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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4권, 예종 1년 3월 11일 을미 3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작록과 임금의 정치에 대해 상소한 사헌부 관리를 종신 서용치 못하게 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는데, 그 상소는 이러하였다.

"신 등이 삼가 살펴 보건대, 한(漢)나라 매복(梅福)효성 황제(孝成皇帝)에게 말하기를, ‘작록(爵祿)과 속백(束帛)295) 은 천하의 지석(砥石)296) 이니, 고조(高祖)께서 세상을 갈고, 둔(鈍)한 것을 갈던 바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한나라〉 고조가 처음 일어나서 한신(韓信)이 동쪽으로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평정하자 곧 제나라 왕을 봉하였고, 진평(陳平)이 험난한 중에서 기묘한 꾀를 내자 곧 전군(典軍)을 주었으며, 정공(丁公)이 불충(不忠)하자 죽이고, 옹치(雍齒)가 무죄하므로 봉하였으며, 팽월(彭越)이 공이 있을 때에는 후(侯)를 봉하고 반역(叛逆)할 때에는 토벌하였으며, 소하(簫何)가 허물이 있으니 옥에 가두었다가 허물이 없으니 용서하였습니다.

대저 고조(高祖)는 상벌(賞罰)의 권한을 잡아서 처단함이 그 도(道)를 얻었기 때문에 천하의 선비가 구름 모이듯 한(漢)나라에 귀부하여, 지혜로운 자는 꾀를 다하고 어리석은 자는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만약 고조가 작록(爵祿)을 허기(虛器)로 삼아 가볍게 썼다면 그것을 주어도 사람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빼앗아도 사람이 징계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어떻게 영웅(英雄)을 부리고 채찍질하며 온 세상을 고무(鼓舞)시켜서 제왕(帝王)의 업(業)을 이루었겠습니까?

