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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4월 24일 정축 1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춘추관에서 《세조대왕실록》을 편수하면서 사초를 거두어 들이다

이때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세조대왕실록(世祖大王實錄)》을 편수하면서 사초(史草)를 거두어 들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만약 사초(史草)에 이름을 쓴다면, 반드시 직필(直筆)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혹자가 말하기를,

"사초에는 예로부터 이름을 썼으니, 지금 안 쓸 수가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이름을 쓰게 하였다.

봉상 첨정(奉常僉正) 민수(閔粹)는 사초에 대신(大臣)의 득실(得失)을 많이 썼는데, 민수가 이름을 쓴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스스로 두렵고 꺼려하여, 기사관(記事官) 강치성(康致誠)을 시켜 그 사초를 몰래 내다가 지우고 고치었다. 기사관 최철관(崔哲寬)민수가 지사(知事) 양성지(梁誠之)의 일을 고쳐 쓰는 것을 보고, 기사관 양수사(梁守泗)에게 말하기를,

"일이 만약 누설되면 우리들은 죄를 피할 수가 없다."

하니, 양수사가 드디어 수찬관(修撰官) 이영은(李永垠)에게 밀고(密告)하자, 이영은이 크게 놀라 마침내 여러 동료들과 상고해 보니 지우고 고친 것이 무릇 여섯 가지 일이었다.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최항(崔恒)·동지사(同知事) 정난종(鄭蘭宗)·김수령(金壽寧), 수찬관(修撰官) 예승석(芮承錫)·조안정(趙安貞)이영은 등이 최철관의 공사(供辭)를 수취(收取)하고, 민수가 고친 곳을 모두 적어서 아뢰기를,

"국사(國史)는 만세(萬世)의 공론(公論)입니다. 민수가 사초를 몰래 내다가 고쳤으니, 청컨대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곧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민수를 잡아 오게 하였다. 한명회가 또 아뢰기를,

"민수(閔粹)가 처음에, ‘신(臣)이 강효문(康孝文)과 더불어 불궤(不軌)를 도모했다.’고 썼다가 지웠는데, 지금 사초에 미납(未納)된 것이 많아 신은 뒤에도 또한 이와 같은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춘추관(春秋館)에 근무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 당시 세조(世祖)의 전지(傳旨)는 매우 자상하여 내가 일기(日記)에 써 두었으니, 경(卿)은 의심치 말라."

하였다. 임금이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 한명회 등과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숭원(李崇元) 등을 불러, 승전 환관(承傳宦官) 이존명(李存命) 및 주서(注書)로 하여금 민수의 집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는데, 종이를 태운 재가 있어 이존명이 아뢰므로, 민수를 궁정(宮庭)으로 잡아 오게 하여 임금이 묻기를,

"너의 사초를 고치고 삭제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너는 어떤 사람을 시켜 빼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이 강치성(康致誠)에게 청하여 빼냈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강치성(康致誠)은 부모의 병(病) 때문에 죽산현(竹山縣)에 가 있었는데, 곧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 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민수에게 묻기를,

"네가 고치고 삭제한 것은 어떠한 일이냐?"

하니, 민수가 하나하나 진술하고 또 말하기를,

"이들 사항(事項)은 그 때에 마침 신이 출사(出使)했다가 듣고서 썼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사(史)라는 것은 만세(萬世)에 전해지는 글인데, 전해 들은 일을 망령되이 기록함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치고 지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전해 들은 일을 썼느냐? 인군(人君)의 일도 또한 마땅히 전해 듣고 쓸 것이냐?"

하니, 민수가 고두(叩頭)하며 사죄하기를,

"신(臣)은 본래 다른 마음이 없어 범인(凡人)에 관하여서도 일찍이 간언(間言)한 일이 없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에 관한 일이겠습니까? 다만 사초를 바칠 기한이 핍박(逼迫)하여 미처 수정(修正)하고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하므로, 전교하기를,

"네가 고치고 지운 데는 반드시 정유(情由)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모두 다 말하여라."

