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납을 철저히 금한 즉위 초의 명령을 다시 완화시키니 백성들이 실망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전지(傳旨)를 내리시기를, ‘이제부터 대납(代納)하는 자는 종친(宗親)·재추(宰樞)·공신(功臣)을 물론하고 즉시 극형(極刑)에 처하고, 그 가산(家産)을 관가(官家)에 몰수하라.’고 하셨으나, 무자년062) 이전에 대납한 것은 모두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교지(敎旨)를 받고 한 것이며, 하물며 민간(民間)에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대납한 그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은 일찍이 판비(辦備)하지 못한 것인데, 지금 만약 이문(移文)하여 독촉해서 납입(納入)하게 하면, 반드시 백성에게 폐를 끼칠 것이니, 본년(本年) 10월 17일 전지(傳旨)를 내리신 이전에 교지를 받아 대납한 물건은, 청컨대 윤2월 그믐날까지 한(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대납을 마치게 허락하시고, 관가에서 그 값을 거두어 지급하되, 만약에 기한 내에 한 가지 물건이라도 납입하지 못한 자와 비록 다 납입하였다 하더라도, 함부로 민간에게 값을 거두는 자는 대납한 물건과 그 값을 관가에서 몰수해 들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세조(世祖)께서 무릇 민간(民間)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사람들로 하여금 경중(京中)에서 선납(先納)하도록 허락하고, 그 값을 민간에서 배(倍)로 징수하였는데, 이것을 ‘대납(代納)’이라 이르고, 또 간경 도감(刊經都監)으로 하여금 대납하는 권한을 가지게 하여, 남의 재화(財貨)를 먼저 받아 대납하게 허락하였는데, 이것을 ‘납분(納分)’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호가 거실(豪家巨室)로서 매우 이를 좋아하는 자와 부상 대고(富商大賈) 및 승도(僧徒)들이 세가(勢家)에 의탁하거나, 혹은 중[僧] 신미(信眉)와 학열(學悅)·학조(學祖)에게 의지하여 서로 다투어 먼저 붙좇으려 하였다. 그러나 대납의 법이 마땅히 백성들의 정원(情願)에 따라야 되기 때문에, 대납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먼저 세가(勢家)에게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청(請)하고, 인하여 후하게 뇌물을 주면 수령들이 그 위세(威勢)를 두려워하고 이익을 꾀하여, 억지로 대납을 하게 하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이미 대납을 하게 되면 수령들이 아전(衙前)을 내어보내 〈그 값을〉 징납(徵納)하고, 만약에 공세(貢稅)일 것 같으면 백성에게 배로 징수하며, 민간에게 환곡(還穀)063) 으로 흩어주는 미곡(米穀)을 가을이 오면 면포(綿布)로써 상환(償還)하라고 약속하면 어려운 백성들이 다투어 받는데, 기한(期限)이 다가와 이르게 되면, 무리를 연하여 이끌고 민가(民家)에 직접 가서 요구하되, 만약에 상환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면 의복(衣服)과 잡물(雜物)을 겁탈(劫奪)하며, 그 값의 고하(高下)를 저희들 마음대로 정하였다. 그러나 장사아치[商賈]들이 징수하고 독촉하는 것은 중들이 불법(不法)을 자행(恣行)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에, 노상(老商)과 대고(大賈)들이 반드시 먼저 중들을 후하게 하여 꾀어서, 악(惡)을 조장하게 하여, 중들이 백성에게 징수하고 독촉하게 하는데, 이들은 반드시 대군(大君)의 대신(代身)인 신미(信眉)·학열(學悅)·학조(學祖)의 제자(弟子)라 칭하며, 조금이라도 뜻과 같지 아니하면 곧 매질을 가하므로, 백성들이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고, 손을 저으며 서로 경계하기를,
"그들의 욕심대로 채워 주어서 멀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閭閻)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으나, 임금064) 은 백성들의 정원(情願)에 따르는 것이라 여기고 그 해(害)가 이에 이른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임금065) 이 즉위(卽位)한 처음에 미쳐서 특별히 명하여 이를 없애게 하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령이 있으니, 백성들의 바람이 조금 결망(缺望)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22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註 062]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063]
○戶曹啓: "曾降傳旨: ‘自今代納者, 勿論宗、宰、功臣, 卽置極刑, 家産沒官。’ 然戊子年以前代納, 悉從民願受敎而爲之, 況民間托人代納, 其田稅貢物, 不曾備辦。 今若移文督納, 必貽弊於民, 自本年十月十七日傳旨以前, 受敎代納之物, 請限閏二月晦日, 許令人畢代納, 官收其直給之。 若限內未納一物者, 雖已畢納, 而濫收價民間者, 沒入代納之物及其價于官。" 從之。 初世祖, 凡民間田稅貢物, 許令人先納京中, 而倍徵其價于民間, 謂之代納, 又令刊經都監, 操代納之權, 先受人貨, 方許代納, 謂之納分。 於是豪家巨室, 多好之者。 富商大賈及僧徒, 或托勢家, 或依僧信眉、學悅、學祖, 爭先趨附。 然代納之法, 當從民情願, 故代納之徒, 必先依勢家, 請于其邑守令, 仍厚賄之, 守令畏威懷利, 勒令代納, 民莫敢違。 旣已代納, 則守令發吏徵納, 若貢稅則旣倍徵於民, 而還散米於民間, 約以秋來, 償以綿布, 貧民爭受之, 及期限已至, 則連群引類, 直至民家索之。 若不及償, 刦奪衣服雜物, 其直之高下, 隨意以定。 然商賈之徵督, 不如僧人恣行不法, 故老商大賈, 必先厚誘僧人, 使之助惡。 僧人之徵督於民也, 必稱大君代身信眉、學悅、學祖弟子, 少不如意, 便加搥撻。 民莫敢仰視, 搖手相戒曰: "不如飽其欲而遠之。" 由是所求無不穫, 所欲無不遂。 如是者歲復不已, 閭閻苦之, 民不聊生, 而在上則以爲從民情願, 不知其害之至此。 及上初卽位, 特令革之, 中外大悅, 至是有是命, 民望稍缺。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22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註 063]