비단 고조만이 그러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고조로부터 올라 가서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고조로부터 내려 와서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당(唐)나라 태종(太宗) 및 우리 조정의 열성(列聖)이 모두 상벌(賞罰)의 적중함을 얻어서 막대한 업(業)을 이루었습니다. 이러므로 ‘공이 있어도 상을 주지 아니하고 죄가 있어도 벌을 주지 아니하면, 비록 요순(堯舜)이 위에 있을지라도 한 조정을 편안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벌이 국가에 관계가 있음이 이와 같으니, 중재(中材)297) 의 임금은 누구라도 상과 벌을 분명히 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아니하고자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상이 반드시 공로(功勞)가 있는 이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귀세(貴勢)298) 에게 우선하고, 벌은 반드시 죄가 있는 이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원(踈遠)한 이에게 우선하는 것은, 진실로 편폐(便嬖)299) 가 만들며 험임(憸壬)300) 이 만들며 좌우(左右)301) 가 만들며 내알(內謁)302) 이 만드는 것입니다. 임금도 생각하기를, 팔병(八柄)303) 이 자기에게 있으니, 사의(私意)로 사람을 상주고 벌하여 능히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할 수 있다고 하니, 이러한 데도 대신이 말하지 아니하고 언관(言官)이 아니면 감히 들어 말하지 못하여 그 도(道)에 순치(馴致)304) 하면, 나라는 그 나라가 아니고 마침내 어찌 할 수 없는 데에 이르고 말 것이니, 이는 고금을 통한 병통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초기에 간흉(姦兇)을 베어 없애고 어지러움을 다스려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며, 착한 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기록하지 아니함이 없고 악한 것이 미세하여도 꾸짖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이에 모든 신하가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벼슬을 받들고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철한 임금의 정치라도 그보다 낫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요즈음에 오면서 조정의 위에는 기강(紀綱)이 서지 아니하여 상벌(賞罰)을 행하는 즈음에 권하고 막음이 법에 어그러져서, 전하의 아름답고 밝은 정치로 하여금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게 합니까? 생각하건대 모든 신하들이 성상의 교화(敎化)를 능히 선양(宣揚)하지 못하여 전하의 상벌에 있어서 혹시 만분의 일이라도 미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우리 조정에서 모든 신하를 제어하는 길은 여러 날 여러 달이 되어야 계급을 올리고 자품(資品)에 따라 임명을 주는 것인데, 날짜가 오래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 두지 못하고 자품이 맞지 아니하면 그 벼슬에 있을 수 없으나, 그 어질고 능한 자는 이 한도에 두지 아니합니다. 당상관(堂上官)은 혹은 노성(老成)305) 한 사람, 혹은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 혹은 공로(功勞)를 쌓은 뒤에야 비로소 제수할 수 있고, 1자(資)·1급(級)이라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선왕(先王)이 믿고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바이며 사대부(士大夫)가 감히 조진(躁進)306) 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세상을 갈고 둔한 것을 가는 도구가 아닙니까? 그러나 임금이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모두 가볍게 여겨서 틈을 엿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령 한 덩어리의 흙이라도 임금이 귀하게 여기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귀하게 여기고, 한 덩어리의 금이라도 임금이 천하게 여기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귀하고 천한 것은 금이나 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임금의 숭상하는 바에 있으니, 관작(官爵)을 삼가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삼도감 낭청(三都監郞廳)의 자궁(資窮)한 자를 당상관으로 올려 주었는데, 비록 덕망(德望)으로 천거한 것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공로자를 기다린 뒤에 제수하였은즉 대개 가볍게 제수하지 아니한 뜻이 있을 것이니 아직 두고서 논하지 말고, 나머지 안혜(安惠)·이영(李聆)·문수덕(文修德)·조지(趙祉)의 무리는 모르기는 하나 별달리 무슨 공로가 있기에 모두 당상관이 되었습니까? 당시에 본부(本府)에서 말을 갖추어 논청(論請)하였으나 전하께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신 등이 이미 한스러움이 있었는데, 요사이 또 통사(通事) 장유성(張有誠)·황중(黃中)과 봉상시 정(奉常寺正) 유계번(柳季潘) 등도 또한 당상관이 될 것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신 등은 명기(名器)307) 가 점점 가벼워져 조정이 따라서 낮아질까 두렵습니다. 장유성·황중상서(象胥)308) 와 통역관(通譯官)으로서 진실로 사류(士流)에 끼지 못할 것이며, 유계번은 비록 사제 전사관(賜祭典祀官)이 되었을지라도 바로 자기의 직분이고 드러나게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지 아니합니다. 신 등은 가만히 헤아리건대, 〈중국〉 사신(使臣)이 어떻게 번국(藩國)309) 의 관제(官制)와 작명(爵命)의 높고 낮음을 알겠습니까? 반드시 통사의 무식한 무리가 연줄로 그 사이에 혀를 놀려서 신총(宸聰)에 전달하게 한 것일 것입니다. 전의 사신의 예(例)를 끌어대어서 부득이한 청을 요구하므로 전하께서는 따르지 아니할 수 없으나, 임금이 상을 주는 것이 진실로 한 가지 단서가 아니니, 비록 거마(車馬)와 의복을 주는 것은 가할지라도 어찌 반드시 작록(爵祿)을 준 뒤에야 청을 채우겠습니까? 하물며 당상관은 더욱이 가볍게 줄 수 없습니다. 어질고 덕이 있는 이를 높이며 명하는 그릇을 용렬하고 공이 없는 무리에게 주면 어떻게 온 세상을 수작(酬酢)310) 하여 호걸(豪傑)의 선비를 따르게 하겠습니까? 신 등은 이로부터 마음이 해이해져서 착한 것을 권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의지하여서 나라를 다스리던 것이 도리어 쓸데없는 헛된 그릇이 될 것이니, 옳지 못한 일의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장유성·황중·유계번의 무리는 족히 입에 담을 것이 못되나, 애석한 것은 관작의 외람(猥濫)됨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는데 정조(政曹)의 대신들이 일찍이 전하를 위해 건백(建白)311) 하여 관방(關防)을 엄하게 세워서 말류(末流)의 폐단을 제어하지 아니함이니, 어찌 적심(赤心)으로 나라를 도모한다고 하겠으며, 어찌 사풍(士風)을 배양(培養)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수년 이래로 당상관은 이미 예사로 제수하는 것이 되어 사람마다 스스로 경영하여 얻게 되니, 가령 뒷날에 적(敵)을 격파하고 기(旗)를 빼앗는 공(功)과 백성을 편히 하고 사직(社稷)을 이롭게 하는 공로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특별히 무엇으로 상을 주어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땅을 주어 후(侯)를 봉하는 것도 옳지 못하고 세경(世卿)312) 으로 습작(襲爵)하는 것도 옳지 못하니, 반드시 관작으로써 공을 상주어야 할 것인데, 예사로 주는 벼슬로써 공을 상주면 어찌 공을 상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신 등이 이른바 선비의 마음이 해이해져 착한 일을 권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연줄로 혀를 놀린 죄는 아직 사신이 북경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 뒤에 논할 것이나, 그 제수한 바 황중·장유성·유계번 등의 당상관의 임명은 청컨대 급히 추수(追收)하여, 조정의 바람에 위로가 되고 전선(銓選)313) 의 길을 맑게 하소서.

