 李克增曰:

自古戡定禍亂, 未必皆武夫。 故 留侯, 有儒者氣象, 而高帝稱: "運籌吾不如也。" 予今於卿見之矣。 卿門地淸流, 國士風烈, 兄弟五人, 皆業學爲文章取科第, 珪組蟬聯。 兄二人, 佐翼我皇考, 蔚爲勳臣, 卿又知遇皇考, 入銀臺爲喉舌, 出納明命惟允。 迨天降割, 我家未堪多難, 俄有孽牙其間。 逆臣康純等, 潛結徒黨, 稔惡滔天, 而兇謀竟自洩。 予煢煢孤立, 危甚累卵矣。 卿時直宿禁內, 曁乃僚同心力, 捍衛我左右, 處置得宜。 盡捕群兇以來, 予委卿與諸卿等雜鞫之, 卿明辨發摘如神, 故賊徒無所遁情, 咸服其辜。 念玆戡定之績, 獨能捍衛于艱。 危而扶顚而持, 實手足於頭目; 智不惑勇不懼, 豈?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克增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高帝留侯帷幄謀臣, 旣剗群雄定天下, 其刻符作誓曰: "泰山若礪, 爰及苗裔。" 卿爲我內臣, 剪群兇扶社稷, 故予以高祖所以誓留侯者誓卿, 卿其以之毋忽。

敎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竹城君 朴之蕃曰:

戡難効忠, 惟臣子之至節; 紀功行賞, 乃國家之良規。 豈以私恩? 實惟公義。 卿稟性通毅, 秉心忠良; 知能達變, 材堪禦侮。 早擢武擧, 恒赴戎行, 從鎭關西, 敵愾嶺州。 蔚有聲名, 冠于羽林, 可謂國家之干城, 公侯之腹心矣。 日者逆臣南怡康純, 陰結不逞, 潛圖不軌, 禍機垂發, 逆謀自洩。 卿聞變奮激, 義氣橫發, 直入虎穴, 手搏元兇。 於是餘黨束手, 悉伏其辜。 宗祊再安, 國步永康, 予嘉乃勳, 曰篤不忘。 肆策卿爲翊戴二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二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二等功臣之蕃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八人、奴婢十口、丘史五名、田一百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丹書鐵券, 旣丕視其戎功; 礪山帶河, 期永保於後裔。

敎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河東君 鄭麟趾曰:

危而扶顚而持, 實賴社稷之良弼; 德懋官功懋賞, 庸答國家之元勳。 式稽彝章, 載揚褒律。 惟卿乾坤間氣, 光岳英靈。 學究天人, 再冠明庭之試; 才優經術, 大展平生之懷。 歷事累朝, 特被殊眷。 垂紳正笏立朝著, 將六十年; 諤言讜論補袞職, 難一二計。 具瞻巖廊之步, 兩策麟閣之勳。 道德可方之古人, 事業無出其右者。 眇予沖質, 叨襲丕基, 圖任惟在舊人, 典刑實在壽俊。 日者逆臣南怡等, 圖危神器, 禍迫堅氷。 予方聞變而戒心, 卿能決策而定難, 安國步於盤石, 鎭人心於泰山。 有德有功有能, 壯我家元氣者誰也? 令譽令聞令望, 冠當時耆舊者公歟! 是用深嘉, 遂擧丕視。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麟趾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弼亮四世, 卿克邁畢公之忠; 帶礪千秋, 予敢忘 之誓?