하니, 민수가 말하기를,

"양성지(梁誠之)가 지금 춘추관(春秋館)에 근무하고 있어, 신이 두려워서 고치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민수(閔粹)를 밖으로 내보내게 하고, 임금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국문(鞫問)하게 하였더니, 민수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이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모두 좌천되었다. 처음에 부상(富商) 수인(數人)이 있어 재화(財貨)를 다투다가 송사가 일어나자 헌부(憲府)로 하여금 안치(按治)하게 하고, 임금이 친히 송상(訟狀)을 물으니, 집의(執義) 이숭원(李崇元) 등이 대답을 잘못하였으므로, 즉시 하옥(下獄)시켰다가 잠시 후 용서하였는데,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는 홀로 구용(苟容)423) 하여 그 일에 관여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대로 재직(在職)하였다. [司憲府員 以治獄 皆左遷 初有當商數人 爭貨發訟 下憲府按治 上親問訟狀 執義孝崇元等 失對卽下獄 尋赦之 大司憲梁誠之 獨以苟容不與其事 仍在職]’라고 썼는데, 뒤에 ‘구용(苟容)’ 2자를 삭제하였고, 또 처음에는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이 부상(父喪) 중 기복(起復)424) 되어 함길도 절제사가 되었다. 그 때 일찍이 한 집에 이르러 잠을 자니, 그 가인(家人)이 우리 처녀를 간통했다고 고소(告訴)하므로, 홍윤성을 하옥하여 추핵하였는데, 그 가인은 무소(誣訴)로 좌죄(坐罪)되었으며, 마침내는 홍윤성이 데리고 사는 바 되었다. [仁山君洪允成 居父喪起復 爲咸吉道節制使 其時嘗至一家宿 其家人奸我處女 發訴下允成獄推之 其家人坐誣訴 竟爲允成所畜]’라고 썼는데, 뒤에 ‘거(居)’ 자로부터 ‘시(時)’ 자까지를 삭거(削去)하고, 여기에다가 ‘승취(乘醉)’ 2자(字)를 첨서(添書)하였으며, ‘좌(坐)’ 자부터 ‘축(畜)’ 자까지를 삭거하였고, 또 처음에는 ‘윤사흔(尹士昕)이 술 기운을 부려 취하면 문득 용렬한 언사로 남을 욕되게 하였다. [尹士昕 使酒 醉則輒以庸言辱人]’라고 썼는데, 뒤에 ‘사(使)’ 자를 제거하고, ‘기(嗜)’ 자를 고쳐 써넣었으며, 또 처음에는, ‘전첨(典籤) 신정(申瀞)이 초천(超遷)되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는데, 이때에 신정의 형 신면(申㴐)은 도승지(都承旨)로서 전형(銓衡)에 관한 일을 상주(上奏)하였으며, 안상계(安桑鷄)를 전첨으로 삼았다. [典籤申瀞 超遷爲藝文直提學 時瀞兄㴐爲都承旨 掌奏銓衡 以安桑鷄爲典籤]’라고 썼는데, 뒤에 ‘시(時)’ 자부터 ‘첨(籤)’ 자까지를 삭거(削去)하였습니다. 또 처음에는, ‘김국광(金國光)은 성품이 절개가 없어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아니하였고, 탐명(貪名)이 많았다. [金國光性無介不拘小節貪名多]’라고 썼는데, 뒤에 ‘무(無)’ 자부터 ‘다(多)’자 까지를 삭거하고, ‘통편(通徧)하여 설설(屑屑)한 것을 가지고 어짐을 삼지 않았고, 오래도록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 [通徧 不以屑屑爲賢 久權多謗]’라고 고쳐 썼으며, 또 처음에는, ‘이때에 이시애(李施愛)가 거짓으로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강효문(康孝文)과 더불어 불궤(不軌)를 함께 도모하였다고 하였다. [時李施愛詐 以申叔舟韓明澮 與康孝文 同謀不軌]’라고 썼는데, 뒤에 ‘불궤(不軌)’ 2자를 지우고 ‘위난(爲難)’ 2자로 고쳐 썼습니다."

하였다. 한명회 등이 이로써 아뢰니, 전교하기를,

"민수(閔粹)의 사초(史草)는 단지 지우고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태운 흔적도 있으니, 그것을 모두 물어 보아라."

하였는데, 민수가 말하기를,

"사초는 경준(慶俊)·박양(朴良)·이인석(李仁錫)·최연(崔堧)·이경동(李瓊仝)에게 빌려서 필삭(筆削)하여 책을 만들어서 춘추관(春秋館)에 납부하고, 그 초고는 즉시 불태웠습니다."

하므로, 한명회 등이 이로써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정언(正言) 원숙강(元叔康)이 전날에, ‘사초에 사신(史臣)의 이름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반드시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니, 청컨대 묻게 하소서."

하여, 원숙강을 불러 물으니, 원숙강이 굳이 숨기므로, 민수는 서소(西所)에 가두게 하고 원숙강은 북소(北所)에 가두게 하였으며, 편수관(編修官) 성숙(成俶)최철관(崔哲寬)·양수사(梁守泗) 등은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민수가 처음 이일을 듣고 춘추관에 도착하니, 혹자가 민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릇 사초 가운데 고치고 지운 곳이 있으면 모두 도장[印]을 찍었으니, 너의 사초에도 인적(印迹)이 명백하지만, 어찌 이것을 가지고 추개(追改)함을 알겠느냐?"

하니, 민수가 그 뜻을 알고 서서 응답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가 납부한 사초는 누구도 고치고 지운 것이 없는데, 홀로 나의 사초만 추개하였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나는 이런 일이 없으니, 누가 이처럼 무망(誣罔)한 일을 꾸몄는가?"