신 등이 또 듣건대, 사람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부월(鈇鉞)314) 이 허기(虛器)가 되고, 사람이 죄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법령이 도설(徒設)315) 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예전의 명철한 임금은 법도를 삼가 지켜서 한결같이 다스리고 친소 원근(親踈遠近)으로써 가볍거나 무겁게 하지 아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게 하였으니, 이는 형법의 정화(精華)316) 입니다. 만일 혹시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고도 꾸짖지 아니한다면 드러내지 아니하는 것이 나은 것만 같지 못하며, 사람의 죄를 알고도 징계하지 아니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개 알지 못하였으면 오히려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인데, 이미 알고서 또 따라서 용서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위엄을 업신여기고 명령을 만만히 여겨서 징계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큰 덕으로써 하고 작은 은혜로써 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천자(天資)가 어질고 인자하시어 형벌을 쓰는 데에 너그럽고 어질게 하기를 좋아하여 유사(有司)로서 과실이 있는 자와 환시(宦寺)로서 무례한 자를 문득 옥(獄)에 내려서 우레같은 위엄을 떨치시므로 국민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들이 마땅히 큰 견책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죄를 결단하는 날에 미쳐서는 모두 말감(末減)317) 하여, 아무가 한 형벌을 받고 아무가 한 관직을 파면되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병조 낭관(兵曹郞官), 봉상시(奉常寺)·내섬시(內贍寺)·사옹원(司饔院)·군자감(軍資監)·상의원(尙衣院)의 관리와 내시부(內侍府)가 이러하였습니다. 그 죄가 논할 만하면 전하께서 무엇이 아까와서 처단하지 아니합니까? 무릇 삼척법(三尺法)318) 은 왕자(王者)가 지키고 따라서 다스림을 삼는 것입니다. 이는 조종(祖宗)의 법이며, 천하 만세(萬世)의 법입니다. 이런 까닭에 법이 있는 곳에는 천지도 바꾸지 못하고 귀신도 바꾸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정을 두고자 할지라도 사정을 둘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법을 한 번 굽히면 마침내 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 옥에 내린 자가 어찌 다 죄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법을 굽혀서 은혜를 펴고자 하여 혹은 아침에 옥에 내려졌다가 저녁에 나오는 자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법이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모든 벼슬아치가 벼슬에 태만하고 많은 기강(紀綱)의 조목이 베풀어지지 아니하여 조정이 날마다 허물어지고 기강이 날마다 폐이(廢弛)되어서 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을지라도 그 뒤를 잘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뒤로부터 관리가 만일 범하는 바가 있거든 그 끝을 생각하고 그 극진함을 생각하여 죄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옥에 내리고 유사(有司)의 논죄(論罪)에 따라 처단하며, 법은 쓰지 아니할 수 없는 데에 행하고 형벌은 스스로 범한 죄에 가하면, 사람들이 비로소 법을 두려워하여 조정이 깨끗하고 밝아질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임금이 보고 지평(持平) 조익정(趙益貞)에게 묻기를,

"상소 가운데, ‘기강(紀綱)이 서지 아니하고 상벌(賞罰)이 적중하지 아니하여 전하의 아름답고 밝은 정치가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정치가 처음과 같지 못한 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하니, 조익정이 대답을 못하였다. 잠시 후에 임금이 비현합(丕顯閤)에 나아가서 좌부승지 한계순(韓繼純)조익정을 불러 안에 들어오게 하여 상소 가운데의 말을 가지고 따져 물으니, 조익정이 벌벌 떨고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다만 말하기를,

"상소는 집의(執義) 김계창(金季昌)에게서 나왔는데, 신은 장무(掌務)로서 상소를 올린 것뿐입니다."