敎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蓬原君 鄭昌孫曰:

協策戢難, 必資命世之元勳; 推恩賞功, 實出有國之公義。 此帝王之令典, 而古今之通規。 惟卿淸介無華, 端方有守。 學透聖賢之深奧, 望重經濟之宏才。 前後歷仕於三朝, 終始不渝於一節。 磊落丈夫之事業, (蹇)〔謇〕 諤大臣之風猷。 嘗覆甌於昭考而奮庸, 功高佐翼, 再領袖於黃扉, 而論道業懋經綸。 偉績炳於丹書, 芳名冠於靑史。 顧以眇質, 叨襲洪基, 煢煢在疚之中, 業業馭朽之際, 豈意賊臣南怡康純等, 陰結不逞而狙獷, 妄圖非分而鼠窺? 賴神鑑之協扶, 致兇謀之旋露。 惟明公獨能決其石畫, 故逆竪悉莫逭於天誅。 盍策烟閣之殊勳, 用旌雲臺之良相?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昌孫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二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忠在社稷, 旣佩安危于一身; 誓指山河, 益共休戚於萬世。

敎推忠佐翼出氣布義敵愾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昌寧君兼戶曹判書曺錫文曰:

天扶景運, 必藉豪傑之才; 國有元勳, 宜擧褒賞之典。 豈私是徇? 以公則然。 惟卿毓秀乾坤, 鍾英光岳。 氣度豪邁, 材識精通。 早游賢關, 雅懷經綸之志; 俄捷巍第, 果擅縉紳之名。 遂遇知於英陵, 而歷事於顯廟。 逮昭考之御極, 眷特偏於龍喉, 列佐翼之策勳, 名轉崇於麟閣。 判度支而經費裕, 入廊廟而訏謀宣。 或杖節而宣力四方, 或登壇而敵愾千里。 望隆將相, 身佩安危。 及予嗣圖, 遭家降割, 豈意不逞之輩, 輒懷非分之心? 從容畫籌, 不勞卒之擒; 協力翊戴, 奚啻絳侯之安? 奸兇旋除, 宗社底定。 眷言功德之懋, 盍示酬報之隆? 匪今斯今, 以德報德。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錫文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予嘉卿作股肱耳目, 期匹休於無疆; 卿體予敷心腹腎腸, 益輸忠於有永。

敎推忠定難翊戴功臣輔國崇祿大夫淸川君五衛都摠府都摠管韓伯倫曰:

褒有德賞有功, 乃古今之通義也。 予以幼沖, 遭家不造, 煢煢在疚, 不意康純南怡等, 潛圖不軌, 禍機在於呼吸, 賴天地祖宗之默祐, 兇謀自洩。 卿於是時, 摠管禁兵, 聞變而起, 奔走宣力, 克剪兇渠。 嗚呼! 予之倚卿愈深, 卿之衛我愈愼, 固已嘉焉。 況當危迫之辰, 克奮忠貞之節, 舍命不渝, 捍衛寡躬, 式保今休。 念卿之勞, 紀卿之勳, 褒賞之典, 實出公義, 予其敢稽?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伯倫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股肱心膂之資, 旣與同乎休戚; 山河帶礪之誓, 宜益堅於始終。

敎推忠定難翊戴功臣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經筵春秋館知事弘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宣城君 盧思愼曰:

忠臣特立, 隱若虎豹之在山; 大憝廓淸, 快於鷹鸇之逐雀。 爰擧策勳之典, 庸示簡勞之恩。 卿生長相門, 秀拔戚里。 射策奏三捷之勇, 博古號五摠之神。 特被昭考之知, 每賜康侯之接。 含香出納, 端合喉舌之臣; 前席論思, 允謂腹心之佐。 委已隆於摠管, 任亦重於度支。 自在靑宮之初, 雅識明堂之器。 屬者昊穹降割, 聖體乖和, 卿乃達曙無眠, 常侍護於左右。 累月不懈, 詎違離於斯須? 猥以沖資, 遽承丕緖, 乃遭家之不造, 而多難之靡堪, 逆儔相煽於蕭墻, 禍機殆迫於昕夕。 幸祖宗之默祐, 而忠義之旋知。 卿在直廬, 蚤聞急變。 區畫幾事, 贊廟謨於從容; 部分禁兵, 獲兇渠於指顧。 乾坤爲之整頓, 廟社於焉尊安。 載惟膚功, 盍用嘉錫?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思愼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皇天后土, 實鑑帶礪之盟; 大旱巨川, 更堅金石之操。

敎精忠出氣布義敵愾定難翊戴功臣正憲大夫兵曹判書朴仲善曰:

蓋聞遇急遽倉卒之變, 弘濟須仗於雄才; 立光明雋偉之功, 懋賞必加於異等。 惟卿戚里之秀, 衣冠之裔, 稟性溫良, 持身端謹, 又精於射藝, 魁中武擧, 蔚有名稱。 歲丁亥兇渠犯順於朔方, 命諸將殄滅無遺, 而卿之功與有多焉。 先王嘉其丕績, 擢長兵部, 賜勳敵愾以褒美之。 頃予遭家不造, 賊臣南怡等, 蔑我幼沖, 潛懷不軌, 禍機垂發。 卿典禁兵, 聞變而赴, 左右宣力, 克靖大難, 使宗社復安。 數年之間, 再立大功, 是天假卿以扶翼我家也。 噫! 非卿所蘊之忠、所懷之略, 予末小子, 安能弘濟艱難, 式保今休乎? 若稽典故, 乃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仲善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名、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丹書、白馬, 期永保乎一心; 黃河泰山, 誓不忘於萬世。

敎推忠定難翊戴功臣正憲大夫中樞府知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春秋館同知事益城君 洪應曰:

風虎相從, 固知非常之佐; 天狗迅掃, 況建不世之勳? 苟嗇旌酬, 曷表英雋? 惟卿襟度明敏, 操履端方。 學窮五車, 深得淵源之正; 識通萬務, 雅存經濟之懷。 早魁賢科, 大播華聞。 翹英鴛鷺, 翺翔近侍之聯; 掌演絲綸, 壓倒老成之輩。 特紆昭考之眷遇, 恒對顧問於燕閑。 獻替切焉, 裨益多矣。 擢銀臺而代喉舌, 出納克明; 托穠李而爲腹心, 夙夜彌謹。 貳天官而士慕淸澹, 長秋部而人服平反。 方寡昧之在儲, 惟輔導之是任, 非惟居養見聞之益, 抑亦左右調護之勤。 嘉乃德而久已傾心, 苟有事則將誰注意? 屬者南怡康純等, 乘我初服, 稔其兇謀, 禍媒已遍於爪牙, 危機殆間於毫髮。 賴神扶之陰祐, 致姦狀之露宣。 卿乃從容叶贊而籌畫如神, 承命訊鞫而輸伏不暇。 盪氛妖於俄頃, 鞏皇圖於緜長。 載念功績之隆, 敢稽褒賞之懋?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地有維天有柱, 旣佩社稷安危於一身; 川作舟旱作霖, 益念國家休戚於萬世。 爰及苗裔, 勿替箕裘。

敎精忠靖難定難翊戴功臣資憲大夫信川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康袞曰:

有功有德, 能爲社稷之重臣; 懋賞懋官, 宜擧國家之彝典。 是出公議, 匪由私恩。 惟卿性本端雅, 志尙忠直。 知足經遠, 才足禦侮, 德器老成, 有古良將之風。 早被我皇考知遇, 從行朝京, 負紲萬里, 不憚勞勤。 及靖夷大難之日, 又能奮發忠義, 協謀宣力, 贊樹鴻業。 皇考深加器重, 倚爲干城, 俾都摠戎政, 常居左右。 予小子纉承丕緖, 遭家不造, 尙賴我勳舊之臣, 佛時仔肩。 頃者逆臣南怡等, 潛懷異心, 謀危宗社, 禍機斯迫。 卿於是時, 握重兵宿衛, 鎭定人心, 旋除姦兇, 宗社賴以乂安。 予懋乃德, 嘉乃丕績, 眷言顧之, 曰篤不忘。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刑白馬而同盟, 旣在上在旁之共鑑; 帶黃河以相否, 庶傳子傳孫而匹休。

敎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正憲大夫巴山君兼內禁衛將趙得琳曰:

蓋聞王者膺圖, 摠覽權綱, 駕馭豪雄, 有勞必旌, 有功必賞, 此古今不易之典也。 惟卿稟性端直, 操心恭謹。 我皇考之在潛邸, 庶事方殷, 夙夜未遑。 卿於是時, 常在左右, 奔走服勞, 未嘗少懈。 年雖少而材器老成, 英邁過人, 動無差失。 皇考深器之, 常比之股肱耳目, 或侍從中原間關之行, 或協贊大難靖夷之擧, 能夷險一節, 舍命不渝, 勳固不細。 及旣龍飛九五, 化家爲國, 錄勳佐翼, 名位俱顯。 卿愈謙卑小心, 執事有恪。 及其售武藝捷嵬科, 皇考尤加眷注, 俾兼內乘, 常侍禁闥。 予在儲闈, 出入相隨, 卿之忠勤, 予固嘉尙。 及皇考違豫, 彌留數旬, 卿日夜侍側, 護衛惟謹, 未嘗解帶。 不弔皇天降割, 遭家不造, 予方煢煢, 罔堪負荷。 不意逆臣南怡康純等, 乘我初服, 利我沖眇, 潛圖不軌, 變在朝夕。 幸賴天地祖宗之佑, 兇謀輒露, 卿能將率禁軍, 扞衛寡躬, 不離左右。 旋殄逆徒, 再安宗社。 念卿之勞之功之懋, 可稽旌賞?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得琳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臣哉隣哉, 予敢忘貫日之悃; 國耳公耳, 卿益體帶河之盟。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兵曹參判兼藝文館提學居昌君 愼承善曰:

同心同德, 旣勳業之獨高; 懋賞懋官, 宜竉恩之特異。 豈一人之私惠? 實萬世之通規。 惟卿性資端方, 操履醇謹, 學乃明體而適用, 藝自含英而咀華。 決科遂冠於大庭, 筮仕已鳴於昭代, 裒然揚歷, 蔚乎聲名, 且聯宗姻, 尤荷眷注。 貳兵部而董戎政, 兼藝苑而佐文衡。 逮予丕承, 倚卿冞篤, 方遭家之覯閔, 孰佛時之仔肩? 不意姦臣南怡等, 潛畜異心, 將危神器, 計已成於肘腋, 禍垂發於蕭墻, 賴上帝陰褫其魂, 俾群兇自露其迹。 纔聞上變, 先召近臣, 卿於是時, 直宿禁內。 忠誠憤發, 能激將士之心; 籌畫從容, 悉擒梟獷之類。 呼吸之頃, 氛沴則銷。 旣弘濟于艱難, 盍丕視其功載?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功臣三等承善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疾風勁草, 嘉乃績而篤不忘; 鐵券丹書, 體予心而永勿替。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弘文館直提學尙瑞院正花川君 權瑊曰:

命汝納言, 允倚應期之良弼; 扞我戡難, 況樹蓋世之殊勳? 盍擧旌褒, 用懋酬報? 惟卿秉性忠直, 操心溫純。 識見該通, 早服詩書之訓; 志氣遠大, 素蘊經濟之才。 登仕版而同僚讓能, 參京兆而訟輩請借。 遂遇知於昭考, 乃特紆於眷憐, 俄擢長于銀臺, 出納惟允, 每昵承于綸音, 啓沃弘多。 簡注尤深, 倚任益篤。 逮予在疚, 仍卿代言。 有嘉謀嘉猷而必陳, 比之藥石; 惟一德一節而相輔, 擬諸腹心。 不意爪牙之臣, 陰構肘腋之變, 勢已成於累卵, 禍不啻於剝膚。 幸賴天意誘衷, 星文示戒, 逆雖秘其詭迹, 賊自洩其兇謀。 予方聞變而戒心, 卿惟奮忠而協策, 捕之急悉繫其黨, 鞫之明盡輸其情。 殄梟醜於從容, 坐掃滔天之祲。 扶鴻祚於臲卼, 立成洗日之功。 論賞典而誰先, 擧彝章而敢後?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爲手足而衛頭目, 予旣銘彝鼎而不忘; 作股肱而柱國家, 卿益期帶礪而勿替。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行承政院右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咸從君 魚世謙曰:

出納惟允, 久依夙夜之賢; 扞衛于難, 益加股肱之美。 玆懋賞典, 用昭宗功。 惟卿器宇宏深, 襟期磊落。 早聞詩禮之訓, 忠孝傳芳; 素蘊經濟之才, 文章餘事。 遂知遇於皇考, 乃騰揚於華聯, 歷試才能, 良深簡注。 繼爾弟居喉舌之任, 復掌絲綸; 曁乃翁爲羽翼之良, 競進藥石。 逮予承緖, 仍卿納言。 非仁義不陳, 夙聞其語; 有謀猷必告, 今見斯人。 庶資夾輔之誠, 共保艱大之業。 頃者賊臣南怡等, 久蓄異心, 廣植兇徒, 禍胎豈由荓蜂, 危機不啻騎虎。 奸謀自洩, 賴神明之陰扶; 逆竪俄殲, 杖忠義之協贊。 卿能緩急不惑, 處置得宜。 淸大憝於斯須, 鞏丕基於杌隉。 夷險一節, 眞可謂公侯之腹心; 休戚與同, 豈非國家之柱石? 予嘉乃德, 曰篤不忘。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功臣三等世謙之後。’ 雖有犯罪,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丹書鐵券, 期永傳於子孫; 帶河礪山, 庶不渝於終始。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行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鈴平君 尹繼謙曰:

人臣盡忠効節, 在險夷而不渝; 王者崇德報功, 豈親疎之有間? 玆擧懋典, 用答殊勳。 惟卿性資端純, 志氣通敏。 早服家庭之訓, 業能繼乎箕裘; 夙騰朝著之名, 器自別於盤錯。 特紆皇考之眷, 昵居近侍之聯。 豈啻肺腑之親? 溫溫惟德; 誠宜喉舌之任, 謇謇匪躬。 逮予丕承, 倚卿尤篤。 出納惟允, 更殫夙夜之勤; 謀猷必陳, 益竭引翼之力。 頃者逆臣南怡等, 陰結不逞, 潛懷異圖, 禍將迫於轉眸, 勢已危於累卵。 賴神明之默佑, 仗忠義之先知, 兇機未成, 逆謀自洩。 予聞變而驚惕, 卿協策而周旋, 措置動中其幾, 捕鞫悉抵於法。 遭不測之大變, 卿獨多扞衛之勞, 保無疆之洪休, 予敢忘戡定之績?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繼謙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建殊勳於倉卒, 旣勁草乎疾風; 期匹休于靈長, 庶河帶而山礪。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靖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雞林君 鄭孝常曰:

負非常之器, 必建不世之功; 建不世之功, 宜享非常之竉。 玆施懋賞, 庶報殊勳。 惟卿以敦撲俊偉之資, 加精深博洽之學。 妙藝雄詞之獨高, 早冠千錢之選; 英聲茂實之相副, 宜擅一代之鳴。 歷敭侍從之聯, 頗隆公輔之望。 予在儲第而方學, 卿爲僚友而始親。 輔導務緝于光明, 必闢聖賢之閫奧; 居養要期於遠大, 常講皇王之經綸。 屬當負荷之初, 授以喉舌之任, 嘉出納之惟允, 分猷念以相從。 不意逆臣南怡康純等, 乘我倉怳宅憂, 蔑我幼沖嗣服, 陰蓄不軌之志, 敢構非分之謀。 兇竪盤據而不知, 禍機垂發而莫悟。 幸賴列聖之陰佑, 我聞義士之露言。 盡獲奸徒, 竟伏明典。 卿於是時, 周旋竭力, 密贊機宜之謨; 左右協忠, 克著扞衛之績。 苟微非常之器, 詎成不世之功? 功旣殊焉, 賞宜厚耳。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孝常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山河爲誓, 予期與國家而咸休; 麟麒有閣, 卿益勵始終而一節。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原城君 安仲敬曰:

竭誠盡忠, 惟臣子之大義; 旌功行賞, 乃國家之恒規。 式稽彝章, 用崇褒典。 惟爾操行端謹, 處事安詳。 曰自弱歲, 居中奉侍, 小心翼翼, 夙夜不懈。 我皇考深加眷憐, 常置左右, 出納明命, 愈久愈謹。 爾之忠勤, 固足嘉尙。 予承丕緖, 造家不造, 惸惸在疚。 不意逆臣南怡康純等, 潛懷異心, 群聚不逞, 圖危神器。 禍機垂發, 兇謀自露。 爾時在我左右, 纔聞變告, 憤激忠誠, 奉我籌畫, 出入應對。 雖在急遽倉卒之間, 能不失機, 宜俄獲兇黨, 咸伏鈇鑕。 淸覆載之大憝, 快神人之共憤。 是雖祖宗默佑之力、宗戚大臣協扶之功, 亦惟爾內近之臣, 奔走扞衛之勤是賴。 念爾之勞, 紀爾之勳, 褒賞之懋, 豈私恩也?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仲敬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鼎勒鍾銘, 爾永堅今日之志; 山礪河帶, 予敢忘此時之心?"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玄福君 權攅曰:

竭節輸忠, 旣樹莫大之美績; 旌能行賞, 宜加不貲之殊恩。 此萬世之恒規, 匪一時之私擧。 惟爾稟資英敏, 處事精詳。 早遊賢關, 擢登司馬之試; 博通群籍, 深硏扁鵲之方。 遂遇知於寧王, 常昵侍乎禁掖, 益勵勤謹而匪懈, 恒承顧問而不違。 節宣或乖, 輒効十全之術; 緩急可倚, 奚啻三折之良? 故睿眷之特紆, 歷華班而驟擢。 竟侍大漸者累朔, 獨苦心於護調, 何嘗暫離乎須臾? 每診候而憂悴。 乃遭家之不造, 遽倚廬而無聊。 念予艱大之難堪, 怵惕惟厲。 命汝左右以承弼, 裨益弘多。 不意逆臣南怡康純等, 希非分而覬覦, 潛皷剝膚之毒吻, 聚不逞而構結, 已迫累卵之危機。 賴上帝陰誘其衷, 致群姦自露厥狀。 爾能駿奔, 密贊於謀畫; 彼悉狼跋, 旋就乎擒誅。 爰命戎功, 敢稽懋賞?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指山河誓終始, 旣已期於永世; 與國家同休戚, 罔或渝於一心。

敎推忠定難翊戴功臣奉直郞行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趙益貞曰:

閔予在疚, 遽遭不測之憂; 捍我于艱, 克効匪躬之節。 盍擧懋賞之典, 用酬戡難之功? 惟爾性度淵純, 操履勤儉。 夙有倜儻之大志, 早登科第而歷揚。 記事翰垣, 秉陽秋之直筆, 注書政院, 佐出納而演綸。 可使展闊步於亨衢, 固已別利器於錯節。 屬者逆臣南怡康純等, 潛畜異志, 大稔兇謀, 禍殆岌乎, 變垂煽矣。 賴列聖之默佑, 荷上天之陰扶, 姦狀自昭。 義士上變, 爾能周旋, 不失其機會, 奔走善承乎策籌, 兇徒旋伏於天誅, 逆沴尋盪於霆擊。 患旣易平, 勳宜亟賞。 玆惟公義, 詎乃私恩?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益貞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永念戎功, 予敢渝 之白水; 益堅素節, 爾毋忘 之丹書。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峯城君 徐敬生曰:

王者膺圖馭世, 摠攬權綱, 德懋懋官, 功懋懋賞。 此國家之常典, 古今之通誼也。 惟爾性稟穎敏, 持心純直。 予居儲位, 汝在左右, 小心趨走, 執事惟謹。 汝之忠勤, 予固嘉之。 頃者予方在疚, 逆臣南怡等, 潛懷異心, 謀危宗社, 蒙天之佑, 兇謀自敗。 爾能奮激奔走, 扞衛協贊, 俄使逆黨, 悉伏其辜。 汝功汝勞, 深足嘉尙。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敬生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疾風勁草, 旣成不朽之功; 帶河礪山, 益竭匪虧之節。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長川君 金孝江曰:

爾捍于艱, 克著忠義之篤; 予懋乃績, 盍施褒賞之隆? 是豈私乎? 自由公耳。 惟爾稟性誠勤, 持身恭謹。 小心夙夜而不懈, 執事左右而不愆, 故深加於眷憐, 常居中而奉侍。 日者逆臣南怡康純等, 將窺神器, 久稔異心, 予方在疚而莫知。 彼將先變於不測, 賴天佑之密荷, 致兇謀之自彰。 當予上變之纔聞, 惟爾中誠之憤激, 奔走倉皇之際, 翊衛隕穫之間。 遇險授命, 豈非有無之能爲; 扶顚持危, 實是緩急之可倚。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孝江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丕視功載, 旣垂令名於鼎鍾; 後調歲寒, 益堅素節於帶礪。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陜川君 李存命曰:

竭節(卽)輸忠, 旣建非常之績; 疇庸懋賞, 宜加不貲之恩。 故深乃嘉, 不忘曰篤。 惟爾秉性忠直, 操心端良。 非惟行己謙恭, 抑又處事明敏。 早被黃門之選, 特蒙昭考之憐, 每器爾之精衷, 俾從我於儲邸。 小心翼翼, 恒左右以相隨; 將命便便, 惟出納之得允。 逮襲艱難, 仍委宣傳。 一節匪懈, 彌夙夜以居中; 萬機無窮, 何頃刻而退處? 乃有逆臣, 敢辜國恩, 潛結朋徒, 陰圖禍難, 焰將煽於靡樸, 蔓已滋於莫圖。 賴宗社之默扶, 致兇姦之敗露。 于方聞變而措置, 爾乃協策而周旋。 雖當倉皇急遽之中, 能効奔走護衛之力, 元兇尋自授首, 餘黨悉皆伏誅。 盍選爾勞, 以厚予賚?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存命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予嘉爾績, 用尋帶河之盟; 爾體予心, 益堅勁草之操。

敎推忠定難翊戴功臣通政大夫行內侍府尙帑柳漢曰:

戡難効忠, 惟臣子之美績; 論功行賞, 乃國家之恒規。 惟爾稟性忠純, 操心端謹。 早充黃門之選, 事我昭考, 小心奉職。 逮予嗣位, 常在左右, 執事有恪, 無有差失。 乃者逆臣南怡等, 陰畜異志, 禍在不測, 幸賴天地祖宗之佑, 奸謀自洩, 兇黨尋皆伏辜。 爾於是時, 扞衛寡躬, 先後奔走之功與有多焉。 肆策爾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之後。’ 雖有罪犯, 宥及氷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無忘今日, 敢渝山河之盟; 不凋歲寒, 益堅松栢之操。

敎推忠定難翊戴功臣崇政大夫行中樞府知事西平君 韓繼禧曰:

予惟國家之興, 必有賢智之臣, 扶翊贊佐, 以保大業, 自古及今, 同一揆也。 惟卿三韓世胄, 一代英材。 稟氣淸亮, 行己端方。 燭理入於毫忽, 講學盡其精微。 凡百云: "爲超出等夷。" 我先王知卿旣深, 眷注日篤, 不啻如心腹。 而卿亦竭力盡忠, 國耳忘家, 知無不言, 其於國家裨益弘多。 以至先王大漸之時, 左右護衛, 罔間朝夕, 親承憑几之屬, 竟倍終天之痛。 逮予繼緖, 卿益竭誠, 佛時仔肩。 及兇竪謀不軌事洩, 又能密贊幾宜, 尋伏天誅。 予之克紹前烈, 保有今休, 卿功爲大, 予敢忘諸?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繼禧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卿旣効忠於先朝, 克有令聞; 又贊寡躬於今日, 以永終譽。 山河猶在, 卿其膺我寵命, 與國咸休, 更期悠久, 而勵後効。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70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농업-전제(田制) / 신분-천인(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