하였다. 민수의 말은 비록 쾌(快)하였으나, 두려운 기색이었다. 사관(史官)들이 모두 이르기를,

"민수의 말이 이와 같은즉 최철관양수사가 변명하기에 매우 어렵게 되었으니, 반드시 큰 옥사가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의금부에서 잡아들이게 됨에 미쳐 민수는 매우 급해졌고, 임금이 또 친히 국문(鞫問)하자 민수는 경황(警惶)하여 감히 사정(事情)을 회피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매우 곧기 때문에, 민수가 옥(獄)에 나아갈 때 장차 면치 못할 것을 생각하고 자결(自決)하려 하였는데, 가인(家人)이 억지(抑止)하여 그만두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62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註 423]
    구용(苟容) : 구차하게 남의 마음에 들도록 함.
  • [註 424]
    기복(起復) : 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喪中)에 있는 관리를 삼년상(三年喪)이 지나기 전에 다시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

○丁丑/時, 春秋館修《世祖大王實錄》, 收史草, 或議: "若書名史草, 則必無直筆。" 或曰: "於史草, 自古書名, 今不可不書。" 遂書名。 奉常僉正閔粹史草, 頗書大臣得失, 聞書名, 竊自畏憚, 因記事官康致誠, 潛出其草刪改。 記事官崔哲寬, 見改書知事梁誠之之事, 言於記事官楊守泗曰: "事若洩, 吾輩不能逃罪矣。" 守泗遂密告修撰官李永垠, 永垠大驚, 乃與諸僚考之, 刪改者凡六事。 領事韓明澮崔恒、同知事鄭蘭宗金壽寧、修撰官芮承錫趙安貞永垠等, 取哲寬供辭, 具書改處啓曰: "國史萬世公論也。 潛出史草改之, 請鞫之。" 卽命義禁府, 拿以來。 明澮又啓曰: "初書臣與康孝文同謀不軌而削之。 今未納史草者多, 臣恐自後亦有如是者。 臣不宜仕春秋館。" 傳曰: "其時世祖傳旨甚悉, 予書于《日記》, 卿勿疑。" 御丕顯閤, 召明澮等及都承旨權瑊、同副承旨李崇元等, 令承傳宦官李存命及注書, 往家搜之, 有燒紙之灰, 存命以啓。 拿致於庭, 上問曰: "汝之史草, 改削乎?" 對曰: "然。" "汝因何人以出?" 對曰: "臣請康致誠而出之。" 時, 致誠以親病, 往竹山縣, 卽令義禁府拿來。 上問曰: "汝改削何事乎?" 一一陳之, 且曰: "此等事, 其時臣適出使, 聞而書之。 今更思, 史乃傳世之書, 妄錄傳聞之事不可, 故改抹之。" 上曰: "汝何以書傳聞之事乎? 至於人君之事, 亦當傳聞而書之歟?" 扣頭謝曰: "臣素無他心, 與凡人處, 尙無間言, 況人君事乎? 但納史之限逼迫, 未及修改。" 傳曰: "汝之改削, 必有情由, 其悉言之。" 曰: "誠之今仕春秋館, 臣畏而改之。" 命出于外, 上入內, 令明澮等鞫之, 曰: "初書: ‘司憲府員以治獄皆左遷。 初有富商數人, 爭貨發訟, 下憲府按治, 上親問訟狀, 執義李崇元等失對, 卽下獄, 尋赦之。 大司憲梁誠之, 獨以苟容, 不與其事, 仍在職。’ 後削苟容二字。 又書: ‘仁山君 洪允成居父喪, 復爲咸吉道節制使。 其時嘗至一家宿, 其家人奸我處女發訴, 下允成獄推之, 其家人坐誣訴, 竟爲允成所畜。’ 後自居字至時字削去, 添書乘醉二字, 自坐字至畜字削去。 又書: ‘尹士昕使酒, 醉則輒以庸言辱人。’ 後去使字改嗜字。 又書: ‘以典籤申瀞, 超遷爲藝文直提學, 時爲都承旨, 掌奏銓衡, 以安桑雞爲典籤。’ 後自時字至籤字削去。 又書: ‘金國光性無介, 不拘小節, 貪名多。’ 後自無字至多字削去, 改書: ‘通徧, 不以屑屑爲賢, 久權多謗。’ 又書: ‘時李施愛, 詐以申叔舟韓明澮康孝文, 同謀不軌。’ 後削不軌二字, 改爲難二字。" 明澮等以啓, 傳曰: "之史草, 非徒削改, 亦有燒痕, 其悉問之。" 曰: "史草借於慶俊朴良李仁錫崔堧李瓊仝, 筆削之書成, 納于春秋館, 卽燒其槀。" 明澮等以啓, 又啓曰: "正言元叔康前日言: ‘史草不可書史臣名。’ 必有所聞, 請問之。" 召叔康問之, 叔康固諱, 命囚于西所, 叔康于北所, 下編修官成俶哲寬守泗等于義禁府。 初聞是事, 到春秋館, 或謂曰: "凡史草中, 有改抹處, 皆印之, 汝草印迹明白, 烏可以是知追改乎?" 知其意, 立應曰: "今諸臣所納史草, 誰無改抹者, 獨以吾草爲追改者何也? 我無是事, 誰構此誣罔之事?" 言雖快色懼。 史官等皆謂: "言如是, 則哲寬守泗, 辨之甚難, 必成大獄。" 及義禁府拿甚急, 上又親鞫, 驚惶不敢遁情, 上頗直之。 之就獄也, 慮不免, 將自引決, 爲家人所抑而止。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62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