하였다. 장차 장신(杖訊)하려고 할 때에 군교(軍校)가 둘러 서고 의금부 낭관(義禁府郞官)이 수계(囚械)와 형장(刑杖)을 가지고 이르렀는데, 임금이 묻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내가 만약 장신하면 사람들은 내가 간하는 말을 거절한다고 이를 것이므로 하지 아니한다. 사헌부 관리를 파직하고 종신토록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비록 노여움을 풀었으나 일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는데, 승지들이 아뢰기를,

"사헌부의 말 가운데 공손하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는 반드시 뜻이 있어서 발설한 것일 것이니, 청컨대 다시 국문하여 죄를 주소서."

하였다. 이 먼저 대사헌(大司憲) 송문림(宋文琳)이 동렬(同列)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관작(官爵)이 외람되고 형벌이 규칙이 없으므로 우리들이 언관(言官)의 벼슬에 있으면서 논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김계창에게 맡겨서 초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아름답고 밝은 정치가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다.’는 말이 있으니 조익정이 장무관(掌務官)으로서 상소를 바칠 때를 당하여 난처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주상이 즉위(卽位)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였는데,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마땅하지 못할까 그윽이 두렵다. 삭제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송문림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말이 격절(激切)하지 아니하면 주상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옛사람은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경계함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하므로, 조익정이 끝내 난처한 기색이 있었으나 송문림에게 견제(牽制)되어 할 수 없이 바친 것이다. 유계번은 일찍이 외람되게 밭을 개간한 공으로 3자급(資級)이 뛰어 올랐는데, 그때 사람들이 가리켜 ‘전대부(田大夫)’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천릉 도감 낭관(遷陵都監郞官)이 결(缺)하자 유계번이 제조(提調) 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에게 요구하여 조석문이 허락하고 차임(差任)은 아니되었는데, 유계번이 스스로 도청(都廳)에 나아가서 당상관(堂上官)을 맞이하고 전송하기를 3, 4일 하니, 동렬들이 비웃고 물리쳐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 또 사제 전사관(賜祭典祀官)이 되기를 구하여 당상관을 취함으로써 사림(士林)들이 비웃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한 때로부터 군공(軍功)으로 당상관에 제수된 자가 무려 수백 사람이었는데, 모두 항오(行伍)에서 갑자기 일어나 복종(僕從)을 갖추지 못하고 또 전도(前導)하는 자가 없어서 당상관의 체모가 없었다. 그 뒤에 설인(舌人)319) 황중(黃中)·장유성(張有誠)의 무리는 연줄로 찬자(鑽刺)320) 하여 또한 당상관을 얻으니, 명기(名器)가 점점 가벼워지기 때문에 상소 가운데 아울러서 언급한 것이다. 무자년321) 사이에 우인(優人)322) 수십 명이 나례(儺禮)323) 로 인하여 모두 당상관의 복장을 갖추고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서로 희롱하기를,

"영공(令公)324) 은 어느 때에 당상관이 되었기에 복장이 이러한가?"

하니, 한 사람이 응하기를,

"내가 경진년325) 에 무과에 급제하여 신사년326) 겨울에 양전 경차관(量田敬差官)이 되고, 정해년327)이시애(李施愛)를 잡아서 드디어 여기에 이르렀다."

하니, 듣는 자가 모두 조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35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註 295]
    속백(束帛) : 폐백. 상품(賞品).
  • [註 296]
    지석(砥石) : 숫돌.
  • [註 297]
    중재(中材) : 중간 자격.
  • [註 298]
    귀세(貴勢) : 귀족과 세력가.
  • [註 299]
    편폐(便嬖) : 임금에게 아첨하여 사랑받는 사람.
  • [註 300]
    험임(憸壬) : 간사한 무리.
  • [註 301]
    좌우(左右) : 임금에게 가까운 사람.
  • [註 302]
    내알(內謁) : 비밀한 청탁.
  • [註 303]
    팔병(八柄) : 임금이 군신(群臣)을 어거하여 다스리는 여덟 가지 권한임. 《주례(周禮)》 천관(天官) 대재(大宰)조에 이르기를, "1은 작(爵)이니 이로써 귀(貴)함을 어거하고, 2는 녹(祿)이니 이로써 그 부(富)를 어거하고, 3은 여(予)이니 이로써 그 총애[幸]를 어거하고, 4는 치(置)이니 이로써 그 항오[行]를 어거하고, 5는 생(生)이니 이로써 그 복(福)을 어거하고, 6은 탈(奪)이니 이로써 그 빈(貧)을 어거하고, 7은 폐(廢)이니 이로써 그 죄(罪)를 어거하고, 8은 주(誅)이니 이로써 그 허물[過]을 어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음.
  • [註 304]
    순치(馴致) : 점차로 나쁜 결과가 오는 것. 그 조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함.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그 도에 익고 극진하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馴致其道 至堅氷也]고 하였음.
  • [註 305]
    노성(老成) : 경험을 쌓아서 일에 익숙한 것.
  • [註 306]
    조진(躁進) : 벼슬의 지위가 올라가기를 조급히 구는 것.
  • [註 307]
    명기(名器) : 작위(爵位).
  • [註 308]
    상서(象胥) : 오랑캐에게 왕명을 전하는 벼슬.
  • [註 309]
    번국(藩國) : 제후국. 우리 나라.
  • [註 310]
    수작(酬酢) : 응대(應對).
  • [註 311]
    건백(建白) : 윗사람에게 의견을 드림.
  • [註 312]
    세경(世卿) : 대대로 이어 전하는 대신.
  • [註 313]
    전선(銓選) : 재능을 시험하여 선발함.
  • [註 314]
    부월(鈇鉞) : 임금의 권위.
  • [註 315]
    도설(徒設) : 이름만 갖추었을 뿐임.
  • [註 316]
    정화(精華) : 가장 좋은 것.
  • [註 317]
    말감(末減) : 형벌을 감(減)하여 죄의 등급을 가볍게 하여 주던 것.
  • [註 318]
    삼척법(三尺法) : 법률을 말함. 고대 중국에서 석 자 길이의 대쪽에 법률(法律)을 썼던 고사(故事)에서 유래(由來)함.
  • [註 319]
    설인(舌人) : 통역관.
  • [註 320]
    찬자(鑽刺) : 다른 사람을 소개함.
  • [註 321]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322]
    우인(優人) : 광대.
  • [註 323]
    나례(儺禮) : 원래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유래된 풍습으로,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대궐 안에서나 민가에서 마귀와 잡신(雜神)을 쫓아 낸다는 뜻으로 베풀던 의식.
  • [註 324]
    영공(令公) : 정삼품과 정이품의 관원(官員)을 일컫던 말. 영감(令監).
  • [註 325]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326]
    신사년 : 1461 세조 7년.
  • [註 327]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司憲府上疏曰:

臣等謹按, 梅福言於孝成皇帝曰: "爵祿束帛, 天下之砥石, 高祖所以厲世磨鈍也。" 以今觀之, 高祖之初起也, 韓信東定, 而卽封王, 陳平險難出奇, 而卽授典軍。 丁公不忠則戮之, 雍齒無罪則封之, 彭越有功則封侯, 叛逆則討之, 蕭何有過則繫獄, 無過則赦之。 蓋高祖操賞罰之權, 而處之得其道, 故天下之士, 雲合歸, 智者竭策, 愚者盡慮。 若高祖以爵祿爲虛器, 輕用之, 其所加也人不喜, 其所奪也人不懲, 何以驅策英雄, 皷舞一世, 而成帝業也哉? 非獨高祖爲然。 由高祖而上, , 由高祖而下, 光武 太宗及我朝列聖, 咸以賞罰得中, 而致莫大之業。 故曰: "有功不賞, 有罪不罰, 雖在上, 不能一朝安也。" 賞罰之有關於國家如此, 彼中材之主, 孰不欲信賞必罰, 而不失其宜也? 然而賞不必及於有勞, 而貴勢先之, 罰不必加於有罪, 而疏遠先之者, 誠以便嬖爲之也, 憸壬爲之也, 左右爲之也, 內謁爲之也。 人主亦以爲, 八柄存乎己, 可以私意賞罰人, 而能貴賤之。 如是而大臣不言, 非言官不敢擧, 馴致其道, 國非其國, 而終至於不可爲已, 此古今之通患也。 恭惟主上殿下, 卽位之初, 誅除姦兇, 撥亂反正, 善無徵而不錄, 惡無細而不責, 於是群臣惕栗, 奉職不敢違越, 雖古先哲王之治, 殆無以過。 奈何近日以來, 朝廷之上, 紀綱不張, 賞罰之際, 勸沮乖方, 使殿下休明之治, 寢不如初乎? 意者, 群臣不明, 不能宣揚聖化, 將殿下之於賞罰, 或萬分之一, 有所未盡歟? 何以言之? 我朝御群臣之道, 累日月以進秩, 循資塗而授任。 日月不久, 則不得置於位; 資塗不値, 則不得居其職。 而其賢其能, 不在此限。 其堂上官, 則或老成之人, 或卓犖之才, 或勳賢之後, 或功勞之積, 然後始得授焉, 雖一資一級, 不可以能躐也。 此先王所恃而爲國, 而士大夫之不敢躁進, 豈非厲世磨鈍之具歟? 然而人主不以爲重, 則人皆輕之, 而有窺覦之心。 假如一塊土, 人主以爲貴, 則衆從而貴之; 一塊金, 人主以爲賤, 則衆從而賤之。 然則其貴其賤, 不在乎金與土, 而在乎人主之所尙, 官爵其可不愼乎? 往者, 三都監郞廳之資窮者, 陞授堂上, 雖非德擧, 必待功勞者, 然後授之, 則蓋有不輕授之意存焉, 姑置勿論。 他餘安惠李聆文修德趙祉之類, 未知別有何勞, 而皆得爲堂上官乎? 當時本府, 具辭論請, 而殿下不之納焉, 臣等已有憾焉。 豈意近日又有通事張有誠黃中及奉常寺正柳季潘等, 亦得爲堂上官乎? 臣等恐名器漸輕, 而朝廷從以卑也。 有誠黃中, 象胥通譯之人, 固不齒於士流, 季潘雖爲賜祭典祀官, 乃其職分, 非有顯顯功勞之可紀也。 臣等竊計, 使臣安知藩國之官制、爵命之高下哉? 必通事無識之徒, 寅緣喋舌於其間, 使之轉達宸聰。 援之以前使臣之例, 要之以不獲已之請, 在殿下不得不從矣。 然人主所賞, 固非一端, 雖賜之車馬衣服可也, 豈必以爵祿然後塞請乎? 況堂上官, 尤不可輕授也。 以尊賢命德之器, 授之於庸鎖無功之徒, 何以酬酢一世而奔走豪傑之士乎? 臣等恐自此士心懈怠, 不可以勸善矣。 然則向所恃而爲國者, 反爲無用之虛器, 不亦不可之大者乎? 夫有誠黃中季潘之輩, 不足置齒牙間矣, 所可惜者, 官爵猥濫, 未有甚於此時, 而政曹大臣, 曾不爲殿下建白, 嚴立關防, 以制末流之弊, 豈曰赤心謀國乎, 豈曰培養士風乎? 由是數年以來, 堂上官已爲例授, 人人皆自以經營而得之也。 假如後日, 有破敵搴旗之功, 安民利社之勞, 殿下又別有何賞之可報乎? 胙土封茅不可也, 世卿襲爵不可也, 必以官爵賞功矣爵功矣, 而以例授賞功, 烏在其爲賞功乎? 臣等所謂士心懈怠, 不足以勸善者此也。 其夤緣喋舌之罪, 姑待使臣回京之後而論之, 其所授黃中有誠季潘等堂上官之命, 請亟追收, 以慰朝廷之望, 以淸銓選之塗。 臣等又聞, 人不畏威, 鈇鉞爲虛器; 人不畏罪, 法令爲徒設。 是故古之明君, 謹守法度, 畫一而治, 不以親疎遠近, 而爲之輕重, 使人畏威而遠罪, 此刑法之精華也。 如或擧人之過, 而不之責, 不如不擧之爲愈也; 知人之罪, 而不之懲, 不如不知之爲愈也。 夫旣不知, 猶有所冀, 旣已知之, 又從而赦之, 人皆褻威而翫命, 無所懲艾。 此先王所以治世以大德, 而不以小惠者也。 我殿下天資仁恕, 其於用刑喜寬仁, 有司之過差者, 宦寺之無禮者, 輒下於獄, 震以雷霆之威, 國人皆曰: "此輩當受大責矣。" 及乎科斷之日, 皆從末減, 未聞某人受一罰, 某人罷一官矣。 如兵曹郞官、奉常寺、內贍寺、司饔院、軍資監、尙衣院官吏, 及內侍府是也。 其罪可論, 殿下何惜而不斷乎? 夫三尺法, 王者有所持循, 以爲治者也。 此乃祖宗之法、朝廷之法、天下萬世之法也。 是故法之所在, 天地不能易也, 鬼神不能易也。 殿下雖欲私焉, 固不能私焉, 無他, 法旣一屈, 終不得伸矣。 彼下獄者, 豈盡無罪? 而殿下屈法以伸恩, 或朝下獄而暮出者有之, 人皆知法之不足畏, 百隷怠官, 萬目不張, 朝廷日以陵替, 紀綱日以廢弛,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 言之至此, 可不爲寒心乎? 伏望殿下, 自今以後, 官吏如有所犯, 思其終、思其極, 有罪然後, 始下於獄, 從其有司之讞而斷之。 法行於不可不用, 刑加於自犯之罪, 則人始畏法, 而朝廷淸明矣。 伏惟殿下, 留神焉。

上覽之, 問持平趙益貞曰: "疏中有: ‘紀綱不張, 賞罰不中, 使殿下休明之法, 寖不如初。’ 今政治不如初, 何謂也?" 益貞無以對。 俄而上御丕顯閤, 召左副承旨韓繼純益貞入內, 逐疏中語以問, 益貞戰慄失色, 但曰: "疏出於執義金季昌, 臣以掌務進疏耳。" 將杖訊, 時, 軍校環立, 義禁府郞官持囚械刑杖已至。 上問訖曰: "予若杖問, 則人謂予拒諫, 故不爲耳。 其罷憲司官吏職, 終身不敍。" 上雖霽怒, 事不可測, 承旨等啓曰: "憲府語多不恭, 此必有情而發, 請更鞫罪之。" 先是, 大司憲宋文琳謂同列曰: "近官爵猥濫, 刑罰無章, 吾輩職在言官, 不可不論。" 遂屬季昌草疏, 疏有‘休明之治, 寖不如初’之語。 益貞以掌務官, 當獻疏, 有難色曰: "上卽位未久, 曰: ‘寖不如初。’ 竊恐未宜, 削之如何?" 文琳曰: "不然。 言不激切, 不足以動主聽, 況古人有先事之戒, 此不爲過矣。" 益貞終有難色, 然制於文琳, 不獲已獻之。 季藩嘗濫以墾田之功, 超陞三資, 時人指爲田大夫。 至是, 遷陵都監郞官缺, 季藩要於提調昌寧君 曺錫文, 錫文許之而未差, 季藩自詣都廳, 迎送堂上者三四日, 同列笑排竟不得。 又求爲賜祭典祀官, 以取堂上官, 士林嗤之。 自李施愛之平, 以軍功除堂上官者, 無慮數百人, 皆暴起行伍, 僕從不備, 又無前導者, 無復有堂上之體。 其後舌人如黃中張有誠之輩, 因緣鑽刺, 亦得爲堂上官, 名器漸輕, 故疏中竝及之。 戊子年間, 有優人數十, 因儺皆具堂上官章服, 入殿庭相戲曰: "令公何時做堂上官, 章服乃爾?" 有一人應之曰: "予於庚辰年中武科及第, 辛巳冬量田敬差官, 丁亥秋捕李施愛, 遂至於此。" 聞者莫不齒冷。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8책 35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